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2.8 정토회 경전반 졸업식, 결사행자 회의
“불교의 핵심”

안녕하세요. 오늘 오전에는 경전반 졸업식이 있었고, 오후부터 새벽까지 대전에서 결사행자 회의가 열렸습니다.

오늘은 원래 전국에서 천여 명이 모여 졸업식을 할 예정이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문제로 다 같이 모이는 행사는 취소했습니다. 대신 29개 정토회에 소수로 모여서 졸업식을 진행했습니다. 스님은 서초법당에서 직접 법문을 하고, 이를 전국으로 생중계했습니다.

열 시부터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서초법당에도 오십여 명의 졸업생이 모였습니다. 스님은 카메라 너머 천여 명의 졸업생들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여러분은 2019년 봄 경전반에 입학하셔서 1년간 공부를 끝내고 오늘 2020년 2월에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라는 보이지도 않고 하나의 세포도 형성하지 못하는 작은 물질 앞에서 우리가 벌벌 떨면서 졸업식마저 무산시켰습니다. 내일 있을 불교대학 수계식은 아예 5월로 연기했습니다. 경전반 졸업식도 정토회별로 나누어서 하고 법문은 생중계 하게 되었습니다. 각 정토회별로 담당 법사님이 계시기 때문에 법사님들이 졸업장도 수여하고 표창도 하고 여러분 이야기도 듣고 나누는 것으로 일정을 조금 변경했습니다. 공연을 아주 열심히 준비한 세 팀이 있는데 그분들께는 죄송하네요. 노력한 것을 보고 박수를 쳐드려야 하는데 지역 정토회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스님은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사람들의 두 가지 반응을 이야기하며 졸업식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염성은 조금 높지만 치사율이 그리 높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조심은 하되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졸업 법문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런 상황에 대한 대처도 모두 수행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는 이런 상황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이럴 때 조심하지 않고 함부로 돌아다니는 것은 용감한 것이 아니라 안전불감증에 해당하는 무지한 행동입니다. 반대로 조심하는 선을 넘어서 두려움에 떨거나 외출도 못하는 정도라면 제대로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공포에 휩싸인 상태입니다. 이럴 때 수행자는 마음은 편안하게 가지되 병의 실상을 잘 알아서 안전수칙을 지키며 다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두려워하면 오히려 안심을 시키고, 어떤 사람이 무지한 상태로 다닌다면 안전수칙을 알려줘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생겼기 때문에 오히려 주위에서 ‘수행자는 다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평소에는 수행자라며 다른 척하다가 막상 어떤 일이 생기니까 다른 사람과 똑같이 벌벌 떨면,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 수행에 대한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수행자라는 표가 나면 오히려 경쟁력이 생깁니다.”

스님은 불교대학에서 배운 실천적 불교사상, 부처님의 일생, 근본불교, 불교의 변천사부터 경전반에서 배운 금강경, 반야심경, 육조단경, 법성게, 신심명의 핵심을 다시 정리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행이라고 강조하며, 수행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설명해주었습니다.

“경전반 공부는 재미있었습니까?”

“네!”

“내용도 좋았습니까?”

“네!”

“자기 삶에도 도움이 되었습니까?”

“네!”

“불교대학을 졸업했을 때도 좋았겠지만 자기 수행에 있어서는 경전반에서 배우는 내용들이 더 많은 도움이 되었을 거예요. 불교의 변천사를 공부하셨다면 역사 속에서 다양한 불교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겁니다. 결국 어떤 불교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불교의 요체가 무엇인가가 가장 핵심입니다.

불교의 핵심은 무엇인가

불교는 종교도 아니고 철학도 아닙니다. 이미 부처님 당시에만 해도 종교로는 브라만교가 있었고, 철학으로는 우파니샤드(Upanishads) 철학이 있었습니다. 종교는 믿음을 중심으로 하고, 철학은 사유를 중심으로 합니다. 종교에는 주로 복을 구하는 현세 구복적인 요소가 많고,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종교는 무지로 인한 두려움에 기반을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반면 철학에는 ‘우주의 근본이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과 같은 사색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믿음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도 분명 인생에서 필요한 한 부분이고, 사유를 중심으로 하는 철학도 인생에서 필요한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종교도 철학도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겪는 구체적인 고뇌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데서 고타마 부처님의 문제의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 내가 당면한 나의 고뇌를 어떻게 해결하고, 내가 나의 고뇌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질 것인가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수행’입니다.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 나’입니다. 지금, 여기, 나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념(正念)입니다. 팔리어로는 ‘사띠(sati)’라고 합니다. ‘알아차림’, 또는 ‘깨어있음’이라고도 표현합니다.

