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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오전에 한번, 저녁에 한번,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하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오전 10시에 서울 정토회관 방송실에서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저녁에 즉문즉설을 못 듣는 분들을 위해서 한 달에 한 번씩 오전에 즉문즉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오전에 시청이 가능한 분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이기도 하고, 시차가 다른 해외 분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이기도 합니다.
2200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날씨가 좀 쌀쌀해졌죠. 무더웠던 여름은 가고 이제 본격적으로 가을 날씨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어제는 추워서 가을보다는 겨울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오늘은 다시 날씨가 조금 풀렸습니다. 감기에 각별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여러분들 얘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어서 1시간 30분 동안 네 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하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어머니가 사고로 인지력 장애를 갖게 된 후 유부남과 부적절한 만남을 자주 갖는다며 어떡하면 좋을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어머니의 연세가 어떻게 됩니까?”
“64세입니다.”
“아버지는 헤어졌어요? 아니면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신 지 20년 됐습니다.”
“20년 전이면 44세에 사별을 하셨네요. 질문자는 지금 몇 살이에요?”
“43세입니다.”
“그럼 질문자의 나이 때에 어머니도 혼자가 되셨네요. 질문자는 지금 결혼했어요? 아니면 혼자 살아요?”
“결혼 안 하고 혼자 삽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심정을 잘 모르는 것 같네요.”
“아니요. 저도 어머니의 그런 마음은 충분히 알고 당연히 존중하지만 상대가 유부남이라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부남 아닌 사람하고 사귀면 좋지만 친한 사람이 유부남밖에 없는 걸 어떡하겠어요?”
“그래서 고민입니다.”
“고민할 필요가 없어요. 질문자가 이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됩니다. 어머니가 사람을 사귀는 게 질문자의 일은 아니잖아요. 어머니가 누구를 사귀든 질문자는 병간호만 하면 됩니다. 어머니의 인생에 간섭하려고 그 집에 간 건 아니잖아요. 질문자가 어머니의 집에 간 목적이 어머니를 도덕적으로 바른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예요? 아니면 어머니를 병간호하기 위해서예요?”
“병간호를 위해서입니다.”
“그럼 병간호만 하면 되지, 왜 간섭을 해요?”
“제가 도덕적으로 자꾸 참견을 하게 됩니다.”
“그건 질문자의 잘못이지요. 만약 질문자가 불교 신자인데 어머니가 기독교 신자라고 가정해 보세요. 어머니가 옛날에 절에 다니더니 요새 교회 다닌다고 기분 나빠서 간호를 안 할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지금 혼자 일상생활이 안 되시는데 앞으로도 제가 어머니를 인정할 수 없다면 그건 저의 문제인 건가요?”
“우리 어머니가 절에 다녔으면 좋겠다는 건 내 바람일 뿐입니다. 어머니가 잘못된 건 아니에요. 어머니가 교회에 다니는 걸 내가 어떡할 거예요? 신앙은 자유입니다. 내 바람대로 되지 않는다고 어머니가 나쁜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내가 어머니의 집에 간 이유는, 어머니가 인지 능력이 부족해서 혼자 생활이 안 되기 때문에 간호를 하기 위함이지, 어머니의 신앙을 바꾸기 위함이 아닙니다. 물론 내 의견을 말씀드릴 수는 있겠죠. '어머니, 나도 절에 다니고 그동안 어머니도 절에 다녔으니 어머니가 다시 절에 다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어머니의 친구들이 다 교회에 다니고 교회가 요즘 노인들에게 여러 가지 서비스를 제공해서 어머니가 재미있다고 느끼셔서 교회를 선택하신다면, 그건 어머니의 자유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 질문자가 간섭할 일은 아니라는 거예요.
