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11.29 전법활동가 법회, 기획위원회 회의, 공동체 서원행자 공청회
“자원봉사도 칭찬이라는 대가를 받는 노동이 아닐까요?”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전법활동가 법회를 생방송하는 날입니다. 오전 10시 정각에 삼귀의 반야심경을 봉독 했습니다. 화상회의 방에 400여 명의 전법활동가들이 자리한 가운데 유튜브 생중계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지난 전국 모둠장 회의에서 의결한 결과에 대해 정토회 대표님이 발표를 하고 나서 스님이 법문을 했습니다. 지난 일주일 간 두북 수련원에서 있었던 일을 우선 소개했습니다.

“이곳 두북 수련원은 며칠째 영하의 날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밖에 있는 수도꼭지가 얼고, 배추나 무, 상추의 잎은 코팅한 것처럼 바싹바싹 얼었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제가 생활한 영상을 잠깐 함께 보고 대화하겠습니다.”

영상을 함께 본 후 법문을 이어나갔습니다.

“저나 공동체 대중들이 절이나 공동체를 이루고 살면 대중이 보시하고 봉사해 주시잖아요. 제가 살아보니까 이렇게 십 년, 이십 년 살면 사람들이 와서 봉사해주거나 보시해주는 걸 너무 당연하게 여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시와 봉사를 받으며 사는 생활은 마치 옛날에 귀족들이 일꾼들의 도움을 당연히 여기는 것처럼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수행자에 걸맞지 않은 세속적인 생활이거든요. 부처님께서 수행하실 때 사천왕이 옷을 빨아준다고 하니까 ‘수행자는 자기 일은 직접 한다’며 거절하신 일화가 있습니다.

수행자가 늘 경계하며 살아야 할 것

물론 건물 공사와 같은 전문적인 일은 저희가 못 합니다. 그러나 먹고 입고 자는 생활에 직결되는 일은 대중의 보시를 받지 않고 저희가 직접 해결해서 살아야 한다는 원칙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엌을 비롯해 저희가 사는 생활공간에는 대중이 와서 봉사하지 못하게 하고 있어요. 서울에 있는 정토사회문화회관에도 월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을 고용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나무 아래에서 생활하신 부처님의 원칙을 백 퍼센트 다 지키지는 못하지만 그 기본정신은 지켜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 들어와서 사는 사람들도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있지만, 대중의 보시에 안주해서는 안 되고 다른 단체에도 보시하고 봉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받는 것이 습관화될 소지가 있거든요. 그래서 어제는 저희 공동체 대중 모두가 직접 농사지은 것을 지체 부자유 사람들이 거주하는 애광원에 보시하고 나눠주는 봉사를 하고 왔습니다. 이렇게 서로 주고받는 연습을 해야지,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면 받는 것이 습관이 돼서 고마운 줄도 모르게 됩니다. 수행자는 이런 것을 늘 경계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어서 전국 모둠장 의결 결과에 대해 다시 한번 스님이 자세히 설명을 해준 후 질문을 받았습니다. 의결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질문이 없자 사전에 신청한 질문자로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시간 강박과 심리적인 예민함이 있는데 전법활동 교육을 받고 모둠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통일의병 등 여러 가지 교육과 회의 등으로 압박감에 시달리다 공황 발작이 왔습니다. 선출된 소임이다 보니 그만두지도 못하고 전혀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스님은 질문자를 위해 답변을 해준 후 더 이상 추가 질문이 없자 법회를 마쳤습니다. 법회가 끝나고 전법활동가들은 모둠별로 온라인 공간에 모여 행복학교 홍보를 위한 모둠활동을 했습니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 1시 30분부터는 정토회 기획위원회 회의에 온라인으로 참석했습니다. 기획위원회 산하에 각 분과에서 그동안 의논해 온 내용을 발표하고, 2차 만일결사를 준비하기 위해 분과를 어떻게 조정할지 토론한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곧이어 오후 4시부터는 공동체 서원행자들과 2차 만일결사 준비와 관련하여 공청회를 했습니다. 지난여름에 안거 이후 2차 만일결사를 준비하기 위한 여러 가지 위원회를 신설했습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2차 만일 준비 위원회와 사회활동 위원회에서 그동안 토론한 내용을 발표하고 스님에게 궁금한 점을 질문했습니다.

먼저 2차 만일결사 준비 위원회에서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자원봉사도 칭찬이라는 대가를 받는 노동이 아닐까요?

“그동안 정토회에서는 수행자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자원봉사를 꼽았습니다. 그러나 자원봉사 역시 크게 보면 칭찬이나 인정 등 대가를 받는 노동자의 부속적 개념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습니다. 노동의 개념을 완전히 새롭게 해석해서 미래 사회를 예견한다고 한다면, 수행자에게는 물질적 대가를 받지 않는다는 부분이 핵심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 사람’이라는 점이 조금 더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부분이 아닐까 싶어요. 앞으로 정토회가 미래 문명을 만들어가는 새로운 인간상으로 ‘수행자’를 모델로 제시하고자 할 때 자원봉사는 어떤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일까요?”

