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2.28 영어권 천일결사자 간담회, 주말명상 회향식, 서울정토회 이사, 일요명상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요?”

안녕하세요. 오늘도 서울 정토회관에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새벽 4시 20분, 아직 서울 공동체 대중이 법당에 내려오기 전 스님은 가장 먼저 방석을 깔고 앉아 명상을 했습니다. 온라인 주말 명상수련 3일째 아침을 맞이해 스님도 참가자들과 새벽 명상을 함께 했습니다.

천일결사 기도를 마친 후 6시 30분에 발우공양을 했습니다.

공양을 마치고 대중은 오늘 울력을 어떻게 할지 논의한 후 마지막으로 스님에게 말씀을 청했습니다.

“어제도 이삿짐을 나르느라고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큰 짐을 다 옮겼고, 뒷정리만 조금 남았습니다. 가구들 중에는 해체해서 가져와야 할 것들이 일부 남아서 조금 더 수고를 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

오늘은 우리가 그동안 사용했던 사무실을 깨끗이 정리 정돈하고 청소까지 해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앞으로 정토회가 점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을 때, 같은 건물에 살았던 사람들이 ‘정토회 사람들과 같이 살아봤는데, 그 사람들 참 고약하더라’ 이런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되잖아요. 꼭 이미지를 좋게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주장하는 말과 실제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면 대중들에게 시비심을 일으키게 되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세상을 향해 올바른 주장을 하지 않으면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세상을 향해 올바른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늘 주의해서 행동해야 해요.

그리고 각목이나 합판 등 나무로 된 것들은 현재 쓸모가 없다고 무조건 버리지 마세요. 앞으로 지부마다 으뜸절을 가꾸어나가야 하기 때문에 나무를 재활용해서 제작할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가능한 재활용을 할 수 있도록 보관을 잘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동을 시킬 때도 일부러 트럭을 빌리고 시간을 내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갈 일이 있을 때 조금씩 싣고 가면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어요. 그러니 보관을 조금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게 연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서울정토회 이사까지 마무리하면 이제 큰 짐은 다 옮기게 되기 때문에 내일은 대청소를 하기로 하고 대중공사를 마쳤습니다.

이어서 오전 9시부터는 영어권 천일결사 입재자 공동정진을 시작했습니다. 올해부터 영어권 천일결사 입재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새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10-4차 백일정진을 시작한 지 절반을 지나 55일째(미국 시간)입니다. 총 12명의 영어권 입재자들이 화상회의 방에 입장한 가운데, 정진을 함께 했습니다.

수행문, 삼귀의, 참회, 108배와 명상을 마치고 휴식을 한 후 10시부터는 스님과의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안녕하세요. 정진 잘하셨습니까?

Hello. everyone. Did you have a good practice session?

잘했으면 잘했다고 이렇게 표시를 해보세요.”

Please make the okay sign like this if you had a good practice session.

스님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습니다. 외국인 참가자들도 환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여주었습니다.

“기도를 시작한 지 8주가 되었으니까 56일이 지났네요. 백일 중 절반이 넘었습니다. 사람이 어떤 결심을 하고 3일이 못 간다는 말이 있는데 56일간 꾸준히 수행을 하셨으니 장한 일이에요.

살다 보면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에 차이가 있습니다. ‘하고 싶다’는 마음의 작용이에요. 과거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내 마음의 습관에 의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해야 한다’는 생각의 작용입니다.

한국에는 콩으로 만든 된장이라는 게 있는데요. 한국 사람은 보통 이 된장 냄새를 맡으면 바로 먹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반대로 서양 사람들은 된장 냄새를 맡으면 역겨워서 싫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된장 그 자체가 역겨운 게 아니라 살아온 습관에 의해서 좋고 싫은 마음이 일어나는 거예요.

‘냄새가 역겨워도 몸에 좋으니까 먹어야 한다’ 또는 ‘너무 먹고 싶지만 먹으면 건강에 나쁘니까 먹지 말아야 한다’라는 건 생각이에요. 이때 의지가 강한 사람은 먹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먹지 않거나, 먹기 싫은 마음을 누르고 먹습니다. 그러나 의지로 마음을 억누르면 사실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먹고 싶고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면 결국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의지가 꺾입니다. 그래서 각오하고 결심해서 시작했다가 결국 흐지부지 되는 경우가 많아요. 여러분도 매일 일찍 일어나서 절을 하면 좋다고 하니까 시작을 했지만 과거에 그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저항이 따르는 거예요. 그래서 절을 하려고 하면 힘이 듭니다.

