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9.26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 농사일
“나를 싫어하거나 비난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방법”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새벽에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을 한 후 하루 종일 농사일을 했습니다.

새벽 4시 30분, 맑은 종소리가 생방송 주소줄을 타고 전국의 천일결사자들에게 울려 퍼졌습니다. 오늘도 4천여 명의 천일결사자들이 생방송에 접속하여 함께 정진을 시작했습니다.

정성껏 예불을 마친 후 스님이 카메라를 바라보고 인사말을 했습니다.

“오늘은 9월 26일 정토회 만일결사 중 제10차 천일결사, 제3차 백일기도 중 6일째 정진일입니다. 함께 정진하겠습니다.”

이어서 삼귀의, 수행문, 참회, 108배, 명상, 경전 독송을 차례대로 했습니다.


사홍서원으로 천일결사 기도를 마친 후 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100일 기도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꾸준히 정진을 해나가기 위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강조해 주었습니다.

“이번 3차 백일기도부터 새로 천일결사에 동참한 사람들은 지난 6일 동안 기도를 빼먹지 않고 매일 정진을 하셨습니까? (웃음)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듯이 3일을 넘기지 못하고 그만두거나 중간에 하루 이틀 빼먹은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뭔가 큰 잘못을 한 건 아니에요. 그것이 보통 사람들의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오늘 결심을 하면 대부분 그 결심이 3일을 넘기지 못합니다. 수행이란 보통사람이 넘기지 못하는 그 고비를 넘겨서 기적을 만드는 일입니다.

세상에 굴림을 당하는 사람 vs 세상을 굴리는 사람

흔히 ‘내가 내 삶을 산다’고 말하지만 사실 잘 살펴보면 여기서 말하는 ‘나’가 누구인지 뚜렷하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에 주변 환경에 따라서 내가 하는 행동이 결정됩니다. 마치 낙엽이 바람에 따라서 이리저리 흔들리듯이, 여러분도 남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따라 좋은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고 싫은 마음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즐거웠다가 괴로웠다가, 무언가 하고 싶었다가 하기 싫었다가, 이렇게 마음은 늘 바뀝니다. 이럴 때 내가 그렇게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늘 경계에 좌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선사들은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세상을 굴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에 굴림을 당한다’

내가 세상을 굴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굴리고 있다는 겁니다. 누구나 다 세상의 영향을 받습니다. 부처님이라고 해서 세상의 영향을 안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사람에 따라 주변의 영향을 전적으로 받는 경우가 있고,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 속에서도 자신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지켜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정도에 따라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가 결정됩니다.

우리는 신에게 의지하고, 부모에게 의지하고, 남편이나 아내에게 의지하고, 돈에 의지합니다. 이렇게 뭐든지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수행의 목표입니다. 예전에는 어떤 이야기만 들으면 자동으로 화를 내곤 했는데, 이제는 예전보다 덜 흔들리는 쪽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이제는 그런 소리를 들어도 아예 아무렇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마음이 흔들리더라도 예전보다 덜 흔들리고, 점차 그런 소리를 들어도 무덤덤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나의 주체성을 확보해나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을 한다고 해서 한꺼번에 모든 것이 바뀌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랜 기간 동안 그렇게 반응해온 습관과 오랫동안 무언가에 의지해서 살아온 노예근성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랫동안 가축으로 기르던 짐승을 어느 날 산에 풀어준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자연에 적응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런 종속성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습니다. 변화하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정진하는 이유는 자유의 길, 주체의 길, 행복의 길로 나아가기 위함입니다. 지금까지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또는 누군가 이런 행동을 하면, 자동적으로 화가 나고, 자동적으로 괴로웠는데, 이제는 자동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내가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범위를 넓혀 나가는 것입니다.

