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5.17. 정토불교대학 실천적 불교사상 12강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길”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을 위한 실천적 불교사상 생방송 수업이 있는 날입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여러 가지 업무들을 처리하고 손님을 맞이했습니다. 두북 수련원을 찾아온 손님과 함께 경주 남산을 순례한 후 같이 식사하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손님을 떠나보내고 다시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와 원고 교정과 여러 업무들을 처리했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 8시 정각에 방송실 카메라 앞에 자리했습니다. 오늘은 정토불교대학 수업 중 실천적 불교사상 과목의 마지막 강의인 12번째 강의를 생방송하는 날입니다.

지난 수업에서는 욕망과 감정의 작용을 이해하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선정’과 ‘지혜’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돌아보고 알아차리는 연습을 통해 수행자로 살아가는 ‘참회’와 ‘포살’, ‘자자’에 대한 스님의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하지 않으려면

“마음이 욕망에 사로잡히고 성질에 사로잡히고 사실에 깨어있지 못하면 어리석은 말이나 행동을 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마음을 고요하게 유지해서 탐진치 삼독에 마음이 물들지 않아야 합니다. 둘째, 탐진치는 시시때때로 일어나기 때문에 항상 사실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물을 한쪽 면만 보거나 일부분만 보거나 한시적으로 보면 단정을 짓게 되고 인식에 오류가 생겨요. 항상 사물을 전체적으로 보고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차리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어떤 편견에 치우치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면 감정이 요동치지 않을 수 있어요. 셋째, 내 편견에 사로잡혀 나도 모르게 감정이 올라왔다면 그 감정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감정에 놀아나지 말아야 해요. 나도 모르게 감정에 놀아났다 하더라도 말과 행동으로 옮기지는 말아야 합니다. 넷째, 욕설과 폭력적 행동을 자기도 모르게 해 버렸다면 참회를 해야 합니다. 수행자라면 넘어졌다고 울 것이 아니라 ‘내가 놓쳤구나!’ 하고 벌떡 일어나서 다시 시작해야 해요.

수행자는 첫 번째 방법인 고요한 마음을 유지해서 정신을 딱 차리고 사는 게 가장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인식의 오류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사실에 깨어있기가 매우 어려워요. 인식에 오류가 생기는 이유는 두 가지예요. 첫째, 사람이 인식하는 데 어떤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 시야를 벗어난 넓은 것, 긴 것을 못 봅니다. 또 시간 상으로도 너무 길거나 짧은 것은 인식할 수 없어요. 그런데도 각자 자신이 경험한 세계 속에서 이렇다 저렇다 단정을 합니다. 둘째, 자기 경험을 기초로 한 선입견 때문이에요. 선입견으로 세상을 보면 항상 인식 상의 오류가 발생합니다. 내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한 것이 항상 진실이라 할 수 없어요. ‘태양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진다. 그렇기 때문에 태양이 지구를 돈다.’라는 것은 분명히 내가 눈으로 보고 경험한 것이지만 진실은 아니잖아요. 이처럼 내 귀로 분명히 듣고 내 눈으로 분명히 봤지만, 진실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것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면 안 돼요. 인식의 오류가 없는 게 가장 좋지만,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항상 나에게 인식 상의 오류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래야 자기 판단이나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게 됩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길, 참회

자기 판단이나 감정에 사로잡혀서 넘어져 버리는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어리석게 살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자기가 잘했다고 주장할 게 아니라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했더라도 금방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해요.

‘죄송합니다. 제가 감정조절을 못해서 죄송합니다. 나도 모르게 과거에 쌓인 내 습관이 드러나서 당신을 힘들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넘어진 뒤에라도 알아차리고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수행자로서 다시 일어나는 것을 ‘참회’라고 합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잖아요. 찰나에 지나간 허물을 알아차리고 자각해야 합니다. ‘아! 내가 잘못했구나’ 알아차리고 자신이 잘못한 점을 그 사람에게 말을 해야 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잘못하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허물이 일어나지 않도록 결심하는 것이 참회입니다. 수행을 시작했다면 먼저 참회부터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자로서 마지막 마지노선이기 때문이에요.

