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3.4. 정토대전 회의, 법사단회의, 만일준비위원회 회의
“유튜브와 게임에 빠져 사는 20대 아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하루 종일 세 번의 회의를 연이어 했습니다. 문경 수련원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더니 어느덧 구름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습니다.

정토대전 회의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치고, 아침 8시에는 정토대전 중 경전 모음집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공동체 법사단과 회의를 했습니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부처님의 다양한 교화 사례를 준비해 와서 어떤 경전의 내용을 선택할 것인지, 내용 상 어떤 부분이 보완이 되어야 할지 스님이 점검을 해주었습니다.

먼저 출처가 되는 경전을 무엇으로 하면 좋을지 스님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증일아함 같은 경전은 한역본이어서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경전은 아니에요. 이미 스리랑카에서 번역한 테라바다 불교 경전이 300년 전에 영국으로 넘어가서 영어로 번역이 되어 있고, 국제 사회에서는 그걸로 통용이 되고 있어요. 앞으로 우리가 세계 불교인들과 교류를 하게 된다면, 중국인들보다는 주로 동남아, 미국, 유럽에 있는 불교인들과 교류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테라바다 불교 경전인 니까야를 출처로 해야 나중에 영어로 번역하기가 쉽습니다.”

이어서 각자 준비해 온 교화 사례를 발표했습니다. 먼저 주리반특이 깨달은 이야기, 앙굴리말라가 깨달은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경전마다 스토리가 조금씩 달라서 어느 경전을 선택할지 토론이 많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화 사례를 읽고 나서 스님은 우리가 왜 경전 속 근거들을 찾으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정토대전을 만드는 이유는 정토대전을 읽어서 교훈을 얻도록 한다는 목적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큰 목적은 앞으로 정토회에서 법사가 된 사람들이 법문을 할 때 그 법문이 경전 속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믿음을 사람들에게 주기 위함입니다.

정토대전을 만들고자 하는 이유

여러분들은 스님의 법문을 듣고 각각의 사례는 잘 알고 있지만 그 내용이 어느 경전에 담겨 있는지는 전혀 모르잖아요. 물론 내 수행을 하는 데는 그런 출처를 몰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불교인들과 교류를 하다 보면 ‘그 이야기는 어느 경전에 있는 것입니까?’ 이렇게 사람들이 반드시 묻게 되어 있어요. 그럴 때 대답을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 우리 어머니 세대들은 신심은 컸지만 불교가 무엇인지 질문하면 대답을 못했기 때문에 무시를 당하기가 쉬웠어요. 그러나 현대와 같이 지식인 사회에서는 정확한 근거를 모르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정토회 법사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믿음과 실천만 갖고 사는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만나 보니 기본적인 사상 정리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구나’

사람들이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최소한의 지식은 알고 있어야 해요. 선불교도 처음에는 직접 대화하고 깨닫는 방식으로 전법이 되어갔는데, 점점 세력이 커지면서 전통 불교와 경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불교가 아닌 것을 자꾸 이야기한다’ 이렇게 사이비라는 제기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 근거를 자꾸 덧붙이게 되었고, 나중에는 기존의 불교보다 더 난해한 교리를 갖게 되었죠. 육조단경도 처음에는 심플했는데, 맨 뒤쪽으로 넘어가면 엄청나게 어려운 내용이 나오거든요.

다음 세대를 위해 디딤돌을 놓는 마음으로

이런 현실을 감안해서 우리 1세대가 2세대를 위해서 미리 준비를 해놓아야 합니다. 미리 준비해 놓지 않으면 결국 2세대가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그들이 또 이 내용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 만들면 더 복잡하게 만들 위험이 높습니다. 1세대인 우리가 기본적인 골격을 만들어 놓아야 후세대에 너무 복잡하게 만드는 것을 막아줄 수 있어요.

물론 정토회가 큰 발전을 하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나 점점 영향력이 커지면 엄청난 정통성 논쟁에 휘말리게 돼요. 그러면 자연적으로 경전 내용에 대해 연구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런 제안을 저에게 자주 합니다.