결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이런 변화를 위해서는 단호한 결심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꾸준함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단호하게 결심을 해도 그걸 유지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나온 겁니다. 정진이라는 말은 꾸준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각오도 필요하긴 하지만 각오는 오히려 사람을 긴장시키기 때문에 나중에 힘이 듭니다. 힘이 들면 중간에 그만두게 돼요. 중간에 그만 두면 그로 인해 좌절감이 생깁니다. 그래서 부작용이 많습니다.

오히려 가벼운 마음으로 하는 것이 꾸준히 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무언가 하기로 정했으면 잘 돼도 하고 안 돼도 하는 겁니다. 매일 아침마다 하는 기도 역시 졸려도 하고, 안 졸려도 하고, 아파도 하고, 안 아파도 하는 거예요. 하기로 정했으면 그냥 하는 거예요. 이럴 때 ‘일어나야지’, ‘일어나야 되는데’ 이렇게 자꾸 각오하고 결심하지 말고 그냥 꾸준히 해나가는 겁니다. 그러면 과거의 습관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나게 됩니다.

가끔 ‘10년을 했는데도 아직도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10년을 했는데도 아직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않았다는 말이지 옛날과 비교해보면 훨씬 나아져 있습니다. 만약 옛날과 비교했는데도 하나도 나아진 게 없다면 정진을 잘못한 겁니다. 여러분은 뭐든지 욕심으로 하니까 정진을 하고 나서 금방 변화가 생기길 원합니다. 변화가 금방 생기지 않으면 ‘노력해도 소용없네’ 하고 금방 포기하게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기 싫은 마음이 든다고 해서 잘못된 건 아닙니다. 정진하는 도중에 졸음이 온다고 해서 잘못된 것도 아니에요. 졸음이 오는 가운데서도 하고, 하기 싫은 가운데서도 하고, 하기로 했으면 그냥 하는 게 정진입니다. 정진을 하고 나서 기분이 좋을 수도 있고, 기분이 나쁠 수도 있고, 정진을 하고 싶은 날도 있고, 하기 싫은 날도 있습니다.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꾸준히 해야 습관이 바뀝니다.

정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꾸준함입니다. 이제 입재한 지 6일째인데 앞으로 100일 동안 꾸준히 해나가 보시기 바랍니다. 원래는 새벽 5시에 정진하는 게 가장 좋지만, 나도 모르게 눈을 뜨니까 6시가 되어버렸다면 그때라도 정진해야 합니다. 6시에는 출근해야 해서 정진을 못했다면 직장에 다녀와서라도 정진을 합니다. 제 시간에 맞춰서 정진을 하는 게 가장 좋지만 이미 제 시간을 놓친 경우에는 늦게라도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늦게 정진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에요. 제 시간에 정진하는 것이 효과가 100이라면, 제 시간을 놓친 경우에는 늦게라도 하면 효과가 50은 된다는 뜻입니다. 저녁에라도 정진을 하면 효과가 30은 되니까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오늘은 어쩌다 보니 못하게 되었다면 지나간 건 지나간 거고 내일은 빼먹지 않고 정진을 해야 합니다. 이때 ‘하루 빼먹었으니 이번 100일은 포기하고 다음 100일부터 잘하지 뭐’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100일 중에 나도 모르게 하루 빼먹었다고 해도 99일을 정진하는 것이고, 이틀을 빠졌다고 해도 98일을 정진하는 겁니다. 하루 빼먹었다고 이번 100일 전체를 포기하면 결국 열흘도 정진하지 않는 결과가 빚어지는 거예요.

정말로 삶의 변화를 가져오고 싶다면

첫째, 100일 동안 안 빼먹고 꾸준히 하는 게 제일 좋습니다. 둘째, 중간에 혹시라도 놓쳤으면 놓친 날은 넘기고 그 다음 날부터 다시 꾸준히 해나갑니다.

등산을 할 때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다리가 아프면 잠시 쉬어서라도 계속 가야 합니다. 오르막이 나타나면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계속 가고, 장애물을 만나면 잠시 머뭇거리고 길을 살피게 되더라도 가기로 했으면 계속 가야 합니다. 그래야 언젠가 정상에 오를 수 있습니다.

