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12.8 제9차 천일결사 회향 수련 2일째
“불평불만이 생기는 이유”

안녕하세요. 정토회 제9차 천일결사 회향 수련 2일째 날이 밝았습니다. 어제 3000배 정진을 마친 대중들은 깊은 잠에 골아떨어졌습니다.

도량석 소리와 함께 일어나 500여 대중이 함께 천일결사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새벽을 여는 햇살이 희양산을 비춥니다.

아침 간식으로 사과와 고구마가 나왔습니다. 1인당 고구마는 1개, 사과는 2개씩 먹은 후 조별로 모여 앉아 3000배를 마친 소감을 적고 그 내용을 모둠별로 함께 나누었습니다.


3000배는 힘들었지만, 힘들었던 만큼 깨닫고 느낀 것이 많습니다. 1시간 동안 소감 나누기를 한 후 8시 30분부터 전체가 다시 대수련장에 모였습니다.

법상에 오른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3000배를 다 하신 분은 한 번 일어나 보세요. 얼마나 잘 생겼는지 봅시다.” (모두 박수)

3000배를 다 한 사람들도 있고, 2500배를 한 사람들도 있고, 2000배도 못한 사람들도 일부 있었습니다.

“2000배도 못 한 사람들은 여기 왜 왔어요? 그냥 집에 가지 그랬어요.” (모두 웃음)

절을 한 횟수에 관계없이 스님은 모든 분들이 정진을 하느라 수고가 많았다며 대중을 격려했습니다.

“날씨가 추웠는데도 다들 정진을 잘하셨습니다.” (모두 박수)

이어서 소감문 발표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둠원들도 내 소감문이 좋다고 추천하고, 본인도 발표를 하고 싶다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세요.”

자발적으로 11명이 앞으로 나와 소감문을 발표했습니다.

“땀을 듬뿍 흘리고 나를 뛰어넘어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3년 동안 매일 수행을 한 덕인지 미움보다는 감사한 마음이 많이 올라왔습니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아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볼 수 있고, 걸을 수 있으니 가진 게 더 많구나. 아들에 대한 걱정은 사라지고, 있는 그대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절하는 내내 내 꼬락서니를 봤습니다. ‘앞사람은 왜 이렇게 거침없이 절을 잘하는 거야’, ‘저 사람은 왜 절을 안 하고 쉬고 있는 거야. 나까지 기운 빠지게’, 온갖 분별의 결정체를 경험했습니다.”

“남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미안했습니다.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바라고 아쉬워하고 미워하고 성질을 냈구나. 그 마음들은 오래가지 않고 금세 지금으로 돌아와 졌습니다. 이렇게 웃으며 가볍게 일상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 참 고맙습니다.”

“찌든 때를 깨끗이 씻어낸 듯 개운합니다. 돌아보니 하루하루는 정말 길었는데 3년은 마치 하루처럼 지나간 것 같습니다. 욕먹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힘들었구나. 이제는 욕먹고 편안해져야겠다고 원을 세워봅니다. 소임을 맡은 덕분에 이만큼 편안해진 것 같습니다. 소임이라는 게 매일 천배를 하는 것과 같구나. 힘들었던 만큼 뿌듯합니다.”

“나는 부모님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구나. 비록 두 분이 많이 싸우긴 했지만 그만큼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두 분은 헤어지지 않았구나. 눈물이 많이 흘렀습니다.”

“과거에 힘들어서 죽고 싶었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그 시기를 잘 극복하고 지금 절을 하고 있는 이 순간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스님의 하루에서만 보던 고춧가루를 스님께 직접 선물로 받아서 너무 기뻤습니다. 냉동실에 넣고 아껴먹겠습니다.” (모두 웃음)

함께 3000배를 했기 때문에 평범한 소감 한 줄에도 웃음이 쏟아지고, 눈물이 맺혔습니다.

소감문 발표를 다 듣고 나서 스님이 정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모두 다 지난 3년 동안 정토회에서 책임 있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다 보니 힘든 순간이 많았을 겁니다. 스님은 우리가 어떤 목적으로 이곳에 모였는지, 힘들긴 하지만 어떤 관점을 갖고 활동을 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소감문 발표를 잘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고,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찾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목표도 원래 없고, 삶의 의미도 원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각자 살아가면서 자기 삶의 목표를 정하고 삶의 의미를 부여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삶의 의미가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갈 것인가를 정하는 겁니다.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가요

