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1.19 석가족 명상수련 2일째
“왜 부처님은 이 어려운 명상을 하라고 하셨을까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석가족 명상수련 이튿날입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5시 20분부터 명상을 했습니다. 하늘에는 아직 초승달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자세를 바로 합니다.”

새벽에는 어제보다 10분 늘려 40분씩 명상을 해보았습니다. 명상을 하며 호흡을 알아차리고, 포행을 하며 동작을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두 번을 반복하고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아침은 식빵, 짜이, 과일입니다. 먹는 동작에 집중해봅니다. 음식을 보고 일어나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아침식사를 마친 후 오전에는 명상하고 포행하기를 네 번 반복했습니다.


수련생들이 수련을 하고 있는 사이, 담마센터에서는 수련생들의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석가족 봉사자 2명이 9시부터 식사 준비를 하기로 했는데 9시 40분이 되어서 도착했습니다. 식단은 짜파티, 사부지(카레), 샐러드, 과일입니다.


짜파티는 밀가루 반죽을 동그랗고 얇게 밀어서 화덕에 굽는 것인데 만들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화덕에 굽는 대신 한꺼번에 많이 튀겨내는 ‘뿌리’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수바스지는 느긋하게 ‘꼬이 디까트 네이해’(아무 문제없어요) 라며 준비했습니다. 한국인 활동가는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가능한 활동가는 다 모아서 함께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다행히 주어진 시간 내에 음식 준비를 마치고 배달까지 완료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수련생들은 명상을 마치고 조용히 나와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오늘은 봄날처럼 햇볕이 좋았습니다. 점심식사 후 쉬는 시간에 햇볕 아래 앉아 야외 명상을 하는 수련생들도 있었습니다.


오후에 다시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명상을 시작하기 전 스님은 부처님이 안 계실 때 우리가 의지해야 할 네 가지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사념처에 의지하라

“아난다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우리는 늘 부처님을 의지하고 살아왔는데, 부처님께서 열반하시면 우리는 누구에게 의지해야 합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사념처에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첫째, 몸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라. 몸은 성스러운 것이 아니라 부정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몸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둘째, 느낌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알아차려라. 우리는 기분이 좋다는 즐거움으로 행복을 삼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즐거움은 곧 괴로움의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즐거움의 본질이 괴로움임을 보면 결국 모두 다 괴로움입니다. 그래서 느낌은 곧 괴로움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느낌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셋째, 우리의 마음은 항상(恒常)하지 않아서, 영원하지 않으며 늘 순간순간 변화한다. 마음이라는 것은 늘 변화한다는 것을 알아차려라. 그러니 마음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넷째, 법(法)이라는 것은 나라고 할 실체가 없다. 나라고 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법에도 집착할 필요가 없다.

이 네 가지를 올바로 알아차리고 있다면 늘 부처님과 함께 있는 것과 같다.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육신은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희 곁에 남아 있으리라.’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라

아난다가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고 살아왔는데, 이제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누구를 스승으로 삼아야 합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가르침인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라. 계율을 잘 지킨다면 항상 나와 있는 것과 같고,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면 설령 나와 함께 있더라도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수행자는 먼저 계율을 지켜야 한다.’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명상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념처(四念處), 즉 네 가지 알아차림에 의지하라고 알려주신 것 중 첫 번째에 해당됩니다. 첫 번째가 바로 몸에 대해 올바르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몸에 대한 알아차림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자신의 동작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세 번째는 이 몸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죽고 난 뒤 시신이 썩어서 흩어져 없어지는 과정을 여실히 관찰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아나빠나 사띠, 호흡 알아차리기

열반(Nirvana)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 네 가지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를 ‘위빠사나(Vipassana, 觀)’라고 합니다. 위빠사나 중에 몸에 대한 알아차림이 있고, 그중에서도 범위를 좁혀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을 부를 때는 ‘아나빠나 사띠(Anapan-Sati)’라고 합니다.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이 잘 유지되면 다른 것에 대한 알아차림도 쉽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호흡을 여실히 알아차릴 수 있도록 꾸준히 정진해야 합니다.

호흡을 알아차릴 때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런저런 생각입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이런저런 기억들이 계속 떠오릅니다. 그리고 ‘내일 뭐 해야지’ 하고 미래에 대한 구상이 계속 떠오릅니다. 이렇게 과거의 생각이나 미래의 구상을 하다 보면 호흡을 놓치고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을 두고 ‘망상을 피운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생각은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에 따라가면 안 됩니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거기에 끌려가지 말고, 마음을 코끝에 딱 모아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한 상태에서 마음을 코끝에 모아서 숨이 들어올 때 들어오는 줄 알고, 숨이 나갈 때 나가는 줄 압니다. 숨이 길면 긴 줄 알고, 짧으면 짧은 줄 압니다. 숨이 가쁘면 가쁜 줄 알고, 부드러우면 부드러운 줄 압니다.

