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1.13 정토경전대학 육조단경 강의
“제 마음이 심히 불안합니다, 달마 대사의 대답은?”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치고 운동장으로 나오니 팽나무 너머에서 해가 떠올랐습니다.

봄이나 여름이나 가을이나 함께 지나온 잎들이 겨울 찬바람에 남김없이 떨어지자 빈 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이 들어왔습니다.

오늘은 정토경전대학 학생들을 위해 오전과 저녁에 연이어 두 번의 강의를 하는 날입니다. 오전 10시 정각에 육조단경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경전대학 학생들은 그동안 반야심경과 금강경 수업을 통해 대승불교의 핵심 가르침에 대한 공부를 마쳤습니다. 오늘부터는 선불교의 핵심 가르침이 담긴 육조단경에 대해 배울 차례입니다. 육조단경은 총 2강으로 진행되는데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입니다.

스님은 먼저 선불교의 발생 배경에 대해 설명하면서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처음으로 불교를 전한 달마 대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선불교의 핵심 가르침인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보리달마(Bodhidharma) 대사는 남인도 향지국의 왕자로 태어나 출가해서 반야다라를 스승으로 법을 계승했습니다. 기록에 따라 정확한 연도는 다르지만 6세기 초에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달마대사는 중국 남쪽 광주에 도착했는데 그 당시 이 지역은 양나라 땅이었습니다. 양나라를 다스리던 무제는 인도에서 고승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마대사를 왕궁으로 초대했어요. 양 무제는 불교를 옹호했고 불사를 많이 해서 불교를 부흥시킨 황제였습니다. 그래서 양나라 사람들은 그를 ‘중국의 전륜성왕 또는 중국의 아쇼카왕’이라고 칭송했어요. 양 무제는 달마대사를 친견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일생동안 수백 개의 절과 탑을 세웠고, 수 천 명의 스님을 양성했으며, 수 만권의 경전을 번역하고 인쇄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불사를 한 공덕이 얼마나 되겠소?’

황제가 이렇게 물었으면, ‘공덕이 한량없습니다’라는 대답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달마대사는 이렇게 답했어요.

‘공덕이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공덕이 없다고 했을까요? 이렇게 지은 공덕은 인연과보로 언젠가는 사라지는 유루복(有漏福)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공덕은 깨달음의 지혜로 얻는 다함이 없는 무루복(無漏福)이에요. 달마대사는 모양과 형상에 집착한 불사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양 무제는 기분이 좀 나빴겠죠. 자신은 불교에 엄청난 지원을 했는데 복이랄 게 없다고 하니까요. 양 무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부처님 가르침에서 가장 성스러운 진리는 무엇입니까?’

부처님 가르침의 요지가 뭐냐는 질문입니다. 달마대사가 말했습니다.

‘성스럽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양 무제가 기가 차서 다시 물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너는 누구냐?’

그러자 달마대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不識, 불식)

우리말로는 ‘모르겠다’라고 번역하지만 ‘생각으로 헤아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양무제가 화가 나서 대사를 죽이려고 칼을 빼들었어요. 대신들은 외국의 고승을 해치면 황제의 명예에 흠이 된다며 겨우 황제를 말렸습니다.

양 무제와 달마대사가 나눈 대화가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이런 대화 속에 ‘선의 요지’가 들어있어요. 선불교는 국왕의 지원으로 불사를 중심으로 융성했던 불교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이었다는 얘기죠.

달마대사는 양 무제를 만나고 ‘이곳에는 불법이 없구나!’라고 탄식하며 양자강을 건너 북쪽으로 갔다고 합니다. 북쪽에는 북위라는 나라가 있었어요. 달마대사는 소림사로 가서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늘 벽만 보고 있었다고 해서 면벽 9년이라고도 해요. 그렇게 침묵하고 있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달마대사를 찾아왔습니다. ‘달마 권법을 가르쳐 달라’, ‘범어를 가르쳐 달라’, ‘경전을 가르쳐 달라’ 이런 식으로 뭔가 얻으려고 찾아온 사람들이 전부였어요.

그러나 이 법은 구할래야 구할 수 없고 얻을래야 얻을 수 없습니다. 달마대사가 9년 동안 침묵하고 있으니까 얻으려고 왔던 수많은 사람들이 다 떠나버렸어요. 얻으려고 왔는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니까 다 가버린 거죠. 그런데 오직 혜가라는 승려가 9년을 말없이 같이 살기만 했습니다. 대사가 참선을 하면 같이 참선을 하고, 일을 하면 같이 일하고, 밥을 먹으면 같이 밥을 먹으면서 아무 얘기도 안 했어요. 그래서 어느 날 대사가 입을 열었습니다.

