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1.17. 온라인 정초법회(대구경북, 경남), 근본불교 즉문즉설, 일요명상
"습관에 종속된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는 방법"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대구경북 지부 저녁반, 경남 지부 회원들과 온라인 정초법회를 했습니다. 오후 3시에는 근본불교 수업을 마친 온라인불교대학생들을 위해 즉문즉설을 하고, 저녁에는 일요명상을 했습니다.

9시, 온라인 정초법회(대구경북 지부)

기도와 공양을 마치고 오전 9시부터 대구경북지부 저녁반 회원들과 온라인 정초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정토회별로 소개를 하고 지역공청회 논의 결과를 발표한 후 스님과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먼저 코로나 사태로 인해 혼란의 시기를 지나온 정토행자들을 격려하는 동시에 사과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10차 천일결사를 시작도 하기 전에 코로나 사태가 생겨서 선출된 임원들이 인사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겨우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데 1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다시 조직 개편을 한다고 하니 정신적으로 많이 피곤할 것 같아요. 이렇게 명백하게 피해자들이 많은데, 이런 일을 발생시킨 가해자가 불분명합니다. (웃음)

가해자가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1년도 내다보지 못하고 조직 개편을 한 천일준비위원회라고 보고 결사행자들을 나무라기도 그렇습니다. 안 그러면 ‘지도법사가 그 정도 안목도 없는가’ 이렇게 볼 수도 있는데, 저는 그런 안목을 못 가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이 정도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지 예측을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지금 가해자가 불분명한 상황이에요. 그래도 제가 지도법사이니까 코로나 바이러스와 결사행자들을 대표해서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혼란스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지 않는 한 살아야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물론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막아야 하지만, 전쟁이 이미 일어났다면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살아나가야 하고, 전쟁을 멈추기 위한 운동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것처럼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고 우리의 삶이 온통 변화되는 가운데서도 어떻게 하면 그나마 잘 대응할 수 있는지 현실 속에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정토회는 이 상황에 방어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더욱더 선제적으로 대응해서 이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보다 이 일이 일어난 게 결과적으로 잘됐다고 평가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변화를 진행하고 있는 겁니다.

온라인으로 전환하고 내 방을 법당으로 만들고 나니 온라인 시대에 오히려 소외된 지역에 더 많은 사람들이 정토불교대학에 참여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법당을 철거하면서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낭비를 많이 했는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작은 법당 하나만 철거해도 물건이 한 트럭이 넘게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낭비를 했는가’ 또는 ‘온라인 방식이 얼마나 자원을 아끼는 방식인가’ 하는 것도 함께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빚어진 일이긴 하지만 이 계기를 통해서 정토회는 ‘마음이 청정한 자가 머무는 곳이 절이다’ 하는 초심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 시기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가고 있는 시기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정토회 별로 발표한 질문과 제안사항을 종합해 스님은 회원들이 헷갈려 하는 모둠 구성과 활동가의 역할에 대해 다시 짚어주었습니다.

설명을 듣고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직접 질문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여전히 활동가의 역할에 대한 질문이 많았습니다. 활동가 유지 조건이 어떻게 변하는지, 기존 지원팀 활동가들은 어떻게 되는지, 법당이 없어지면 삼보수호비 등은 어떻게 납부해야 하는지, 앞으로 담당하게 될 실현지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겨야 할지에 대한 질문이 나왔습니다. 더 이상 질문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질문을 받고 11시가 넘어 법회를 마쳤습니다.

12시, 온라인 정초법회(경남지부)

12시에 다음 법회를 시작하기 때문에 미리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하고 촬영 장소로 돌아온 스님은 웃으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밥 해먹고 설거지하니 시간이 금세 지나가네요.”

12시 정각이 되어 경남지부 회원들과 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도 정토회 별로 소개를 하고 공청회 결과를 발표한 후 스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예정된 시간이 지나도록 질문을 받고 법회를 마치며 스님은 온라인 정토회로 변화하는 취지에 대해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과거를 털어버리세요

“어느 정도 이해가 되셨어요? 길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법문을 제공해주려고 하는데, 왜 정토회 회원들을 외면하겠습니까.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마세요. 온라인 시대로 바뀌면서 전법에 더욱더 집중하려고 하다 보니까 전법사를 양성하는 일을 강조하게 된 것이고, 나머지 회원들은 지역별 수련원에 가서 더 많은 봉사를 할 수 있게 가자는 취지입니다.

