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8.13. 농사일, 두북특별위원회 회의
“간절함이 없어서 고민입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농사일을 하고 하루 종일 두북특별위원회 회의를 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밭으로 나갔습니다. 스님은 우렁이를 건지기 위해 체도 챙겨 왔습니다. 논 아래쪽 수로에도 우렁이가 많이 쓸려 내려와 있었습니다.


스님은 먼저 수로에 가득 찬 풀을 베어 거둬 낸 후 우렁이를 건졌습니다.


금세 대야에 가득 우렁이를 건졌습니다.


아랫논으로 가서 논둑을 따라 걸으며 우렁이를 고루 던져주었습니다.


아랫논에서도 역시 수로를 메운 풀을 베고 우렁이를 건져 논으로 던져주었습니다.


아랫논을 한 바퀴 돌고 윗논으로 올라가 보았습니다.



윗논 수로에서도 우렁이를 건져 논으로 보내주었습니다.



윗논, 아랫논을 모두 살펴본 후 스님은 낮아지고 터진 논둑을 메웠습니다.

그리고 물을 막아둔 수로를 터서 물을 빼주었습니다. 흙으로 만든 사이둑 끝을 터주고 포대를 깔았습니다. 이렇게 하면 물은 빠지고 주변 흙은 쓸려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비가 오면 여기 고인 물이 논으로 넘쳐흐르니까 논둑이 터질 위험이 있어요. 그래서 논의 물을 급히 빼니까 우렁이가 다 쓸려 내려와요. 이렇게 둑가에 넘치는 물을 미리 좀 빼놓으면 그럴 일은 없지요.”

스님은 아랫 논으로 가서도 같은 작업을 했습니다.


논에서 내려와 사용한 도구를 씻었습니다.


도구를 씻고 나서 스님은 농사 창고 앞을 지나다 움푹 팬 땅을 발견했습니다. 대중이 오다가다 발이 빠지거나 미끄러지기 쉬워 보였습니다.

“아직 울력 시간이 남았죠?”

“네. 10분 정도 남았습니다.”

“그럼 저 좀 도와주세요.”

스님은 뒷정리를 하고 있는 행자 둘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움푹 팬 땅을 메우는 작업을 했습니다. 농사 창고 주변에서 퍼온 흙과 돌을 팬 곳에 채우고 장화발로 꼭꼭 다져주었습니다.




“마르고 나면 다니기가 한결 수월할 거예요.”

금방 땅을 메우고 울력을 마쳤습니다.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와 발우공양을 한 후 오전 10시 30분부터 두북특별위원회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정토대전 편찬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정토대전은 경전 모음집, 불교사상서, 사회사상서, 수행의식집, 깨달음의 글, 총 5권을 편찬할 계획입니다. 특히 불교사상서와 사회사상서에 대해 많은 토론이 펼쳐졌습니다.

불교사상서 기획에 대해서는 ‘승가공동체의 역사’라는 목차를 넣을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넣을 것인지가 쟁점이 되었습니다.

“불교의 세계관, 인간관, 가치관이 주요 목차인데 마지막에 승가공동체가 목차로 나오는 게 조금 어색한 것 같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해왔는지 아는 것도 불교사상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부처님 당시부터 베사카 부인 등 재가 수행자의 활동들이 왕성하게 있었습니다. 이런 재가자들의 활동이 후대에 전승되지 못하고 다시 출가자 중심으로 가게 된 측면이 큽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렇게 재가 수행자들의 실천이 있었으므로 오늘날 정토회가 재가자 중심으로 활동한다는 정신의 근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재가자 중심으로 활동한다는 표현도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정토회의 지향은 출가와 재가를 뛰어넘어 활동하는 것 아닌가요?”

...

스님도 법사님들의 토론을 경청한 후 이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승가공동체의 역사를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상가라는 용어 속에는 재가상가와 출가상가라는 구분이 없습니다. 상가의 구성원 중에 재가 수행자와 출가 수행자가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죠. ‘상가’란 수행공동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혈통과 신분에 의해서 상가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상가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출가’라는 자기 결단이 필요하다.‘

이렇게 해서 초기에는 출가 수행자들이 생기게 된 것이고, 나중에는 ‘출가하지 않고도 오계와 팔계를 지키면 수행자가 될 수 있다’고 하면서 상가 구성원에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라는 네 가지 부류가 생기게 된 겁니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소승불교에 와서는 출가자만 상가의 구성원이 되고, 재가자는 신자로 전락했습니다. 그러자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다시 출가와 재가를 구분하지 않고 새로운 상가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보살 상가입니다. 그런데 대승 불교도 시간이 흐르면서 출가한 스님들만 상가의 구성원이 되고, 재가자들은 다시 신자로 전락하게 된 거예요.

