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1.15 천일결사기도 생방송, 정토불교대학 근본교리 즉문즉설
“친구와 손절하고 나니 마음이 불편합니다.”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새벽 4시 30분에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예불, 삼귀의, 수행문, 참회, 108배, 명상을 한 후 경전독송을 했습니다.

‘비구들이여!
두 가지 경우의 사람은
이것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괴로운 경지와 지옥에 떨어진다.
두 가지 경우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깨끗하게 지내지 않으면서도
깨끗하게 지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
그리고 완벽하게 한 점 티끌도 없이
깨끗하게 지내는 사람을
부정하게 지내고 있다고
근거도 없이 비방하는 사람이다.

비구들이여!
이 두 가지 경우의 사람들은
이것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운 경지와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기도를 마치고 스님이 오늘 읽은 경전에 대해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지 말라

“이 게송에서 ‘깨끗하다’라는 말은 계율을 잘 지킨다는 뜻입니다. 오늘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경우를 경계하라는 내용이에요. 첫째, 계율을 잘 안 지키고 청정하게 살지 않으면서 자신이 마치 계율을 다 지키고 아주 청정하게 잘 사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둘째, 다른 사람은 계율을 잘 지키고 청정하게 살아가는 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에게 마치 많은 허물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 경우입니다. 두 가지 다 수행자로서 바르지 않은 태도예요. 경전에 이런 사람은 괴로움의 지옥에 떨어진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옥은 극도로 괴로운 상태를 말해요.

사람은 자기 허물은 보기가 어렵고, 또 남의 허물은 안 보기가 어렵습니다. 육조단경을 보면 혜능 대사께서도 간곡하게 일러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지 말라, 다른 사람의 허물이 눈에 보이면 그것이 곧 나의 허물임을 알라’

현실에서는 남의 허물을 보기가 쉽죠. 예수님께서도 ‘남의 눈에 티끌은 보면서 제 눈에 대들보는 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모두 같은 가르침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은 아주 작은 것도 금방 눈에 띕니다. 다른 사람이 뭘 조금만 잘못해도 ‘왜 저럴까?’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죠. 자기가 잘못하는 건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걸 요즘 말로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 줄여서 ‘내로남불’이라고 하죠. 자기가 잘못하는 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한다고 합리화를 하고, 다른 사람이 잘못하는 건 문제가 많다고 지적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자기의 허물은 잘 보이지 않고, 남의 허물은 잘 보이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을 나무랄 수는 없어요. 또 그렇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 수행자라면 남의 허물은 가능하면 들추지 말고 자기의 허물을 보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남의 눈에는 대들보가 있다고 하더라도 가능하면 시비하지 말고, 제 눈에는 작은 티끌이라 하더라도 찾아서 없애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괴로울 일이 없고, 갈등할 일이 없어집니다.

이처럼 내가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또 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남의 허물을 보지 말고 늘 나의 허물을 보고 개선해 나가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늘 ‘내가’ 계율을 잘 지키고 있는지를 살피고, 부족한 부분은 반성하고 참회를 해야 해요. 다른 사람이 계율을 잘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는 굳이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관점을 가져야 괴로움 없이 살아갈 수 있어요.

내가 계율을 청정히 지키는 것은 나의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이 계율을 지키는지 여부는 그 사람의 문제입니다. 그가 어떻게 하는가는 그 사람의 문제이기 때문에, 설령 계율이나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보더라도 그를 탓하지 말고 오히려 불쌍히 여겨야 해요. 계율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결국 괴로움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불쌍히 여기는 겁니다. 결코 탓하는 마음으로 지적을 하는 게 아니라 안타까운 마음, 자비로운 마음으로 지적을 해야 합니다. 포살과 자자도 그런 마음으로 하는 거예요. 자자를 할 때는 그를 위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야기를 꺼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읽은 경전을 통해 배우는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생방송을 마치고 잠시 휴식한 후 오전 10시부터는 불교대학 학생들을 위한 즉문즉설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불교대학 학생들은 지난 9월에 입학해서 근본불교 수업을 듣고 있는 중입니다.