‘이거 한다고 뭐가 좋나?’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이 시간에 잠이나 자야지’라고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살면서 늘 이 시간에 잠을 자왔잖아요. 늘 자왔는데도 인생이 힘들었잖아요. 지금까지 늘 부지런히 살았는데도 인생이 힘들었잖아요. (웃음)

삶에 변화가 있으려면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만으로는 안 됩니다. 무언가 다른 것이 가미되어야 변화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정진입니다.

그리고 이번 3차 백일 정진 기간 동안에는 정토회의 모든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전법을 하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우리 주변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의 마음이 조금 덜 괴로울 수 있도록, 스트레스를 덜 받을 수 있도록 우리가 힘을 모아서 도와줍시다. 전법을 할 때도 역시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정진입니다. 우선 내가 먼저 좋아져야 합니다. 그런데 나만 좋으면 안 되고, 내가 좋아지면서 동시에 이웃도 좋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전법이 필요합니다.

천일결사의 목표에서 가장 첫 번째 항목이 우선 나부터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경계에 영향을 받던 삶으로부터 벗어나 조금씩 자유의 영역을 넓혀 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곧 주체성을 넓혀 나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꾸준한 자기 정진이 필요합니다.”

이어서 오늘 읽은 경전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오늘 읽은 경전에는 부처님을 비난했던 사람이 부처님을 만나고 나서 위대한 수행자로 바뀌게 된 한 바라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라문은 인도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입니다. 경전에는 농사를 짓는 바라문이라고 나오지만 바라문이 직접 농사를 지었다기보다는 수하에 500명의 하인이 농사를 짓도록 진두지휘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혼자서 어떻게 쟁기 500개를 끌 수 있겠어요? (웃음)

부처님 당시 바라문들은 사문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바라문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신분제에 의해 주어진 사회적 지위였습니다. 정신세계를 담당했던 그들이 당시 사회에서 최고의 계급이었습니다. 반면 사문은 중인이나 평민 계급 중 스스로 출가를 해서 수행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신분에 의해 수행자가 된 것이 아니라 자기 결심에 의해 수행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문에게 바라문은 권위주의자 또는 형식주의자로 보였고, 바라문에게 사문은 그저 신분이 낮은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나는 마음의 밭에 수행의 씨앗을 뿌리는 해탈의 농사를 짓소

경전에 나오는 농사짓는 바라문도 자신이 볼 때 부처님은 사문이니까 조금 낮춰봤습니다. 또 부처님은 출가를 해서 남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었기 때문에 거지 취급을 한 부분도 있었을 겁니다. 이 농사짓는 바라문이 밥을 나누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걸식을 하는 부처님도 그 뒤에 줄을 섰습니다. 부처님 차례가 오자 바라문이 말을 겁니다.

‘우리는 농사를 지어서 먹고사는데, 사문은 왜 멀쩡한 사대육신을 가지고도 농사를 짓지 않는가?’

이는 곧 음식을 주지 않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들처럼 나에게도 음식을 달라’고 말하면 그 사람의 이야기에 끌려가는 것이 되는데, 부처님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끌려가는 법이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대응 설법을 하십니다.

‘나도 농사를 짓소. 당신은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먹을 것을 수확하는 농사를 짓지만, 나는 내 마음 밭에 수행의 씨를 뿌리고 해탈을 수확하는 농사를 짓습니다. 그래서 괴로움이 없는 경지를 얻습니다.’

바라문은 이 이야기를 듣고 자기가 짓는 농사보다 부처님이 짓는 마음의 농사가 훨씬 더 훌륭한 농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음식을 주려고 하자 이번에는 부처님이 그 음식을 거절합니다.

조금 전에는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음식을 안 주려 했고, 이번에는 자기 마음에 든다고 다시 음식을 주려 한 거죠. 자기가 마음에 든다고 주고,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안 주면, 그건 올바른 공양의 자세가 아닙니다. 자기가 한 말과 행동을 돌이키고 공경하는 마음을 담아서 해야 하는 것이 공양입니다. 부처님도 바라문을 설득해서 음식을 받고자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공양은 거절을 한 것입니다.