“일단 ‘주인과 종’이라는 이분법적인 분류의 틀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먼 옛날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원시적으로 살 때는 누구나 다 주인이었어요. 그런데 계급사회가 발생하고부터는 주인과 종이 생겨났습니다.

종 중에서 가장 열악한 조건이 노예라고 말할 수 있어요. 신분적으로 묶여 있고, 자기가 생산한 걸 다 빼앗기고, 물건처럼 사고 팔렸으며, 생존도 어려웠습니다. 생존이 열악한 조건에 있고, 정신적으로도 종속돼 있고, 차별을 받으며 폭력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이 노예였습니다.

이처럼 아주 열악한 조건에 있다가 다음 단계에 와서 조금 발전한 게 중세 시대의 농노입니다. 발전이라고는 하지만 농노 역시 아직 신분과 땅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농노는 신분적으로 노예보다는 좀 나았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 시대의 소작농들도 거의 농노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자본주의 시대에 오면서 농노들이 돈을 주고 신분을 사서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신분적으로는 조금 자유로워졌어요. 그러나 역시 돈에 묶여 있다는 측면에서는 여전히 묶여 있다고 볼 수 있죠.

노동자는 돈에 묶여 있다 보니 ‘일은 적게 하고 돈은 많이 버는 게 노동의 해방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완전한 자유인, 즉 ‘주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이 바로 자원봉사입니다. 돈에 묶이든, 명예에 묶이든, 묶이는 것은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원봉사라는 것은 묶임이 없다고 볼 수 있어요. 즉, 자원봉사야말로 주인이 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원봉사 역시 칭찬에 묶여 있거나 보이지 않는 대가에 묶여 있다면 심리적으로는 아직도 완전한 자유인이 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에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 여러분이 하고 있는 자원봉사는 강제 노역이나 돈을 받는 노동과는 다르지만, 칭찬에 묶여 있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강제 노역은 돈을 안 주고, 노동은 돈을 주지만, 자원봉사자들에게는 돈 대신 칭찬이나 명예를 준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자원봉사를 한다고 해도 아직 완전히 해방됐다고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자발적인 봉사를 하고 있다면 주인의 반열로 올라서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주인이 되는 길

노동의 해방은 노동 조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이 놀이화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노동이 수행이 되는 겁니다. 이처럼 수행을 통해 우리는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수가 있습니다. 재능을 팔아서 유무형의 대가를 받아 사는 방식으로는 자기실현을 할 수 없어요. 몸을 움직이는 것은 자기 삶을 실현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다시 말해 자연으로부터 인간으로 갔다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오는 것과 다름없다고 볼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가 된다는 것은 인간의 자기실현에 있어서 마지막 단계에 이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늘 여러분에게 수도 없이 하는 얘기가 이거예요.

‘우리는 좋은 일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고 수행이 목표입니다.’

좋은 일을 하더라도 나를 희생해가며 좋은 일을 하면 반드시 나중에 후회하게 됩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대가가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배신감마저 느끼게 돼요. 이것은 아직 주인이 못 된 자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뭘 하든 수행자가 되는 것이 더 근본이 돼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일에 빠지게 되면 일을 하는 노동자나 다름없어집니다. 게다가 월급도 못 받는 노동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강제 노역이나 다름없는 행위를 하는 셈이 돼요. 그런 측면에서 미래 문명을 이끌어갈 새로운 인간상이라고 하면 최소한 자기의 재능을 팔아서 먹고사는 노동자의 범위는 벗어나야 합니다. 형식적인 자원봉사가 아니라 정말 자발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봉사를 해야 해요.

자원봉사자들에게 약간의 마일리지나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은 우리가 가고자 하는 목표에서 보면 수정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참여시키기 위해서 도입하는 겁니다.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에서도 인센티브 제공을 두고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수정주의 논쟁이 나왔잖아요. 우리가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면 순수성을 유지해야 하지만, 그래도 많은 대중이 참여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이루어져야 해요. 순수성만 유지하고 대중이 참여하지 않으면 고립이 되고, 대중은 많이 참여하는데 목표성을 놓쳐버리면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여기서 ‘중도(中道)’라는 길이 나오는 겁니다. 목표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어떤 단계적인 절차를 밟아서 목표에 이르는 거죠. ‘법화경’을 보면 가다가 중간에 힘들어서 더는 안 가겠다고 하니까 환상의 성을 만들어서 거기로 갔다가 다시 간다는 비유가 나오잖아요. 그것처럼 정토회가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감안한 정책을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일 것인지를 정해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대중들한테 지금 제안해 보는 방안이 봉사 마일리지 적립입니다. 일의 대가로 현금을 주는 것은 세상의 노동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그 대신에 마일리지를 주는 겁니다. 마일리지를 적립해서 내부 상품과 교환할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마일리지가 하나의 화폐 역할을 하겠죠. 이렇게 하면 조금 더 이 운동을 확산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일리지가 단순히 교환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실현의 역할을 하도록 하려면 더 많은 연구를 해야 합니다.