비유하자면 우리가 꼭 설악산에 올라가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설악산에 올라가고 싶어 한다면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경치가 아름답기 때문에 오르고 싶다’, ‘정상이 높기 때문에 도전하고 싶다’ 등 각자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겁니다. 혼자 등정을 할 수도 있고, 함께 등정을 할 수도 있습니다. 혼자 등정을 하면 혼자만의 느낌과 재미가 있는 반면 두려움과 어려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도반들과 함께 등산하면 함께하는 재미가 있고,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우애가 있습니다. 또한 오르는 과정에서 누가 밥을 하니, 텐트는 누가 치니 등을 두고 갈등이 생기기도 합니다. 산을 오르는 어려움보다 사람 사이의 갈등 때문에 ‘다시는 산에 오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반면에 산에 오르는 것은 힘들지만 서로 돕고 끌어주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마음이 좋아서 등산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상에 올라서 멋진 경치를 보는 것보다 도반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마음이 훗날 돌아봤을 때 더 아름다움으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나름대로 각자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서 큰 집에서 살고, 큰 차를 타고, 좋은 음식을 마음껏 먹거나 명품을 두르는 것을 목표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 곳곳을 여행하며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이런 삶은 부(富)를 추구하는 것에 의미 부여를 하는 삶입니다.

어떤 사람은 출세에 의미 부여를 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음악이든, 운동이든,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다는 목표를 두고 살아갑니다. 어떤 정치인들은 시장, 도지사, 국회의원 또는 대통령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들 위에서 사람들을 호령하며 살아가는 삶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다 좋아하길 바라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바랍니다. 이런 사람 중에는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다면 부(富)나 지위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여자 또는 멋진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 하고, 또 평생 서로가 서로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람은 각자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갑니다. 이런 삶의 목표나 의미는 태어날 때부터 여러분에게 주어진 것도 아니고, 하느님이나 부처님이 부여하신 것도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각자가 어디에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를 정한 것입니다.

남에게 손해를 끼치고 있나요

우리가 어디에 삶의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는 각자의 자유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각자가 어디에 의미를 부여하든지 그것을 가지고 옳다 그르다는 말씀 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세상은 나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계율을 강조하셨습니다.

첫째,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생존 욕구에 의한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때리거나 해치지는 말라.
둘째, 내가 이익을 보고자 하는 것은 좋지만 다른 사람을 손해 끼치지는 말라.
셋째, 내가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좋지만 그것을 위해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는 말라.
넷째, 행동뿐만 아니라 말로도 다른 사람을 괴롭히거나 손해 끼치지 말라.

이렇게 우리의 자유로움 속에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한계를 그어두셨습니다.

왜 이런 한계가 필요할까요? 그건 다른 사람의 바람과 나의 바람이 충돌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바람이 충돌할 때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면서 나의 이익을 추구하게 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과보가 따르게 됩니다. 지금은 10원 이익을 볼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결국 50원의 손해를 보게 됩니다. 이렇게 나의 작은 이익 추구가 결국 나에게 커다란 손실로 다가오기 때문에, 이런 행동은 나쁜 행동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따져보면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길게 보면 손해 보는 장사입니다. 그런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한 치 앞을 못 본다’는 말이 있듯이 눈앞의 작은 이익만을 보고 멀리 다가오는 커다란 손실을 알지 못한 채 행동을 하면 손실이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이건 하지 마라’라고 자꾸 강조하니까 이런 부처님의 말씀을 마치 우리의 삶을 속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쉽습니다.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막고 세상을 외면하게 하는 가르침이라는 오해를 하게 됩니다. 불교에 대한 첫 번째 오해는 복을 빌면 복을 준다는 기복적인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오해는, 불교가 너무 금욕적이고 비현실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는 정신이 미약한 이유는 계율을 속박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형식적으로 계율에 메여서 살아가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적극적으로 계율을 지킬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지혜가 생기면 계율을 어길 때 큰 재앙이 초래될 것이 금방 보이기 때문에 계율이 저절로 지켜집니다.

이렇게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남에게 손해를 끼치면 안 된다는 것을 바탕에 깔고, 그다음에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선행을 꼭 해야 하나요

선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선행을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행도 역시 자기 인생에 어떤 의미 부여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자연에 있는 한 마리의 토끼처럼 살라는 것은 인생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만약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인생의 무거운 짐이 된다면 그것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냥 토끼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모인 분들은 대부분 사람으로 태어나서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는 삶을 살고자 모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선택한 삶입니다. 마치 설악산에 오르지 않아도 되지만 산에 오르는 것에 의미 부여를 한 사람들이 함께 모인 것과 같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모인 걸까요?

첫째, 우리는 ‘한반도에서 전쟁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 하는 것에 뜻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면 나를 포함해서 가족, 주변 지인들까지 모두가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어떠한 이유를 붙여서 전쟁을 합리화하는 것에 우리는 동의하지 못합니다. 다른 건 모르지만 전쟁에 이유를 붙여서 합리화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입장입니다. 아무리 갈등이 생기더라도 힘이 아닌 평화적인 해결 방법을 원합니다.