‘너는 왜 왔느냐? 무엇을 얻으러 온 것이냐?’

‘저는 안심입명(安身立命)의 도를 얻으러 왔습니다.’

‘얻는다’라고 표현했지만 다른 게 아니라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싶어서 왔다는 거예요. 대사가 다시 물었습니다.

‘네 마음이 어떤데?’

‘제 마음이 심히 불안합니다.’

‘그래? 그럼 불안한 마음을 이리 내놔라. 내가 편안하게 해 줄게.’

불안한 마음을 내놓으려면 우선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경전을 뒤진다고 찾아지는 것도 아니고, 인도에 간다고 찾아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자기 마음을 살펴야죠. 한참 뒤에 혜가 스님이 말했습니다.

‘내놓을래야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내 이미 네 마음을 편안하게 했도다.’

이 문답에서 우리는 ‘눈을 밖으로 돌리지 말라’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법은 마음밖에 있는 게 아니에요. 직지인심(直指人心)이란 자기 마음을 직시하라는 뜻입니다. 불안한 걸 내놓으라고 해서 살펴보니 불안하다고 할 실체가 없었어요. 달마 대사가 ‘내가 네 마음을 편안하게 했도다’라고 해서 혜가 스님이 편안해진 게 아닙니다. 자기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렸을 때 이미 마음이 편해진 거예요. 이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합니다.

수행이란 생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뭔가 지식을 쌓아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요. 수행은 학문이 아니라 체험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수행을 중시했던 부처님의 가르침은 복을 빌고 선행을 닦는 종교로 발전했습니다. 또 학문적으로 탐구하는 철학으로도 발전했어요. 그러나 아무리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철학적 지식을 많이 알아도 괴로움이 없어지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리에 치우친 교종을 비판하며 등장한 선(禪)마저도 시간이 지나면서 학문적이고 이론적인 쪽으로 기울었어요.

그래서 정토회는 ‘불교의 본래 가르침인 수행으로 돌아가자’라는 종지를 새롭게 세웠습니다.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으로, 대승의 원래 정신인 보살도로, 선의 원래 정신인 수행으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수행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를 믿으라는 것도 아니고, 철학을 공부하자는 것도 아니에요. 내가 직접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수행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루 일 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인도에서는 걸식이 보편적 문화입니다. 수행자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늘 옮겨 다니는 유행(遊行)을 했어요. 불교가 중국에 전파된 이후 선종 제4대 도신대사에 이르러서 한 곳에 머무르면서 수행하는 문화가 형성됐습니다.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인도 문화에 따르면 수행자는 집착을 놓아야 하기 때문에 어떤 일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숲 속이나 산속에 머무르면서 수행을 하려면 음식을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농사짓는 것과 마음을 닦는 선이 둘이 아니라는 선농일치(禪農一致)의 가르침이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이렇게 선불교에는 ‘하루 일 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라는 노동과 수행이 일치하는 전통이 생겼고, 한국 불교에도 그런 전통이 전해졌습니다. 오늘날 절에서 하는 발우공양은 절 안에서 밥을 지어먹는 대신 얻어먹는 걸식의 형식을 빌려서 하는 공양 방법이에요.

대중의 보시에 의하지 않고 자기가 먹을 걸 자기가 생산하니까 선불교는 자립할 수 있었습니다. 정토회에서도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가능하면 스스로 자립하는 선의 전통을 지키려고 해요. 이런 선의 전통은 테라밧다 불교의 전통과는 많이 다릅니다. 테라밧다 스님들은 일체 손도 까딱 안 합니다.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 문화 때문이에요. 본래 부처님께서는 집착하지 않기 위해 걸식을 하라고 가르쳤는데 지금은 마치 양반처럼 어떤 일도 안 하려고 합니다. 반대로 자급자족을 하기 위해 일을 하다 보면 세속살이가 되기 쉬운 위험이 있어요.

선종과 달리 교종은 국왕이나 부자들의 보시를 받아 화려하게 융성했어요. 그러나 국가가 불교를 탄압하자 교종은 일순간에 무너졌습니다. 반면 선사들은 크게 지장을 받지 않았어요. 원래 숲 속이나 지방에서 자급자족하고 살았으니까 불교를 탄압하든 하지 않든 크게 구애받을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나중에는 오히려 선종이 불교의 주류가 됐어요.”