질문자는 간호를 목적으로 어머니 댁에 간 건데, 간호 이외의 조건으로 간호를 계속할지 말지 결정하려 하잖아요. 만약 본인이 힘들어서 간호를 안 하겠다면 그런 결정은 해도 돼요. 어머니의 병이 다 나아서 간호할 필요가 없거나, 내가 힘들어서 간호를 안 하겠다는 건 괜찮아요. 그런데 어머니가 교회에 다니거나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이유로 간호를 안 하겠다고 하는 것은 목적에 부합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잘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내 의견은 말해 줄 수 있어요. '어머니, 그분을 안 만나면 어떨까요?' 이렇게 말할 수는 있지만, 어머니가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어머니의 자유 영역에 속하는 일입니다. 그런 정도의 행위는 범죄가 아닙니다. 성인이 누구를 만나든 그건 범죄가 아니에요. 국가 공권력이 두 사람의 만남을 제재할 수가 없어요. 내가 절에 가든 교회에 가든 내 개인의 선택인 것처럼 내가 누구를 만나든 그것도 개인의 선택입니다. 그분의 부인이 그게 싫어서 그 분과 헤어지는 것도 개인의 선택입니다. 과거에는 이러한 일이 범죄로 취급되었고, 법을 어겼다고 해서 경찰이 구속을 했어요. 그러나 성인들끼리의 의사결정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나 관계의 손상은 개인이 감당해야 할 민간 차원의 일이지 국가 권력이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이는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의 영역에 속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어머니가 그런 사람을 만난다는 이유로 간호를 못하겠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간호하는 것과 그 사건은 무관한 문제입니다.”
“스님, 어머니께서 술을 드시고 사고가 나신 건데, 앞으로도 술을 드시려고 하시거든요. 그런 행위는 제가 옆에서 간호하는 목적과는 거리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런 행위가 싫어서 질문자가 간호를 안 하는 것은 본인의 자유예요. 간호는 의무가 아니니까요. 내가 생각할 때는 어머니가 술을 안 먹는 게 좋겠지만 어머니는 외로움이나 갑갑함 때문에 술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술은 무슬림 국가에서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금지된 게 아니잖아요. 이 문제에서도 내 의견은 말할 수 있지만 어머니의 선택은 어머니의 자유 영역에 속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술을 드신다고 해서 간호를 안 하겠고 하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내가 어머니를 간호하는 이유는 어머니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서이고, 어머니는 자기 나름대로 인생의 길을 가는 겁니다. 질문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간호하기 싫다면 안 해도 돼요. 그건 본인의 선택이에요. 그러나 어머니의 선택을 나쁘다고 판단할 수는 없는 거예요. 예를 들어 아침 6시에 일어나서 108배를 하면 건강에 좋으니까 어머니에게 권했어요. 그런데 그걸 어머니가 안 한다는 이유로 간호를 안 하겠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좋은 줄은 알지만, 안 한다고 해서 범죄는 아닙니다.
어머니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으면 도와드리고, 나머지 일은 어머니가 알아서 하도록 맡기면 됩니다. 질문자가 의견이 있다면 말해줄 수는 있어요. 여러분들도 스님한테 이렇게 말하잖아요.
'스님, 나이도 드시고 건강도 안 좋으시니까 비행기를 타고 다닐 때는 저가항공보다는 편안한 비행기를 타십시오. 너무 멀리 돌아가지 마시고 직항을 타십시오. 나이가 있으시니 숙소 역시 최고급은 아니라도 괜찮은 곳에서 주무십시오. 스케줄을 너무 빡빡하게 짜지 마시고, 음식도 신경을 써서 드십시오.'
저한테도 수없이 이런 건의가 들어옵니다. 그중에 어떤 것은 제가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안 받아들여요. 만약 저가항공을 타지 말라 했는데 제가 탔다고 해서 '즉문즉설도 안 듣겠다'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바람직한 행동이 아닙니다. 즉문즉설을 듣기 싫어서 안 듣는 건 괜찮아요. 대신에 관계없는 것을 연결시키지는 말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자기 의견을 상대가 안 받아들이면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의견을 말할 수는 있지만 상대가 범죄 행위를 하지 않는 이상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어요. 질문자도 자기 생각을 말할 수는 있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간호를 할 건지 말 건지와 연결시키는 것은 맞지가 않습니다. 만약 어머니에게 용돈을 드렸을 때 어머니가 그것으로 계속 술을 사 먹거나 마약을 하거나 엉뚱한 짓을 해서 실제로 어머니한테 별로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내가 용돈을 안 드리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내 자유입니다. 하지만 어머니한테 그렇게 하지 말라고 의견을 말할 수는 있어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에요. 돈을 드리거나 안 드리는 건 내 자유지만 어머니가 돈을 어디에 쓰는지를 내가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질문자는 지금 자신의 주장을 도덕이라는 잣대에 맞추어서 어머니가 나쁘고 본인은 옳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그런 이념과 이데올로기, 윤리, 도덕을 넘어서서 사람을 봐야 됩니다. 질문자는 어머니의 병을 보고 간호하는 것이지, 어머니의 다른 행동을 보고 간호를 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간호하기 싫으면 '어머니 간호해 드리기 싫습니다', '힘들어서 못하겠습니다' 하고 물러나면 됩니다.”