부처님도 어릴 때는 브라만교를 접했고, 출가 후에는 선정주의와 고행 주의를 따라 수행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양쪽의 길을 다 가보았지만 지금, 여기, 나의 고뇌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을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자신이 걸어온 수행의 길을 돌이켜보다가 놓친 부분을 발견하고 새로운 길, 즉 중도(中道)의 길을 찾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 나에게 깨어있는 수행을 통해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을 얻게 되셨습니다. 그 후 많은 사람들에게 이 좋은 법을 전하게 되면서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 기본 정신은 ‘중도(中道)’입니다. 지금은 이를 나누는 범주가 종교와 철학 이렇게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종교로 규정하는 사람도 있고, 불교를 철학으로 규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불교를 종교라고 하기에는 철학적 요소가 많고, 철학이라고 하기에는 또 종교적 요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기준을 따르다 보니 종교 또는 철학이라고 분류가 되는 것이지, 그 가르침의 핵심을 보면 종교도 아니고 철학도 아닌 제3의 영역입니다. 이 영역을 ‘수행’이라고 이름 붙인 것입니다.

수행과 종교의 차이

우선 수행과 종교의 차이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각자가 지금 겪는 괴로움을 한 번 떠올려 보세요. 왜 괴로움이 생길까요?

바로 내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깁니다. 가고 싶은데 가지 못하고, 먹고 싶은데 먹지 못하고, 쉬고 싶은데 쉬지 못하고, 자고 싶은데 못 자고, 만나고 싶은데 못 만나고, 보기 싫은데 같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나의 욕구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괴로운 겁니다. 이렇게 나의 욕구대로 되지 않을 때 대개 상대방 때문에 문제라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오라고 하면 네가 와야 하고, 내가 가라고 하면 네가 가야 하고, 내가 달라고 하면 네가 주어야 한다는 식으로 남 탓, 세상 탓을 합니다.

이렇게 괴로움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사람은 괴로움을 해결하려면 바깥 세상을 내가 원하는 대로 바꾸어야 합니다. 내가 달라고 하면 주고,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도록 세상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건 내 힘으로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어떤 힘 있는 존재가 있어서 내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하면 그 사람을 데려 오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하면 그 사람을 데리고 가고, ‘주면 좋겠습니다’하면 그 사람이 주도록 하는 그런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그렇게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줄 수 있는 힘 있는 존재가 있으면 나의 괴로움이 모두 사라질 거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힘 있는 존재가 바로 전지전능한 존재입니다. 이건 욕구가 충족되면 고뇌가 해결된다고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기본적으로 쾌락주의적 관점을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수행은 괴로움이 나의 무지(無知)로부터 생겨난다고 자각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외부의 어떤 존재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알지 못함으로 인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어두울 때 두려운 것은 어둠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어두울 때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밝을 때는 주변이 보이니까 두렵지 않은데, 어두우면 주변이 보이지 않으니까 같은 환경에서도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날 때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두렵지 않은데 내가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익숙한 장소에 가면 두렵지 않지만, 낯선 장소에 가면 두려움이 생겨납니다. 익숙한 일을 할 때는 두렵지 않지만, 생소하거나 낯선 일을 할 때는 두려움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다 모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두려움입니다. 알게 되어 무지가 사라지면 두려움도 함께 사라집니다. 모르기 때문에 신비주의가 생겨납니다. 알고 나면 신비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종교는 인간의 무지로 인해 일어나는 두 가지 심리인 두려움과 신비로움에 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두려움을 이용하여 협박을 하고, 신비로움으로 유혹을 합니다. 이는 근본 원인인 무지는 그대로 놔둔 채, 그로 인해 생겨나는 욕구에 대응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두려움이 일어나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탐구하셨고, 그것이 무지라는 것을 알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무지를 타파하여 두려움 자체가 사라지는 길을 발견해내셨습니다. 깨어있음을 통해 욕구 자체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래서 괴로움이 사라진 경지에 이르셨습니다.

괴로움은 나의 무지로부터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가서 부탁할 일이 없어져 버립니다. 나를 직시해서 나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면 두려움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이처럼 종교와 수행은 완전히 다른 길입니다.

