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6.23 북한전문가 모임, 정토불교대학 인간붓다 제9강
“이것이 인류 역사에서 여성 해방의 효시가 아닐까요?”

안녕하세요. 오늘도 서울 정토회관에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새벽 4시 30분에 서울 공동체 대중과 함께 예불을 했습니다.


예불을 마치고 스님은 곧바로 평화재단으로 이동했습니다. 7시가 되자 북한 전문가 분들이 속속 평화재단에 도착했습니다. 최근 남북 관계를 둘러싸고 정세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북한에서는 어떤 변화가 감지되고 있는지 서로 의견을 나누고,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평화재단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논의했습니다.

이어서 오전에는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들과 연이어 미팅을 했습니다. 미팅을 다 마치고 나니 12시 30분이 되었습니다. 손님들을 떠나보내고 서둘러 서울을 출발해 두북 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차창 밖으로 시야가 안 보일 정도로 강한 비가 쏟아졌습니다. 빗길을 뚫고 수도권을 벗어나자 구름 낀 하늘이 나타났습니다.


오후 5시에 두북 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저녁 식사를 간단하게 한 후 정토불교대학 강의 준비를 하고, 원고 교정을 보았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8시가 되자 정토불교대학 생방송 수업을 하기 위해 방송실 카메라 앞에 자리했습니다.

지난 수업 시간까지 부처님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수행하고 성도하고 6년 동안 교화를 해나간 과정까지 연대순으로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이제 부처님이 일생동안 설법한 내용별로 분류해서 소개하는 강의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오늘은 부처님이 교만한 사람들을 어떻게 교화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펼쳐졌습니다.

“2600년 전 당시 인도 사회에서 주로 거만을 떨거나 잘난 체를 했다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첫째, 당시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였기 때문에 성차별이 만연했습니다. 여성을 멸시하고 남성을 우대했습니다. 요즘도 부부간에 대화를 하다가 말이 안 통하면 ‘여자가 뭘 안다고 그러냐’ 이렇게 나오는 사람이 있잖아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바로 남성이라는 것을 우월하게 생각하는 태도에서 나오는 거예요.

2600년 전 당시에는 여성 차별이 매우 심했습니다. 여성은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주인이고, 결혼하면 남편이 주인이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이 주인이었어요. 유교에서도 여성은 남성에 종속된 것으로 봐서 삼종지도라고 하잖아요. 오늘은 이렇게 차별받던 여성에게 부처님은 어떤 해방의 길을 열었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네 개의 계급이 있지만 내 법 안에서는 평등하다

둘째, 고귀한 계급과 천한 계급이 정해져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계급 차별이 아주 심했습니다. 가장 높은 계급이 ‘브라만’이었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창조신의 이름이 브라만인데, 인도 당시 사회에서 최고 상위 계급의 이름도 브라만이었습니다. 자기들은 신과 같이 성스럽고 신성하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세상을 다스리는 왕은 오히려 두 번째 계급이었고, 사업이나 경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세 번째 계급이었습니다. 노동을 해서 먹고사는 사람들은 카스트의 마지막 계급인 네 번째 계급이었어요. 그리고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던 계급 밖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불가촉천민’이라고 불렸습니다. 이 사람들은 굳이 분류한다면 다섯 번째 계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가촉천민은 사람 취급을 안 하니까 일반적으로 카스트는 네 가지 계급이 있다고 말합니다. 불가촉천민은 함부로 죽여도 상관없을 정도로 짐승 취급을 받았습니다. 요즘은 동물권(Animal rights)이라고 해서 동물도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지만, 인도 당시에는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별이 남자냐 여자냐, 신체가 건강하냐 장애가 있냐, 신분이 양반이냐 상놈이냐, 얼굴색이 희냐 검냐, 이런 것은 전생의 죄 하고도 관계가 없고,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사주팔자 하고도 관계가 없는 얘기입니다. 그냥 피부색이고, 성별일 뿐입니다. 부처님은 이 사실을 2600년 전에 이미 설파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네 개의 큰 강이 있지만 바다에 가면 하나가 되듯이 세상에는 네 개의 계급이 있지만 내 법 안에서는 하나로 평등하다.’

성차별, 계급 차별 등 모든 차별을 부정하면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어요...”