“스님이 해주신 말씀들을 저도 항상 알고 있었지만 그때그때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같아요.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다잡고 어머니 간호에 힘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음을 다잡을 것도 없어요. 그냥 어머니가 아픈 것에 대해서만 도와드릴 것을 도와드리면 됩니다. 나머지 어머니의 인생에 대해서는 간섭을 안 하는 게 좋습니다. 만약 술을 드시고 돌아가신다면 장례를 치러드리면 되고, 사고가 나면 병원에 입원시켜 드리면 됩니다. 또한 사생활 문제로 상대편이 부인하고 갈등이 생기면 그것 역시 그때 가서 해결하면 되는 일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 의견은 말할 수 있지만, 강요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나이 드신 어머니가 지금 와서 그 사람을 사귀지 않고 다른 사람을 사귈 수가 없습니다. 나이가 64세이고, 치매 증상이 있고, 건강도 안 좋은데, 어떤 남자가 그런 여자와 사귀겠어요? 옛날부터 알고 지냈고 정이 깊은 사람이니까 대화도 하고 밥도 먹는 거예요. 어머니의 처지는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다른 사람을 사귀라고 하면 어디 가서 사귀나요? 그런 엉뚱한 소리를 하면 안 돼요. 아무도 사귀지 말고 혼자 있으라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혼자 있으면 외로운데 어떻게 혼자 있어요? 어디 가서 누구하고 대화도 나누고 밥도 같이 먹고 싶은데, 길 가는 사람을 붙들고 할 수가 없잖아요. 옛날부터 알던 사람이 있어서 서로를 이해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오히려 고마운 일입니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간호해 주는 딸이 하는 말을 안 들을 수도 없잖아요. 그러니 안 만난다고 하고 또 만나는 겁니다. 질문자는 어머니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해놓고, 어머니가 거짓말하고 약속을 안 지킨다고 하는 겁니다. 애초에 어머니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 조건을 내걸고 있어요. 아이가 학교 가서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중간 성적 밖에 안 나오는데, 상위권에 못 든다고 엄마가 계속 야단을 치면, 아이는 야단을 안 맞기 위해서 결국 성적표를 조작하게 됩니다. 엄마가 압박을 안 한다면 아이가 성적표를 조작할 이유가 없겠죠. 또 사춘기가 되어서 여자 친구를 사귀고 싶은데 엄마가 못하게 하니까 여자 친구 없다고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겁니다. 애초에 금지를 안 하면 거짓말을 왜 하겠어요? 못하게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처럼 어머니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자가 어머니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 조건을 자꾸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어머니를 위해 다른 대안이 있으면 질문자가 마련해 드리면 돼요. 병든 어머니의 친구도 되어주고, 간호도 해주고, 밥도 사주는 괜찮은 60대 남자친구를 한 번 구해 봐요. 질문자의 힘으로 못 구하잖아요. 그런데 어머니가 알아서 구해서 사귀는데, 왜 그걸 가지고 난리를 피우고 그래요?”
“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코로나 시대 이후 의사소통이 너무 어렵습니다. 가슴속에 쌓여만 가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불교 공부 중에 윤회, 전생 등 납득이 되지 않는 내용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명상을 하고 나면 평온하고 집중력이 좋아지지만 꼭 잠이 쏟아집니다. 노곤한 상태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명상을 해야 하나요?
대화를 마치고 나니 12시가 다 되었습니다.