둘째, 지구촌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굶어 죽고, 아이들이 기본적인 문자와 산수를 배우지 못하는 것은 설령 내 자식, 내 나라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개선하자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기아, 질병, 문맹 퇴치를 위한 구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아 퇴치는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좋은 집에서 살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굶주림에서는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어릴 때 주변 사람들이 굶는 모습도 봤고, 저도 굶어봐서 그런지, 굶주림만큼은 없어져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외국에 나가면 사람이 굶는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먹고, 산속에 토끼도 먹고 살아가는데, 사람도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에서 기아 퇴치 운동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셋째, 현재 지구의 환경이 너무 악화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나무를 베고, 건설을 해도 환경 문제가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지구의 자연정화능력보다 우리의 파괴의 힘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파괴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개발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지구의 자연정화능력 이상으로 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개발이라고 인식하지만 실제로는 지구환경 파괴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속 가능하지 않은 이런 개발은 이제 멈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구 환경을 살리는 실천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괜찮지만 세상을 위해서 하는 활동이 아니라 나 역시 이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서 건강을 유지하는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 하는 활동이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활동입니다.

이런 활동에 의미 부여를 하고 우리가 모인 겁니다. 이렇게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을 하기로 했고, 여러분들은 그 뜻에 동조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저를 비롯해서 법사님들 몇 분이 함께 뜻을 세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에 동조한다는 것은 여러분도 이런 활동에 의미 부여를 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설악산에 올라가자고 하니 골프 치던 사람들, 술 먹던 사람들, 놀던 사람들도 따라온 것과 같습니다. 무슨 이유로 따라왔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런 활동이 좋아 보이니까 따라온 거예요. (모두 웃음)

불평불만이 생기는 이유

그런데 설악산에 올라가는지 모르고 그냥 좋아 보여서 따라온 사람들은 아래 계곡에서는 좋았는데 오르막이 시작되니까 ‘왜 이렇게 힘든 산을 오르나?’ 하고 불평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일이 확실히 자기 일이 되지 않은 상태이다 보니까 불평이 생깁니다.

저는 제가 의미를 부여해서 선택한 일이기 때문에 아무리 힘이 들어도 다만 할 뿐입니다. 오늘 밤에도 필리핀 민다나오로 떠나는 일정인데, 민다나오에 가서 몇 시간을 걷거나 트럭 뒤에 타거나 잠자리가 불편해도 제가 선택한 일이니까 그냥 하는 거예요. 스님이라고 왜 불편하지 않겠어요. 그건 단식할 때 ‘스님은 배 안 고프십니까?’하고 묻는 것과 똑같아요. (모두 웃음)

여러분도 백두대간을 등산하겠다고 선택해서 올라가도 다리가 아프고 춥고 하잖아요. 그래도 자기가 의미 부여를 하고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견뎌나갑니다. 어제 삼천 배 할 때도 다리가 아픕니다. 그래도 여러분이 선택해서 참여했기 때문에 다리가 아파도 견디고 해 나가는 거예요. 만약 공무원 연수를 하는데 삼천 배를 시키면 인권침해라고 하면서 난리가 날 거예요. (모두 웃음)

여러분과 저의 차이는 의지력의 차이가 아니에요. 저는 제가 자발적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이 일을 제 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여러분은 아직 그 확신이 덜한 차이입니다. 저 역시도 제가 선택했지만 모든 일을 완전히 다 제 일로 받아들인다고는 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선택했지만 후회가 되거나 ‘이 일을 꼭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100%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하는 일의 90%는 나의 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50% 정도를 나의 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자꾸 ‘이 일을 꼭 해야 하나?’ 하는 불평을 하게 되는 겁니다. 하기 싫으면 중간에 그만두면 되는데 불평을 하면서도 계속 따라옵니다. (모두 웃음)

산에 오르는 것에 비유하면, 경치 좋은 계곡을 걸을 때는 좋았는데, 이제 가파른 곳에 다다르니 불평불만이 심해지는 것과 같아요. 제가 여러분보다 특별히 의지가 강하거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해예요. 차이는 이 일을 얼마나 자기화했는가에 있습니다. 제가 90% 자기화를 했다면 여러분은 아직 50%밖에 하지 않은 채 가고 있는 차이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리가 아프지만, 다리가 아플 때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자기화가 덜 된 사람은 다리 아픈 것이 불만으로 나타납니다.

‘여길 왜 오르냐?’
‘조금 천천히 가면 안 되냐?’
‘짐을 이렇게 많이 가지고 갈 필요가 있냐?’

이렇게 불평을 하게 되는 이유는 지금 하는 일이 나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개개인마다 업식의 차이가 조금씩 있지만 제가 볼 때는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인가’입니다.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스스로가 어디에 의미 부여를 하고 선택하며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자발적 선택이 가장 중요해요.