전법사가 되고 나서 일주일에 겨우 불교대학 하나 운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비록 전법사가 되지 않아도 매일 수련원에 가서 농사를 짓거나 꽃밭을 가꾸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일의 양이 많고 적음을 갖고 전법사와 회원을 구분하는 게 아니에요. ‘이 분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를 나오기 때문에 전법사 모둠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이런 건의를 자꾸 하는데, 기도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는 것과 전법사가 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보시를 얼마나 했는가와 전법사가 되는 것도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전법사가 아닌 분들도 정토회에서는 아주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런 분들은 회원이 되어서 다양한 봉사활동과 수련에 참가할 수 있게 길을 열어주고 있어요.

지금까지는 어떤 자격을 갖추면 정회원이 된다는 개념이 있었는데, 온라인 시대에는 이런 개념이 없어집니다. 과거를 털어버리세요. 앞으로는 회원과 전법사 두 가지가 있는 겁니다. 기본은 회원이 되는 것이고, 회원 중에 전법사 역할을 하겠다는 사람들은 그에 필요한 교육과 훈련을 받은 후 활동가가 되는 거예요.

한번 활동가가 되면 영원히 활동가라는 생각을 이제는 버리셔야 합니다. 불교대학과 경전반을 진행하는 역할을 하면 활동가이고, 그런 활동을 안 하면 회원이 되는 겁니다. 태생으로 바라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농사를 지으면 농사꾼이 되고, 염불하면 종교인이 되고, 장사하면 장사꾼이 되는 것과 같아요. 내가 하는 행동에 의해 규정이 되는 거예요. 스님도 영원히 지도법사가 아니에요. 은퇴를 하는 순간 저도 일반 회원으로 돌아가서 농사지으며 살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관점을 잡고 다시 논의해 보세요. 여러분이 활동가가 아닌 사람들도 활동가 모둠에 포함시키자고 결정하면 그렇게 가도 됩니다. 대신에 효율이 좀 떨어지겠죠. 그러면 모둠장에게 부담이 많이 생기게 될 겁니다. 실제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활동가 모둠을 만들면 각자 자기 역할을 잘하기 때문에 모둠장이 힘들 일이 없게 되는 거죠.

다시 토론해 보시고 또 고민이 되면 다시 모여서 대화를 나눠봅시다.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니냐고 질문하는데, 절대 서두르고 있지 않습니다. 결론이 났으면 바로 추진을 했지 뭣 때문에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의견 수렴을 하고 있겠습니까. 결론이 안 나면 올해도 1년 내내 토론해도 괜찮습니다.

법당이 더 이상 효용 가치가 없다면 빨리 정리를 하면 되지 시간을 끌고 있을 이유는 없잖아요. 그것은 마치 사람이 죽었을 때 ‘70년 동안 산 사람을 3일 만에 장례를 치르려고 서두르느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과 같아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죽었으면 빨리 장례를 치러야지 시신을 방에 놔두면 냄새만 날 뿐이잖아요. 그걸 서두른다고 이야기하면 안 돼요. 서두르지 않을 테니까 충분히 논의 시간을 갖기 바랍니다.”

2시가 넘어 경남지부 정초법회를 마쳤습니다.

3시, 근본불교 즉문즉설

잠시 휴식한 후 오후 3시부터는 온라인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을 위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온라인 불교대학 학생들은 실천적 불교사상, 부처님의 일생, 근본불교, 세 과목에 대한 학습을 마쳤습니다. 오늘은 근본불교 과목을 공부하면서 궁금한 점을 해소하기 위해 마련된 시간입니다.

1,500여 명의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먼저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제일 어렵다고 하는 불교의 근본 교리에 대한 공부를 마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평가를 보니까 어려웠다는 얘기가 많네요.

그런데 부처님의 말씀이 어려운 건 아니에요. 후대 학자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요약해 놓으면서 어려워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요약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불교가 학문화되고 체계화되었기 때문이에요.