점심 식사 후 오후 2시에는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과 미팅을 가졌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오랫동안 정토법당 총무 역할을 해오신 김준자 님이 한국을 방문하여 스님에게 인사를 하러 찾아왔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주고받으며 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스님은 서울 정토회관으로 향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에 정기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저녁에는 4700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네 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아이가 게임 유투버를 하면서 하루종일 방 안에서만 생활하는 모습을 지켜보기가 힘들다며 부모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아들을 집에서 내보내면 아무 문제가 없겠네요. 아들을 집에 들여서 생긴 문제예요. 계속 눈앞에 보이니까요. 광부 같으면 아침에 출근해서 땅속으로 들어가서 보통 8시간 일하고 나오죠. 또 추가 근무까지 하면 하루에 12시간이나 땅속에 있다가 나오잖아요? 그것보다는 방에 들어가서 12시간 있는 게 더 낫지 않나요? 아들이 게임 유튜버라면 직업 성격상 늘 컴퓨터 앞에서 일해야 합니다. 만약 직업이 안과의사라면 매일 다른 사람 눈만 보며 살 겁니다. 이비인후과의사라면 매일 귀만 들여다보고 살겠죠. 치과의사라면 매일 남의 이만 보고 살고, 내과 의사라면 매일 남의 내장만 보고 살 거예요. 이렇게 보면 세상에 이보다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건 질문자의 관점이 잘못되어서 그런 겁니다.
어떤 사람은 우울증 같은 병으로 방에서 나오지도 않는 사람도 있고, 밥 먹으라고 해도 안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질문자의 아들은 때가 되면 나와서 밥 먹고 설거지까지 해주고 들어간다고 했잖아요. 집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나와서 거들기도 하고요. 요즘 사회 전체적으로 재택근무하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그런 것처럼 아들도 재택근무를 하는 겁니다. 자기 방이 곧 사무실인데 어디가서 일하겠어요? 사무직이라면 회사에 출근해서 종일 사무실에 앉아서 일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질문자의 눈에 보이지 않아서 문제가 안 되는 거예요. 만약 회사를 다니는 아들을 종일 따라다녀 보면 아마 똑같이 ‘우리 아들은 종일 회사 의자에만 앉아있다’ 이렇게 얘기할 거예요. 어떤 창고에서 일한다면 종일 물건만 옮기고 있다고 하고, 대형상점에서 일하면 종일 진열대에서 진열만 한다고 할 거예요. 모든 직업이 그렇습니다. 아들은 재택근무를 하니까 자기 방이 곧 사무실인 거예요. 종일 자기 방에서 일하고 있는 겁니다. 아들이 원룸을 구해서 다시 나가면 아무 문제가 안 될 거예요. 만약에 아이가 책상에서 만화책을 보더라도 부모가 보기에 공부를 하는 것 같으면 흡족해합니다. 또 실제로는 어떤 학습을 하고 있어도 아이가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사실보다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기분이 달라지는 거예요. 이렇게 질문자의 문제로 보셔야 합니다.
아들은 첫째, 직업상 재택근무를 해서 방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그 직업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게임 유튜버라는 것은 종일 컴퓨터 앞에서 일하는 직업입니다. 만약 수입이 없어서 부모에게 돈을 달라고 하면 주지 않으면 됩니다. 질문자는 공무원 같은 직업을 선호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는 관점이 달라요. 실제로 지금 세상이 유지되려면 누군가는 창문을 고쳐야 하고 하수구도 놓아야 하며 전기도 연결하고 자동차도 고쳐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일을 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젊은이들이 유튜버라든지 사무직 같은 걸 선호해요. 그래서 이런 기술직에 일 할 사람이 없어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계속 들이고 있는 거예요.
요즘 농촌에는 밤이 떨어져 있어도 그걸 주울 사람이 없어서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해서 줍는다고 합니다. 마늘 심는 걸 예전에는 할머니들이 했지만, 이제는 그분들도 힘들어 해서 외국인 노동자가 대신 한다고 합니다. 축사를 운영해도 소여물 줄 사람이 없어서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합니다. 과수원에도 외국인 노동자가 와서 일합니다. 우리나라가 거의 이렇습니다. 부모는 그저 자기 자식이 편안한 곳에서 돈 많이 벌며 일하길 원하지만 그런 직업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요? 아들의 삶은 본인 몫이에요. 38살이면 이제 거의 중년인데 그의 삶은 그의 몫입니다. 이건 질문자가 바로 옆에서 아들을 보고 있어서 생긴 문제입니다.
