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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오전과 저녁에 전법 회원을 위한 생방송 법회를 하고, 중앙승가대학교 초청으로 학인 스님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오전 10시부터는 주간반 회원들을 위한 전법회원 법회를 시작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전법회원들이 모여서 스님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먼저 정토회 대표님이 전국사업 정기회의 결과를 보고했습니다. 이어서 다 함께 스님에게 삼배의 예로 법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지난주에 부탄을 다녀온 소감을 나누며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요즘 부탄에서 지속 가능한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좀 더 면밀하게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의 지원이 약이 되기보다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식물에게 필요한 거름을 주듯이, 부탄 사람들이 자립하는데 정말 도움이 되는 지원이 무엇인지 세밀히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차례 답사를 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는 측면에서는 지금까지 해왔던 긴급구호 사업과 같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일회적인 지원이 아니라 그들이 자립할 수 있고, 지속가능한 방식의 지원을 하려고 하는 점이 다릅니다. 그래서 더 많은 사전 준비가 필요합니다.
올해는 대규모 행사가 여러 차례 있어 여러분에게 업무가 과중될까 우려됩니다. 하지만 본래 하기로 했던 일들이니까 시간적 부담이 있더라도 물러서지 말고 즐겁게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분의 질문을 받고 누구든지 자유롭게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아이가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지만 공부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기가 힘들다며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부모가 ‘자식이 잘됐으면 좋겠다’, ‘공부도 잘하고 학교도 성실히 다니면 좋겠다’ 하고 바라는 것은 모든 부모들의 원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지능지수가 떨어지든, 성격이 게으르든, 어떤 이유로든 공부를 못할 때 억지로 부모가 시켜서 공부를 하면 나중에 부작용이 생깁니다. 어릴 때는 강압적인 방식이 통합니다. 초등학교 때는 엄마가 아이에게 얼마나 많이 관심을 갖고 집중을 하느냐에 따라서 성적이 좋아지기도 하는데, 사춘기를 지나 중고등학교로 넘어가면 억지로 한 공부는 결국 아이들이 반발을 하게 됩니다. 결국 삐뚤어지게 되기가 쉽습니다.
항상 학부모들이 하는 얘기가 ‘초등학교까지는 공부를 잘했는데 중학교 가더니 성적이 떨어졌어요’ 하는 겁니다. 제가 상담을 해보면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똑같이 말합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시키는 대로 공부하기 때문에 효과가 나지만, 점점 클수록 억압된 것은 용수철이 튀듯이 반발이 일어나서 공부를 하지 않게 됩니다.
엄마는 ‘아이가 공부를 얼마나 잘하느냐’ 보다는 ‘아이가 얼마나 심리적으로 편안해지느냐’ 하는 것을 중심에 두고 아이를 관찰해야 합니다. 아이에게 심리적 억압이 되는 행동은 엄마가 가능하면 하지 않는 것이 좋아요. 공부를 1등하고 심리적 억압이 있는 아이보다는 공부를 중간 정도로 하고 심리적 억압이 없는 아이가 앞으로 세상을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기능을 익히거나 성적을 잘 받아서 높은 지위에 올라갔다고 하더라도 정신적으로 힘들고 불행하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람의 지위나 돈을 가지고 평가하겠지만 부모는 항상 자식이 건강하고 행복하면 됐다는 관점을 갖고 아이들을 봐야 됩니다. 아이가 머리가 아프고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아이의 요구가 있을 때는 지원을 해 줄 수 있지만 그 이상으로 아이에게 자꾸 잔소리를 하거나 공부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게 된다면 그건 질문자가 고쳐야 할 일이지, 아이에게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됩니다. 자식에 대한 엄마의 잘못된 집착이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정토회 운영과 부탄의 지속가능한 개발 계획에 대해 다양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이어지는 질문들에 대해 답변을 모두 한 후 11시가 되어 법문을 마쳤습니다.