‘사람이라면 화를 낼 수도 있지! 내가 신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데 그럴 수도 있지’

이렇게 수행적 관점을 놓치고 자기 행위를 합리화까지 한다면 범부중생이지 수행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불교대학 공부를 해서 수행자 대열에 들어섰다면 잘못을 할 수는 있지만 잘못했다는 알아차림은 있어야 합니다. 잘못한 걸 움켜쥐고 잘했다고 주장하면 안 돼요. 마음의 찌꺼기가 남아있지 않아야 합니다. ‘어! 내가 잘못했네.’ 이렇게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해요.

그런데 자신의 잘못을 죄스럽게 여기는 사람은 참회하는 사람일까요? 이 사람은 참회가 아니라 후회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잘못할 수 없는 사람인데 잘못을 해서 부끄럽다’ 이렇게 자신이 잘났다는 얘기예요. 누구나 실수하고 잘못할 수 있습니다. 괴로움 없는 삶은 우리의 목표지 아직 현실은 아닙니다. 현실의 우리는 탐진치 삼독에 휩싸여 살아왔기 때문에 잘못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예요. 다만 이것을 합리화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이 관점이 분명해야 해요.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참회해야 할까요? 부처님께서는 수행자가 지켜야 할 규범으로 다섯 개를 제시하셨습니다. 첫째, 적어도 어떤 상황에서든 남을 죽이거나 때리는 것을 합리화하지 않아야 합니다. 때릴 수도 있다거나 죽일 수도 있다는 말도 하지 말아야 해요. 그런 마음이 들었다면 딱 멈추어야 합니다.

둘째, 어떤 상황에서도 타인의 재물을 뺏거나 훔쳐서는 안 됩니다. 내가 아무리 배가 고프더라도 타인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 아무리 욕망이 일어나더라도 타인의 의사에 반하는 말이나 행동을 강제로 해서는 안 됩니다.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해서는 안 돼요. 성적 괴롭힘은 어떤 이유로도, 어떤 상황에서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넷째, 내 욕망에 휘둘려 사기 치는 말을 하거나 내 성질에 못 이겨서 폭언을 해서는 안 됩니다.

다섯째, 술이나 마약 같은 중독성 물질을 절제하지 못하고 취해서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다섯 가지는 특정 종교에 상관없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만한 규범이잖아요. 이 다섯 가지 규범을 지키면 나도 살기 좋아지고, 우리 사회도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 자명합니다. 오계를 지키지 못했다면 절대 합리화를 해서는 안 됩니다. 혹여 나도 모르게 지금까지 살아온 삶 때문에 이 다섯 가지 계율을 지키지 못했다면 이렇게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합니다’

이제 다섯 가지 가치관을 기준으로 참회를 해야 합니다. 타인에게 잘해주지 못한 온갖 것을 참회해야 하는 게 아니에요. 이 오계가 수행자가 참회를 하는 최소한의 기준입니다. 이 오계에 세 가지 계율을 더한 것이 팔계입니다. 첫째, 부자라도 검소하게 살아야 합니다. 둘째, 지위가 높아도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마음의 들뜨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향락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수행자로서 사치, 교만, 쾌락을 자제하겠다는 이 세 가지 계율은 지금 당장 여러분이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오계는 만약 어길 경우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는 사항입니다. 살다 보면 오계를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어요. 그럴 때는 딱 엎드려서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태도가 분명해야 합니다. 오계에 대한 참회가 가장 기본입니다. 수행이 조금 더 깊어져서 팔계를 지키겠다면 사치도 참회해야 하고, 교만도 참회해야 하고, 쾌락을 추구해도 참회해야 합니다. 그렇게 참회함으로써 수행자로 다시 돌아오는 거예요. 수도 없이 넘어지고 일어나면서 나아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스스로 드러내어 참회하기, 포살