지금 배운 내용만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으면 스님들이 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겠습니까. 이번에는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어려운 내용을 맛보기로 공부하신 것이니까 앞으로도 이 내용은 두고두고 연구해야 될 일이에요. 오늘은 근본불교를 배우고 나서 이해가 부족한 게 있거나 근본불교를 어떻게 하면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같이 얘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8명이 화상으로 연결되어 스님과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학생들은 불교의 근본 교리 중에서 ‘오온’을 가장 어려워했습니다. ‘오온’에 대한 가르침을 어떻게 내 삶 속에 적용할 수 있는지 스님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나’라고 느끼는 게 없으면 식물인간이 아닌가요?

“저는 불교 근본교리 중에 오온(五蘊)에 관해서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오온(五蘊)의 가르침에 따르면 다섯 가지 요소가 있어서 ‘나’라고 느끼는 것이고, ‘나’라고 느끼는 것은 결국 착각이라는 것이라고 저는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착각이 사라진 식물인간과 같은 상태가 과연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함이 생겼습니다.”

“식물인간은 의식이 없는 상태예요. 착각이 없는 상태가 아니고 의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 대해서는 논쟁을 할 필요가 없죠. 그러나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는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상태와 사실을 사실대로 모르는 상태로 나눌 수 있습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무지하다 것은 사실을 왜곡해서 알거나, 모르고 있는 상태를 뜻해요. 둘 다 의식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식물인간은 의식이 없는 상태예요. 아예 의식이 없는 상태와 의식이 있으면서 사실에 깨어있는 상태는 전혀 다릅니다. 범주가 다른 두 가지를 비교하는 것은 잘못된 비교입니다.

‘나’라고 하는 실체가 과연 있는가

지금 우리는 의식이 있는 상태입니다.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인식상의 오류가 바로 ‘나라고 하는 어떤 실체가 내 몸의 어딘가에 있다’ 하는 착각입니다. ‘나’라는 실체가 있기 때문에 말도 하고, 보기도 하고, 죽으면 벌도 받고, 천국도 가고, 윤회도 한다는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런데 부처님이 연구해 보니까 ‘나’라고 하는 실체는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얘기입니다. 우리는 ‘나’라고 이름을 붙여 놓고 그런 게 내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부처님은 그런 게 없다고 하신 거예요.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몸을 다 해부해 봐라. 나라고 할 만한 게 몸에 있는가? 몸을 해부해 보면 지수화풍의 성질을 가진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여러 내장 기관으로 이루어져 있지, 몸의 어디에도 나라고 할 게 없다. 머릿속에 있는지 머리를 한번 해부해 봐라. 심장에 있는지 심장을 해부해 봐라. 나라고 할 것은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부처님은 ‘나’라고 하는 실체가 없다고 하셨어요.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거나, ‘아트만’라고 부르는 변하지도 않고 다른 것과 관계도 맺지 않는 나만의 나라고 하는 실체는 없다는 뜻입니다.

생물학적으로 움직이고 말하고 행동하는 내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죽어서 극락에 가거나 천당에 가는 나만의 나라고 할 게 없다는 뜻입니다. 인도에서는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내 몸 안에 있어서, 육체가 죽으면 나라는 실체가 소한테 들어가서 소가 되고, 개한테 들어가서 개가 되고, 전생에 독한 마음을 먹어서 이 생에 독사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뜻이에요.

이렇게 설명하니까 또 여러분은 지금 존재하는 ‘나’라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뜻은 아니에요. 경전에서는 나라고 할 만한 실체를 ‘나의 나’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나의 아트만이 없다는 뜻이에요.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작동의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자동차가 움직일 때 자동차 속에 ‘이것은 A자동차이다’, ‘저것은 B자동차이다’ 할 만한 어떤 실체가 없습니다. 그냥 자동차의 부품들이 모여서 작동하는 거예요.

마치 자동차의 부품들이 설계도에 따라서 작동하듯이, 인간도 인체의 세포가 DNA 설계도에 따라서 모여서 작동하는 겁니다. 여기에 정신 작용인 업(業)과 카르마(Karma)까지 소프트웨어로 깔려 있다고 보시면 돼요. 신체라는 하드웨어에 정신작용이라는 소프트웨어가 깔려서 인간이 행동을 하는 것이지 거기에 ‘나만의 나’라는 건 없다는 겁니다. 나만의 나가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전생이니, 내생이니, 천당이니, 지옥이니, 소가 되니, 말이 되니, 온갖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작동이 없다는 뜻은 아니에요. 지금 이렇게 작동을 하고 있잖아요. 정신 작용 역시 불변하고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정신 작용은 매일 업그레이드가 되고 있습니다. 마치 스마트폰에서 앱이 업그레이드되듯이 날마다 바뀌고 있어요. 우리의 머릿속에는 매일 정보가 들어오고, 그 정보를 처리하면서 우리의 정신이 바뀌기 때문에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엄격히 말하면 다르다는 겁니다. 어제의 하루를 경험하기 전의 나와 어제의 하루를 경험한 오늘의 나는 0.1%가 달라도 달라졌다는 거예요. 이렇듯 불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로를 규정짓고 그것이 나라고 착각하고 살아요.

