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1.9 영어 즉문즉설, 2차 만일준비위원회 간담회, 성도재일 철야정진
“아내가 교회에 기부하는 걸 싫어해요”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오전 8시부터 외국인을 위한 즉문즉설을 영어 통역으로 진행했습니다. 오늘도 전 세계에서 300여 명의 외국인들이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새해가 시작되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세는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스님은 올 한 해 어떤 마음으로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지 이야기했습니다.

“2022년 새해를 맞이하고 처음으로 여러분을 만났네요. 지난 2년 동안 우리는 코로나19바이러스로 인해서 많은 불편을 겪었습니다. 지금도 그 영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처음 코로나19바이러스가 나타났을 때는 바이러스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안일하게 대응해서 급속도로 확산이 됐어요. 그러자 두려움에 빠진 각국에서는 거리두기를 강화했고 사람들은 불편을 겪어야 했습니다. 시행착오를 거쳐서 이제 우리는 코로나19바이러스를 조심해야 하지만 그렇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완전 종식이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백신을 100% 접종하기도 어렵고, 또 변종이 계속 나오기 때문입니다.

백신을 맞으면 중증으로 악화되는 걸 줄일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백신을 계속 접종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한편 위중한 환자를 위한 치료약을 개발해야 합니다. 이제 코로나19바이러스를 특별한 전염병이 아니라 일반적인 전염병이라고 인식을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코로나19바이러스가 있는 가운데 점점 일상성을 회복해 나가야 해요. 그렇다고 완전히 옛날처럼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조심하면서 일상을 회복해나가야 될 것 같아요.

앞으로 또 어떤 변종이 나타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인류가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힘이 점점 커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올해가 지나면 일상이 많이 회복될 것 같습니다. 물론 옛날과는 좀 다른 일상이겠죠. 새해에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도 일상을 회복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세 명의 외국인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교회에 기부를 하는 것에 대해 아내가 반대를 하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아내가 교회에 기부하는 걸 싫어해요

“My relationship with my wife is really good. We probably agree on 99% of things. And so obviously my question is about the 1% today. My problem stems from because of her upbringing, my wife tends to be very very frugal. And usually that’s a really great thing but there’s one thing that’s bothering me which is that in our life together especially when we’re raising our kids, there was a church that we attended that was very important to me because I share those values from that church. And now that my kids have grown especially during the pandemic I have not been attending that church very often. And yet I still would like to continue to give an annual donation to that church because it means a lot for me in my history and also I really strongly believe in the social justice and racial justice work that this church is doing. Because we no longer attend the church on a regular basis, my wife repeatedly asks me to stop donating to that church. And that kind of pains me because I still feel very strong social connection tot he people who go to that church. And so I was wondering if you have any suggestions for me of how I can handle this?
(저는 아내와 관계는 매우 좋습니다. 대부분 99%의 일들은 서로 동의합니다. 오늘 제 질문은 1%에 관한 것입니다. 제 문제는 아내의 자란 환경에서 유래하는데 아내는 매우 검소합니다. 보통은 매우 좋은 자질이지만 제가 신경 쓰이는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저희가 아이를 키울 때, 저에게 매우 중요하고 좋은 가치들을 배운 교회가 있었습니다. 제 아이들이 성장하고 팬데믹 동안 교회를 자주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전히 교회에 연간 기부를 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제 역사에서 유의미한 일이고, 이 교회가 하고 있는 사회정의, 인종적 정의에 관한 일을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더 이상 교회를 주기적으로 방문하지 않기 때문에 아내는 기부를 중단하라고 합니다. 저는 교인들과 여전히 강한 교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중단하기는 어려워요. 이 문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제안해주실 수 있을까요?)

“부인에게 이렇게 제안을 해보세요.

‘내가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기부하는 게 좋겠어요, 교회는 잘 안 가면서 기부라도 하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 둘 중에 부인이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해보세요.”