수행이란 절을 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에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습관에 종속되지 않고, 필요하다면 그 습관을 거슬러 갈 수 있는 연습을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꾸준히 하면 몸에 밴 습관이든, 생각의 습관이든, 마음의 습관이든, 나에게 손실을 가져오는 습관은 능히 멈출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러면 손실을 가져오는 습관을 무조건 참고 의지로 억누르라는 말이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은 의지가 강하면 좋다고 생각하지만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단계까지 가야 수행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습관에 얽매이지 않고 습관으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을 때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어요.

인생을 살면서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자동으로 늘 좋고 싫은 감정, 하고 싶고 하기 싫은 욕구가 일어납니다. 감정과 욕구에 매이면 괴로움이 생깁니다. 감정과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괴로울 일이 없어집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죽어서 천국에 가느냐 안 가느냐, 다음 생에 태어나서 복을 받느냐 안 받느냐가 아닙니다. 지금 내가 괴로우냐, 안 괴로우냐가 핵심 과제예요. 지금 내가 괴롭지 않은 삶을 사는 게 중요해요.

지금 괴롭지 않으면 과거도 미래도 괴롭지 않게 됩니다. 수행자는 내생이 있든지 없든지 윤회를 하든지 안 하든지 지옥 가든지 천당 가든지 이런 것이 도무지 관심사가 아닙니다. 내생이나 윤회는 다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나온 관념들입니다. 수행을 하면 인생에 두려움이 없어지기 때문에 그런 것 자체가 과제가 될 수가 없습니다. 여기까지 얘기하고 여러분들의 얘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영어 통역까지 해야 하기 때문에 약 1시간 동안 3명의 질문만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영어권 신규 입재자들은 그동안 정진하면서 들었던 의문을 편안하게 질문했습니다. 그중 시애틀에 사는 한 분은 정진을 하기 전 읽는 수행문에 마음이 공하다는 것을 알면 괴로움이 사라진다는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 질문했습니다.

“스님, 안녕하세요.”

파란 눈동자에 갈색 머리를 한 질문자는 한국어로 인사를 건넨 후 이어서 질문을 했습니다.

마음의 실체가 공한 줄 알면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다, 무슨 뜻인가요?

“After getting to know you, I have been taking deeper interests in Buddhism. One Buddhist concept of "Shunyata (공 사상)" is difficult for me to understand. Will you please explain to the general public what is "Shunyata (공 사상)" with simple examples for us laymen to understand? Secondly, how can we use the understanding of "Shunyata" in our day-to-day lives? On a related note, from Jungto 1000 day practice, I have been learning that "The root of all suffering and attachments is within us... and that the mind itself is empty. With this realization, our suffering naturally disappears.". But, I am not making a connection between "mind itself is empty" and "with this realization, our suffering naturally disappears." Can you please explain to us the general public with examples how this realization of an empty mind leads to the disappearance of suffering?”

“스님을 뵙고 저는 불교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중 ‘공사상’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천일결사 기도 수행문에도 ‘모든 괴로움의 뿌리가 다 마음 가운데 있고, 그 마음에 실체가 본래 공한 줄 알면 모든 괴로움은 저절로 사라진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이 이해가 안 됩니다. 마음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어떻게 괴로움이 사라지게 되나요? 저와 같은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도록 간단한 예를 들어서 공에 대해서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목적지로 가는 길

“예를 들어 시카고를 간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 여쭸어요.

‘시카고로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면 됩니까?’

질문한 사람이 샌프란시스코에 산다면 부처님은 동쪽으로 가라고 하실 겁니다. 보스턴에 사는 사람이라면 서쪽으로, 애틀랜타에 사는 사람이라면 북쪽으로 가라고 하실 거예요. 질문자가 있는 위치에 따라 방향이 다 다릅니다. ‘그럼 시카고로 가는 방향은 도대체 어느 방향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느 방향이라고 정해서 말할 수 없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가는 방향이 없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아무렇게나 가도 된다는 뜻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시카고 가는 방향이 정해지려면 질문자의 위치를 확인해야 합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다면 방향이 동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스턴에 있다면 서쪽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부처님은 질문자의 위치에 따라 방향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렇게 부처님과 질문자의 대화를 모아 놓은 것이 경전입니다. 어떤 경전에는 시카고로 가는 길이 동쪽, 어떤 경전에는 서쪽, 어떤 경전에는 북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경전을 두고 어느 방향이 맞는지 논쟁을 하거나 어느 방향이 더 좋은지 논쟁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후대에 많은 학파와 종파가 나누어진 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절대화했기 때문입니다. 즉, 질문하는 사람이 어느 위치에 있냐를 고려하지 않고 시카고로 가는 절대적인 하나의 방향을 자꾸 주장한 거예요.