이어서 전법 회원들은 계율에 따라 자신의 말과 행동을 참회하고 나누는 포살 법회를 했습니다.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 중앙승가대학교 초청 강연을 하기 위해 김포로 향했습니다. 오후 2시에 중앙승가대학교에 도착해 강연을 하기 전 교학처장 스님과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출가하는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 속에서 승가대학교 운영에 어려움이 없는지, 어떤 대안이 있는지, 정토회는 어떻게 대안을 마련하고 있는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2시 30분이 되어 학인 스님들이 공부하는 육화당으로 이동했습니다. 법당에는 학인 스님들 40여 명이 자리했습니다.
삼귀의, 반야심경, 청법가, 청법 삼배를 하고, 교학처장 스님의 환영사를 듣고 나서 스님이 법상 위에 올랐습니다. 스님은 학인 스님들이 무엇에 중점을 두고 공부를 하면 좋겠는지 이야기하며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원래 이 자리를 대중방에서 그냥 좌담하듯이 하려고 요청을 드렸었는데 여러분들이 이렇게 가사 장삼을 다 수하고 정좌를 해서 앉아 있으니까 제가 말문이 막힐 것 같습니다.” (웃음)
스님은 학인 스님들이 편안하게 질문하고 대화할 수 있게 가운데로 모여 앉도록 했습니다.
“오늘은 출가한 수행자끼리 나이 많고 적은 것 따지지 말고 ‘정말 우리가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되겠는가’ 하는 현실적인 주제를 가지고 여러분과 대화를 하고자 합니다. 저는 부처님 가르침의 목표는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일상 용어로 말한다면 자유와 행복이고, 불교 용어로 말한다면 해탈과 열반입니다. 죽어서 극락에 간다든지, 복을 받는다든지, 오래 산다든지, 건강하다든지, 이런 게 불교의 목표가 아닙니다. 불교의 목표는 지금 내가 자유롭고 행복한가입니다. 즉 해탈과 열반이 수행의 목표임을 분명히 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이렇게 출가해서 살고 있는데, 정말 자유로운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가요? 자유롭습니까? (웃음)
스님들이나 신부님들, 목사님들의 얼굴을 보면 대부분 좀 근엄합니다. 세속 사람들과 비교할 때 어린아이들이 갖고 있는 해맑음이 적습니다. 왜냐하면 일종의 사명감을 너무 많이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깨달아야 된다는 무거운 사명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얼굴에 밝은 미소를 지니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이런 무거운 짐이 없어야 돼요. 여러분은 지금 스님이라는 직책에 대해서도 무거운 짐이 있고, 계율에 대해서도 무거운 짐이 있잖아요? 이런 것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고 가볍게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먹고 싶은데 안 먹으려고 하면 무거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좋아해도 ‘그건 건강에 해로운 거야. 좋거든 너나 먹어. 몸에 안 좋기 때문에 나는 안 먹어’ 이런 관점을 갖는다면 무거울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처럼 내가 주인이 되어서 계율과 의식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안팎이 굉장히 투명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수행자인데, 세상 사람보다 더 위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겉으로는 근엄한 척하고, 속으로는 자신의 욕망을 따로 채우며 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것을 떠나서 나 자신이 너무 이율배반적이잖아요. 이렇게 이율배반적인 사람이 되려고 수행자가 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누구보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수행자가 되었다는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괴로움이 없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스트레스가 없이 사는 것을 뜻합니다. 공부가 뜻대로 안 됐다, 박사 학위를 못 땄다, 스승님께 야단을 맞았다 등등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우리들에게도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럴 때 과연 여러분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느냐, 아니면 훨씬 덜 받느냐, 이런 문제입니다.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면 그게 바로 수행의 효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똑같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이름을 어떻게 붙이고 모양을 어떻게 하고 있든 그냥 세상살이에 불과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수행자는 해탈과 열반을 가장 중심에 두고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대중들에게 어떤 희망을 줄 수가 있습니다.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스트레스를 받고 더 자유롭지 못하다면 무엇으로 그들을 견인하는 효과를 낼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복을 빌어준다든가, 지식을 전달하는 것과 같은 수행 외적인 요인으로 대중을 자꾸 모으려고 하게 됩니다. 절이 크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사업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과 관점이 똑같아요. 사람들이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도록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사람들의 무거운 짐을 얼마나 덜어줄 수 있는지가 우리의 평가 기준이 되어야지, 수행 외적인 규모가 평가 기준이 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려움이 닥치는 것을 너무 피하지 마세요. 왕따도 당해보고, 멸시도 받아보고, 비난도 받아보고, 낙방도 해보고, 고통도 겪어보면, 그것이 결국 수행 차원에서는 자기를 지켜내는 데에 큰 도움이 됩니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의 얘기를 공감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내가 어려움을 극복한 경험이 있어야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요. 그러니 어려움에 처한 것이 꼭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경험들을 전부 수행으로 승화시켜 나가면, 자기 수행에도 도움이 되고, 전법에도 도움이 됩니다.”