“That sounds a good solution. but she’s likely to be unhappy with those choices.”
(좋은 해법인 것 같은데요. 아내는 그 선택지들에 만족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내가 교회도 안 나가면서 기부한다고 문제 제기를 하니까 교회에 열심히 나가면서 기부하겠다고 말해 보라는 거예요. 그러면 아내가 뭐라고 할 것 같아요?”

“I think that she truly would like me to stop being involved in that church and start attending more completely with Jungto.”
(아내는 제가 그 교회에 관여하는 것을 그만두고, 정토회에 더 참여할 것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은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갚아라’라고 가르치셨어요. 아내에게 이렇게 제안해보면 좋겠습니다.

‘법륜스님에게 물어보니 정토회에 기부할 돈을 당분간 교회에 기부하라고 하셨어요. 부처님은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갚으라고 가르치셨대요. 여보, 내가 아이들을 키울 때 교회에 은혜를 많이 입었으니까 아직 좀 더 갚아야 할 것 같아요.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줘요.’

“I actually told her that I’d like to make an equal donation to Jungto but for her she wanted all the money to Jungto, not split half and half.”
(제가 정토회에도 동일하게 연간 기부를 하겠다고 말했는데 아내는 교회에 반, 정토회에 반이 아니라 전액을 정토회에 기부하기를 원합니다.)

“교회에서 그 돈을 잘못 쓰고 있다면 기부를 하지 말아야 할지 고려해야 하지만 잘 쓰인다면 교회에 기부를 해도 좋습니다. 어디든지 잘 쓰이는 곳에 기부를 하면 돼요. 사람들이 보기에는 교회와 절이 무척 달라 보이지만 지구 밖에서 보면 교회니 절이니 하는 것은 다 인류 안에 있는 서로 다른 모양일 뿐입니다. 그러니 당분간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교회에 계속 기부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내가 불만이 있으면 스님이 정토회에서 감사히 받은 걸로 하겠다고 전해주세요.”

“Thank you very much for your comment. I appreciate.” (답변 감사드립니다.)

“원래 질문자가 살아온 습관대로라면 교회에 출석하고 기부도 해야 할 거예요. 정토회를 만났으니 기부는 교회에 하고, 마음공부는 정토회에서 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나눠서 하다가 나중에 하나로 통일해도 괜찮아요.

질문자와 대화를 하다 보니 제 친구인 신부님과의 대화가 생각이 납니다. 매년 크리스마스에는 제가 신부님이 계신 성당을 방문하고, 매년 부처님오신날에는 신부님이 정토회를 방문하는 사이예요. 정토회 회원 중에는 과거에 천주교 신자였던 분들도 제법 있습니다. 그래서 한 해는 성당에 다녔던 정토회 회원들과 크리스마스에 성당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신부님께 이렇게 소개를 했어요.

‘당신이 잃어버린 어린양들을 제가 데리고 왔습니다.’

그랬더니 신부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재미있었습니다.

‘어린양들은 스님이 잘 보호해주시고 십일조는 성당에 내도록 하면 되겠습니다.’ (웃음)

지금 질문자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신부님이 돈을 밝힌다는 뜻이 아니에요. 신부님과 저는 사람들이 성당에 가느냐, 절에 가느냐를 특별히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겁니다. 제가 성당에 가서 설교를 하면 신부님이 농담을 해요.

‘제가 설교할 때는 박수를 적게 치더니 왜 스님한테 많이 치나요?’

그러면 저도 웃으면서 이야기합니다.

‘제가 설교를 더 잘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맨날 먹는 떡보다 새로운 떡이 별미라서 그렇죠. 너무 질투하지 마세요.’

질문자도 이렇게 조금 가볍게 아내와 대화를 해보면 좋겠습니다.”(웃음)

“My wife values your sentiment so hopefully she will take that to heart. But what would happen if there were different question that you weren’t here to arbitrate and how can I still be comfortable and keep my marriage strong despite the fact that we have those very different feelings?”
(아내는 스님의 의견을 존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스님이 중재해줄 수 없는 다른 문제가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고 아내와 서로 다른 감정을 느끼더라도 제가 어떻게 계속 편안할 수 있고 결혼생활을 튼튼하게 유지할 수 있을까요?)