이어서 스님은 계급이 높다고, 남자라고, 왕이라고 거만하게 굴고 잘난 체하는 사람들을 부처님은 어떻게 교화를 했는지 다양한 사례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이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계급이 높은 사람의 교만이 적나라하게 표현된 것이 석가족 출신 우빨리의 출가 얘기입니다. 우빨리는 이발사였고 수드라에 속하는 노예 계급이었어요. 부처님이 고향인 카필라바스투에 갔을 때 많은 석가족 왕자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를 했습니다. 왕자들은 부처님께 가기 전에 이발사인 우빨리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자신들은 이제 필요 없다며 갖고 있던 보석도 우빨리에게 다 줘버렸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출가하러 오면 누군가가 머리를 깎아주는 것이 아니라, 미리 자기 머리를 깎고 출가하러 간 거예요. 부처님도 스스로 머리를 잘랐잖아요. 왕자들의 머리를 깎아 주던 우빨리는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왕자들은 신분도 높고 부유하고 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데도 그걸 다 버리고 출가를 하는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내가 뭐가 아까워서 출가를 못할까?’

그래서 본인도 출가해야 되겠다고 결심을 하고 왕자들이 준 귀한 패물을 다 버리고 부처님을 찾아갔습니다. 이 때는 벌써 부처님이 성도 후 6년이 지나서 교단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때였습니다. 그래서 처음 출가한 사람은 바로 부처님에게 와서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교단을 이끄는 사리푸트라에게 가서 교육을 받고 난 뒤 출가수행자가 되는 시스템이 갖춰졌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우빨리는 출가수행자가 어떻게 되는지 절차를 몰라서 바로 부처님을 찾아간 거예요. 부처님께 출가하겠다고 하니까 부처님께서 몇 가지 물어보고 법을 설해 주었습니다. 벌써 마음의 준비가 됐던 우빨리는 곧바로 법의 눈을 떴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오라, 비구여’ 하고 출가를 허락했습니다.

우빨리에게 마땅히 경배하라

반면에 석가족 출신 왕자들은 사리푸트라에게 가서 기본적인 교육을 받은 후 우빨리보다 늦게 출가를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선배들에게 쭉 인사를 하게 되었는데 맨 마지막에 서 있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려고 보니까, 며칠 전까지 자신들의 시종이었던 우빨리였습니다. 왕자들은 아무리 출가를 했다고 해도 시종이었던 우빨리에게 도저히 절을 할 마음이 나지 않아서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머뭇거리는 왕자들을 보고 부처님께서 하신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우빨리에게 마땅히 경배하라.’

어제까지 자신들의 종이었던 사람에게 엎드려 인사를 해야 할 정도로 교단 안에서는 계급 차별을 철저히 부정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단의 화합이 늘 유지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성 해방의 효시, 비구니의 탄생

부처님은 이렇게 계급 차별을 단호하게 부정하셨어요. 하지만 당시 인도 사회에서 계급 차별보다 더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가 성 차별이었습니다. 부처님 성도 후 남자 출가수행자가 첫 번째로 나왔고, 그다음에 남자 재가수행자와 여자 재가수행자까지 나왔는데, 여자 출가수행자는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여성은 반드시 남자에 의지해야 자기 생존이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성은 남성인 아버지, 남편, 혹은 아들에게 의지해야지, 자기 혼자서 자기 이름을 가질 수가 없는 사회였어요. 여성은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로 불렸지, 자기 이름이 독립적으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석가족의 많은 젊은이들이 출가하자 주인이 없는 여성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남편이 출가해서 혼자된 여성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그 여성의 주인이 없어집니다. 부처님의 양모인 마하파자파티 부인도 아들인 부처님이 출가했고, 남편인 정반왕은 돌아가셨고, 자기가 낳은 아들 난다와 손자 라훌라도 출가했으니까, 집 안에 남성이 한 명도 없고 혼자 남게 됐습니다. 석가 족에 이런 여성이 수백 명이 발생한 거예요.

그러자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하파자파티 부인이 중심이 돼서 이런 여인들이 부처님을 찾아와서 출가를 허락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승낙하지 않으셨어요. 세 번을 청했는데 세 번 다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보통은 세 번 청하면 부처님이 승낙하셨는데, 여성의 출가는 세 번 다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며칠 있다가 또 찾아가서 청했는데 또 승낙을 안 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부처님은 카필라성을 떠나서 남쪽 바이샬리로 가버리셨어요.

마하파자파티 부인과 석가족 여성 500명은 포기하지 않고 부처님의 뒤를 따라 수백리 길을 걸어서 바이샬리까지 부처님을 따라갔습니다. 우리가 버스를 타고 가도 이틀 이상 가야 하는 거리인데, 석가족 여인들은 바이샬리까지 걸어와서 부처님을 찾아갔습니다.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서 또다시 출가의 허락을 요청했어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다시 승낙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하파자파티 부인은 너무나 슬퍼서 울고 있는데, 석가족 출신 아난다 존자가 그걸 보고 너무 가슴이 아파서 ‘조금 기다리십시오, 제가 들어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고는 부처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부처님, 여성은 출가해서 수행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합니까?’