이어서 학인 스님들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 명이 궁금한 점을 묻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는데요. 그중 한 스님은 기후 위기 시대에 수행자의 역할에 대해 질문을 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출가를 하면 걸식이라고 해서 얻어먹었습니다. 입는 것은 주워 입었습니다. 주워 입더라도 다른 사람이 쓸 수 있는 것은 주워 입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시신을 덮었던 천은 부정 탄다고 해서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출가 수행자는 시신을 덮었던 천을 주워 입었습니다. 잠은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잤습니다. 이것이 출가 수행자의 의식주 생활이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이렇게 생활을 하니까 출가를 하는 순간 의식주 문제는 해결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무리 승려가 많이 들어와도 승단에서 의식주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어요. 초기 불교가 빠르게 확산된 데에는 이런 생활 방식이 가장 큰 장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절을 운영하려면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큰일이지 않습니까? 잘 수 있는 집을 지어야지, 음식을 해서 먹여야지,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어야지, 승려가 많이 들어오면 재정에 엄청난 부담이 됩니다.
부처님 당시처럼 의식주를 해결하면 의식주에 대한 번뇌에서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수행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의식주 문제 해결이 기본 과제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선방에서 수행을 할 때도 주로 먹는 문제가 거론이 많이 됩니다. 왜 먹는 것을 제대로 안 주냐는 거죠. 그래서 출가를 할 때는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못 먹어도 부처님보다는 잘 먹어요. 아무리 못 입어도 분소의보다는 잘 입습니다. 아무리 숙소가 못해도 나무 밑보다는 낫습니다. 이런 관점을 갖고 수행자는 먹고 자고 입는 문제에 대한 불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선 의식주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져야 우리가 쓸 수 있는 에너지를 그 외의 부분에 쓸 수 있습니다. 제가 요즘 부탄에 가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의식주에 구애를 받지 않으면 활동할 수 있는 범위가 굉장히 넓어집니다. 시골 어디에 가든지 빈집에 침낭 하나 가져가서 자면 되거든요. 그런데 의식주 문제에 너무 매이면 활동을 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렇게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이야말로 기후 위기를 막을 수 있는 대안입니다. 저는 검소해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검소한 생활이 저한테 편합니다. 옷을 입어보면 새 옷보다 헌 옷이 편해요. 여러분들은 어떤가요? 새 옷이 좋나요? 저는 헌 옷이 몸에 편하고, 새 옷을 입으면 어딘가 불편해요. 그래서 가능하면 새 옷을 안 입습니다. 이렇게 적게 소비하는 것이 지구 온난화를 막는 길이지 다른 만 가지 방법은 무용지물입니다. 에너지를 적게 소모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에요. 옷을 입는 것이 에너지 사용량과 관계가 없지 않으냐고 할 수 있겠지만, 옷도 한 벌 더 입게 되면 그 옷을 만드는데 CO2가 그만큼 배출되는 거예요.