우리 정토회 상근 활동가분들도 법당에 나와서 일할 적에는 배우자가 잔소리를 해도 좀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코로나팬데믹 이후에 거의 온라인으로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서 가족들의 불만이 엄청나게 많아졌어요. 법당에 나와서 봉사할 때보다 집안일을 더 하는데도 집에서 보면 늘 컴퓨터 앞에 앉아있으니까요. 그래서 질문자의 얘기를 들어보면 특별히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부모의 처지에서 자식이 어떤 직업을 가지길 원하는 마음은 이해됩니다. 그런데 아들이 지금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자기 나름대로 방을 구해서 일하고 있었는데 들어오라고 해서 그렇게 사는 거잖아요. 그렇게 아들은 종일 방에서 자기 일에 집중하고 있는 겁니다. 아무 문제가 없어요. 질문자가 아들을 문제 삼는 겁니다.”
“아, 네. 잘 알겠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들이 유튜버를 한 지 4년 정도 되었는데 구독자 수가 그렇게 늘어나지도 않고 있어요. 이제 곧 마흔인데 부모 마음에 그걸로 먹고살겠나 싶었습니다. 저는 아들이 특별히 아픈데 없이 건강한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나이를 점점 먹고 있어서 이제 독립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네, 유튜버로 먹고살지 못할 수도 있겠죠. 가게를 차려도 그걸로 먹고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못 먹고사는 경우도 있어요. 인테리어 비용이나 투자비를 다 잃을 수도 있고요. 그런데 집에서 하는 유튜버는 돈을 벌진 못하더라도 잃을 건 없잖아요. 또 아들은 굳이 열심히 노력해서 돈 벌 이유가 없어요. 부모가 내어 준 방에 살면서, 엄마가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 주니까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자기 용돈 정도 벌어서 살다가 나중에 부모가 죽으면 그 집을 물려받아서 살면 됩니다. 굳이 집을 따로 사서 나갈 필요가 없어요. 우리 세대는 집이 없어서 집을 사야 했고 아이도 많이 낳아서 방도 몇 개 필요했어요. 아이들 교육비도 필요했고요. 그런데 요즘에는 결혼도 잘 안 하고, 하더라도 아이를 잘 낳지 않아요. 아들은 결혼도 안 했을뿐더러, 사무실 겸 자기 방에서 좋아하는 일 하고, 용돈 생기면 필요한 것 좀 사면서 만족하는 겁니다. 아들이 오십이 되고, 육십이 되면 질문자도 늙거나 병들 수 있겠죠. 요즘 미국 같은 데서는 자식이 부모를 돌보아도 국가가 비용을 지원합니다. 아들은 그냥 이렇게 살아도 편안한데 왜 굳이 집을 사려고 하겠어요? 자기가 부모 방을 뺏은 것도 아니고 남는 방에 살고 있다가 나중에 물려받으면 되는데요. 어떻게 보면 한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다 환경에 적응해서 사는 겁니다. ‘비빌 언덕을 보고 비빈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지금 아들은 사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어요. 결혼하려면 집도 구해야 하고 돈이 많이 들죠. 아들은 그럴 형편도 안 되지만 그럴 생각도 없으니 본인은 특별히 복잡할 게 없죠. 부모가 보기에는 속이 타지만, 본인은 아무 문제없습니다.”
“아들에게 간섭하지 않고 그냥 믿고 지켜봐야 할까요? 아니면 내보내서 정신 차리고 일하게 해야 할까요?”
“그건 질문자 마음이에요. 보기 싫으시면 내보내면 됩니다. 원래 독립해서 나간 아들을 질문자가 선심 쓰듯 불러들여서 살고 있잖아요. 보기 싫으면 내보내도 되고, 빈방을 그냥 두느니 아들이 있는 게 낫다면 살게 해도 됩니다. 어떤 선택이 좋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어요. 질문자는 아들이 집에 있으면 집에만 있는다며 불만일 거고, 나가면 또 안쓰럽다며 속이 상할 거예요. 아들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질문자의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에요. 같이 살아도 질문자가 편할 수 있고 나가도 편할 수 있습니다. 질문자의 문제이지 아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질문자는 자꾸 아들을 어떻게 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그건 어떻게 하셔도 됩니다. 아들을 그대로 두어도 되고 내보내셔도 됩니다. 질문자의 권리이니까요. 아들을 내보냈다가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거나 다치기라도 한다면 질문자는 내보낸 걸 후회할 거예요. 또 계속 같이 산다면 한 십 년쯤 뒤에 ‘그때 내 보낼 걸 집에 두어서 자립심이 없다’라고 후회할 겁니다.