강의는 두 시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스님은 다음 시간에는 달마 대사 이후 육조 혜능대사가 어떻게 출가해서 깨달음을 얻고 법을 전했는지, 후대에 선불교가 어떻게 전해졌는지 강의할 예정이라고 소개한 후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점심 이후에는 손님들이 연이어 두북 수련원을 찾아왔습니다. 오후 내내 미팅을 계속해서 가졌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 7시 30분부터는 육조단경 2강 수업이 이어졌습니다. 정토경전대학 학생들이 모두 화상회의 방에 입장한 가운데 스님의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은 선불교의 핵심 가르침이 담긴 육조단경의 법문을 한 혜능 대사가 어떻게 출가를 했고, 어떻게 법을 증득했고, 어떻게 법을 전했는지, 전 과정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졌습니다.

그런 후 육조단경에 있는 문구들을 읽고 스님이 직접 그 뜻을 해설해 주었습니다.

“사념(邪念)일 때 번뇌가 이는 것이며
정념(正念)이면 번뇌가 가시는지라.
사(邪)와 정(正) 모두 여의어 쓰지 않을 때
생멸 없는 청정지에 이르렀더라.”

이어서 그 뜻을 해설해 주었습니다.

“육조단경은 무념의 종지(宗旨)를 가르칩니다. 삿된 생각이나 바른 생각이나 다 생각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생각을 탁 놓고 무념(無念)이 되도록 하는 가르침이에요. 삿된 생각은 말할 것도 없고, 바른 생각도 번뇌일 뿐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일반적으로 배워온 내용은 나쁜 생각을 버리고 좋은 생각을 갖고, 나쁜 행동은 하지 말고 좋은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나쁘고 좋은 것이 어젯밤에 꾼 꿈과 같아요. ‘나쁘다’, ‘좋다’ 하는 생각 자체를 넘어서 버려야 됩니다. 이것이 무념의 가르침입니다.”

계속해서 다음 구절을 읽었습니다.

“보리는 본래로 이 자성이니

스님의 해설이 이어졌습니다.

“보리란 본래 자기의 성품인데 한 생각 일으키면 그건 벌써 망념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명상을 할 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명상을 할 때 제가 늘 강조하잖아요. 몸도 멈추고, 생각도 멈춰라. 일으키는 생각이 다 망상이니 거기에 의미를 두지 마라. 망상이 끊임없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내버려 둬라. 망상은 꿈같고 안개 같고 아지랑이 같은 것이니 오직 호흡에만 깨어 있어라. 호흡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호흡을 느껴라. 모든 생각을 여의여야 한다. 이 구절은 그런 뜻입니다.”

그냥 읽으면 무슨 뜻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면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육조단경의 마지막 문구는 후대에 법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동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수평적으로도 널리 전해져야 하지만 수직적으로 후대 사람들에게도 잘 전해지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먼 미래를 향해서 법을 이어가려면

“전법은 수평적으로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법을 전하는 것과 수직적으로 먼 미래를 향해서 법을 이어가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수평적 전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평적으로 널리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직적으로 저 미래를 향해 법을 전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명예에 집착하거나 서로 이익을 다퉈서 근본 법이 훼손되면 대부분 법이 유지되지 않고 얼마 못 가서 대가 끊어져 버립니다. 정토회가 아무리 불사를 많이 하고, 많은 사람들이 정토회 회원이 되고, 정토회의 사회적 영향력이 아무리 커져도, 근본을 놓쳐버리게 되면 이 법을 먼 미래로 전하지 못하고 30년도 못 가서 흐지부지 끊어져 버립니다.

당시에는 혜능을 따르는 사람이 소수였고, 신수를 따르는 사람은 백 배도 넘었습니다. 그런데 100년을 못 가서 혜능의 문하에는 기라성 같은 제자의 제자가 나왔고, 신수의 문하에는 오히려 대가 끊어져 버렸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혜능이 더 훌륭한 사람이 돼버린 거예요. 당시에 혜능과 신수는 비교가 안 될 수준이었습니다. 혜능은 스승으로부터 계도받지 못하고 밤에 도망을 가야 했어요.

여러분들이 집중해야 할 일은 옆으로 전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옆으로 전법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법을 미래로 이어갈 수 있도록 법의 종지를 지키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세상과 어느 정도 타협해서 가도 되지만, 저는 그렇게만 가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어떻든 이 법의 종지를 지켜서 미래로 이어가도록 하는 것이 저에게는 더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이것이 선종의 가르침입니다.