쉽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만나면 스님이라고 부르죠. 그런데 제가 속가 집에 가서 아버님을 만나면 저를 보고 아들이라고 생각하겠죠. 만약 제가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가면 가게 주인은 저를 보고 손님이라 생각할 겁니다. 그것처럼 질문자도 만약 어떤 남자를 만나서 가정을 꾸리면 아내라고 불리게 되고, 아기를 출산하면 엄마라고 불리게 되고, 학교에 가면 학부형이라고 불리게 되고, 가게에 가면 손님이라고 불리게 되고, 절에 가면 신자라고 불리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인연에 따라서 나라는 존재가 규정되는 거예요. 본래 ‘나’라고 하는 건 없습니다. ‘나는 엄마이다’ 하고 불변의 ‘나’라는 것은 없다는 거예요. 시공간의 인연에 따라 이렇게 규정받기도 하고, 저렇게 규정받기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연소생’이라고 하는 거예요. 인연에 따라 이뤄지고 인연에 따라 사라질 뿐이지 시공간을 떠난 불변의 ‘나’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오온(五蘊)이 쌓여서 작동하고 있을 뿐

마찬가지로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다섯 가지를 의미하는 오온(五蘊)이라는 것도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도록 해서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가르침입니다. 인간의 행위를 살펴보면, 첫째, 육체의 작용이 있습니다. 이것이 색(色)이에요. 둘째, 정신의 작용은 네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수(受)는 어떤 감정이 일어나는 토대가 되는 느낌 작용을 뜻해요. 상(想)은 느낌에 기반을 두고 일어나는 감정 작용, 생각 작용, 기억 작용입니다. 행(行)은 그에 따라서 ‘해야지’, ‘말아야지’ 하는 의지 작용을 의미합니다. 식(識)은 어떤 것을 인지하는 아는 작용이에요. 네 개의 작용 중에 핵심은 식(識)입니다. 식(識)의 부수적인 작용이 수(受), 상(想), 행(行)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네 가지 정신 작용과 육체 작용을 합해서 인간의 행위를 다섯 가지로 설명한 거예요. 이렇게 설명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인간의 행위에는 단독의 실체가 없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겁니다. 색수상행식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것은 과학에서도 이미 밝혀졌습니다. 원자가 하나의 덩어리다고 생각했는데, 원자를 들여다보니까 그 속에는 핵도 있고, 전자도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이것은 핵과 전자가 핵심이 아니라 원자가 단독자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하는 게 핵심입니다. 그래서 오온(五蘊) 중에서 색(色)이 뭐니, 수(受)가 뭐니, 행(行)이 뭐니 하는 것은 학자들이 분석할 일인 거예요. 인간이 오온(五蘊)으로 쌓여있다는 얘기는 인연으로 뭉쳐진 존재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한 겁니다. 불변하는 나라고 하는 실체는 없다는 거죠.

이것을 알면 나라고 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입만 열면 ‘내 거다’, ‘나다’ 이런 얘기를 하잖아요. 그것의 근거가 없다는 겁니다. 모든 삶의 뿌리를 ‘내가!’ 하는 것에 두고 살아가는데 사실은 그때그때 작동하는 것 밖에 아니라는 거죠. 내가 하는 말과 생각은 소프트웨어에 깔려있는 대로 나타나는 현상에 불과한 겁니다.

그런데도 마치 ‘나’라는 단독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운전할 때 내비게이션이 ‘오른쪽으로 가세요’, ‘왼쪽으로 가세요’, ‘300 미터 가서 유턴하세요’라고 하니까 그 안에 사람이 있는 줄 착각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사실은 우리가 산다는 것은 그냥 소프트웨어가 깔린 대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에 불과한 거예요.

