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9.24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 상임 천일준비위원회 회의
“왜 평생 노력했는데 더 괴로워졌을까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천일결사 기도를 생방송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새벽 4시 30분, 맑은 종소리가 랜선을 타고 울려 퍼지며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삼귀의, 수행문, 참회, 108배, 명상, 경전 독송을 차례대로 한 후 오늘 읽은 경전에 대한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습니다.

"아침 기도 잘하셨습니까? 태풍이 지나가고 기온이 많이 떨어지고 날씨가 많이 서늘해졌습니다. 무덥던 여름이 언제 끝날까 싶었는데, 어느덧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습니다. 이렇게 좋은 계절을 맞아서 여러분도 1차 만일결사의 마지막 백일기도를 꾸준히 해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부처님이 꿰뚫어 본 본질

요즘 우리가 읽는 경전은 부처님이 농경제와 사문 유관을 거치며 출가의 뜻을 세우지만, 아버지의 간곡한 만류로 여러 가지 세속 생활을 경험하고 그 과정에서 괴로움의 본질을 꿰뚫게 되는 내용입니다. 부처님은 세속 생활에서 쾌락을 맛보면서도 그 쾌락의 본질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꿰뚫어 봤습니다. 그래서 욕망의 세계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똥 누고 뒤도 안 돌아본다'는 말처럼 부처님은 결국 왕위에 대한 아무런 미련 없이 출가의 길을 떠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는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하는데 그것이 곧 괴로움과 맞닿아 있다는 점입니다. 불교대학에서 배우는 '부처님의 일생'을 보면 '부처님이 무희들과 어울려 쾌락을 즐겼지만, 새벽녘에 눈을 떠 그들이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니 그것이 마치 무덤가의 시쳇더미와 같았다'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타림의 시쳇더미와 같았다는 건 전날 밤의 쾌락이 곧 괴로움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괴로움의 극치가 바로 죽음이니까 시체로 표현한 거예요.

이처럼 즐거움과 괴로움은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즐거움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그 즐거움이 곧 괴로움이 되는 겁니다. 세상에는 즐거움과 괴로움이 있고, 그중 우리는 괴로움은 버리고 즐거움만 추구합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에서 생기는 즐거움은 이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괴로움으로 바뀝니다. 즐거움이 곧 괴로움입니다. 이처럼 괴로움은 버리고 즐거움만을 추구하려는 자세를 두고, 부처님은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독을 사랑한 것과 같고, 물고기가 낚싯밥을 무는 것과 같고, 개가 살 없는 뼈다귀를 무는 것과 같다.'

독을 사랑한 것과 같다는 것은 너무 원해서 먹지만 결국 독으로 인해 죽게 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물고기가 낚싯밥을 보는 순간 '웬 떡이냐?'하고 물지만, 그 순간 괴로움의 극치인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개가 살 없는 뼈다귀를 물면 뼈다귀를 아무리 씹어도 아무런 소득이 없습니다.

독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는 말씀을 제가 요즘 식으로 바꿔서 '쥐가 쥐약을 먹는 것과 같다'라고 표현합니다. 쥐약이 든 고구마가 예쁜 접시 위에 올려져 있을 때 쥐가 '웬 떡이냐?'하고 먹지만, 결국 그 안에 든 쥐약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게 곧 독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또, 개가 살 없는 뼈다귀를 무는 것과 같으니 아무리 노력해봐야 소득도 없고 오히려 하면 할수록 괴로움이 커집니다.

왜 평생 노력했는데 더 괴로워졌을까

우리가 인생을 조금만 돌아보면 이런 이치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비해 지금 괴로움이 커졌는지 줄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죠. 만약 초등학교 시절보다 지금의 괴로움이 더 커졌다면, 매 순간 즐거움을 위해 평생을 노력했는데 왜 실제로는 괴로움이 더 커졌을까요? 평생 즐거움을 추구했으면 적어도 어린 시절보다는 괴로움이 줄고 즐거움이 조금은 늘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정작 늘어야 할 즐거움은 줄고, 줄어들어야 할 괴로움은 오히려 늘어났죠. 이는 우리가 추구한 즐거움의 본질이 괴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꿰뚫어 알지 못하면 아무리 불법(佛法)을 공부해도 즐거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에 독이 들었다는 걸 알지 못하면, 옆에서 몸에 나쁜 음식이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숟가락을 놓지 못합니다.