그런데 참회는 자신이 잘못을 자각해야 할 수 있는 거예요. 잘못해놓고 참회를 하지 않는다면 같이 수행하는 다른 사람들은 의혹이 생깁니다. 이 의혹을 풀어주는 것이 ‘포살’이에요. ‘참회’가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리고 뉘우치는 것이라면, ‘포살’은 대중의 의심을 풀어주기 위해서 나의 잘못을 대중 앞에 드러내어 참회하는 것입니다. ‘포살’은 인도말인데 고백이라는 의미입니다. 포살 역시 잘못한 당사자가 자각을 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인이 자각을 못한다면 어떻게 치료해야 할까요? 행복으로 가는 마음공부를 함께 하는 친구를 도반이라고 합니다. 도반들에게 잘못을 한 당사자가 간절한 마음으로 이렇게 청해야 합니다.

‘도반님들이시여, 지난 일주일간 저를 보시고 수행자로서 허물이 있다면 저를 위해서 지적을 해주십시오.’

그러면 도반들은 같이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애정을 가지고 그를 위해서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부분을 알려줘야 합니다. 이렇게 잘못한 당사자가 도반에게 청해 도움을 받아 참회하는 것을 ‘자자’라고 합니다.

참회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스스로 참회하는 ‘참회’, 둘째, 드러내어 대중 앞에 고백해서 참회하는 ‘포살’, 세 번째, 대중에게 청해서 대중의 도움을 받아 참회하는 ‘자자’입니다.

여러분들은 우선 스스로 참회하는 게 중요합니다. ‘포살’의 장점은 첫째, 본인에 대한 의혹을 해소시킬 수 있습니다. 둘째, 드러내어 약속을 함으로써 지키려는 의지를 다질 수 있습니다. 혼자서 다짐한 것보다 대중 앞에서 다짐을 해놓고 지키지 못하면 민망하잖아요. 그래서 지키게 되는 효과가 조금 더 큽니다. 이렇게 타인의 가슴속에 있는 의혹을 해소하고 본인의 결심을 더 단단히 하기 위해 포살을 하는 거예요. 포살은 우리 공동체가 수행자 집단임을 확인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포살이 끝나면 승가가 청정해졌다고 표현을 합니다.

‘자자’는 수행력이 높아야 가능합니다. 보통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적을 받으면 기분이 나쁘잖아요. 그러면 자자가 안 되고, ‘지적질 또는 시비 나누기’가 되기 쉬워요. ‘자자’는 본인이 간절하게 청해야 합니다. ‘저를 위해서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청하면 도반들이 당사자를 위해 애정을 가지고 조언을 해주는 거예요. 조언할 때는 시비심으로 ‘다 네 문제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포살과 자자를 할 때는 반드시 구체적인 계율에 근거해서 말을 해야 합니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그 계율을 어겼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줘야 본인이 자각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자자’는 본인이 청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변명을 하거나 저항하기보다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실이 아닌 경우에는 해명할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보셨군요.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렇게 수행 집단에서는 ‘포살’과 ‘자자’를 통해서 의혹을 풀고 화합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마음의 예방과 치료

계율을 어겼을 때는 반드시 ‘참회’를 해야 합니다. 참회란 계율을 놓쳤을 때 놓친 줄을 알아차리고 다시 수행자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지나간 허물을 뉘우치고 다시는 허물을 짓지 않겠다고 다짐해야 해요. 자신의 마음에 깨어있으면 감정이나 욕망이 올라올 때 계율을 어기지 않게 됩니다. 알아차림을 놓치고 계율을 어겼다면 참회를 해야 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병이 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방법은 알아차림입니다. 병이 났을 때 치료를 하는 방법은 참회예요. 우리는 감정을 알아차려서 계율을 어기지 않아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어겼으면 어긴 줄을 알고 참회해서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병이 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처럼 우리는 감정을 알아차려서 계율을 어기지 않고 지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병이 나면 치료를 해야 하듯이 나도 모르게 계율을 어겼다면 어긴 줄을 알고 참회하는 거예요.