‘정토행자 중에 몇 명을 스리랑카나 미얀마에 유학을 보내서 테라바다 불교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로 키워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정통성 논쟁이 될 때 대응을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아무 문제가 없지만,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때 가서 준비하면 너무 늦다는 거예요. 지금부터 사람을 키워서 30년 뒤를 준비해야 한다는 제안이에요. 그렇게까지는 안 하더라도 지금 우리들이 후세대를 위해 이렇게 기초적인 정토대전이라도 만들어놓자는 겁니다.”

이어서 여러 가지 교화 사례를 함께 읽고 스님에게 편집 방향에 대한 조언을 계속 들었습니다. 오후 2시 40분에 회의를 마쳤습니다.

법사단 회의

잠시 휴식을 하고 오후 3시에는 공동체 법사단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서울 정토회관에 있는 유수 스님과 상향 법사님, 미륵사에 있는 향덕 법사님은 화상으로 회의에 참여했습니다.

먼저 스님이 오늘 주요하게 논의해야 할 내용을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온라인 정토회로의 전환이 대중부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데, 법사단에서 조금 보완을 해주면 좋을 것 같아요. 특히 지부별 으뜸절에 대한 운영 원칙이 세워져야 하고, 그에 따른 법사단 운영 방안도 마련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공동체는 아직 어떻게 개편할지 논의가 부족한 것 같아요. 공동체도 대중부와 같은 방식으로 재편을 하려면 기존과는 모둠 편성도 달라져야 하고, 운영 방식도 달라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공동체 성원들과도 공청회를 한 번 해야 할 것 같아요.”

이어서 준비된 안건에 대해 하나씩 토론을 했습니다. 이야기해야 할 안건이 많아서 저녁 6시 20분에 회의를 마쳤습니다.

만일준비위원회 회의

저녁 7시 30분에는 2차 만일준비위원회와 화상회의를 했습니다.

“지난번 스님께서 제안해주신 내용을 바탕으로 각 지회 구성을 수정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자문받고 싶은 사항이 있어요. 바로 질문을 드릴까요?”

“네, 이야기해 보세요.”

“스님,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즉문즉설을 매주 진행할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4월부터 바로 시작하게 되는 걸까요?”

“즉문즉설을 매주 진행하는 것이 좋을지, 격주로 하는 게 좋을지, 매월 한 번 진행하는 것이 좋을지, 이런 문제에 대해 누군가가 조금 더 연구를 해주시면 좋겠어요. 일단 저는 4월 23일부터 매주 즉문즉설이 가능하도록 날짜는 비워 두었어요.”

“네, 빨리 TF팀을 마련해서 제안을 올리겠습니다.”

이 외에도 온라인 정토회 새로운 임원 선거 방식, 정토사회문화회관 운영 방향, 지회별 지원담당 배정 여부 등 만준위 위원들은 궁금한 내용을 질문했습니다. 쟁점사항에 대해 스님이 간명하게 답변해 주었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저녁 9시에 회의를 끝내고, 하루 일정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불교사상팀, 사회사상팀과 정토대전 편찬을 위해 회의하고, 저녁에는 금요 정기법회를 생방송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었으므로 지난 2월 26일 정기법회에서 있었던 즉문즉설 한 편을 소개하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유튜브와 게임에 빠져 사는 20대 아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경계성 지능장애가 있고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진단을 받은 20대 아들이 집에서 게임과 유튜브에 빠져 있습니다. 이렇게 아들을 집에 데리고 사는 것이 아들에게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서 한 달간 기한을 줄 테니 집을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있는 아들을 내보내는 것이 맞는지, 집을 나간 아들이 혹시나 잘못되지 않을지 걱정이 됩니다.”

“닭이 병아리를 키울 때 사람이 가까이 가면 어미 닭은 도망가지 않고 사람한테 덤빕니다. 자기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서 막대기로 때려도 절대 도망을 안 갑니다. 그냥 맞고 덤비죠. 그런 성질이 있어야 종을 유지하고 번식시킬 수가 있어요. 위험에 처했을 때 어미들이 다 새끼를 버리고 도망가 버리면 새끼를 보호할 수가 없죠.