습관에 종속된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동적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을 세부적으로 설명한 것이 12연기입니다. 그렇게 이미 깔려 있는 소프트웨어에 의해 작동되는 노예 생활을 안 하려면 업을 끊어야 합니다. 업을 끊으려면 반복되는 연결 고리 중 하나를 끊어야 해요.

충동적으로 살아가면서 마치 자기가 주체적으로 산다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알면 더 이상 충동적으로 살지 않게 된다는 거죠. 우리는 기분이 모든 행동을 좌우합니다. 기분이 좋으면 뭐든지 다 주고, 기분이 나쁘면 ‘나는 죽었으면 죽었지 그건 못한다’ 하고 거부합니다. 그 기분이라는 게 아무 근거가 없다는 거예요. 그냥 이미 깔려 있는 소프트웨어가 작동된 결과일 뿐인 겁니다. 그러니 형성된 업식에 따라 너무 노예 생활을 하지 마라는 거예요.

기분 좋음이 없어야 되고, 기분 나쁨이 없어야 된다는 뜻이 아니라 좋음과 나쁨에 너무 놀아나지 마라는 겁니다. 조금만 진정해서 살펴보면 지금 하는 행동이 나에게 이익이 될 것인지 손해가 될 것인지 금방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후회할 일을 안 하고 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입을 악물고 억지로 살아가라는 뜻이 아니에요.”

“네, 잘 알았습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불교대학에서 락이 곧 고라고 배웠습니다. 저는 요즘 행복한데 이런 즐거움이 언젠가는 괴로움으로 변할까 봐 두려워요.
  • 남편에게 불쾌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불쾌하구나’ 알아차려보지만 감정이 더 안 좋아집니다. 그래도 불쾌한 감정을 표출하지 않고 반대로 행동해보고 있습니다. 마음과 다르게 행동하는 제가 가식적으로 느껴지고 답답합니다. 마음에서부터 불쾌하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요?
  • 십이연기와 오온십이처를 공부하고 제가 좋고 싫은 감정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감정에 끌려가고 싶지 않아서 이제 행동을 하기 전에 멈추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수동적으로 사는 거 같아요. 업식에 따라 좋고 싫고 반응하는 게 아니라 부처님의 길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어떤 느낌이나 감정을 알아차리면 잠시 수그러 들었다가도 다시 일어나고, 다시 알아차렸지만 결국 그 감정에 휩쓸려 무너지고 맙니다. 어떻게 알아차려야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사라지게 할 수 있나요?
  • 저에게 암시를 하는 기도가 좋아서 매일 108배를 하는데 암시하고 싶은 내용이 많아서 매일매일 기도 내용이 바뀌게 됩니다. 이렇게 기도해도 되는 걸까요?
  • 출가 수행자들이 지켜야 할 계율 중에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고 하는 계율도 있나요?
  •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이 무한에 가까운 신체, 정신 능력을 가지게 되면 부처님의 말씀은 우리 삶에 적용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시대에 수행자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마지막으로 스님은 다음에 배울 과목인 불교 변천사를 배우는 이유와 그 목표에 대해 강조하며 법문을 마쳤습니다.

“근본불교에 대한 공부를 마쳤으니까 이제 남은 과목은 불교의 변천사입니다. 불교의 변천사는 단순히 역사를 공부하는 시간이 아니에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주 합리적이고 인간의 무지를 깨뜨리며 중생의 병을 치유하는 방책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복을 빌고 사람이 죽으면 극락 간다는 얘기를 하는 수준으로 전락해 버렸는지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변했는지 궁금하잖아요. 처음부터 부처님이 이렇게 가르쳤다면 모르겠는데 이렇게 안 가르쳤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요?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 불교 변천사를 공부하셔야 합니다.

불교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

가령 부처님은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오온(五蘊)을 설명하셨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오온(五蘊)의 각각이 실체가 있다고 철학적으로 변질이 됐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게 대승불교입니다. 비록 부처님의 이름, 경전, 용어를 사용해도 이미 근본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면서 원래의 부처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고 해서 일어난 게 대승불교입니다.