농사와 공양에 대한 이야기에 감동을 받은 바라문은 부처님께 법을 설해 달라고 청하게 되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결국 바라문도 출가를 하게 되었고, 부지런히 정진을 한 결과 아라한과를 증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를 싫어하거나 비난하는 사람과 대화하는 방법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경전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걸식하는 부처님께 공양드리기를 거부한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해서 결국 그들이 부처님의 법문을 청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재가신자가 되거나 출가수행자가 된 사례들이 많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두가 부처님을 처음부터 좋아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싫어하거나 비난한 사람마저도 부처님은 거기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기분 나빠한 게 아니라 그런 것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바꿀 수 있었던 겁니다.

말이 쉽지 그렇게 실제로 행동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대를 어떻게 교화할 것인지를 생각하기 전에 우선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내가 그것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군가 부처님에게 욕을 해도 부처님은 ‘왜 욕을 하는가?’하고 따져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의 대화법은 주제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돌리는 것이 하나의 특징입니다. 부처님이 어느 바라문의 집에 걸식하러 가셨는데, 바라문이 밥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부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대는 사대육신이 멀쩡한데 왜 남의 집에서 밥을 달라고 하는가?’

오히려 부처님은 바라문에게 이렇게 되묻습니다.

‘당신 집에 손님이 올 때 선물을 가지고 옵니까?’
‘가지고 오죠.’

‘그때 선물을 받지 않으면 그 선물은 누구의 것입니까?’
‘그야 가져온 사람의 것이죠.’

‘당신이 지금 나에게 욕을 선물했는데, 내가 웃으면서 그 욕을 받지 않으면 그 욕은 누구의 것입니까?’

이렇게 부처님은 늘 스스로 알아차리도록 하셨습니다. ‘욕을 하면 당신만 손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답을 통해서 스스로 자각하도록 했습니다. 결국 대화 끝에 상대방이 스스로 ‘아,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하고 알게 됩니다. 이렇게 스스로 알아차리는 것을 ‘자각(自覺)’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자각하면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부처님께 사과를 하거나, 법문을 청하게 됩니다.

이런 내용들이 우리가 지난 일주일 동안 읽은 경전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경전을 함께 읽으면서 여러분에게도 많은 깨우침이 있길 바랍니다. 이번 일주일도 빠지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합장으로 인사를 하고 방송을 마쳤습니다.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을 마치고 바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논 뒤로 가서 밤을 주웠습니다. 어제 낫에 손등을 베여서 오늘은 기다란 집게를 가지고 왔습니다.


개울에 빠진 밤도 주웠습니다. 스님은 집게를 손가락처럼 자유롭게 쓰며 밤을 집어냈습니다.




산 아랫밭 뒤로도 가보았습니다.


크기는 작지만 알이 꽉 찬 밤이 많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밤을 줍고, 산 아랫밭에 무와 배추가 잘 자라고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농사일을 마치고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온 스님은 두북 공동체 대중이 함께 자리한 발우공양에 참석했습니다. 추석을 앞두고 법사님들은 문경, 아도모례원 등 각자의 수행처소로 모두 흩어집니다. 스님은 전체적으로 몇 가지 공지할 내용이 있다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추석 연휴 기간에는 공동체의 전 성원이 온라인 명상수련에 함께 하겠습니다. 여름에는 농사일 때문에 하루 일과를 변경해서 운영했는데, 명상수련이 끝나고 10월 5일부터는 하루 일과 시간을 원래대로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두북 공동체에 공식적으로 배정된 사람은 네 명입니다. 나머지는 다 네 명에게 붙어사는 사람들이에요. 붙어사는 사람들은 밥을 얻어먹으려면 하루에 2시간은 무조건 농사일을 해야 합니다. 서울에 올라가서 업무를 해도 되는데, 두북 수련원에서 일할 때는 이 차이가 있을 뿐이에요. (웃음)

코로나 때문에 출입을 금했던 자원봉사자들도 10월 5일부터는 다시 출입을 허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발우공양을 마치고 10시 20분부터는 추석에 나갈 방송 촬영을 했습니다. 먼저 유튜브 채널 '법륜스님과 함께하는 행복TV' 요청으로 추석 인사를 촬영했습니다.