“아내가 만약 정토회 회원이라면, 질문자의 요구 정도는 수용을 해야 정토회 회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부부의 경우라면 의견이 다를 때는 합의를 해야 해요. 누가 옳고 그른 것을 따질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면 서로 의견이 다를 뿐입니다. 합의를 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교회에 기부하는 문제를 예를 들어 볼게요.

첫째, 대화를 해서 의견을 맞추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내가 질문자의 의견을 수용해서 교회에 계속 기부를 하든지 아니면 질문자가 아내의 의견을 수용해서 기부를 그만두든지 하나를 결정하는 거예요. 둘째, 각각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내는 정토회에 기부하고 질문자는 교회에 기부하는 거예요. 셋째, 순차적으로 합의를 보는 겁니다. 앞으로 3년이면 3년, 5년이면 5년까지만 교회에 기부하겠다고 약속하는 거예요.

이렇게 서로 대화를 통해서 합의점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질문자는 지금 나쁜 일을 하려는 게 아니라 좋은 일을 하려는 거잖아요. 이것 때문에 아내와 다툴 이유는 없습니다. 아내의 주장이 완강하다면 질문자가 양보해도 돼요. 교회에 기부하나 아내에게 기부하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큰 차이가 없을 겁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남편과 3년 넘게 극도의 이혼 분쟁 소송과 양육권 조정을 해왔습니다. 남편은 항상 협박과 불평 메시지를 보냅니다. 이 상황에서 5살 아들을 어떻게 키워나가야 할까요?
  • 붓다는 2600년 전에 상가의 화합을 위한 6가지 원칙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고, 제 삶에서 갈등이나 언쟁이 있을 때 그것을 적용하고 싶습니다. 갈등은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좋을까요?

인생의 괴로움을 어떻게 없애나갈 것인지 방법을 찾아 나가 보는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생방송을 마치고 방송실을 나오자 정토회 2차 만일결사준비위원회(이하 만준위)를 맡고 있는 구성원들이 스님에게 새해 인사를 했습니다. 만준위는 그동안 스님과 화상회의만 계속 해왔는데 새해를 맞이해 스님과 만남의 시간을 갖고자 코로나 검사를 모두 받은 후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삼배로 스님에게 인사를 드린 후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만준위에서는 정토회의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아홉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연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연구하는 과정에서 궁금했던 점들을 모아서 한 명씩 차례대로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환경 운동의 역사, 기아 질병 문맹의 해결 과정, 인간의 정신세계 연구 결과, 붓다 담마의 역사 등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그중 한 명은 앞으로 천 년 후에 정토회가 어떻게 평가될 것인지에 대해 스님의 생각을 여쭈었습니다.

천 년 뒤 정토회는 어떻게 평가될까요?

“2차 만일결사 30년을 설계하며 부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2600년 동안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천 년 뒤 정토회가 너무 궁금해졌습니다. 과연 ‘정토회’라는 이름이라도 남아있을까, 남아있다면 어떻게 평가될까, 정토회가 지금 하고 있는 운동은 문명 전환 운동의 시작점이 될 수 있을까, 무엇을 기준으로 그 가능성을 점검해봐야 할까요?”

“그건 역사가 결정하지, 우리가 결정할 수 없어요. 우리는 기존의 사상으로는 지금 당면한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시대는 마치 부처님 당시나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와 같다고 말할 수 있어요. 기존에 있던 사상과 철학으로 이 세상을 설명하기에는 모순이 너무 많고, 그렇다고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이념이나 사상이 출현한 것도 아니니까 문제 해결은 말할 것도 없죠.