'나는 이제 이러한 모양을 명확히 보았다.
마땅히 기뻐하고 용맹하고 부지런해서
정진하는 마음을 내어 복덕을 기르고
큰 서원을 일으켜 세간을 건지리라.
구할 이 없는 중생에게 구호가 되며
양육할 이 없는 사람에게 귀의할 데가 되고
집이 없는 중생들에게 집이 되리라.
이제 해야 할 일이 이미 내 앞에 나타났으니
미구에 결정코 이 뜻을 이루리라.'

이러한 모양을 명확히 보았다는 건 이 즐거움과 괴로움의 본질, 존재의 본질을 분명히 봤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지만 중생은 어리석어서 물고기가 낚싯밥을 좋아하듯이, 개가 뼈다귀를 좋아하듯이 여전히 독을 사랑하고 괴로움 속에서 헤맵니다. 부처님이 보시기에 그런 중생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래서 구할 이 없는 중생에게 구호가 되고, 양육할 이 없는 사람에게 귀의할 데가 되고, 집이 없는 중생들에게 집이 되리라는 원(願)을 세우신 겁니다.

부처님은 욕망의 본질을 꿰뚫어 봄으로써 욕망에 대한 미련을 버렸지만, 중생은 아직도 욕망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거기에 집착해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욕망의 본질을 깨달은 부처님이 중생들도 이 본질을 확연히 알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원(願)을 세우시는 내용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출가에 대해 인생을 살다가 실패했을 때 선택하는 길로 생각합니다. 이는 조선시대 불교 탄압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가령, 연애하다가 실패하거나, 시험 준비를 하다가 실패하거나, 뭔가 세상에 낙오돼서 그것에 충격을 받고 인생을 죽지 못해서 하직하는 길로 출가를 생각하죠. 그러나 사실은 오히려 세상에서 추구하는 많은 돈이 주어져도 그것을 뛰어넘고, 높은 지위가 주어져도 그것을 뛰어넘고, 학문이나 명예가 주어져도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 출가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런 것을 얻지 못해서 선택하는 것이 출가의 길이라고 오해하죠. 그래서 사람들은 누가 출가했다고 하면 '인생에서 무엇을 실패했기에 출가했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그 사연을 듣고 싶어 합니다.

이는 세상의 스승으로서 출가자의 길을 가는 자세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 그렇게 보이면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기는 연민의 대상은 될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스승이 되지는 못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존재의 본질을 알고, 본인과 중생을 위해 해탈의 길이라는 새로운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때 부처님은 이렇게 결심하십니다.

'나는 이제 차라리 스스로 절벽 위에서
이 몸을 던져 큰 바위에 떨어질지언정,
모든 독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을지언정,
또한 스스로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않아 죽을지언정,
만약 내가 마음에 다짐한 대로
중생들을 고통의 바다에서 해탈시키지 못한다면
결코 카필라성에 다시 돌아가지 않으리라'

설령 죽을지언정 해탈의 길을 찾지 못하면 다시는 이 카필라성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외침이자,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해탈시키는 길을 찾지 못한다면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이렇게 다짐하면서 미련 없이 왕위를 버리고 집을 떠났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절에서 오래 살고, 출가해서 스님이 되고, 지식이 많아도 이 존재의 본질에 대한 부분이 분명하게 잡히지 않으면 불쌍한 존재가 됩니다. 이 관점이 뚜렷하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왕 앞에서 기가 죽고, 부자들 앞에서 위축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부자들이 주는 돈 몇 푼에 위축되고, 부자들이 주는 음식과 잠자리에 위축됩니다. 사람들이 베푸는 것에는 감사한 마음을 내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위축된다면, 우리가 담배 한 개비, 음식 한 점 앞에서 비굴하게 구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 즐거움과 괴로움의 본질, 존재의 본질이 부처님의 출가 정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이 부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혹시 이 관점에 대해 아직 명확하지 않으면, 적어도 스스로 명확하지 않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만약 출가해서 걸식하는 스님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집을 지어서 좋은 옷과 좋은 음식을 주고, 지위를 주고 명예를 준다면, 얼핏 보면 스님들을 존경하는 것 같지만, 이는 여전히 세속적인 관점에서 스님들을 대하는 것이고 결국 출가자를 세속화시키는 길입니다. 역사 속에서도 이런 과정을 거쳐서 불교가 차츰 세속화되었어요. 절 건물이 대궐처럼 바뀌고, 스님들에게 사회적 지위가 생기고, 스님들이 호화로운 옷을 입고, 호화로운 음식을 먹으며 세속적인 권력을 쥐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세속에 살면서도 세속에 물들지 않는 길