닭이 원래 그렇게 도망가지 않고 사람에게 덤비는 동물은 아닙니다. 병아리를 안 키울 때는 사람이 가까이 가면 도망가 버립니다. 사람이 가까이 가면 닭이 도망가는 것은 자기 생명을 보호하려는 본능입니다. 자기를 보호하고자 하는 개체 보존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병아리가 있을 때는 완전히 다릅니다. 개체 보존의 본능보다 종족보존의 본능이 더 강하게 작용합니다. 그래야 종족이 보존되니까요.

그런데 어느 정도 병아리가 자라서 노란 솜털이 빠지고 붉은 깃털이 올라오면, 아직 성체가 안 됐어도 어미닭은 더 이상 새끼를 보호하지 않습니다. 조금 컸어도 똑같은 자기 새끼인데 그때는 사람이 병아리를 잡아도 어미닭이 덤비지 않아요. 어느 정도 병아리가 커서 닭의 모양을 갖추면 어미도 새끼도 각각 개체 보존의 본능만 작용합니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하듯이 전혀 상관을 안 합니다. 모든 짐승이 새끼가 어릴 때는 위험에 처했을 때 죽기 살기로 새끼를 보호합니다. 그러나 새끼가 어느 정도 크면 각자 자기 살 길을 찾아서 도망갑니다. 새끼가 완전히 성체로 안 컸어도, 사람으로 치면 사춘기를 넘었다면, 살쾡이가 와서 새끼를 물어도 어미가 목숨 걸고 싸우지는 않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아이가 어릴 때는 어떤 위험이 있어도 아이를 돌봐야 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어느 정도 크면 돌보지 않아도 돼요. 아이가 3살 때까지는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 무조건 아이를 돌봐야 합니다. 성인이 될 때까지는 계속 돌보아야 해요. 그런데 아이가 성인이 되면 각자 독립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에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병입니다.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야 할 시기에 외면하는 것도 병이고, 독립해야 할 시기에 집착하고 과잉보호하는 것도 병입니다. 이런 병에 걸리면 부모가 자식을 미워하거나 혹은 자식이 부모를 미워하는 일이 생겨요. 자연 세계에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동물 세계에서는 자식 때문에 힘들다고 하는 부모가 없어요. 마땅히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어미가 죽어가면서도 ‘새끼 때문에’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개는 강아지를 여섯 마리씩 낳아서 키우더라도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부모 자식 관계로 힘든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힘든 게 아니라 심리적으로 힘든 거예요. 특히 요즘은 아이를 보살피는 보호본능이 점점 없어지고, 자식이 다 컸는데도 집착을 끊지 못하는 부모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요. 그래서 부모 자식 관계가 점점 힘들어지는 거예요.

아이가 어릴 때는 마땅히 자식을 키워야 합니다. 힘들다고 아우성치는 부모는 모성애나 부성애가 부족하거나,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안 하려고 하는 거예요. 자식이 다 컸는데도 자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부모는 과잉보호를 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이라면 자연을 기준으로 했을 때 동물의 기본은 지키되 동물보다는 조금 나아야 되잖아요. 동물은 자기 새끼에 대해서만 목숨을 걸고 돌보지만, 사람은 남의 아이라도 부모가 없으면 돌보기도 합니다. 동물은 아무리 어미가 늙어도 새끼가 돌보아주는 일이 없지만, 사람은 자기 부모가 아니더라도 늙은 사람을 돌보기도 합니다.

내 자식이기 때문에 돌보는 것과 환자이기 때문에, 늙었기 때문에, 어리기 때문에 돌보는 것은 성격이 다릅니다. 성인이 됐는데도 내 아들이기 때문에 돌보는 것은 집착입니다. 내 아이이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돌봄을 받아야 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돌보는 것은 집착이 아닙니다.

만약 질문자가 도움이 필요한 이웃집 아이를 돌보듯이 할 수 있다면 돌봐도 괜찮습니다. 이웃집 아이가 부모도 없고 돌볼 사람이 없어서 ‘나라도 돌봐야겠다’ 하는 마음으로 돌볼 수 있으면 아무런 괴로움이 안 생겨요. 그런데 질문자가 그런 수준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 자식이라는 집착 때문에 ‘내가 돌봐야 하나’ 하고 걱정하기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질문자가 아들을 안 돌보기로 하고 ‘너는 이제 나이가 성년이니까 자립을 해라’라고 할 때는, 아들이 나가서 죽든지, 병이 더 나든지, 신경을 딱 꺼야 합니다. 그래야 괴로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아들이 나가서 혹시 다치거나 사고가 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들을 내보낼 수 있는 수준이 아직 안 된다고 볼 수 있어요.