병이 재발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도 예방입니다. 알아차리면 예방이 되고 놓치면 병이 발생하고 다시 알아차리면 치료가 돼요. 이렇게 예방과 치료를 꾸준히 연습해 나가는 사람이 수행자입니다. 자기 마음, 성질, 욕구를 잘 알아차리는 훈련을 자꾸 하다 보면 감정이 격동하지 않으니까 계율은 저절로 지킬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계속 정진을 하면 통찰력이 생깁니다. 통찰력이 생기면 마음이 흥분하는 일이 아주 드물어지기 때문에 마음에 긴장이 사라져요.

수행자가 계정혜를 닦아 통찰력을 갖게 되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통찰력이 없어서 감정이 일어나더라도 감정을 제대로 알아차리면 적어도 밖으로 드러내서 확대하고 재생산시키지는 않게 됩니다.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계율을 어기게 됩니다. 어겼을 때는 어긴 줄 알고 다시 돌아오면 됩니다. 이것이 ‘참회’입니다. 참회는 수행에 가장 바닥이고 마지노선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초심자는 기도할 때 수행문을 읽고 참회를 먼저 합니다. 그 후에 선정을 닦는 명상을 하고 지혜를 증득하기 위해서 부처님 말씀인 경전을 독송하는 거예요.

부처님이 활동하셨던 2600년 전에 비해 현대 사회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현대사회에 오계를 그대로 적용하면 시대에 안 맞을 수가 있어요. 예를 들어 부처님 당시에는 담배가 없었고 술 먹고 취한 사람들이 문제를 많이 일으켰기 때문에 ‘술 먹고 취하지 마라’는 계율만 있었습니다. ‘담배에 중독되지 마라’ 이런 계율은 없어요. 태국이나 남방불교에 가면 계율에 없다는 이유로 스님들이 노소에 관계없이 담배를 피우거든요. 정토회에서는 현실에 맞게 ‘술 먹고 취하지 마라’라는 계율을 술뿐만 아니라 담배나 마약과 같은 ‘중독성 물질에 빠지지 마라’라고 해석했습니다. 이렇게 계율을 현대 실생활에 알맞게 해석한 것이 18 계본입니다. 18 계본은 나와 타인, 우리 사회를 좀 더 건강하고 정의롭고 아름답게 만들어가기 위한 실천입니다. 어떤 특정한 종교나 지역, 남녀에 국한해서 지켜야 할 규범이 아니에요. 계율은 죽어서 좋은 곳에 가기 위해서, 복을 받기 위해서, 돈을 더 잘 벌기 위해서 지키는 게 아니에요. 살아있는 사람들이 좀 더 서로 존중하고 좀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길입니다.”

수행 연습을 안내하고 아홉 시가 넘어 수업을 마쳤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바로 서울로 출발했습니다. 내일은 의암손병희선생 순국100주년 기념토론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밤 1시가 되어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했습니다. 내일은 서울에서 오전과 저녁에 수행법회를 하고, 의암손병희선생 순국100주년 기념토론회에 참석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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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금숙

삼독으로 인해
어리석은 행동이 일어났다면 바로 알아차리고
참회로서 벌떡 일어서야 함을 알았습니다

2022-10-12 12:37:04

우현

죄송합니다 제가 감정조절을 못해서 죄송합니다 수행자의 마지노선 참회부터 잘 해야겠습니다

2022-06-15 22:35:35

무검

개인의 인식오류로 자신의 생각이 언제나 틀릴 수 있다는 사실과 알아채림의 중요성, 참회의 올바른 태도에 대한 가르침 감사합니다.

2022-06-05 11:3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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