선(禪)도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고 하면서 새로운 상가를 제안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육조 혜능 대사는 승려가 되기 전에 법을 얻었거든요. 법을 깨닫고 나중에 승려가 된 겁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법을 얻는 데에 있어서 출가와 재가를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禪)은 상가 구성에 있어서는 혁명적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출가 승려가 중심이 된 상가를 구성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오늘날 정토회는 상가를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출가와 재가, 남녀, 승속을 구분하지 않고 발심한 사람을 상가의 구성원으로 하고 있습니다. 용어의 표현 상으로는 공동체 안에 들어온 사람과 밖에 사는 사람을 출가와 재가로 구분하기는 하지만, ‘수행공동체’라는 새로운 상가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즉 정토회에서는 출가와 재가를 위계의 개념으로 하지 않고 있어요. 승려이든 승려가 아니든 모두가 평등하다는 관점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법륜 스님을 스님이기 때문에 존경하는 문화는 없어져야 합니다. 물론 정토회에도 출가한 승려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만약 스님이기 때문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을 앞자리에 앉도록 한다면, 그것은 마치 부처님 당시에 브라만 출신 스님이라고 더 대우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브라만 출신이라도 승려가 되면 천민 출신 승려와 평등하게 지냈기 때문에 당시 브라만 사회에서 엄청난 왕따를 당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만약 출가한 스님이 지금 정토회에 들어와도 아무런 특별 대우를 해주지 않으니 그래서 ‘스님을 이런 취급하다니!’ 하면서 엄청 힘들어 할 수 있어요.

불교 역사 속에서는 재가자로서 뛰어난 수행자가 된 사례들이 많이 있습니다. 중국의 방거사, 한국의 부설거사, 인도의 유마거사의 사례는 승속을 뛰어넘은 사례들이에요. 대승 경전에서는 보살들이 비구들보다 수행의 경지가 더 높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선불교도 법을 전할 때는 승속을 구분하지 않는 파격을 보여줬죠. 그런 측면에서는 새로운 상가를 구성한 것과 다름없었는데,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출가 승려의 전유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출가 공동체는 조직으로 뭉쳐져 있고, 재가자들은 흩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재가자들은 법을 널리 퍼뜨리는 효과는 크지만, 역사적으로 법이 전해져 내려가게 하는 것은 스승과 제자로 이어지는 출가 공동체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재가 수행자라고 하더라도 대부분 자신의 당대에 끝이 나지 후대에 계승되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요.

반면에 출가 공동체는 스승과 제자로 이어지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꼭 누구의 제자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사람과 사람에 의해 법이 전해져 내려가니까 모든 성과물이 출가 공동체 안에 축적될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 정토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와 달리 온라인 기술이 발달해서 즉문즉설이 유튜브를 통해 널리 확산된 측면이 있지만, 결국 모든 법문의 기록은 출가 공동체에 남게 되는 겁니다. 밖으로 확산이 된다 해도 법문의 편집은 출가 공동체에서 하기 때문에 결국 법문의 취사 선택도 출가 공동체를 중심으로 하게 되는 경향을 띨 수밖에 없게 되어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정토회가 하고 있는 불교는 ‘실천불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상은 ‘성불’과 ‘정토’입니다. ‘성불’은 상구보리(上求菩提)를 의미하고, ‘정토’는 하화중생(下化衆生)을 의미해요. 그런데 우리가 ‘성불회’라고 하지 않고 ‘정토회’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정토회를 시작할 때는 개인의 수행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실천이 부족한 현실을 더 강조했던 겁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실천불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시대 상황을 반영한 거예요.

신해행증(信解行證)의 관점에서 보면, 종교로서의 불교는 믿음을 기초로 하고 있고, 철학으로서의 불교는 이해를 기초로 하고 있고, 수행으로서의 불교는 실천과 증득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토회는 실천과 증득을 중심으로 하는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토론을 하다 보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대화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러다가 밤을 새우겠습니다. 승가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시간이 다 지나갔어요. 지금부터는 진도를 좀 빨리 나가겠습니다.” (웃음)

오후 공양을 한 후 다시 속도를 내어 논의를 이어나갔습니다. 저녁 시간에는 사회사상서의 기획 내용을 검토했습니다. 초안으로 올라온 기획안에는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는 사상적 기반을 오계를 중심으로 제시했습니다.