딱 이혼을 해야 되겠다고 결심하면 이혼한 남편이 다음 날 교통사고로 죽어도 어떤 후회가 없어야 해요. 우리는 대부분 ‘이럴 줄 알았으면 이혼하지 말걸’ 이렇게 후회를 합니다. 내가 선택한 길이 바른 길이라면 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후회 같은 건 안 해야 돼요.

‘선택의 순간이 다시 나에게 온다 해도 나는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다. 남편이 죽은 건 교통사고가 나서 죽은 것이지, 이혼과는 관계가 없다.’

이렇게 자기 입장이 분명하면 후회하지 않습니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주는 것은 괜찮아요. ‘남도 어려움에 처하면 돕는데, 내 자식인데 도와주자’ 이렇게 도와주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벌써부터 ‘후회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식을 내보낼 수준이 못 됩니다. 질문자 수준에는 그냥 짊어지고 사는 수밖에 없겠어요.

자식을 짊어지고 같이 사는 것이 좋은가, 내보내는 것이 좋은가, 여기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자식을 보호하고 살기로 결정했다면 거기에 따른 모든 과보를 내가 받아야 되고, 내보내는 것으로 결정했다면 그에 따른 모든 과보를 내가 받아야 돼요. 그런데 질문자는 귀찮으니까 내보내려고 했다가, 내보냈다가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어쩔까 싶어서 또 붙잡는 거예요. 그래서 아이도 그런 부모 밑에서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워요.

여러분들은 이런 문제가 있을 때 늘 ‘내보내야 됩니까, 데리고 있어야 됩니까?’ 이렇게 묻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핵심이 아니에요. 내보내거나, 데리고 있거나, 후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성년이 된 자식을 부모가 계속 보살펴주면, 그 아이 입장에서는 부모가 죽을 때까지 계속 보호를 받고 싶겠죠?”

“네,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고 게임만 하는 거 같아요.”

“만약 두 다리가 부러지거나, 두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남이라도 보호해야 하잖아요. 보살펴야 할 수준의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가 남이라도 보살펴야 하는데 왜 내 자식을 못 보살펴요? 그런 사람을 보살피면서 ‘이 사람은 아무것도 안 하고 게임만 한다’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보살피려면 그가 어떻게 하든지 다 끌어안아야 되고, 보살피지 않고 내보내려면 어떤 일이 벌어져도 후회하지 않고 그냥 한 사람으로서 볼 수 있어야 돼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스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하고 또 묻겠죠. 네. 그렇게 안 되기 때문에 인생이 괴로운 겁니다. 그래서 평생 전전긍긍하고 사는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제가 ‘어떤 상황이든 그대로 받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될까요?”

“기도가 왜 필요해요? 질문자 본인이 결정하는 게 필요하죠. 기도라는 말을 그렇게 쓰니까 자꾸 기복적으로 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하면 좋은 일이 생기겠지 하는 것이 기복입니다. 지금 질문자가 묻는 내용은 이렇게 묻는 것과 같아요.

‘그러면 제가 ‘봄도 좋고, 여름도 좋고, 겨울도 좋고, 다 좋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늘 봄이 됩니까?‘

이것은 법문을 듣고 나서 ‘여름도 좋고 겨울도 좋다’라고 머리로는 알지만, 속으로는 늘 ‘그래도 봄이 좋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집에서 아들을 보살피면 아들의 병이 호전되어 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아들이 집 밖에 나가서 살면 사고가 안 나야 된다’ 자꾸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근심 걱정이 끊어지지 않는 겁니다.

스님은 아들의 상태를 정확히 모르니까 전문가한테 물어보세요. 전문가가 보기에 ‘이 정도면 누군가가 보살펴야 한다’라는 진단이 나오면, 그때는 질문자가 보살피거나 보살피는 시설에 위탁을 하면 됩니다. 그 정도는 아니고 보통 사람보다 좀 어렵긴 하지만 자립해서 자기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진단이 나오면, 거기에 따라서 결정하면 됩니다. 다리가 하나 없거나 눈이 하나 안 보인다고 보살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멀쩡한 사람이라고 해도 내가 좋아서 보살피는 것이라면, 그것은 주어진 조건이나 상황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보살피고 나서 나중에는 원망합니다. 이것은 수행적 관점이 잘못된 겁니다.