‘아들과 같이 살든, 독립해서 나가든 그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질문자가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아들이 나가도 아무 문제없어요. 둘 중에 무엇이 더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선택을 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책임지면 됩니다.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는 데서 후회가 생기는 겁니다.”
“잘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절친한 친구가 없어서 늘 외롭습니다. 인연들은 스쳐 지나가기만 할 뿐 내 곁엔 남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친구를 만들 수 있을까요?
내향적인 성격인데, 회사에서는 외향적인 사람들이 발표를 잘하니 더 인정받는 것 같습니다. 그 속에서 어떻게 하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깨달음의 장을 다녀오고 싶은데 교사라서 방학을 이용해야 합니다. 12월에는 임신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깨달음의 장과 임신 중에 어느 것이 더 먼저인지 헷갈립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서 스님이 마무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관념의 벽을 가지고 삽니다. 법률이든, 윤리든, 도덕이든, 관념의 벽에서 선악 개념이 나옵니다. 수행을 해서 관념의 벽을 무너뜨리면 사물을 보는 눈이 훨씬 더 넓어지고 밝아집니다. 못 먹어서 굶주리거나 병이 나서 아픈 것은 육체적인 괴로움입니다. 그 외에는 대부분 정신적인 괴로움입니다. 정신적 괴로움은 관점을 바꾸면 아무 일도 아닐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구를 좋아해서 만났다가 서로 안 맞아 헤어졌다고 합시다. 헤어졌다는 자체가 큰 슬픔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합니다. 헤어져서 괴로운 건 아니에요. 싫어하는 사람과 헤어지면 오히려 즐겁잖아요. 헤어진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인데, 만나고 싶은 욕망 때문에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만나는 건 아무 문제가 안 되는데, 내가 싫어하는 마음에 집착을 하면 만나는 게 괴로워집니다. 집착으로 인해 괴로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만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게 아니고, 헤어지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게 아닙니다.
집착은 관념의 이데올로기에서 나옵니다. 관념이 몸과 마음에 축적된 것을 ‘습(習)’ 또는 ‘까르마(karma)’라고 합니다. 까르마로부터 좋고 싫고 가 나오거든요. 관념 체계가 무너지면 좋고 싫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싫어해도 필요하면 능히 할 수 있고, 좋아해도 필요 없으면 능히 멈출 수 있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보다 더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고 싶은 건 해야 되고, 하기 싫으면 안 해야 되는 걸 자유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반쪽짜리 자유밖에 안 됩니다. 좋아도 멈출 줄 알고, 싫어도 능히 할 줄 아는 자세를 가질 때 우리는 세상만사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조금만 관점을 바꾸면 큰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말씀하신 네 분의 얘기가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 같지만, 가장 핵심은 내가 어떤 것을 붙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래야 된다’ 하는 생각을 붙들고 있으니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이래야 된다고 정해진 법은 없습니다. 이것이 중도입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상태에서 이런 일도 생기고, 저런 일도 생기는 거예요. 필요하면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될 수는 없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부모를 원망합니다. 부모님은 기본적으로 나를 도와주시는 분이에요. 그러나 내가 원하는 만큼 도와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부모를 원망하게 되죠. 특별하게 자식을 해치는 부모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부모는 자식을 해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자식들이 대부분 부모에 대해서 원망을 갖게 되는 이유는 자식들이 원하는 만큼 안 해주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예요. 이 세상은 살만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 되지 않습니다. 원하는 것이 다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원하는 대로 안 된다고 괴롭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원하는 게 다 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무의식에서는 원하는 게 다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원하는 대로 다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하면 괴로움이 생기는 겁니다. 뭔가 붙잡고 있는 것을 조금 내려놓으면 여러분도 훨씬 더 자유롭고 밝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생방송을 마치고 나니 밤 9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내일은 문경 선유동 정토연수원에 정토회의 각 단위 책임자 200여 명이 모여서 정토사회문화 회관 활성화를 위한 오프라인 시범 프로그램 운영 방안을 주제로 1박 2일 동안 공청회를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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