내가 의지를 갖고 이러저러하게 호흡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어도 호흡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그 호흡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긴장도 하지 말고, 애쓰지도 말고,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호흡을 다만 알아차릴 뿐입니다. 놓치면 ‘놓쳤구나’ 하고 다시 합니다.”

명상을 하고 포행을 했습니다. 점심식사 후라 그런지 코를 골며 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시 명상을 시작하기에 앞서 스님은 ‘수행에 방해가 되는 다섯 가지’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수행을 방해하는 다섯 가지

“첫 번째는 먹고 싶다, 자고 싶다, 눕고 싶다는 등의 욕망입니다. 두 번째는 무언가 하기 싫다는 혐오입니다. 세 번째는 무언가를 하다가 잘 된다고 ‘이야, 이거 잘 되네’ 하고 들뜨는 마음입니다. 네 번째는 게으름입니다. 잘 안 되니까 그만두고 싶다는 게으름이 일어납니다. 다섯 번째는 회의적 의심입니다. ‘이걸 한다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정진하는 데 늘 장애가 됩니다. 그러니 이런 마음이 일어나면 ‘부처님께서 이런 마음이 정진에 장애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하는 것을 알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몸의 자세를 바르게 합니다. 가부좌를 하고, 허리를 펴고,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눈을 지그시 감고, 마음을 코끝에 모아봅니다. 그리고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밖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몸에서 통증이나 가려움 등 여러 가지 감각이 일어나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머릿속에서 지나간 과거의 이런저런 기억이나 미래에 대한 이런저런 구상이 떠오르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다만 숨이 들어오면 들어오는 줄 알고, 숨이 나가면 나가는 줄 압니다.

바닷가에 앉아 있으면 파도가 밀려오고 파도가 밀려나갑니다. 그것처럼 호흡은 저절로 들어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합니다. 호흡이 들어올 때는 들어오는 줄 알고, 나갈 때는 나가는 줄 압니다. 그것을 주시하고 알아차리는 것에는 힘이 들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편안한 가운데 코끝에 집중해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이것을 빨리어로는 ‘사띠(sati)’라고 합니다. ‘알아차림’이라는 뜻입니다.”

포행을 하는 발걸음이 어제보다 느려졌습니다. 다시 두 번 더 명상하고 포행하기를 반복했습니다.


해가 점점 기울고 있었습니다.

“긴장하지도 말고, 잘하려고 애쓰지고 말고,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한 상태에서 다만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저녁으로 감자 한 알과 따뜻한 우유를 먹었습니다. 인도인들에게는 평소보다 이른 식사 시간입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한 뒤 다시 명상을 두 번 반복한 후 저녁 8시부터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련생들은 미리 궁금한 점을 질문지에 써서 냈습니다.

먼저 불교와 상카시아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 부처님께서 상카시아에 오실 때, 인드라와 브라만과 함께 오셨나요?
  •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은 돌아가시고 나서 어느 나라로 가셨나요? 부처님께서 어머니께 설법하러 가셨다고 했는데 그곳은 어떤 곳인가요?
  • 인도에서 불교가 없어진 것은 이슬람교의 침략 때문일까요? 아니면 인도의 브라만들 때문일까요?

스님은 한문 경전을 학습했기 때문에 빨리어는 다 알지 못한다고 양해를 구한 후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힌디로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들도 있었고, 단순한 지식을 묻는 질문들도 있었습니다.

  • ‘卍’와 반대로 그려진 기호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 위빠사나 명상하는 수행자들은 왜 잠을 자지 않을까요?

명상에 대한 질문도 있었습니다. 명상에 대한 질문과 답변 두 가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편하게 살라고 하면서. 왜 어려운 명상을 하라고 하셨나요?”

“위빠사나를 왜 어렵다고 생각합니까?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게 뭐가 어렵습니까? 숨을 내가 쉬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놔둬도 숨은 알아서 쉬어집니다. 나는 그냥 구경만 하면 되는데 그게 뭐가 어려워요?

걸을 때는 어차피 다리가 움직이면서 걷잖아요. 그때 왼발이 나갈 때 왼발이 나가는 줄 알아차리고, 오른발이 나가면 오른발이 나가는 줄 알아차리고, 손이 올라가면 올라가는 줄 알아차리고, 앉으면 앉는 대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거기에 뭔가를 하라는 게 아닙니다. 무언가 자동적으로 하게 될 때, 그것을 하는 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욕심이 일어나면 욕심을 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욕심내는 마음을 알아차리라는 것입니다. 화가 나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게 아니고, 화가 일어날 때 ‘어, 화가 일어나네’하고 알아차리라는 것입니다. 이게 왜 어려워요?”