이런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주장을 합니다. 기존의 권위가 무너지니까 새로운 주장이 계속 제기가 되는 거예요. 이런 신흥 사상이 10년, 20년 사이에 나타나는 게 아니라 어쩌면 수백 년 사이에 계속 나타납니다. 부처님이 사셨던 시대도 브라만 문명의 쇠퇴기였습니다.

부처님의 출현 이전부터 부처님의 출현 이후까지 길게는 500년, 짧게는 300년 정도의 혼란기를 겪은 거예요. 브라만 문명의 쇠퇴기에는 부처님만 출현한 게 아닙니다. 기존의 브라만들도 권위를 갖고 주장했고, 브라만 중에서도 자신을 반성하고 새로운 시도를 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주류 계층인 브라만이 아닌 쪽에서 신흥 사상가들도 많이 출현했습니다. 경전에 나오는 육사외도뿐만 아니라 62가지 견해, 360가지 견해가 있었다고 해요. 그만큼 새로운 주장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수많은 사상들이 오래 지속되지 못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 수행적 관점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사상을 조금 개선한 정도로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상이 오랫동안 지속되기 위해서는 뚜렷한 자기 정체성이 있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둘째, 뚜렷한 자기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끌고 갈 수 있는 리더가 양성이 됐느냐가 중요합니다. 신흥 사상이 대부분 당대에 끝나버린 이유는 그 사상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리더십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대부분 선대의 명예와 재산을 계승해서 종교의식을 행하면서 돈을 벌어 유지하는 방식으로 흘러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제자들아, 너희들은 재산의 상속자가 되지 말고 법의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 어느 정도 확산성을 가져야 합니다. 지속성은 있는데 확산성이 없으면 소수에게만 전해지다가 고립이 됩니다. 물론 선불교처럼 소수로 계속 내려가다가 6대에 와서 확산성을 가진 경우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초기에 확산성을 갖는 경우 대부분 오래 유지되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내부에 뚜렷한 정체성을 못 갖춘 상태에서 확산성을 갖게 되면 확산이 거꾸로 독이 돼서 대중 추수주의로 가버리기 때문입니다.

건물이 없어도 정토회는 오래 유지될 수 있어요. 하지만 정토회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면 건물은 하나의 재물에 불가하게 됩니다. 이 말은 건물을 짓지 말자는 뜻이 아니라 정토회의 정체성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에요.

그런 측면에서 정토회는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지속성을 가지려면 출가 수행자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정토회는 현재 재가 수행자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고 있어요. 출가 수행자는 죽으나 사나 출가해서 사니까 이걸 계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재가 수행자는 개인이 아무리 정체성을 잘 유지해도 그것을 자식한테까지 연결시키지는 못해요. 당시에 위대하다고 여겨졌던 재가 수행자가 상가의 중심이 되지 못한 이유는 당대에 끝나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출가 수행자들은 가정을 갖고 있지 않으니까 정체성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출가 수행자가 상가의 중심이었다고 말할 수 없어요. 아마 정토회와 비슷했을 겁니다. 그런데 출가 수행자는 정체성을 지속시켜 나가는 힘이 있었고, 재가 수행자는 개인으로 끝나버리고 그걸 지속시키는 힘이 없었던 거죠.

일본에서는 재가자가 중심이 된 불교 운동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단체들은 교단의 중심을 대부분 자식이 대를 이어 가죠. 그런데 정토회는 재가 수행자 중심의 단체라고 표명을 하지 않아요. 뿐만 아니라 출가자와 재가자를 구분하지도 않습니다. 출가 중심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족이나 혈연 중심도 아니기 때문에 만약 그 장점이 살아난다면 독특한 창조성이 발휘될 거예요. 그렇지 않고 어느 하나도 지속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면 붕괴가 될 위험이 높고요.