밖으로 향해 있는 눈을 안으로 돌리면

종교에서 신(神)이 하는 일은 원하는 것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에서는 힘 있는 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대신 깨우쳐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정작 수행에 있어서 스승이 하는 일은 깨우쳐 주는 일도 아닙니다. 그저 밖으로 향해있는 눈을 안으로 돌리는 역할만 해줍니다. ‘너 때문에’ 하고 밖을 탓하는 마음을 안으로 돌려서 ‘아, 이건 내 문제구나. 내 욕구이구나’ 하고 알아차리게 합니다. 우리는 선사들의 어록에서 많은 배움을 얻습니다.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
‘지금 네 마음이 어떠한가?’
‘불안합니다.’
‘불안한 마음을 이리 내어놓아 보아라.’

‘저를 자유롭게 해 주십시오.’
‘누가 너를 붙잡고 있는가?’

이런 어록들은 신비한 내용이 아닙니다. 그저 밖을 향해 있는 눈을 안으로 향하게 해서 자기를 살펴볼 수 있도록 바꾸어주는 말들입니다. 시선을 안으로 돌리면 괴로워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아버립니다.

이를 두고 금강경에서는 밖에서 억만금을 얻는 것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치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밖으로부터 얻는 것을 복(福)이라고 할 때, 삼천대천세계를 칠보(七寶)로 가득 채워서 복을 짓는다고 하더라도 나의 무지를 깨우쳐서 해탈에 이르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법을 보는 자 곧 여래를 보리라

불교는 수행입니다. 여러분들은 경전반을 통해 수행이 무엇인지 하나씩 점검하면서 1년 동안 공부해 왔습니다. 수행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새삼스럽게 들리나요? (모두 웃음)

만약 이 이야기가 새삼스럽게 들린다면 여러분들이 경전을 공부하면서 다만 문자에 집착하고, 언어에 집착하고, 지식에 집착하고, 글자를 해석하는데 치우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경전을 읽고, 수많은 어록을 봐도, 핵심 요점은 방금 말한 부분입니다. 이것을 수행의 기본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에 이 내용을 정리해서 매일 아침 기도할 때 읽는 수행문에 실어두었습니다. 이 관점을 항상 가지고 있으면 어떤 경전을 읽어도 늘 이 관점을 재확인시켜줍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아난다가 슬피 울고 있으니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난다여, 슬퍼하지 말라.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비록 육신은 너희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희 곁에 남아있으리라.’

이는 구슬 같은 무언가가 허공에 남아 있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네가 깨어있다면 그 속에 여래는 늘 남아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도 ‘나를 보는 자 곧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 곧 나를 본다’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법을 보는 것이 곧 여래를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수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불자는 신자가 아닌 수행자를 의미합니다. 믿는 자가 아닌 닦는 자입니다. 수행자는 어떤 능력이 있는 존재를 추종하거나 믿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닦고 까르마를 닦는 자입니다. 여러분은 수행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해야 합니다.

수행, 보시, 봉사하는 삶

그러니 수행, 보시, 봉사 중 아무것도 하기 싫다면 정토회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야 합니다. 봉사만 하고 수행, 보시는 하기 싫다면 다른 시민단체로 가면 됩니다. 정토회는 여느 시민단체처럼 사회활동을 하지만 수행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바탕 위에 사회활동을 해나갑니다. 마찬가지로 봉사는 하지 않고 수행만 하려는 사람은 다른 수행단체로 가면 됩니다. 정토회에서는 수행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는 동시에 보시와 봉사를 함께 하는 바탕 위에 수행을 해나갑니다.

이 부분을 잘 유념하셔서, 올해 새로 시작하는 각 지역 정토회에서 여러분들 각자가 작은 소임이라도 하나씩 맡아서 해주시길 바랍니다. 발심 행자가 된 후 3년이 지나야 서원행자의 자격이 주어집니다. 여러분처럼 경전반 졸업생들은 이미 그 과정에 들어선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서원 행자가 될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앞으로 여러분이 얼마나 봉사를 충실히 해나가는 지에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눈독 들이는 정토회 선배들이 많아요. 좋은 인재들을 자기 부서에 데려가려고 유심히 살펴봅니다. (모두 웃음)

그렇다고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어요. 늘 마음을 자발적으로 내면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스님이 월급을 받고 활동을 한다면, 지금 스님의 일정은 중노동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좋아서 활동을 하니까 웃으면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마음을 적극적으로 내서 수행자로서의 생활을 해나가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경전반 졸업을 축하드리고, 앞으로는 정토회에서 같은 멤버로서 함께 활동하는 사람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법문을 듣고 명상을 했습니다. 명상을 마치고 스님은 다시 전국의 졸업생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네. 이런 기회를 빌어서 한 가지 당부드리겠습니다. 정부에서도 잘 안내하고 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예방하는 기본적인 두 가지를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첫째, 공공장소에 다닐 때는 나를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마스크를 해야 합니다.