대승불교도 세월이 흐르다 보니까 또 이런 현상이 빚어졌습니다. 두 번째 현상이 빚어질 때는 문자의 발명이 큰 영향을 줬습니다.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고 대화를 하면서 인격의 감화를 받아야 되는데 문자로써 가르침이 전해지니까 인격은 없어지고 지식만 남게 된 거예요. 문자의 발명 덕분에 불교를 전하기 위해 인도 사람이 중국까지 안 와도 되는 큰 장점이 있었던 반면 중국 사람들이 볼 때는 인격이 없는 불교를 하다 보니 점점 학문화가 된 겁니다. 그래서 일어난 게 선불교입니다.

선불교가 다시 지금에 이르러서 또 이런 현상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원래 부처님이 가졌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자는 목표의식을 갖고 불교 역사를 공부해야 합니다. 그냥 불교 역사에서 몇 년도에 뭐가 일어났다는 것을 배우려는 게 목표가 아니에요. 제대로 된 불교 역사관을 가져서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 공부를 하는 겁니다. 옛날 방식으로 돌아가자는 뜻이 아니라 부처님이 가졌던 그 문제의식으로 돌아가자는 의미입니다.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 공부를 하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 법문을 한 후 5시가 넘어 방송을 마쳤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 8시 30분부터는 온라인 일요명상을 시작했습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 41번째 진행되는 온라인 명상입니다.

간단히 인사말을 건넨 후 지난주에 4명이 영어로 올린 질문에 차례대로 답변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명상할 때 자꾸 애가 써진다며 편하게 명상하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명상을 하는 방법

“명상할 때 애가 써집니다. 편하게 명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애가 써질 때마다 알아차리고 긴장을 푸는 연습을 반복해서 해야죠. 긴장을 하는 이유는 잘하려고 너무 욕심을 내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 명상인데, 명상을 욕심으로 하니까 애가 써지는 일이 발생하는 거예요.

‘내가 명상을 잘하려고 욕심을 내고 있구나’

이렇게 알아차리고 욕심을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연습을 해도 잘 안 될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욕심을 내서 잘하려고 하는 것이 오랜 습관으로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긴 알아도 나도 모르게 그런 습관이 계속 나옵니다. 그럴 때마다 ‘아, 내가 욕심을 내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내려놓는 연습을 반복하면서 긴장을 점점 풀어나가야 합니다.

명상을 할 때는 욕심을 내서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하겠다!’ 이런 의도를 갖고 명상을 하면 안 됩니다. 먼저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세요. 고개를 숙이거나 하는 흐트러진 자세는 생각이 더 많아지게 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자세는 바르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니 마음은 아무런 할 일이 없는 한가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후 다만 코끝에 관심을 둘 뿐입니다. 그러면 코끝에서 호흡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어떤 생각에 관심을 두게 되면 호흡 알아차림은 사라집니다. 호흡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 이런저런 일에 생각이 옮겨 다니는데, 이것을 ‘산만하다’라고 말합니다.

마음을 코끝에 딱 집중시켜야 해요. 여기서 코끝은 육체적인 코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숨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내가 호흡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상태를 지속하는 것이 명상입니다. 아무 노력도 필요 없습니다. 관심을 콧구멍 끝에 두면 호흡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돼요.

어떤 상황에 처해도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기 위해서

호흡하는 것을 놓쳤다는 것은 관심이 다른 곳을 향했다는 것입니다. 우선 여러분들은 콧구멍 끝에 관심을 오래 묶어두는 연습을 먼저 해야 합니다. 긴장하거나 애쓸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긴장하게 되면 숨이 거칠어집니다. 긴장하지 않으면 시간이 흐를수록 숨은 부드러워집니다. 부드러운 숨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미세한 감각을 알아차린다는 겁니다. 미세한 감각을 알아차리게 될 때 우리는 미세한 느낌도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미세한 느낌에 의해서 우리의 욕망과 감정이 비롯되기 때문에 그 느낌을 알아차리고 거기에서 멈추게 되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게 됩니다.