부처님께서 사람들을 인도하고자 하는 목표는 언제나 해탈입니다. 해탈이란 괴로움이 없는 상태, 두려움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질문을 하든 부처님은 그 질문자의 고통을 잘 알기 때문에 열반으로 가는 길을 알려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대에게 그 길을 인도할 수가 없겠다고 판단하면 부처님은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하셨습니다.

공사상은 대승불교(마하야나)에서 나온 사상입니다. 대승불교가 나오기 전에는 소승불교라고 부르는 근본불교(테라밧다)가 있었습니다. 대승불교가 나오기 직전에 소승불교에서는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아니다. 이것이 바른 가르침이다’ 이렇게 동쪽이니 서쪽이니 북쪽이니 여러 학파로 나누어 다투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하나로 절대화해서 서로 주장을 했던 겁니다. 대승불교 초기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동쪽이라 할 수도 없고 서쪽이라 할 수도 없고 북쪽이라고 할 수도 없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다가 ‘공(空)’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공을 아무것도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잘못됐어요. 정확하게는 ‘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즉, 어떤 것도 시간과 공간을 무시하고는 정해질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시간과 공간이 정해지면 어떤 방향이 정해진다는 뜻입니다.

‘시카고 가는 방향이 어떤 방향입니까?’

이렇게만 물으면 ‘정해진 길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한다면 방향은 동쪽으로 정해집니다. 애틀랜타에서 출발한다면 북쪽으로 정해집니다. 방향은 인연에 따라서 그때그때 달라집니다. 선불교에서는 이것을 중도(中道), 근본불교에서는 무아(無我), 대승불교에서는 공이라고 표현합니다.

다만 그것일 뿐

다른 비유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여기에 컵과 컵 받침대를 보십시오. 제가 있고, 컵이 있고, 컵 받침대가 있습니다.

컵은 받침대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큽니다.”

“컵은 법륜스님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작습니다.”

“이 컵은 큽니까, 작습니까?”

“Nothing.”(크다고도 작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네. 컵이 없다는 뜻은 아니죠. 질문을 바꿔서 이 컵은 무겁습니까, 가볍습니까?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습니다. 이 컵은 비쌉니까? 쌉니까? 비싼 것도 아니고 싼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조건에서 비교를 하면 이 컵은 크다고 불리기도 하고 작다고 불리기도 합니다. 비싸다고 하기도 하고, 싸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크다 작다, 비씨다 싸다, 가볍다 무겁다는 성질은 컵에 있는 거예요? 내가 인식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예요?”

“네, 인식하는 방법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조건에서 작다고 인식을 한 건데, 컵 자체가 작기 때문에 작다고 인식했다고 보고 컵이 작은 게 사실이라고 객관화시켜요. 존재 자체는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것일 뿐입니다. 크다, 작다는 것은 내가 어떤 것과 비교해서 인식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어떤 사람을 보고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 자체에 좋고 나쁨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그렇게 인식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괴로움의 뿌리, 옳고 그른 시비 분별은 다 내가 일으킨 거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 공이란 단순히 비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존재에 크다고 할 것이 없고, 작다고 할 것이 없고, 옳다고 할 것도 없고 그르다고 할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조건에서는 그렇게 인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원리를 알면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괴로워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주장을 할 때는 순간적으로 상대적인 것을 객관화시켜 버립니다. ‘내가 그렇게 인식했구나’라고 보는 게 아니라 ‘이게 옳다. 사실이다,’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주장을 하는 거예요. 우리의 일상은 늘 그렇습니다.