10분 정도 촬영을 하고 이어서 법회를 촬영했습니다. 추석 연휴 동안 스님은 온라인으로 명상수련을 진행하기 때문에 미리 법회를 녹화해서 방송하기로 했습니다. 수요일 수행법회와, 금요일 정기법회를 위해 각각 다른 인사말로 두 번 촬영했습니다.

추석 연휴에 대해 인사말을 한 후 즉문즉설 시간도 가졌습니다. 연휴 기간이니 세 사람에게만 질문을 받고 한 시간 안에 법회를 마쳤습니다.

  • 큰 댁에서 부모 유산인 집을 팔고 제사도 안 지낸다니 무척 서운합니다. 서울에 있는 손주는 온라인으로 제사를 지내자고 하는데 온라인 제사를 지내도 될까요?
  • 결혼하고 19년 동안 3살 어린 시동생에게 꼬박꼬박 도련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요즘 시대에 ‘도련님’은 맞지 않는 호칭인 것 같아요. 적당한 호칭이 없을까요?
  • 집에만 있어야 하는 추석 연휴 동안 미래를 대비해 무엇을 공부하면 좋을까요?

촬영을 마치고 운동장으로 나오니 활짝 핀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에 한들한들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바람개비 알아요? 제가 어렸을 때는 이렇게 꽃잎을 네 개로 만들어서 하늘 위로 날리는 놀이를 했어요. 그러면 꽃이 뱅글뱅글 돌면서 땅에 떨어져요."

떨어진 꽃송이를 주워 꽃잎을 네 개로 만든 뒤 하늘 위로 힘껏 던졌습니다. 꽃잎이 뱅글뱅글 도는 듯하다가 땅에 툭 떨어졌습니다.

"잘 안 되네요. 우물 속에 던지면 뱅글뱅글 잘 돌아요. 어릴 때 이런 거 안 해봤어요?" (웃음)

오후에는 실내에서 각종 업무를 처리했습니다.

해질 무렵 다시 비닐하우스로 나갔습니다. 4동에 갓과 시금치를 심기 위해 옥수수 뿌리를 캐고 밭을 뒤집는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스님은 명상수련을 앞두고 오늘 아침부터 단식을 시작했습니다. 빈속으로 새벽에 천일결사 기도를 촬영하고, 아침 울력을 하고, 다시 법회를 녹화하고, 오후 울력까지 나오니 기운이 없었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단식을 시작해서 힘이 없네요. 이만 들어가 볼게요.”

“네, 스님.”

잠시 후 스님은 삽을 들고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말없이 땅을 삽으로 뒤집었습니다.

울력을 마치고 저녁에는 원고를 교정하고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내일은 아침에 농사일을 한 후 저녁에는 온라인 일요 명상수련을 생방송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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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롱불

나를 싫어하거나 비난하는 사람과는 마주하기 싫어합니다. 그리고 행복학교 홍보도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보냅니다. 이마저도 엄청 망설이다 보냅니다. 부처님께서 자신을 비웃거나 비난하는 사람들과 문답식의 대화로 그들을 제자로 만드신 과정을 보며 나도? 라지만 역시 용기가 나지를 않습니다. 한번 다시 시도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10-10 07:03:28

스님 이마도 반질반질 윤기나고요.
스님이 주우신 밤톨도 광택이나요.

2020-10-07 09:22:38

보각

스님 고맙습니다. 세상을 굴리는 사람, 꾸준히 가볍게 수행해보겠습니다

2020-10-06 17: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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