이에 대해 스님은 가볍게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불교 사회사상서에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가

“불교의 사회사상이라고 한다면, 첫째, 불교는 세계를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내용이 들어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불교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핵심 내용은 연기적 세계관입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상호 연관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자연계를 적자생존이나 약육강식으로 보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인간 사회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아니라 함께 공존하는 세상을 지향합니다.

둘째, 불교의 사회관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이 사회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 연기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다릅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게 될 때 다양성을 존중하는 평등성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 불교의 진리관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불교는 진리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대한 내용이죠. 제법이 공한 이치, 실체를 부정하는 무아관, 고정 불변함을 부정하는 무상관, 이런 내용들을 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정의는 차별 현상계에서 평등 본성계로 한발 한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차별 현상계에서 일어나는 것이 번뇌와 괴로움이라면, 평등 본성계로 나아가게 되면 괴로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불교의 가치관입니다. 그 가치관의 첫 번째가 ‘다른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된다’ 하는 불살생 계율입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 되고,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을 중요시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오계와 팔계를 소개할 수 있는데, 이것은 나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가장 기본적인 지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 정의론의 관점에서 인종 차별, 계급 차별, 성 차별 문제들을 다뤄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팔정도에서 ‘정명’을 중심으로 직업윤리를 다뤄볼 수도 있을 겁니다.

이 불교사회사상서를 읽으면 세상이 한눈에 보여야 합니다. 불교사상은 ‘인간이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 하는 관점에 서 있습니다. 인간의 괴로움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중도, 팔정도, 사성제가 나오는 겁니다.

사회적 고통이 생기는 이유는 차별을 합리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지로부터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바르게 깨달아서 진실을 알면 서로 연기되어 있고 서로 다를 뿐이지 높고 낮음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 서야 사회적 고통을 해결해 나갈 수 있어요. 불교사상서는 인간이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나 자유와 행복으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라면, 사회사상서는 사회적인 갈등과 고통을 어떻게 풀어서 평화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사례들을 소개하면, 이 책 한 권만 읽어도 세상이 한눈에 보이는 겁니다. 앞에서 말한 총괄적인 관점에서 다시 개별적인 사안들을 들여다보는 거죠. 절반은 총론에 해당한다면, 나머지 절반은 각론이 함께 제시되어야 해요.

예를 들어 낙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여기에는 태아를 존중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과 산모가 처한 고통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두 가지 관점을 함께 봐야 합니다. 어느 관점에 더 비중을 둘 것인지는 주어진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시간과 공간에 따라 이런 선택과 저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을 ‘중도’라고 합니다. 어떤 문제도 한 가지 측면에만 치우쳐서 봐서는 안 됩니다.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 불교의 관점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불교의 화쟁사상, 중도사상, 무유정법 등은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들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 의견들을 주고받은 끝에 결국 사회사상서의 목차를 전면 재검토해 보기로 하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습니다.

개원 기념법회 기획안에 대해 검토를 하고 있는 중에 저녁 8시가 되었습니다. 회의를 중단하고 저녁예불을 한 후 다시 회의를 이어나갔습니다. 밤 9시가 되었지만 논의를 끝마치지 못했습니다. 공동체 법사단은 회의를 더 연장하고자 했지만, 스님이 다시 제안했습니다.

“오늘은 그만합시다. 너무 늦었어요. 나머지는 내일 얘기합시다.”

내일도 아침에 농사일을 한 후 하루 종일 두북특별위원회 회의를 계속 이어갈 예정입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었으므로 지난 수행법회에 나온 즉문즉설 한 편을 소개해드리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저는 간절함이 없어서 고민입니다

“저는 수행을 함에 있어 간절함이 없습니다. 새벽 5시 기상, 전법, 통일운동, 환경보호 등 정토회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활동들을 할 때 저는 간절하지 않습니다. ‘이만 하면 괜찮다’, ‘지금 이대로 좋다’ 하며 살고 있습니다. 애쓰지 않기 때문에 쉽게 지치거나 많이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님께서 ‘수행은 자발적인 간절함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실 때 마음에 걸림이 생겼습니다. 지금 저의 수행 태도에 관해 점검을 받고 싶습니다.”

“네, 괜찮아요. 제가 간절하게 해야 한다고 한 법문은 어떤 변화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한 말입니다. 나를 변화시키고자 할 때 간절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변화라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재 내 삶에 만족하고, 내 능력 범위 내에서 삶을 산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간절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불같이 화가 나는 업식이 있어서 가족이 너무 힘들어한다거나, 먹는 욕망을 못 내려놔서 비만이 심하다거나, 내 업식이 삶에 큰 장애가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의 업식이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데 큰 장애가 되어서 업식을 변화시키겠다는 사람들에게 간절함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모든 사람들에게 간절함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변화는 시키고 싶고 그에 따른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노력은 조금 해놓고 목표가 안 이루어진다고 좌절해요. 이렇게 해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정말 자신을 변화시키고자 하면, 첫째, 내 업식은 누가 대신해서 변화시켜줄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해서 한다’ 하는 자발성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조금 장애가 생겼다고 해서 쉽게 넘어지면 안 됩니다. 꾸준한 노력을 지속해야 합니다. 간절하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노력할 수 없어요. 그래서 간절함을 얘기한 거예요.