어떻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고 역사가 평가하는 거예요. 얼마나 오래 지속되느냐를 봐야 평가가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조대사를 훌륭하게 평가하잖아요. 그러나 당대에 육조대사는 이름도 없는 사람이었고, 신수대사는 훨씬 더 알려진 지도자였습니다. 신수의 제자들은 갈수록 세력이 약해졌고, 육조의 제자들은 점점 번창하니까 결국 육조가 처음부터 위대한 사람이었다고 평가되는 겁니다.

그것처럼 부처님이 위대한 게 아니라 부처님 제자들, 그 제자들의 제자들이 훌륭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부처님이 훌륭해진 거예요. 용성조사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얘기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용성조사 밑의 제자들이 안 받쳐주면 용성조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 모릅니다.

그러니 천년 후에 정토회가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지금 논할 필요가 없어요. 정토회가 천년 후에도 유지가 되려면, 현재 정토회가 세운 방침이 천년 동안 지속될 수 있는 정체성을 갖고 있는지, 그 정체성을 천년 동안 유지해 나갈 내부의 힘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현실을 수용하는 이유가 보완적인가 vs 타협적인가

쉽게 말해 이제 고작 30년을 유지해 왔는데 처음 세운 원칙이 지켜지고 있는지를 보면 돼요. 현실을 감안해서 이거 바꾸고 저거 바꾸고 하면서 대중의 요구를 점점 수용하게 되는데, 그것이 보완적인지 타협적인지에 따라서 운명이 달라지는 겁니다. 보완적이면 정체성이 더욱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고, 타협적이면 벌써 붕괴로 간다고 보면 돼요.

그 선택은 점쟁이가 하는 게 아니고 바로 여러분들이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타협적으로 가면 붕괴되는 속도가 빨라질 거예요. 불교의 역사에서 대중부와 상좌부를 비교해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중부가 상좌부에 반대해서 먼저 분열을 시작했잖아요. 그런데 역사를 보면 대중부에서 분열이 계속 일어나게 됩니다. 한 번 분열된 쪽에서 분열이 더 빨리 일어나는 거예요. 반면에 상좌부는 100년 뒤에나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타협을 해서 폭을 넓히고 수용을 해주면 생활이 더 편해지니까 타협을 한 쪽이 더 오랫동안 유지될 것 같고, 타협을 안 해서 생활이 불편한 쪽이 빨리 붕괴될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타협한 쪽에서 또 타협안을 내게 됩니다. 한 가지를 변화시키면 또 다른 변화가 따라와요. 즉문즉설에서 부모가 이혼을 하면 자식이 이혼할 확률이 높다고 얘기하듯이 한 번 타협을 한 집단은 그로 인해 타협을 계속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꾸 개선을 하게 되죠.

그렇다고 해서 시대의 변화를 보완하지 않으면 고지식한 쪽으로 흘러갈 위험도 있습니다. 부족한 점을 보완해 가는 쪽으로 타협을 했다면 정체성은 더 강화될 수 있어요. 그러나 보완이 아니라 욕구를 수용하는 쪽으로 갔다면 얼마 안 가서 또 다른 요구가 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정체성을 잃고 붕괴될 수 있습니다.

고지식한 게 아니라 현실을 수용한 것인지, 정체성을 잃을 것인지, 그 평가는 역사가 지나 봐야 알 수 있어요. 지금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만준위 위원들은 그동안 막혀 있던 의문점을 많이 해결했다며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만준위 위원들은 스님이 사준 칼국수를 한 그릇 씩 먹고 다 함께 천룡사로 향했고, 스님은 엊그제 하려다가 만 마당에 디딤돌을 놓는 일을 오후 내내 했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 8시 30분부터는 일요명상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날을 기념하는 성도재일 전날 저녁입니다. 부처님은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오롯이 정진을 한 끝에 새벽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듯이 오늘은 일요 명상 시청자 모두가 부처님처럼 밤새 정진을 해서 부처님의 깨달음이 어떠했는지 체험해 보기로 했습니다.

정진을 시작하기에 앞서 스님은 부처님이 태어나서 출가하고 6년 고행을 한 후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주욱 설명해 주었습니다.