오늘의 경전을 읽으면서 우리는 불법의 가치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내가 당장 부처님처럼 걸식을 하고, 분소의를 입고, 나무 밑에서 지내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현재 내가 먹고, 입고, 자는 삶에 대해 불평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수행자로서 가정생활을 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전법을 하는 것에 대해 힘들다고 불평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보면 힘든 게 맞습니다. 그건 마치 담배를 피우고 싶은 사람이 담배를 피우지 못해서 힘들어하는 것과 같으니,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이해가 되는 것과 바른길은 별개입니다.

여러분이 수행자라면 가정생활을 하고 직장 생활하면서 전법을 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베풀어진 혜택이지, 그것이 괴로움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선택에 의해 세속에 있으면서도 전법 활동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비록 출가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수행자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세속 생활의 일부는 수행적 관점에서 해나가고, 수행자로서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해나가야 하겠다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가족들의 시선에서는 불쌍하게 보일 수도 있고, 이해가 안 되는 선택으로 보일 수도 있고, 그것이 가족 사이에 갈등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도 출가하실 때 아버지 정반왕과 갈등이 있었는데, 그것과 마찬가지죠.

또한, 여러분은 세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세속 사람들의 요구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이 불평할 때 '내가 어디 가서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나?' 이렇게 말할 일은 아닙니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기 위해 활동을 하지만, 그들이 같이 담배를 피우자고 하는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죄송합니다'하는 마음을 내는 겁니다. 그들에게 '담배 피우는 게 뭐가 좋다고 나한테도 같이 피우자고 하냐?' 이렇게 하면 서로 갈등만 생깁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요구에 끌려가서 같이 담배를 피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듯이, 세속적인 가치에 휩쓸려서 수행자로서의 정체성을 망각하면 굳이 힘들게 수행자로서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관점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야 연꽃이 흙탕물 속에서도 꽃을 피우고 흙탕물에 물들지 않듯이, 여러분이 세속에 살면서도 세속에 물들지 않고 여여하게 새로운 길, 미래 문명의 길, 붓다의 길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법문을 한 후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이어서 오전 8시부터는 어제에 이어서 상임 천일준비위원회 회의를 했습니다. 내년부터 2차 만일결사가 시작되고 나서 첫 3년을 어떻게 운영해 나갈지 상임 천일준비위원회에서는 많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오늘은 온라인 법회 운영 방식과 정토회의 사업 목표 설정 방식에 대해 초안을 마련해 와서 스님의 조언을 듣고 함께 토론한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원래 일정은 오전 10시부터 ‘아도모례원’에서 용성조사 오도일 기념법회와 회원의 날 행사에 참여할 계획이었으나 참여하지 못하고, 서울에서 그동안 밀린 업무를 보았습니다. 인도, 방글라데시, 필리핀을 다녀온 후 한국에서도 계속 온라인 법회와 화상회의가 연달아 있어서 휴식을 하지 못했는데 오랜만에 휴식도 할 수 있었습니다.

내일은 새벽에 서울을 출발해 두북 수련원으로 이동하고, 저녁에는 일요명상을 생방송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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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명화

스님 말씀듣고 다시 힘내봅니다.
감사합니다.

2022-09-30 08:40:25

안명순

괴로움의 본질. 세속에서 살아가는 삶 분명하게 수행
연꽃의 흙탕물 속에서 꽃이피고 흙탕물 속에 물들지 않는다
감사합니다

2022-09-29 07:43:44

우민자

"즐거움의 본질이 괴로움이다"
수행적 관점을 놓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_()_

2022-09-28 18:5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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