예를 들어, 굶주리는 북한 주민을 돕는다고 합시다. 내 형편에 맞게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기부하는 정도로 돕겠다면 간절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형편에 식량을 1천 톤도 보내기 어려운데, 식량난을 겪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10만 톤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이것은 내 능력 밖의 일입니다. 그럴 때 보통 종교인들은 하느님이나 부처님한테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외부적인 힘을 빌리는 기도는 실제로 부처님이나 하느님이 도와주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잖아요. 왜냐하면 그건 믿음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변화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극한 정성이면 하늘이 감동을 한다’ 이런 옛말이 있는데, 하늘이 감동을 한다는 말은 곧 주위 사람들이 감동을 한다는 뜻입니다. 제 경험의 범위에서 살펴봐도 그렇고, 옛날 얘기를 살펴봐도 그렇고, 하늘이 돕는다고 할 때 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도와줍니다. 삼국유사에도 ‘간절히 기도를 했더니 어떤 사람이 수레에 식량을 싣고 왔다’ 이런 얘기가 나와요. 하늘이 부처님의 모습으로 온 것이 아니고, 관세음보살이 특별한 모습으로 도와준 것이 아니고, 어떤 여인의 모습으로 돕거나, 사람의 모습으로 돕습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곧 하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겁니다.

변화를 가져오려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감동을 해야 돼요. 내가 배고플 때 밥 먹듯이 그 사람도 배고플 때 밥 먹고, 내가 졸릴 때 자듯이 그 사람도 졸릴 때 잔다면, 감동이 안 옵니다.

‘나는 배가 고프면 밥 안 먹고는 못 사는데, 저분은 밥을 안 먹고 북한 돕기를 하더라’

‘나는 졸리면 자야 되는데, 저분은 밤새도록 잠도 안 자고 하더라’

‘나는 일이 안 되면 금방 포기하는데 저분은 지치지 않고 줄기차게 하더라’

이렇게 사람들이 느끼게 되면 감동이 옵니다. 굶주리는 북한 동포도 눈에 안 보이고, 하느님도 눈에 안 보이는데, 내 앞에 보이는 그 사람의 행동만 봐도 감동이 되니까, 전세금을 빼서 지원을 한다든지, 적금을 깨서 기부를 한다든지, 결혼반지를 모금함에 넣는다든지,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런 모습을 보면, 첫째, 자발적이고, 둘째, 간절함이 있을 때, 자기 변화든 사회 변화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모든 사람들에게 ‘간절해야 된다’라고 법문한 것이 아니에요. 자기 변화나 세상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간절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도 변화시키고 세상도 변화시키고 싶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노력도 안 합니다. 이런 걸 ‘욕심’이라고 해요. 노력을 안 하니 이루어지지 않죠.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기도해도 영험이 없더라’, ‘수행해도 안 되더라’ 이렇게 말하면서 좌절하고 절망하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제가 ‘정말 변화를 가져오려면 간절해야 된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모든 일에 간절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농사를 짓는데 비가 안 온다면, 옛날 같으면 방법이 없으니까 하늘을 향해 간절하게 기도라도 해야 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는 비가 안 온다고 해서 간절할 필요는 없잖아요. 농사 지을 물이 없으면, 지하수를 파서 써도 되고, 저수지에 있는 물을 끌어다 써도 되고, 수중펌프나 여러 가지 기계를 사용해도 됩니다. 일상생활을 언제나 간절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변화를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면 간절하게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질문자는 내 능력껏 잘 활동하고 있는데 간절할 게 뭐 있어요. 힘이 닿는 데까지 하면 됩니다. 그러니 수행에 아무 문제가 없어요.”

“네, 감사합니다.”

전체댓글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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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명

변화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면 자발적으로 간절하게 해야 한다는 스님의 말씀 감사합니다.

2024-01-23 16:20:59

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여러 봉사자님들과 수행법회, 회의 참가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2021-02-15 23:35:39

김애자

회의가 중요하구나

현재 내 삶에 만족하고, 내 능력 범위 내에서 삶을 산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간절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2020-08-18 23: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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