“부처님은 지금부터 2600년 전 인도의 북쪽 히말라야 산기슭 지금의 네팔 땅,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에서 태어났습니다. 12살 때 농경제에 참여했다가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을 보고 ‘왜 하나가 살기 위해서 하나가 죽어야 할까?’ 하는 큰 의문을 가졌어요. 그리고 농부가 헐벗은 몸으로 쟁기질을 하는 초라한 모습, 그리고 농부가 땅을 갈기 위해서 소를 채찍으로 때리는 모습, 소가 거품을 물고 헐떡이는 모습, 이런 고통스러운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왜 하나가 행복하기 위해서 다른 하나가 불행해야 할까?

농부가 편리하게 땅을 갈기 위해서 소는 고된 일을 해야 했습니다. 태자가 왕궁에서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는 농부가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왜 하나가 행복하기 위해서 다른 하나가 불행해야 할까? 다 함께 행복한 길은 없을까?'

이런 의문이 들어서 선생님과 부모님에게 여쭤봤지만 아무도 이에 대한 시원한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남을 이겨서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만 가르쳐주었지 함께 행복해지는 길에 대해서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고민하고 연구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는 이 일을 계기로 세상의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풀리지 않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성문을 나가서 세상을 둘러보니까 늙어서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냥 버려져 있었습니다. 병이 들었는 데도 보호받지 못하고, 죽은 시신마저도 수습되지 않고 그냥 버려져 있었습니다.

‘세상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울까?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면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사는 것도 신의 뜻일까? 신에게 빌면 모든 소원이 성취된다고 했는데, 왜 저들은 열심히 빌었는 데도 불구하고 신은 돌보지 않을까?’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고뇌에 빠진 그는 어느 날 출가 수행자를 만났습니다. 매우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두 눈은 빛났고 아무런 고뇌가 없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출가 수행자에게 경배하면서 '나도 저 사람처럼 출가를 해야겠다' 하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왕은 아들이 왕이 되지 못해서 이런 번민을 한다고 생각해서 한 지역을 맡겼습니다. 그가 한 지역을 통치할 책임자가 되어 그 지역에 갔을 때, 그 지역 주민들은 고통스러워하고 있었고 가축들도 헐떡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축들의 고삐를 끊어서 놓아주고, 노예들도 다 풀어 주었습니다.

고통 없이 함께 행복해지는 길은 어떤 길일까? 그의 사색은 점점 더 깊어만 갔습니다. 여러 번 부모에게 요청했지만 승낙이 되지 않았고, 부모는 '세상의 쾌락을 알지 못해서 저렇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결혼을 시켰습니다. 하지만 어떤 것도 그의 의문을 잠재우지 못했습니다. 결국 망설임 속에서 10여 년이 흘렀고 결국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들이 태어났기 때문에 이제 집을 떠나도 되겠다고 생각하고, 부모의 승낙을 받지 않고 밤에 몰래 왕궁을 떠났습니다. 왕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머리를 자르고 헌 옷을 입고 스스로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수행자가 되면 금방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런 숲 속에서 살아 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힘들었고, 후회하는 마음도 일어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질타했습니다.

‘출가를 하고 싶어서 10년 동안이나 노력을 해놓고 정작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니까 오히려 후회를 하고 있구나!’

그래서 그는 스승을 찾아 나섰고, 스승을 통해서 더 깊은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스승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 경지가 완전한 해탈은 아니었기 때문에 또 다른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또 그 스승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그것 또한 자신이 갖는 의문을 완전히 해소해 주지 못했습니다. 더 이상 찾아갈 스승이 없게 되자 이제 남은 과제는 스스로 찾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고행자들이 수행하는 숲 속으로 들어가서 6년 동안 용맹정진을 했습니다. 그는 먹지도, 입지도, 자지도 않는다고 할 정도로 극심한 고행을 했습니다. 그의 몸은 마치 해골바가지에 가죽을 씌워놓은 것처럼 여위어 갔지만 깨달음은 얻어지지 않았습니다.