나는 이 컵을 작다고 보는데 다른 사람이 크다고 하면 틀렸다고 할 게 아니라 ‘저 사람은 이 컵을 크다고 인식하는구나’ 이렇게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서로 다르게 인식한다고 해서 갈등이 생길 일이 없습니다. 누구는 시카고 가는 길이 동쪽이라고 하고 누구는 서쪽이라고 하면 어느 게 맞는지 따질 필요가 없어요. 서쪽이라고 하면 ‘아, 저 사람은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구나.’라고 이해하면 되고 동쪽이라고 하면 ‘저 사람은 보스턴에 살고 있구나’ 이렇게 이해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공한 줄 알면 마음에 괴로움이 일어날 일이 없습니다. 존재 자체는 크지도 작지도 않으니 작다, 크다라고 말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내가 인식하는 대로 말할 수는 있지만 절대적 성질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서로 다를 뿐이지 누가 옳고 그르고 맞고 틀리고 높고 낮고가 없습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논쟁하는 사람들을 볼 때도, 누가 맞는지 따지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은 믿음이 다르구나’라고 바라보면 됩니다. 제가 너무 길게 얘기했는데 이해하셨습니까?”

“네, 스님. 모든 예시들이 다 공감이 되었습니다. 굉장히 흥미롭고 훌륭한 답변이었습니다. 훨씬 더 이해가 깊어진 거 같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머지 두 명의 질문을 받고, 꾸준히 수행할 것을 당부한 후 방송을 마쳤습니다. 스님이 온라인 방송을 하고 있는 사이 공동체 대중들과 봉사자들은 하루 종일 서울정토회 이사를 했습니다. 2층에서 1층으로 1층에서 새 공간으로 부지런히 이삿짐을 옮겼습니다. 스님이 어제 새로 제안한 방식대로 계단에 합판을 이용해 미끄럼틀을 만들어서 손쉽게 짐을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오늘은 온라인 주말 명상수련 3일째 날입니다. 수련생들은 마지막 명상을 마치고 오후 1시 40분부터 소감문 작성을 했습니다. 오후 3시에는 스님도 화상회의 방에 입장하여 전체 수련생들과 회향식 프로그램을 같이 했습니다.

300여 명의 수련생 중에 19명이 발표자로 선정되어 소감문을 읽었습니다. 스님은 한 명 한 명의 소감을 경청하며 조언할 부분은 꼼꼼히 메모를 했습니다. 50분 동안의 소감문 발표를 마치고 스님이 정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소감을 잘 들었습니다. 모든 분들의 얘기를 다 들어 보면 좋겠지만, 그렇게까지는 시간이 없다 보니 일부 사람들의 얘기만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소감을 듣고 난 제 소감은 이렇습니다.

‘다 명상을 하기는 했구나!’ (웃음)

다리가 아팠다, 졸렸다, 먹고 싶었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이런 얘기들을 하는 모습을 보니까 명상을 제대로 하신 것 같아요. 이렇게 명상을 직접 해봐야 이런 어려움이 있다는 걸 알지, 명상을 안 해본 사람은 ‘명상을 하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천당이나 극락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런 얘기밖에 할 줄 모릅니다. 앞으로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을 만나면 여러분들은 ‘저 사람은 명상을 안 해봤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힘들었다고 아우성을 치니까 ‘명상을 하긴 했구나’ 하고 잘 알잖아요. (웃음)

나의 출발점이 여기이구나!

명상이 무엇인지 관점을 잘 잡으셔야 합니다. 2박 3일 동안 졸기만 해도, 다리만 아파도, 망상만 피워도, 모두 명상을 잘한 거예요. 그게 내 출발점입니다.

‘아, 내가 지금 여기에 서 있구나! 그러나 나의 목표는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나는 내 출발점을 확인했다. 명상을 해보니 나는 주로 먹고 싶은 것에 많이 끄달리는구나. 경계에 끄달린다는 것에는 좋고 나쁨이 없구나. 어떤 사람은 인천에서 출발하고, 어떤 사람 부산에서 출발하듯이, 내가 여기에 서 있구나!’

이렇게 확인한 것만 해도 큰 성과입니다. 여러분들은 자꾸 명상을 통해 무언가를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무슨 2박 3일 만에 모든 것을 다 깨달으려고 합니까. 그거야말로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보다 더 큰 욕심이에요. 이번 명상을 통해 내가 지금 어느 위치에 있느냐 하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에요. 앞으로는 여기서부터 한 발씩 걸어 나가면 됩니다.”

이어서 10분 간 휴식 시간을 갖고, 수련생들은 스님에게 회향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애쓰지 않기 위해 애를 쓴 수련생들을 웃음으로 격려했습니다.

“거센 폭풍우가 지나가고 나면 날씨가 아주 맑아지고 고요해지듯이 2박 3일 동안 여러분들은 졸음과 통증, 망상의 거센 폭풍우를 겪었습니다. 폭풍우가 다 지나가고 나니 지금은 좀 편안해지셨습니까?