수행자는 ‘자기실현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에 중점을 둬야 합니다. 물질 사회에서는 물질에 초점을 두니까 물질적으로 빈곤한 사람은 피폐해지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은 물질 향유가 지나쳐서 부패하게 돼요. 그래서 양쪽 다 인간성을 상실하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인간성을 회복하려면 피폐해도 안 되고, 부패해도 안 됩니다. 너무 금욕으로 가서도 안 되고, 너무 쾌락으로 가서도 안 돼요. 이게 부처님이 말하는 중도(中道)입니다. 중도는 현실의 조건에 따라 조금씩 기준이 바뀝니다.

그런 면에서 노동자를 규정했듯이 수행자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철학적으로 정의할 필요가 있어요. 주인과 종 중에서 종에 속하되 종 중에서도 한 단계 높은 종, 즉 노동자 다음의 종이 될 것인가? 아니면 종으로부터 해방되어 주인으로서 규정을 받을 것인가? 이런 철학적 문제가 앞으로 정의돼야 합니다.

수행자에 대한 철학적 정의를 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그에 따르는 훈련 프로그램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이것이 개인의 경험에 끝나지 않고 사회적 경험이 되어 확산과 보편화의 길을 갈 수 있겠죠.

지금까지처럼 개인에게 의지하고 개인별로 체험하는 방식은 확산 속도도 늦고, 확산이 이루어지더라도 편차가 너무 심해지고, 그러다 보니 나중에 가서 엉뚱한 방향으로 가버릴 수도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대신에 논리화하고 철학으로 정립할 경우 관념화가 되거나 지식이 되어 버리는 부작용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인간의 뇌 구조가 그렇게 생겼기 때문에 늘 경계하고 알아차림을 하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수행이라는 것은 알아차림 속에서 계속 자기 업그레이드를 해야 합니다. 사회 속의 확산을 위해서 대중성을 받아들이면 결국은 세속적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약점이 있고, 근본을 유지하려고 하면 결국 사회와 유리되고 고립주의로 갈 수밖에 없어요. 이 두 가지 사이를 어떻게 중도적으로 나아갈 것인지가 관건입니다.

부처님 당대 같으면 부처님이 그 중도적인 부분을 조율하셨어요. 예를 들어 부처님은 걸식을 하셨잖아요. 초대받아서 먹거나, 밥을 해 먹는 것이 아니라, 걸식하는 방식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걸식하는 것으로 나아갔음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초대받는 걸 허용했습니다. 옷도 분소의를 입는 걸 원칙으로 하되, 분소의가 없을 때는 새 옷을 입어도 되도록 허용했어요. 무조건 새 옷을 입어도 좋다고 허용하면 세속으로 빠지고, 새 옷을 입으면 절대로 안 된다고 하면 고행주의로 빠지게 됩니다.

알아차림이 온전하면 남이 볼 때는 모순처럼 보이더라도 균형을 잡아갈 수 있어요.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균형을 잡기가 어렵습니다. 정토회도 지금 일시적으로나마 이러한 균형을 잡으려고 대중부와 법사단을 따로 두고, 의사결정은 대중부에 우선권을 주더라도 반드시 법사단의 심사를 하도록 하는 등 여러 방법을 시도해 보고 있는 겁니다.

결국 법사단과 대중부 사이에서 균형을 어떻게 잡을 거냐 하는 문제입니다. 대중은 자기가 처한 현실을 중요시해서 보고, 법사단은 방향성을 우선해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아래와 위로 의사결정과 승인이라는 제도를 둬서 지도부와 대중 사이, 그리고 법사단과 대중부 사이에 균형을 잡아나가도록 한 겁니다. 확산과 순수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적절히 유지해 나가야 한다는 과제가 있기 때문에 자꾸 이런 제도가 새로 도입되는 거예요. 정토회는 확산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시스템을 자꾸 바꾸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사회활동위원회에서 궁금한 점을 질문한 후 마지막으로 다음 공청회 일정과 진행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 후 공청회를 마쳤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에는 여러 가지 업무들을 처리한 후 하루 일정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JTS 창고에 보관 중인 담요, 목도리, 침구류를 부산불교복지협의회 소속 100여 개 단체에 기증하기 위해 물품 전달식을 하고, 비닐하우스에 생강을 수확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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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정

칭찬이나 인정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은 괴로움의 씨앗이 사라지는 인간다운 삶의 길을 알게해주셔서 고맙습니다.

2021-12-09 15:57:10

월광

결국 법사단과 대중부 사이에서 균형을 어떻게 잡을 거냐 하는 문제입니다. 대중은 자기가 처한 현실을 중요시해서 보고, 법사단은 방향성을 우선해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아래와 위로 의사결정과 승인이라는 제도를 둬서 지도부와 대중 사이, 그리고 법사단과 대중부 사이에 균형을 잡아나가도록 한 겁니다. 고맙습니다. 잘 새기겠습니다.

2021-12-07 00:40:44

임효신

감사합니다.

2021-12-04 10:3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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