욕망을 따르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는 새로운 길을 찾아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봤습니다. 왕자로 있을 때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서 그 만족감으로 즐거움을 얻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욕망 충족은 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출가한 후에는 욕망을 무조건 부정하고 극심한 고행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욕망을 따르지도 않고, 욕망을 거부하지도 않는,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욕망을 욕망으로 알아차리는 제3의 길이었습니다. 욕망을 따라가면 과보가 따르고, 욕망을 억제하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러나 욕망을 다만 욕망인 줄 알아차리면 과보도 받지 않고 스트레스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중도’라고 합니다.

그는 몸과 마음의 긴장을 모두 풀었습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증상을 다만 증상으로 알 뿐이었습니다. 몸과 마음의 욕구에도 의미를 두지 않고, 생각에도 끌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는 이 거대한 욕망이 거대한 관념으로부터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거대한 관념의 장벽이 무너지자 그는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나무 한 그루가 자라듯이, 다람쥐 한 마리가 뛰어다니듯이, 그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고 아무런 긴장도 없고 그냥 자연스러운 상태를 경험했습니다. 아무런 애쓸 것도 없이 그냥 편안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났다!'

과거로부터 전승된 윤리나 도덕, 관습이나 습관, 경전이나 계율도 모두 하나의 관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좋은 법을 누가 알 수 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왜냐하면 이 법은 지금까지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경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좋은 법을 한때 자신을 가르쳐주었던 스승들에게 먼저 전해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옛날에 자신과 함께 수행하던 도반들을 생각했어요. 그는 그들에게 이 좋은 법을 나눠주기 위해 그들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 후 그는 평생 동안 교화의 길, 전법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가 마지막 수행정진 끝에 깨달음에 이른 그 경험을 함께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부처님처럼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한 상태에서 아무것에도 의미를 두지 말고 그냥 호흡만 알아차려 봅니다.”

스님의 법문을 듣고 나니 일요 명상 참가자 모두가 마치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깨달음을 얻기 전 마지막 정진을 시작하는 부처님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어서 스님의 명상 안내가 시작되었습니다.

“다만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나도 모르게 어딘가에 의미를 두고 끌려갔다면 '끌려갔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옵니다. 다만 해볼 뿐입니다. 잘 된다, 안 된다, 이런 의미를 일절 부여하지 않습니다. 농구 연습을 할 때 공이 골에 들어가든 들어가지 않든 관계없이 다시 받아서 던지듯이 다만 공을 던질 뿐입니다.”

탁! 탁! 탁!

죽비 소리와 함께 30분 동안 명상을 한 후 10분 동안 포행을 하고, 다시 30분 동안 명상을 한 후 20분 동안 휴식을 했습니다. 이 과정을 두 번 해보았습니다.


어느덧 시계는 밤 12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다들 명상 잘하셨습니까? 예년에는 밤새도록 명상을 하기도 했는데 올해는 자정까지만 하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들은 내일 아침 직장에 출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4시간 연속해서 통역해 준 제이슨 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운동장으로 나오니 어두운 하늘에 새벽별이 반짝였습니다.

내일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날을 기념하는 성도재일입니다. 오전에 성도재일 기념 법회를 한 후 오후에는 정토불교대학 교과 개편 회의를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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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크샤

법륜스님께 한의사 김상수 원장이 쓴 코로나 미스테리.오로지 선생의 백신주의보란 책을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코로나는 자체가 허구이며 백신은 맞을 필요도 없는 국제제약자본의 플랜데믹입니다.

2022-02-26 19:13:09

김영수

목포에서 건설인력으로 두아들 키워요
잘부탁 드려요
저도 부처가 되고싶어요~~~

2022-01-18 00:19:49

ㅎㅎ

모든 괴로움은 관념에서 일어나는구나.. 감사합니다

2022-01-17 11: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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