지난 3일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떤 수고가 많았을까요? 편안해지려고 너무 애를 쓰는 수고를 많이 하셨어요. 너무 수고가 많았으니 내일 하루는 푹 쉬시기 바랍니다. (웃음)

애를 쓰지 않기 위해 너무 많은 애를 쓴 여러분들에게

우리가 보통 힘들다고 할 때는 크게 네 가지 원인을 이야기합니다. 첫째, 과로로 인해서 몸이 힘듭니다. 그래서 손도 까딱하지 말고 편안히 쉬기 위해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어요. 그런데 앉아 있기만 하면 다리가 너무 아프니까 한 번씩 다리를 펴기 위해 포행을 했습니다. 둘째, 말을 너무 많이 하면 힘듭니다. 그래서 말도 하지 않는 묵언을 했어요. 셋째, 이것저것 생각하려고 머리를 계속 돌리다 보니 머리가 아파서 힘듭니다. 그래서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어요. 넷째, 애를 너무 써서 힘듭니다. 그래서 아무런 애를 쓰지 않기로 했어요. 이렇게 여러분의 요구 조건을 다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가만히 있으려고 너무 많이 애를 쓰고, 생각을 안 하려고 너무 많이 애를 쓰고, 말을 안 하려고 너무 많이 애를 쓰고, 애를 안 쓰려고 너무 많이 애를 쓰는 바람에 지금은 ‘피곤해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 이렇게 말하는 형국이 된 것 같아요. 여러분들이 지금 이런 모순 속에 살고 있습니다.

힘든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지 않으려면

이번 명상이 아무리 힘들었다 해도 ‘명상이라고 하면 듣기도 싫다’ 이렇게 트라우마로 남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때는 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니 ‘아! 다시 해볼만하다’ 이렇게 되려면, 첫째, 자발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둘째, 자각이 일어나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옆에서 ‘술 먹으면 안 된다’라고 지적하는 방식으로는 절대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요. 스스로 어느 순간에 ‘술이 몸에 많이 해롭네!’ 이렇게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깊이 자각하게 되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까르마라고 하는 우리의 오랜 습관은 자각 없이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외부에서 큰 자극을 주어서 변화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지 환경이 바뀌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버려요. 그러나 자각이 일어나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자각이 일어나려면 자발적으로 해야 합니다. 자발적일 때는 순간순간은 힘들어도 나중에 트라우마가 되지 않습니다.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된 변화는 트라우마로 남게 되지만, 자기 혼자서 스스로 참고 견디는 것은 트라우마로 남지 않아요.

그러니 이번 명상도 그렇고 앞으로의 명상도 그렇고, 늘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발적인 경험을 통해 자기를 알아나가는 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내가 이런 문제가 있네’, ‘나한테 이런 것이 있네’ 이렇게 자각하기 위해서는 이번 2박 3일처럼 직접 해봐야 합니다. 직접 해보지 않고 법문만 많이 듣는 사람들은 법문을 이해만 하고 있지 자각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명상수련을 할 때는 법문을 최소로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명상수련의 목표가 자각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직접 경험해서 알아야지 스님이 말해서 아는 것은 명상을 굳이 하지 않아도 일상적인 법문을 통해서도 가능하니까요.

명상수련은 직접 체험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법문은 거의 없고 하루 종일 명상만 하니까 여러분들은 ‘배우는 게 없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배우는 게 없어서 우리 인생이 피곤한 게 아니라 너무 많이 알아서 피곤한 거예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정진을 꾸준히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은 내가 주인입니다. 내가 책임을 져야지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할 사람은 없어요. 아내도 부모도 자식도 내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습니다. 항상 자기의 문제는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서 괴롭지 않도록 살아야 해요. 그래서 지금보다는 덜 괴롭고, 덜 외롭고, 스트레스가 적은, 이런 상태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막 즐거운 게 행복이 아니에요. 괴로움이 없는 삶이 행복한 삶입니다. 모두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스님은 손을 흔들며 전체 수련생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법상에서 내려온 스님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원고 교정 업무를 본 후 저녁 8시 30분에 다시 생방송 카메라를 향해 자리에 앉았습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 47번째 진행되는 온라인 일요명상 시간입니다. 스님은 지난 일주일 동안 이사를 하면서 느낀 점을 나누면서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정토회 전체가 이사를 하느라 저도 이삿짐 운반을 하루 종일 했습니다. 오래간만에 육체적 노동을 많이 했어요. 이사를 하면서 ‘아! 우리가 검소하게 산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물건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또 이사를 하면서 많은 물건들이 함부로 버려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작은 물건도 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저와 갖고 있어 봐야 결국 쓰레기만 된다고 주장하는 젊은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작은 갈등이 있기도 했어요. (웃음)