불교대학 학생 2200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먼저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정토불교대학 근본교리 즉문즉설

“안녕하세요. 불교대학 학생 여러분! 오늘은 여러분이 늘 보던 영상보다 확 늙은 스님이 되어 나왔습니다.” (웃음)

학생들은 스님이 20년 전에 강의한 영상을 보며 온라인 공간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스님의 농담 한마디에 화면 속 얼굴마다 웃음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요즘 불교교리를 배우고 있는데, 많이 어렵죠? 정토불교대학에서는 가능하면 불교용어는 덜 쓰고 최대한 일상용어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그래도 불교대학 공부를 마치고 난 사람이라면 불교 철학의 가장 기본 개념에 대한 이해는 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여 연기, 중도, 사성제, 팔정도, 삼법인,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을 교과 과정에 편성했습니다. 아무래도 일상적 언어보다는 어렵다 보니 배우면서 머리도 아프고, 또 학교 다닐 때 공부하던 기억이 떠오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웃음)”

이어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다섯 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네 명은 교리에 대한 질문을 했고, 한 명은 불편한 친구와 관계를 끊었는데 왜 불편한 마음이 드는지, 또 불편한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불편한 친구와 손절했는데 마음이 불편해요

“요즘 자기와 맞지 않는 인간관계를 단절하는 걸 ‘손절’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최근에 저를 불편하게 만드는 친구와 관계를 정리했는데 오히려 마음이 불편합니다. 어릴 때는 모든 인연을 소중하게 대했지만 지금은 지인이 너무 많아진 것 같기도 하고, 소중한 인연에만 집중하기에도 에너지와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래서 불편한 관계는 정리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정리했는데도 막상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지 모르겠습니다.

평소에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고 연락을 자주 하던 친구도 아니었는데도 관계를 정리하고 나니 마음이 불편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데, 관계를 정리해서 불편함이 생기는 걸까요? 아니면 저는 그 친구를 내치더라도 다시 내게 다가와 주기를 바라는 이기심 때문일까요? 아니면 친구가 자기 잘못에 대해 사과하길 바라는 마음이나 제가 옳다는 사로잡힘 때문에 불편한 걸까요? 이 불편한 마음은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여쭤봅니다.”

“지금 상황이 ‘계륵’과 같습니다. 계륵이란 ‘닭의 갈비’라는 뜻이에요. 먹자니 살도 별로 없고 귀찮은데 그렇다고 버리자니 아까운 존재예요. 지금 질문자의 친구도 가까이하려니까 여러모로 귀찮고, 그렇다고 버리자니 몇 가지 이익이 되는 점이 있는 겁니다.

계륵 같은 인간관계가 많습니다. 인간관계를 맺을 때 100% 이익만 보는 관계도 없고, 100% 손해만 보는 관계도 없어요. 만약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었는데 나에게 이익은 하나도 없고 100% 손해만 본다면, 그 사람과는 관계가 멀어져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100% 이익만 되고 손해 되는 점이 하나도 없는 사람과는 가까이 있어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습니다. 관계라는 건 대부분 이익보다 손해가 조금 더 많거나, 손해보다 이익이 조금 더 많은 정도입니다. 이익과 손해가 50 대 50에서 많이 벌어져 봐야 40 대 60 정도예요. 이럴 때 60의 손해 때문에 관계를 정리하자니 40의 이익도 같이 버려야 합니다. 그렇다고 40의 이익 때문에 관계를 유지하자니 60의 손해까지도 같이 따라와요. 그래서 계륵과 같은 겁니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질문자는 그 관계에서 손해는 보기는 싫은데 이익을 버리기는 아쉬운 거예요.

부부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도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이 문제로 고민하는 겁니다. 조금 성질이 나면 이혼하겠다고 하다가, 자고 일어나서 괜찮으면 또 천생연분이라고 합니다. 관계에 이익과 손실이 같이 있기 때문입니다. 손해가 더 커 보일 때는 이혼하겠다고 하다가, 이익이 크다 싶으면 또 관계가 좋아 보이는 거예요. 어떤 관계에서도 늘 이익과 손해가 함께 온다는 걸 알아야 해요.