“...”

“여러분은 담배를 피우는 게 어렵습니까, 안 피우는 게 어렵습니까?”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게는 안 피우는 게 어렵죠.”

“담배를 피우려면 돈이 있어야죠, 담배 사야죠, 껍질 뜯어야죠, 담배를 꺼내야죠, 입에 물어야죠, 성냥도 꺼내야죠, 성냥에 불을 붙여야죠, 담배를 빨아야죠, 또 빨아들인 연기를 다시 뱉어야죠, 재도 털어야죠. 얼마나 일이 많습니까? 담배를 안 피우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되잖아요. 안 하는 게 훨씬 쉽습니다. (모두 웃음)

그런데 담배를 피우는 습관이 있는 사람은 안 피우는 게 더 어렵습니다. 담배를 안 피우는 게 어려운 이유는 담배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습관의 문제입니다. 자기 습관 때문에 쉬운 일이 어려워지는 겁니다.

여러분은 화를 내는 게 힘든가요, 안 내는 게 힘든가요? 화를 내려면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인상 써야죠, 고함을 쳐야죠, 눈도 부릅떠야죠,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화를 안 내는 건 아무것도 안 해도 됩니다. 그러나 화내는 습관이 있는 사람은 화 안 내기가 더 어렵습니다.

이럴 때 부처님은 어려운 것을 하라고 가르친 게 아니라 쉬운 걸 하라고 가르치셨어요. 그런데 여러분이 어려운 일을 하는 것입니다. 돈 벌어서 담배 피우고, 돈 벌어서 술 먹고, 싸우고, 고함을 지릅니다. 이렇게 힘든 일을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습니다.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안 먹고, 화도 안 내면 아무 할 일이 없습니다. 그냥 편안하게 있기만 하면 되니까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왜 쉬운 일을 놔두고 자꾸 어려운 일을 하려 듭니까? 부처님은 쉬운 일을 하라고 가르치셨어요. 담배 피우는 게 쉬워요, 안 피우는 게 쉬워요?”

“안 피우는 게 쉽습니다.” (모두 웃음)

“그래요, 부처님은 어려운 거 하지 말고 쉬운 걸 하라고 가르치신 거예요. 담배 피우려면 힘드니까 피우지 말라. 술 먹으려면 힘드니까 술 먹지 말라. 화내려면 힘드니까 화내지 말라. 남을 때리려면 힘드니까 때리지 말라. 이건 나한테도 힘들고 남한테도 해가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쁜 습관 때문에 힘든 일을 계속합니다. 힘든 일을 내가 일부러 찾아서 하려니까 인생이 피곤한 거예요. 부처님은 그런 피곤한 인생을 살지 말고 편안하게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에너지가 남으면 어려운 사람을 돕고 살라고 가르치셨고요. 이처럼 위빠사나는 쉬운 길을 가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쉽고 간명한 설명에 석가족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집니다. 어떻게 하면 해탈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도 있었습니다.

“언제 해탈할 수 있을까요?”

“해탈은 갑자기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꾸준히 정진해나가야 합니다. 어떤 생각이 떠올라도 호흡에만 집중하는 연습을 자꾸 해나간다면, 다른 사람이 욕을 해도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자기중심을 잡을 수 있고, 어떤 사건이 생겨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처럼 앉아서 정진을 꾸준히 해나가는 게 첫 번째 할 일입니다. 그런데 앉아서는 가만히 호흡 관찰이 되는데, 걸으면 잘 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는 더 안 됩니다. 그러니 우선 조용히 앉아서 알아차림을 유지하고, 움직일 때는 동작을 알아차리고, 음식을 씹을 때는 맛을 알아차리고, 어떤 기분이 일어나면 그 기분을 알아차리고,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생각을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을 계속해서 연습하면 상대방이 욕하는 소리를 들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나도 모르게 화가 일어날 때 ‘어, 화가 일어나네’하고 알아차리면 화가 올라오다가도 다시 가라앉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어울려 살아도 자기의 평정심을 유지해나갈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명상할 때 계속 생각이 일어나요. 언제 생각이 멈출까요?’라는 질문도 있었습니다. 생각이 계속 일어나는 것은 한국인이든 인도인이든 비슷한가 봅니다.