부처님이 걸식을 갔을 때 한 바라문이 동냥을 얻으러 온 부처님에게 욕설을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미세한 느낌을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에 욕을 하는 바라문을 보고도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겁니다. 기분이 나쁜데 참으면서 미소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이어서 3명의 질문에 대해 더 답변을 한 후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명상하는 방법을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편안한 가운데 콧구멍 끝에 관심을 두어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거기에 의미 부여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코끝에 관심을 두고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어떤 생각도 무의미한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을 멈춘다’ 이렇게 설명하기도 합니다. 생각을 멈춘다는 것은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일어날 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서 스토리를 만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나도 모르게 스토리를 만들었다면 이미 호흡을 놓쳤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애쓰지도 말고, 긴장하지도 말고, 안 된다고 포기하지도 말고, 그냥 꾸준히 해 봅니다. 반가부좌를 하고, 허리를 똑바로 펴고,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눈을 지그시 감고, 몸과 마음을 편안히 갖고, 관심을 콧구멍 끝에 딱 두어서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놓치면 다시 합니다.”

오늘은 35분 간 명상을 했습니다.

탁, 탁, 탁!

죽비 소리와 함께 명상을 마쳤습니다.

“해보고 난 후 소감을 채팅창에 올려주세요”

수십 개의 소감이 실시간 채팅창에 올라왔습니다.

“다리가 매우 아팠습니다.”
“I felt a lot of pain in my legs.”

“고개를 숙이지 않으니 망상이 덜했습니다.”
“I had less distracting thoughts because I didn’t lower my head.”

“어느 때보다 편안했습니다.”
“I was very comfortable throughout.”

“망상은 있었지만, 마음은 편안했습니다.”
“There were distracting thoughts but my mind was at ease.”

“조금 길게 느껴졌습니다.”
“Felt a little long.”

“순간순간 망상이 올라왔으니 바로 호흡으로 돌아갔습니다.”
“I had distractions at times but I was able to go straight back to my breaths.”

“긴장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I realized I was so tensed.”

“다리가 많이 저렸지만, 끝까지 참고했습니다.”
“My legs ached a lot, but I was able to endure to the end.”

“졸려서 꾸벅하고 졸았지만, 다시 집중했습니다.”
“I was dozed off but I was able to refocus.”

“놓치고 잡고 놓치고 잡았지만, 마음은 편안했습니다.”
“I kept having to go back to the breath because I lost the focus but my mind was still at ease.”

“가슴에 답답한 감정이 느껴져 힘이 들었습니다.”
“My chest felt a kind of frustrated stuffy. It was difficult for me.”

“억울함을 어떻게 말할지 생각하는 망상을 하였습니다.”
“I was distracted by the thought I’ve been trying to express how wrong I felt.”

“등받이 쿠션을 사용하니 다리가 저리지 않았습니다. 집중하자마자 이렇게 했는데요. 몸은 편안해져서 좋았는데 집중이 흐트러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깊은 호흡에 빠지기 바로 직전에 더 깊이 빠지는 명상 과정에 두려움이 느껴졌습니다. 계속 제 생각에서 호흡에 더 깊이 빠지지 않으려고 방해를 하는 것 같습니다.”
“I used a back pillow and felt no numb legs. In and out of thought, in and out of focus. I drifted off a little when I relaxed. Every time I get close to a deep state of relaxation, I feel fear of going deeper, and my thoughts keep interfering with the process.”

다양한 소감을 스님이 직접 읽어준 후 방송을 마쳤습니다.

“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편안한 일주일이 되기를 바라고요. 다음 주에 또 뵙겠습니다.”

방송이 끝나고 스님은 영어 통역을 해준 국제국 활동가들과 미국의 바이든 새 정부와 코로나 대처 상황에 대해 대화를 주고받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대구경북지부 주간반 활동가들과, 오후에는 강원경기지부 주간반 활동가들과 온라인 정초법회를 할 예정입니다. 저녁에는 행복학교 참가자들을 위한 특강이 있습니다.

▼ 온라인 일요명상은 아래 유튜브에서 다시 보기 하실 수 있습니다.

▲ 영상 보기

전체댓글 39

0/200

박경호

좋은 법문 감사드립니다

2021-03-01 22:21:08

ㅎ ㅎ

나라는게 없다 오묘하군

2021-01-24 12:07:03

굴뚝연기

[…부처님이 걸식을 갔을 때 한 바라문이 동냥을 얻으러 온 부처님에게 욕설을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미세한 느낌을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에 욕을 하는 바라문을 보고도 미소를 지을 수 있었던 겁니다. 기분이 나쁜데 참으면서 미소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스님의 하루 아니면,어찌살까요 ㅠㅠ끝마무리 부분에서,내일오전ㅡ대구경북지부 아니라,서울제주요~^^

2021-01-24 01: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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