최대한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삶

자연의 동물들은 가능하면 자연의 훼손을 최소로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너무 많은 쓰레기를 만들고 살아가는 것 같아요. 한번 만들어진 물건은 가능하면 완전히 못 쓸 때까지 재사용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훨씬 더 자원 소모를 줄일 수 있고, 지구 환경이 오염되는 것도 막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사를 가니까 아무래도 새로운 공간에 맞게끔 새로운 가구를 배치하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인 것 같아요. 그러나 정토회는 가구를 일절 새로 사지 않고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가져가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외부 사람이 보기에는 좀 깨끗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입고 다니던 옷을 입으면 더 편하듯이 사용하던 가구들을 사용하는 게 사실은 더 편리합니다.”

이어서 지난주에 영어로 올라온 질문 두 가지에 대해 답변을 했습니다. 그리고 9시에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자, 그러면 명상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세를 바로 합니다. 가부좌를 하고,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고개를 똑바로 듭니다. 눈을 편안하게 감고,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뭘 해야겠다는 애씀이나 의지를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을 갖습니다.

마음을 코끝에 집중합니다. 그러면 저절로 들숨과 날숨이 알아차려집니다. 지금은 오직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것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관심이 다른 데로 가 버릴 때가 있는데, 그러면 재빨리 다시 코끝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긴장해서도 안 되고, 잘하려고 해도 안 되고, 안된다고 포기해서도 안 되고, 실망해서도 안 됩니다. 집중이 되면 지속하고, 놓치면 다시 합니다. 편안한 가운데 다만 꾸준히 해나갑니다.”

탁! 탁! 탁!


이제는 정겨워진 죽비소리가 시작과 끝을 알립니다.

“오늘은 해보니 어땠습니까? 소감을 올려 주세요.”

스님의 이야기가 끝나자 말자 수십 개의 소감이 채팅창에 올라왔습니다.

“망상이 많이 올라왔으나 호흡으로 돌아가기를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I had a lot of distractions and when I tried to go back to my breath and repeated that countless times.”

“땀이 약간 나고 몸에 차가운 기운이 들었습니다.”
“I was a little sweaty and felt the kind of coldness descend upon me.”

“죽비 소리에 깜짝 놀란 것을 보니 졸았던 것 같습니다.”
“I was surprised awake by the sound of the clapper which means that I was probably sleeping.”

여러 증상과 소감들을 다 읽은 후 스님이 정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양파 껍질을 벗겨내듯이

“명상을 하면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증상들입니다. ‘이런 증상이 나타나네!’ 하고 다시 할 뿐입니다. 꾸준히 해나가면 조금 더 편안해지고, 조금 더 안정되어 갑니다. 어떤 때는 편안하다가 어떤 때는 망상이 심해지고, 계속 좋아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졌다 나빠지기를 반복하며 점점 좋아지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잘 된다 싶으면 다음 시간은 또 안 되고, 죽어도 못 하겠다 싶으면 다음 시간은 또 잘 되고. 마치 양파 껍질을 하나씩 벗겨내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잘 되고 안 되고를 논하지 말고 ‘이런 증상도 있네’, ‘이럴 때도 있네’ 하면서 꾸준히 해나갑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주를 기약하며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밤 10시가 넘었습니다.

내일은 아침에 공동체 대중과 발우공양을 한 후 오전에 삼일절 특별법회를 하고, 오후에는 두북 수련원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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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판위의연아킴

스님 감사합니다.
어떤 것을 느끼고 판단할 때 제 인식이 그렇게 보고 느끼고 판단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겠습니다.

2022-10-18 10:01:55

박영옥

오늘..
단기 4355년,불기2566년,서기2022년,이기1401년6월28일,화요일
공=무아=중도....제법무아,제행무상의 가르침을 저의 마음에 새겼습니다.
고맙습니다.시골농부 부처님,법륜스님

2022-06-28 13:23:43

김소영

불교대학 공부에도 굉장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1-03-23 04:5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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