저는 ‘자식이니까 이렇게 해야 된다’, ‘부모니까 이렇게 해야 된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 건 여러분이 알아서 하면 됩니다. 제 얘기의 초점은 ‘보살펴라’, ‘보살피지 마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내가 괴롭지 않은가’ 이겁니다. 장애가 있는 자식을 둔 부모도, 남편이 죽은 여자도, 늙어서 혼자 사는 사람도 괴롭지 않은 길이 있다는 거예요. 봄이 오든, 여름이 오든, 가을이 오든, 겨울이 오든, 어떤 상황에서도 능히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어떤 것인가, 이걸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제 얘기를 여러분 식대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제가 여러분과 대화를 하는 목표는 해탈과 열반입니다. ‘어떻게 하면 해탈과 열반으로 갈 수 있느냐’ 이걸 갖고 얘기하는 것이지, 부자가 되느냐, 가족 간에 우애가 있느냐, 출세를 하냐, 유명해지냐, 건강해지냐, 오래 사느냐,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들은 ‘이래야 한다’ 하는 것을 전제하고, ‘어떻게 하면 오래 살 수 있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묻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법문이 여러분 생각에 맞으면 ‘우리 스님 훌륭하시다’ 이렇게 얘기하고, 자기 생각과 좀 안 맞으면 ‘스님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 이러잖아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스님을 좋아하고 안 좋아하는 것에 별로 신경을 안 써요. 여러분들이 ‘스님 훌륭합니다’ 하고 박수를 쳐도 별로 신경 안 쓰고, 막 욕을 해도 별로 신경 안 써요. 왜냐하면 그건 저하고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고, 자기 기분대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비록 지금은 ‘법륜스님 훌륭하다’라고 해도, 제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얘기를 하면 바로 ‘그건 아닙니다’ 이렇게 나올 거예요.

‘부모는 이래야 한다’, ‘자식은 저래야 한다’ 이렇게만 바라보고 사는 삶은 윤리와 도덕의 그물에 매여서 사는 삶입니다. 삶은 내가 선택하고 책임지는 거예요. 내가 자식을 낳았으면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성년이 될 때까지 보살펴야 되고, 내가 도저히 못 보살피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서라도 보살펴야 됩니다. 또 자식이 성년이 되면, 아무리 자식이라도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개인의 존엄을 예우해줘야 돼요. 자식은 자기 소유물이 아니에요. 자식을 소유물로 잘못 생각하니까 자식을 죽이고 자기가 죽는 일이 생기는 겁니다.

자기가 성질난다고 해서 다섯 살 짜리 한테 악을 쓰고, 일곱 살 짜리를 때리고 난리잖아요. 자식은 내 기분을 풀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내가 만든 물건이니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낳았으니까 내 것이라는 잘못된 의식을 갖고 있어서 생기는 문제예요. 자식이 다 컸는데도 자식에게 집착해서 전전긍긍하기 때문에 눈 감을 때까지 근심 걱정을 놓을 수 없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질문할 때 누구에게 묻는지 알아야 됩니다. 스님에게 묻잖아요. 스님은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는 사람이에요. 어떤 경우에도 괴롭지 않은 경지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전체댓글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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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진

제가 여러분과 대화를 하는 목표는 해탈과 열반입니다. ‘어떻게 하면 해탈과 열반으로 갈 수 있느냐’ 이걸 갖고 얘기하는 것이지, 부자가 되느냐, 가족 간에 우애가 있느냐, 출세를 하냐, 유명해지냐, 건강해지냐, 오래 사느냐,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들은 ‘이래야 한다’ 하는 것을 전제하고, ‘어떻게 하면 오래 살 수 있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2021-03-18 00:40:19

이채영

감사합니다

2021-03-16 15:03:21

소닉

정토대전 천천히 나와도 좋습니다. 미국 스터디 바이블처럼 지도 유물 등도 함께 실려 있으면 좋을 듯 합니다.

2021-03-11 19:3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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