부처님께서도 늘 고(苦)와 락(樂). 괴로움과 즐거움이 함께 온다고 하셨습니다. 고락이 윤회한다고도 하죠. 고와 락이 함께 오는 이유는 우리에게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욕구를 버리면 고와 락이 같이 사라져요. 여러분은 락에 심취해 있기 때문에 욕구를 버리고 싶지 않아 합니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고가 뒤따라오는 거예요. 괴로움(苦)을 완전히 없애고 싶다면 즐거움(樂)도 같이 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면 인생을 무슨 재미로 삽니까?’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락을 버리기 싫다는 말이죠. 그렇게 락을 붙잡으면 고는 자동적으로 따라옵니다. 고를 없애는 데 다른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게 아니에요. 고와 락은 늘 붙어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고와 락을 분리시켜서 즐거움만 있는 곳을 천당이라고 하고, 괴로움만 있는 곳을 지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다들 천당에 가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것도 다 욕망일 뿐 고와 락은 분리시킬 수 없어요. 고와 락을 오가며 윤회하는 게 우리의 삶입니다.

여러분이 락을 취하려면 고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고, 고를 버리고 싶다면 락도 기꺼이 버려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락을 취하기 위해 고도 받아들이고, 지혜로운 자는 고를 버리기 위해 락도 같이 버립니다. 이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경전에 나오는 공덕천과 흑암천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한 부잣집에 절세미인이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했습니다. 이름을 물었더니 공덕천이었어요. 주인은 뛸 듯이 기뻐하며 그 여자를 방으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뒤에 한 여인이 따라 들어왔어요. 매우 추악한 모습을 한 여인으로 이름이 흑암천이었습니다. 주인은 기겁을 해서 흑암천을 쫓아버리려 했습니다. 그러자 흑암천이 ‘방금 집으로 들어간 여자는 제 언니입니다. 저는 늘 언니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저를 쫓아내려면 우리 언니도 같이 쫓아내야 합니다’라고 말했어요. 집주인이 공덕천에게 가서 그것이 사실인지 물었더니 사실이라고 했죠. 주인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둘 다 쫓아버렸습니다. 그 후 자매는 다시 어느 집을 찾아갔는데, 어리석은 집주인은 두 명 모두를 기쁘게 맞아들였다고 합니다.

공덕천과 흑암천이 바로 ‘지혜로운 자는 고(苦)를 버리기 위해 락(樂)도 같이 버리고, 어리석은 자는 락(樂)을 취하기 위해 고(苦)도 같이 받아들인다’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이야기입니다. 괴로움을 없애고 해탈을 하고자 하면 고와 락을 같이 버려야 해요. 욕망을 놓아 버리면 고와 락이 같이 없어집니다. 따라서 해탈의 경지는 즐거운 상태가 아니라 고요 적정의 상태입니다. 힌두교에서 말하는 해탈은 즐거움만 있는 경지를 말하는데 이는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질문자도 인간관계를 정리하려면 그로 인한 장점이나 이익도 같이 버려야 합니다. 유지하고 싶다면 그로 인한 불편함이나 손해도 같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혼을 하고자 하는데 위자료 때문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혼을 하자니 재산이 아깝고, 그렇다고 계속 같이 살자니 꼴 보기가 싫은 거죠. 그럴 때 남편이나 아내를 내보내려고 하면 재산을 붙여서 같이 내보내야 합니다. 인생의 고뇌는 늘 이렇습니다. 아이들과의 문제도 마찬가지예요. 집에서 같이 살자니 꼴 보기가 싫고, 내보내려니 하루 이틀 지나면 또 보고 싶어서 문제죠.

수행이란 둘 다 쫓아내는 길만 있는 게 아닙니다. 락(樂)을 즐기고 싶다면 고(苦)를 기꺼이 받는 자세도 수행입니다. 인연을 지었으면 과보를 기꺼이 받는 거예요. 돈을 빌렸을 때 기꺼이 이자를 쳐서 갚을 생각을 하면 괴롭지 않습니다. 빌릴 때는 좋아해 놓고 막상 갚을 때가 돼서 울고 불고 괴롭다고 한탄하면 안 됩니다.

지금 질문자가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자기중심적으로 이해관계를 따지기 때문입니다. 손해가 싫으면 이익도 버려야 하고, 이익이 좋으면 손해를 기꺼이 감수해야 해요.”

“네. 스님의 말씀을 통해 제가 꾀를 내고 욕심을 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즐거움을 좇고자 한다면 괴로움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도 새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근본불교 과목에서 배운 불교교리에 대한 질문이 많았습니다.