부처님이 대답했습니다.

‘여성도 수행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누구나 다 청정하게 수행하면 가능하다.’

‘그런데 왜 여성에게는 출가를 허용하지 않습니까?’

아난다는 이렇게 되물으면서 부처님의 생모가 돌아가시고 마하파자파티 부인이 부처님을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공덕을 지었는지 나도 잘 알고 있다. 아난다여, 여성의 출가를 허용하노라.’

이렇게 해서 여성 출가수행자인 비구니가 탄생했습니다. 최초로 여성이 남자 없이 자기 이름을 갖게 됐습니다. 비구니 이전에 자기 이름을 독립적으로 갖게 됐던 사람들은 유녀들뿐이었습니다. 유녀는 특정한 남자가 주인은 아니지만, 주인이 여러 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도에서는 아주 아름다운 여성이 있어서 남자들이 서로 결혼하겠다고 다투면, 그 여자를 유녀로 만들어서 남자들이 공유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비구니는 여성이 남성 없이 오롯이 혼자서 자기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이 인류 역사에서 여성 해방의 효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왜 여러 번 거절을 하시다가 바이샬리에 와서 허락을 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알려면 당시의 사회적인 배경을 살펴봐야 합니다. 바이샬리는 당시 인도에서 가장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도시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나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는 성 차별이 워낙 굳건한 사회였기 때문에 여성 출가를 허용하려고 해도 다른 도시에서는 하기 어려웠어요. 부처님이 바이샬리에서 여성의 출가를 허용한 이유는 바이샬리가 그만큼 진보적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석가족 여성들이 스스로 수십 일에 걸쳐서 카필라성에서 바이샬리까지 맨 발로 걸어오는 과정에서 자립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여성들은 평생 동안 남자에게 의지해서 자기 행복을 추구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출가수행자가 된다는 것은 모든 의지처를 불살라버리고 스스로 내 삶을 사는 거예요. 석가족 여성들은 그것을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준 겁니다. 오늘날 여성 해방을 주장하는 사람도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직도 남자에 의지해서 자신의 인생 설계를 하는 여성이 많잖아요. 그런데 2600년 전에는 여성의 의지심이 더 심했겠죠.

2600년 전에 동등한 권한을 갖게 된 여성과 남성

이 두 가지 요인으로 인해서 여성의 출가가 허락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실제 사실은 부처님이 여성 출가에 대해 거절하지 않고 쉽게 허락하셨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그런데 왜 경전에는 이렇게 어렵사리 허락한 것으로 나올까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500년 후에 여성 출가 제도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당시 다른 교단에는 출가한 여성이 없었는데, 불교만 여성 출가자가 있으니까 품위 유지가 안 된다는 이유였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500년이 지나자 불교 교단에서도 여성 출가를 없애버린 거예요. 부처님이 이미 허락하신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 그 책임을 아난다에게 돌렸습니다. 부처님이 몇 번이나 거절하셨는데도 아난다가 여러 번 요청을 해서 부처님이 할 수 없이 허용을 하신 것이지, 부처님의 본심은 허락을 안 하려고 하셨다는 핑계를 대면서요. 어쩌면 비구니 제도를 폐지하기 위한 핑계로 부처님이 여성 출가에 대해서 여러 번 거절한 것으로 기록했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처님이 몇 번을 거절했느냐가 아니라, 불교에서 여성 출가를 허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까지도 가톨릭에서는 수녀는 사제가 될 수 없잖아요. 그런데 비구니는 2600년 전에 이미 비구와 동등하게 모든 권한을 갖게 됐습니다. 그러나 후대에 여성 출가자들은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여자가 혼자 숲에서 수행하고 있으니까 남자들이 잡아가고 성폭행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주인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여성 수행자들은 혼자 숲 속에서 정진하지 못하게 하고 반드시 비구 교단 가까이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도록 계율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계율은 오늘날 시각으로만 바라보면 어쩌면 남녀를 차별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까지 법문을 한 후 이번 주 수행연습 과제를 이야기하고 생방송 수업을 마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부처님이 차별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자비의 손길을 내민 이야기들이 이어집니다.

내일은 오전에 농사일을 하고, 낮에는 경주국립공원 관계자들과 미팅을 하고, 저녁에는 금요 즉문즉설 강연을 생방송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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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근

2600년 여성출가
감사합니다

2022-06-30 06:32:11

청정화

감사합니다

2022-06-27 19:37:05

신수진

감사합니다

2022-06-27 13: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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