둘째, 손을 잘 씻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더라도 기침을 하면 마스크를 끼고 병원에 다녀와야 해요. 폐렴 증상이 있으면 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안전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게 좋습니다. 몸에 열이 있고 기침이 심하면 공공장소에는 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정토회 행사 중에 의무로 참여해야 하는 행사더라도 증상을 말하면 양해를 해줍니다. 국가의 안전 정책에 함께 동참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 오천만 명 중에 27명이에요 바이러스보다 공포가 우리를 더 긴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전수칙은 꼭 지키고 너무 두려워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정토회에서도 당분간 몇 천 명이 모이는 행사는 다 취소하려고 합니다. 다른 방식으로 진행은 하되 주의를 해나가겠습니다.”

스님은 너무 두려워하지 말되, 안전 수칙을 잘 지킬 것을 당부하며 법문을 마쳤습니다. 법문을 마치고 바로 대전으로 이동했습니다.

전국 지역 정토회에서는 졸업장과 상장을 수여하고, 법사님과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스님은 이동하는 차 안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부족한 잠을 보충했습니다. 오후 2시에 대전 정토법당에 도착했습니다.


대전법당에서는 10차 천일결사 기간 대의원으로 선출된 분들이 모여 첫 회의를 열고 있었습니다. 전국대의원회의 상설기구인 상임위원회를 구성할 상임위원도 각 지역별로 1명씩 선출해 축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은 원고 교정을 보고 업무를 본 후 4시부터 결사행자회의에 참석했습니다. 법사님들은 전국에서 경전반 졸업식 행사를 마치고 대전에 도착했습니다.

성원 보고가 있은 후 곧바로 본안건부터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오늘 결사행자 회의에는 다루어야 할 안건도 많을 뿐만 아니라, 쉽게 결론을 내기 어려운 내용도 많았습니다. 모두들 아예 밤새 회의를 할 각오를 하고 회의에 임했습니다.

지역 정토회와 해외 정토회 대표, 총무, 대의원 임명안 인준, 국제정토회와 청년정토회 총무 임명안 인준, 상임위원회 임명안 인준, 지역 정토회 선거 후 후속 처리 건, 지역 정토회 팀 편재 방식, 직급 체계 개선 방안, 통일특별위원회 활동가 중에 대의원에 당선된 사람들의 활동 방식, 2차 만일준비위원회 임명, 기획위원회 임명, 사료편찬 특별위원회 임명 등 다양한 안건들에 대한 토론이 밤새 계속되었습니다.

중간에 잠시 저녁 예불을 한 후 김밥으로 식사를 했습니다. 다시 기나긴 토론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총무, 대표, 대의원에 대한 선거가 지난주에 있었고, 10차 천일결사가 3월 8일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주요 임원들의 임명과 역할에 대해 논의할 게 많았습니다.

오후 4시에 시작한 회의는 새벽 3시 30분이 다 되어서 드디어 마지막 안건이 통과되었습니다. 회의를 끝마치며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새벽 5시에 끝날 줄 알았는데, 1시간 일찍 끝났어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토회가 조금씩 발전할 수 있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토론하고 노력한 결과입니다.

사홍서원을 하고 나니 시계가 새벽 3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결사행자들은 인도에 다녀온 스님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며 삼배를 했습니다.

“모두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수행정진 잘하시기 바랍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새벽 4시에 대전 정토법당을 출발했습니다. 고속도로에 올라서니 차가 한 대도 안 보였습니다.

텅빈 도로를 달려 6시에 두북 정토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내일은 두북에서 농사 담당자들과 함께 세 번째 농사 회의와 유통 사업에 대한 논의를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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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여러 봉사자님들과 참가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_^

2020-05-14 13:28:30

이명애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배웠지만.......
법륜스님의 초분을 다투는 일정을보며 스님건강이 애가 쓰입니다

ㅜㅜㅠ

2020-02-17 07:12:45

해탈지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 나
정념 사띠라는 말씀은 많이 들어 왔지만 나는 지금 얼마나 깨어있는가? 되돌아보며 수행자로서의 기본을 다시 새기며 수행자의 기본을 지키겠습니다.

2020-02-16 12:5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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