  •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분들 중에 타인에게 맞추기만 해야 하다 보니 나를 잃어버리고 가면 우울증에 걸려 괴로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이 흔히 자아를 찾고 싶다고 하는데요.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와 어떻게 다를까요?
  • 천일결사 기도 경전 내용 중에 지혜로운 사람은 죽은 후에 좋은 경지가 기다리고, 어리석은 사람은 죽은 후에 나쁜 경지가 기다리고 있다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이 내용과 ‘무아’는 모순 아닌가요?
  • 대승불교의 ‘오온개공’과 소승불교의 ‘무아’가 같은 의미인 것 같은데 왜 대승불교는 소승불교를 비판했나요?
  • 초기 불교 경전에도, 12연기 속에도 윤회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윤회란 항상 존재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가능할 텐데, 그럼 ‘무아’와 모순되는 것 아닌가요?

질문에 대해 답변을 마치자 약속한 두 시간을 훌쩍 넘겼습니다. 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왜 위대한지, 그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이 왜 일어나는지 마음의 작용에 대해 깊이 탐구하셨고, 그 원리를 깨달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음 생에 좋은 곳에 태어나기 위해 공부한다면 그 가르침이 위대하다고 할 게 뭐가 있겠어요? 설마 부처님께서 다음 생에 좋은 곳에 태어나기 위해 수행을 하셨을까요?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이라면 ‘왕의 지위를 한번 얻어 볼까’ 하는 마음으로 수행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미 가지고 있던 왕의 지위도 버리고 6년의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으셨잖아요. 그 깨달음이 과연 ‘어떻게 하면 더 큰 나라의 왕이 될 수 있는가?’ 이런 내용일까요?

부처님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수행을 한 뒤 왕이 되는 그런 삶을 사신 분이 아니에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가지고 있던 왕위도 버리고, 사랑하는 가족도 버리고, 마음의 번뇌를 해결하고자 왕궁을 떠나신 분입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으신 다음에 더 큰 부자가 되고 더 큰 나라의 왕이 되셨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깨달은 후에도 평생 걸식하시고, 평생 다 떨어진 옷을 입고, 평생 나무 밑에서 잠을 자는 생활을 하셨어요. 그러면서도 왕을 깨우치고, 바라문을 깨우치고, 부자들을 깨우치고,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한 법문을 계속하셨습니다.

평범한 사람 같으면 부자들을 깨우친 다음에 부자들에게 돈을 얻어서 좋은 집을 짓고, 왕을 깨우친 다음에 왕에게 좋은 음식과 좋은 옷을 얻어서 생활을 했을지 모르죠. 그런데 부처님은 그런 걸 준다고 해도 안 받으셨습니다. 수행에 도움이 안 되는 물건은 일절 받는 법이 없으셨어요.

붓다의 제자라면 이런 부처님의 삶을 성찰해봐야 합니다. 복을 빌어서 무엇을 이루겠다는 자세는 버려야 해요. 지금보다 잘 살고 싶어서 복을 빌게 되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과 복을 구하는 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가지고 있던 복(福)조차 버린 부처님한테 왜 자꾸 복을 달라고 해요?

윤회를 자꾸 이야기하는 것도 결국 복을 받고자 하는 겁니다. 이번 생에 좋은 일을 하면 다음 생에 좋은 곳에 태어나고, 이번 생에 나쁜 일을 하면 다음 생에 나쁜 곳에 태어난다는 것도 다 이번 생에 좋은 일을 하면 다음 생에 복을 받는다는 말이잖아요. 이건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논리이지, 부처님이 말씀하신 인연과보(因緣果報)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인과응보의 논리는 이미 대부분의 종교가 말하고 있잖아요.