마지막 질문은 보디사트바(보살)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보디사트바(Bodhisattva)의 의미

“보디사트바는 누구인가요? 신불교운동을 일으킨 암베드카르도 보디사트바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암베드카르를 따르는 사람들은 부처님 사진과 암베드카르 사진을 같이 모시는데 그렇게 하는 게 맞을까요?”

“보디(Bodhi)는 깨달음이란 뜻입니다. 사트바(sattva)는 중생이라는 뜻입니다. 합치면 깨달은 중생이라는 뜻입니다. 참 재밌는 단어예요. 보디를 강하게 읽고, 사트바를 약하게 읽으면 ‘깨달은’ 중생, 부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트바를 강하게 읽으면 깨달은 ‘중생’이니까, 깨닫기는 했지만 아직 중생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보살이란 중생에서 출발해서 부처의 세계로 나아가는 자라고 할 수 있어요.

테라밧다에서는 보디사트바로 오직 한 사람만 인정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닫기 전까지만 보디사트바라고 봐요. 부처님도 한 분입니다. 그런데 마하야나에서는 많은 부처님이 계시고, 많은 보디사트바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면 보디사트바라고 봅니다. 여러분도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면 다 보디사트바예요. 여러분도 열반을 증득하면 다 부처예요. 이것이 마하야나입니다.

암베드카르는 테라밧다에서 보면 보디사트바라고 할 수 없고, 마하야나에서는 보디사트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님은 테라밧다와 마하야나의 관점을 비교하며 설명했습니다. 마하야나에서 부처님 좌우에 보살을 함께 모시듯 마하야나의 관점에서는 부처님 옆에 간디나 암베드카르를 모실 수 있다고 이야기하자, 한 스님이 “그건 틀렸어요.”라고 단호하게 반박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마하야나(Mahayana, 북방불교, 대중부 불교)는 테라바다(Theravada, 남방불교, 상좌부 불교)와 관점이 서로 다릅니다. 마하야나에는 많은 붓다가 있습니다. 마하야나 사상은 부처님이 한 분이 아니라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암베드카르가 깨닫지 못했다면 붓다가 아니고, 누군가가 암베드카르는 깨달은 자라고 생각하면 그를 붓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암베드카르를 따르는 사람들은 암베드카르 박사가 깨달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어떤 게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마하야나 불교라도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만 모실뿐, 일체 다른 보디사트바를 모시지 않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다르게 하더라도 그걸 어떻게 하겠어요?” (모두 웃음)

“저도 스님의 개인적인 생각이 궁금했습니다.”

“네, 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틀렸다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걸 어떡하겠어요. 그건 그 사람들의 자유입니다. 예를 들어 불단에 암베드카르 박사의 사진을 같이 놓는다고 해서 그걸 갖고 싸우겠어요, 뭘 어떡하겠어요? 그래도 기독교나 힌두교보다는 낫잖아요.”

“인도에서는 암베드카르를 따르는 사람들과 테라밧다를 따르는 사람들이 싸워요.” (모두 웃음)

“저는 다른 종교 간에도 싸우는 건 옳지 않다고 보는데, 하물며 같은 종교 안에서 싸우는 건 말할 필요도 없죠. 현재 인도의 불교 인구 비율이 0.5%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암베드카르와 테라밧다가 싸우면 어떡합니까.”

“위험해지겠죠.”

“그러니 ‘우리와 테라밧다, 암베드카르는 서로 조금씩 다르구나’ 하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러분이 한국에 가보면 불단 중앙에 부처님이 계시고, 양쪽에 보디사트바가 있습니다. 어떤 절에 가면 부처님은 안 계시고, 아발로기테슈바라 보디사트바(Avalokiteshvara Bodhisattva, 관세음보살)만 모신 곳도 있습니다. 그렇게 서로 다르다고 해서 절에 불을 질러버릴 수는 없잖아요. (모두 웃음)

여기 모인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만 존경하자고 정했습니다. 물론 다른 보살들 중에도 훌륭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만 존경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또 우리와 생각이 다릅니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도 존중해야 합니다.”

질문자를 비롯해 암베드카르 사진을 모시는 게 잘못됐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자신의 모순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습니다. 어느덧 밤 10시가 다 되었습니다.

“내일 정리 법문 시간도 있으니까요. 오늘은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날이 맑아서 하늘에 별이 많이 보였습니다. 가로등이 없는 캄캄한 동네라 별빛이 더욱 밝아 보였습니다.

내일은 석가족 명상수련 3일째로 마지막 날입니다.

지금, 행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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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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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당

존중하겠습니다♡

2021-01-17 17:42:03

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여러 봉사자님들과 참가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_^

2020-03-23 21:00:12

고경희

연습만이 살길^^

2020-01-27 00:5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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