2600년 전 아주 오래된 새길

선종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법은 모양과 형체가 없는 것이니까 가장 근본 알맹이는 유지하되 그 나라에 맞게 잘 포장해서 전법을 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선불교는 인도적인 문화를 걷어내고 동아시아적인 문화를 잘 수용해서 토착화했다는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선불교가 부처님을 중심으로 하기보다 조사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불법의 근본을 오히려 잃어버린 게 아니냐고 비판합니다. 부처님은 세상의 평화를 말씀하시고, 계급의 차별을 부정하고, 여성의 출가를 허용하고, 많은 중생을 교화하는 일을 했는데, 선불교는 너무 자신들의 깨달음에만 치우쳐서 세상의 리더십과 중생의 교화력을 잃어버렸다는 거죠. 한마디로 오늘날 환경 문제, 평화 문제, 불평등 문제, 인권침해 문제 등에 대해 무관심하고, 사회적인 실천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붓다는 힘으로 투쟁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사회문제의 모순을 꿰뚫어 보고 구체적인 실천을 했습니다. 그에 반해 선불교는 마음에 대해서는 굉장히 꿰뚫어 보는 눈이 있는데, 세상을 보는 눈은 거의 없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선불교의 장점은 살리고, 부족한 점은 보완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부처님의 일생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깊이 공부해야 해요. 부처님의 인격 속에서 우리가 가야 할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일생을 기록한 사람들이 인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속에는 인도의 문화가 너무 많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굉장히 심플하게 법을 가르쳤지만, 그것을 기록한 사람들이 인도 전통의 윤회 사상과 인과응보 사상을 그 속에 담아서 너무나 신비주의적으로 부처님을 묘사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선불교가 이런 신비주의적인 요소들을 과감하게 걷어내 버렸다는 것은 코페르니쿠스적인 파격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정토회도 가능한 갈등을 안 일으키고 가려고 종교의식도 조금 수용하는 등 현실과 타협한 측면들이 있는데, 선불교는 적당하게 타협해서 가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어요.

멀리 가려면 법에 맞게 근본적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대중에게 널리 전하려면 현실을 좀 수용하면서 가야 해요. 이 두 가지를 중도적으로 통합하는 것이 과제입니다. 너무 근본적으로만 가면 세상에서 고립이 되고, 너무 세상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다 보면 세속화되어 근본을 놓쳐버립니다. 이 두 가지를 적절히 조화시켜 나가야 해요.

그래서 가능하면 세상에 법을 전하는 일은 스님이 하지 말고 여러분들이 해야 돼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것도 다 스님한테 맡기려고 하잖아요. 세상 속에 사는 여러분들이 전법을 해야 대중의 눈높이에 맞는 전법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가능하면 먼 미래에도 이 법이 꽃피울 수 있도록 해나가는 역할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해요. 이렇게 서로 역할 분담을 좀 해야 합니다.

한 마디를 하더라도 네 소리를 해봐라

불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지금까지 두 번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제1의 불교 혁명은 대승불교의 혁명입니다. 대승불교의 혁명이 담긴 경전이 바로 금강경과 반야심경입니다. 그런데 대승불교가 중국에 전해지고 나서 또다시 학문화되고 철학화되니까 새로운 혁명이 또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2의 불교 혁명인 선불교입니다. 지금 시대는 제3의 불교 혁명이 일어날 시기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혼란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 문명까지 다 감안해서 인간이 가야 할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제시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경전의 내용을 듣고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자기화하고 경험하는 것은 더욱더 중요합니다. 선불교는 특히 이것을 더 강조했습니다. 스승의 물음에 경전을 읽고 대답하면 ‘그건 책에 있는 얘기다. 한 마디를 하더라도 네 소리를 해봐라’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선불교의 요지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명상하고 나서 ‘다리가 아팠어요’, ‘졸렸어요’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책에 있는 소리가 아니고 모두 자기가 경험한 소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무리 그런 얘기를 해도 스님은 잘했다고 칭찬하는 거예요. 자기가 경험한 소리를 하니까요. 그런데 어디 가서 들은 소리를 하면 ‘망상 피웠네’ 이럽니다. 선불교는 특히 자신이 직접 체험하는 것을 중요시한다는 것을 한 번 더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밤 10시가 다 되어서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오전과 저녁, 두 번의 강의를 통해 경전대학 학생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체험하고, 자기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불법의 핵심을 자상하게 설명해 준 스님에게 모두 삼배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공동체 법사단과 만일결사 회향 기념으로 진행되는 정토불교대학 준비를 위해 온라인으로 회의를 하고, 저녁에는 금요 즉문즉설 강의를 생방송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51

0/200

진여심

감사합니다

2022-04-19 05:55:02

김희복

스님 감사합니다~()

2022-01-29 15:28:25

ㅎㅎ

내 소리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2-01-19 14:4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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