지금 기후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소비를 줄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전기 소비를 줄이든, 자동차를 덜 타든, 옷을 하나 덜 입든, 밥을 덜 먹든, 소비를 줄여야 기후 위기를 막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도 딱 일치합니다. 저는 부처님의 가르침이야 말로 기후 위기를 막는 유일한 해법이라고 생각해요.
가난한 나라에 가면 다 돈 주고 살만한 것들인데, 우리는 유행 따라 다 버리잖아요. 가능한 버리지 말고 재활용하고, 신제품을 사기보다는 재사용을 해야 합니다. 저 역시 이미 가지고 있는 승복만 해도 죽을 때까지 입고도 남습니다. 어쨌든 소비를 줄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그래서 저는 항상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의식주에 대해서 더 이상 욕심을 내지 말자. 내가 아무리 못 먹어도 얻어먹는 것보다는 잘 먹고, 주워 입는 것보다는 잘 입고, 처마 밑에 자는 것보다 나은 곳에서 자지 않느냐. 부처님을 기준으로 하면 불평불만을 가질 게 없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불평불만도 적어지고 덜 소비하게 됩니다. 항상 기준을 부처님으로 삼아야 합니다. 제 얘기가 여러분들에게 꼰대 같은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웃음)
정토회 회원들은 삶의 기준을 ‘전 세계 70억 인구 중에 중간 이하로 살자’ 이렇게 잡았습니다. 전 세계 70억 인구 중에 중간 이하면 대한민국에서는 하위 10퍼센트 미만입니다. 대한민국에서 하위 10퍼센트 미만의 생활 수준을 유지해야 전 세계의 중간이 됩니다. 수행자라면 전 세계의 중간 정도만 살면 됩니다. 비록 한국에서 살 때는 약간 빈곤함을 느끼지만, 부탄에 가면 지금 우리가 입은 옷도 그 사람들의 옷보다 좋고, 뭘 해도 더 좋습니다. 그런 나라에서는 수행자가 아닌 사람도 그렇게 사는데 수행자라고 하면서 대중보다 더 호화롭게 사는 것은 맞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져야 합니다. 수행자라면 기후 위기 시대에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불교는 연기 사상이기 때문에 철학적으로도 기후 위기 시대에 유리합니다. 그래서 저는 불교가 원래의 가르침을 잘 지켜 나가면 새로운 기회가 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통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변화된 시대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대응했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불교의 현대화가 지나친 세속화로 가서는 안 됩니다. 지금 한국 불교는 문화 상품을 확대해 나가서 젊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좋은 면도 있는데, 한편으로는 사찰 경영이 너무 자본주의적으로 흘러가는 측면도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병폐가 지금 인류문명의 위기를 가져오고 있는데, 이런 자본주의적인 접근 방식은 단기적으로 효과가 있을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도움이 안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서 스님이 마무리 인사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의 분위기가 너무 엄숙한 것 같아요. 다음에 혹시 한 번 더 초대를 해주시면 우리 모두 가사를 벗고 법당이 아닌 대중방에 빙 둘러앉아서 인생 고민을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고민이더라도 좋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에서는 인간의 어떤 고민에도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없습니다. 본인이 안고 있는 고민이 제일 큰 고민이에요. 이러한 고뇌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가 있는지가 부처님 가르침의 목표이기 때문에 고상한 질문만 하지 마세요. 여러분 개개인의 삶이 불법을 만나서 좀 더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두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후 큰 박수로 법회를 마쳤습니다. 법회를 마치고 학인 스님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했습니다.
스님은 강연을 마련한 교학처장 스님과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정토회관으로 출발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부터는 정토회관 방송실에서 저녁반 전법회원들을 위해 생방송 법회를 했습니다. 전법회원들이 모두 화상회의 방에 입장하자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이어서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네 명의 질문을 받고, 자유롭게 손을 들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생방송을 마치고 나니 밤 9시가 넘었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남원 실상사로 이동해 하루 종일 두북 어르신들을 모시고 사찰순례를 한 후 다시 서울로 돌아와 저녁에는 부탄 지속가능한 개발 사업에 대해 온라인으로 회의를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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