복을 빌어서 부자가 되고 지위가 높아지는 것은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 위대한 불법(佛法)을 결혼 상대를 구하는데 쓰려고 하고, 자식 시험 붙는 데 쓰려고 하고, 선거에 당선되는 데 쓰려고 하고, 몸 건강해지는 데 쓰려고 하는 건 깨달음의 내용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해탈의 영약을 왜 그렇게 자질구레한 것에 사용하려고 해요? (웃음)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라도 내가 모르면 잘 사용할 수 없습니다. 불법(佛法)을 엉뚱한 곳에 쓰려는 사람들을 욕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좋은 가르침을 전혀 엉뚱한 곳에 적용을 하니 안타까울 뿐이죠. 장자 소요유 편에 손이 트지 않게 하는 약을 겨울에 빨래할 때 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쟁에 사용해서 승리한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어진 것을 어떻게 쓰는지는 각자의 자유예요. 다만 정토불교대학에 와서 불법(佛法)을 배울 때는 그래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가를 발휘할 수 있도록 잘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적용하든지 그건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다만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왕위도 버리고 가족도 떠나셨다는 점, 그리고 깨달음을 얻으신 후에도 평생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의 모습으로 지냈다는 점의 의미를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진 것 하나 없이 살면서도 부처님은 왕을 가르쳤고, 부자들을 가르쳤어요. 왕들이 부처님을 찾아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가르침을 청했고, 부자들이 부처님을 찾아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평범한 사람 같으면 가르침을 주고 난 다음 한 번쯤은 그들에게 뭔가를 요구할 법도 합니다. 부처님은 법문이 끝나고 그들에게 뭔가를 달라고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오히려 그들이 준다고 해도 안 받으셨습니다.

왕들과 부자들이 늘 부처님을 찾아가서 괴로움을 호소했지, 부처님이 그들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한 적이 없어요. 산 위에 남아있는 길들도 전부 왕들이 부처님을 찾아뵙고자 필요해서 닦은 길들입니다. 부처님의 유적도 부처님이 살아계실 당시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모두 후대의 왕들이 부처님의 삶과 가르침에 감동을 해서 세운 것입니다. 부처님은 절 하나 지은 것이 없고, 삶의 징표 하나 남기지 않고 살다가 가셨어요. 제자들과 후대 사람들이 그나마 남은 흔적을 찾아서 부처님을 기린 겁니다. 부처님이 떠난 후, 제자들은 진흙 위에 남은 부처님의 발자국이 발견하고 그걸 잘 보관해 두고 숭배하는 문화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시신을 화장하고 남은 유골이 아직 전해지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떠나실 때 남은 건 유골과 발자국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면 아무런 흔적 없이 살다가 가신 걸 알 수 있어요.

이렇게 보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왕이 되어야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왕이 아닌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붓다가 될 수 없어요. 부처님께서는 걸식을 하고, 남이 버린 옷을 입고, 처마 밑에서 자는 사람도 붓다가 될 수 있다는 걸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먹고, 입고, 자는 걸 보면 부처님이 살다 가신 조건보다 훨씬 좋습니다.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이유가 적어도 좋은 것을 못 먹고, 좋은 옷을 못 입고, 좋은 집에 못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깨달음이 아닌 다른 욕망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 길을 가지 못하는 거죠.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참으로 위대한 지혜를 깨달으셨는데 어쩌다가 오늘날 불교는 그 참모습을 잃게 되었는지를 배우는 과목이 ‘불교의 변천사’입니다. 여러분이 다음에 배울 과목이자 불교대학의 마지막 과정이죠. 이 변천사에서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불교의 모습을 되찾고자 어떠한 노력들을 했는지도 같이 배울 거예요. 내용이 조금 어려울 수 있지만 잘 배우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이 변천사가 어렵다고 해서 내년부터는 불교대학 교과 과정에서 변천사는 빠질 예정입니다. 여러분이 불교의 변천사를 배우는 마지막 불교대학생이 될 거예요.” (웃음)

스님은 불교대학 학생들이 마지막 과목까지 잘 공부하길 당부하며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점심 식사 후 오후에는 산 윗밭으로 올라가 주변에 나뭇가지들을 정비했습니다. 낫으로 잔가지 치는 일을 한 후 과일나무를 심기 위해 지형을 답사하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내일은 마산과 경주에서 거사님들이 와서 하루 종일 산 윗밭 주변을 함께 정리하고, 저녁에는 온라인 일요명상을 생방송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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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효신

감사합니다.

2022-01-22 05:41:08

굴뚝연기

[복을 빌어서 부자가 되고 지위가 높아지는 것은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이유가 적어도 좋은 것을 못 먹고, 좋은 옷을 못 입고, 좋은 집에 못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깨달음이 아닌 다른 욕망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 길을 가지 못하는 거죠.]저도,힘들게한다는이유들로 친구들과 절교한것에 죄책감이ㅠ

2022-01-20 01:24:37

ㅎㅎ

망설이는건 이익이 있기 때문이군.. 감사합니다

2022-01-19 15:5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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