큰 집에 사는 것에 의미 부여를 하고 살 수도 있지만, 방이 넓어봐야 청소하기 힘들고, 정원이 커봐야 관리하기에 힘만 들어요. 이렇게 가치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돈을 벌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어서 어디에 쓸 것인가, 지위가 높지 않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지위를 어디에 이용할 것인가, 내가 가진 명예를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내가 가진 돈, 내가 가진 지위, 내가 가진 명예를 어려운 사람을 돕고 평화를 지키는 데 사용하자.’

이렇게 의미 부여를 하고 살 수도 있잖아요. 어떤 사람은 돈을 모아서 큰 집을 사는 데 쓰지만, 우리는 돈을 모으는 이유가 굶어 죽는 사람들을 돕고자 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높은 지위를 갖는 것에 목적을 두기 때문에 지위를 얻고 난 뒤 모두 사익을 위해 사용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킵니다. 대통령이 되는 것도 대통령이 되는 것 자체에 목적을 두면 안 됩니다. ‘대통령이 되어서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겠다’ 이런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일반인으로서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민으로서 아무리 민원을 제기해도 해결되지 않으니 내가 시장이 되어서 우리 고장에 이러이러한 문제를 꼭 해결하겠다!’

이런 목적의식을 가지고 시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시장, 대통령 등의 지위가 무언가를 하기 위한 도구가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위를 얻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그것을 얻고 난 뒤에 불행의 길을 걷게 됩니다. 얻기까지는 모두 훌륭한 사람이었는데 얻고 난 뒤에는 존경을 받기보다 불행한 길을 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얻고 나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목표를 두지 않고, 얻는 것 자체에만 의미 부여를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떤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살 것인가

우리는 목적을 이루어가는 과정과 목적을 이루는 데 의미를 부여하지, 무언가가 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정토회가 커지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표입니다. 우리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결과적으로 정토회가 커지는 것이지, 정토회를 커지게 하기 위해서 좋은 일을 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들 모두 9차 천일결사에서도 좋은 마음으로 활동을 잘해주셨지만, 10차 천일결사에서도 어디에 의미 부여를 할 것인지 가다듬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원래 의미라는 것은 없습니다. 제법(諸法)은 공(空)하다는 것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기 때문에 각자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해서 그 일을 할 때는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장애가 별 일 아닙니다. 오래 걷는 게 별 일 아니고, 위험한 것도 별 일 아닙니다. 목표가 해외여행인 사람을 아프가니스탄이나 필리핀 민다나오에 데려가면 비싼 돈 냈는데 고생만 시킨다고 불평할 것입니다. 그러나 목표와 의미 부여를 달리하면 힘든 길을 걷는 것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인도 성지순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는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걸어 다녀야 되는데 차로 이동을 시켜준다고 생각하면 인도에서의 생활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날씨는 춥고 오래 걸어서 다리가 아프지만, 자기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목표를 이루어나가는 과정에서 기쁨이 생깁니다. 그런데 자기가 선택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날씨는 춥고, 먼지는 많고, 잠자리는 불편하고... 첫날부터 공항에서 잠을 자야 하다니 이게 뭐하는 짓이냐’ 이렇게 계속 불만이 생깁니다. 계속 불평불만을 하고 있으면, 가는 길이 힘듭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여러분도 불평만 계속할 거면 이 길에서 빠지면 된다는 거예요. 누가 가자고 해서 억지로 따라온 게 아니잖아요. (모두 웃음)

각자 선택해서 가기로 한 거니까 의기투합을 해야 합니다. 가는 과정에서 힘이 드는 건 당연합니다. 직장생활도 해야 하고, 가정생활도 해야 하는데 정토회 활동까지 하려니 힘듭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정생활도 힘들고, 직장생활도 힘이 들어서, 가정을 떼려 치우거나, 직장을 떼려 치우는데, 여러분들은 직장생활도 잘하라고 하고, 가정에서도 고개를 숙이라고 하고, 거기에다가 정토회 활동에 통일의병 활동까지 하라고 하니 힘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이건 등산을 하는데 짐이 무거운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짐은 우리가 산 정상까지 오르는데 필요한 짐이어서 들고 가는 것이지, 누구 고생시키려고 일부러 들고 가는 게 아닙니다. 밑에 있을 때는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올라가서 하룻밤 자려고 하면 텐트도 챙겨가야 하고, 물도 챙겨가야 합니다. 그러니 힘들면 속도를 조금 늦춰서 가거나 중간에 쉬면서 가면 되지, 가는 것 자체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습니다.

내일 죽어도 후회가 없는 인생

이런 관점을 가지고 서로 힘든 부분을 나누면서 마음을 모아 나가면, 나중에 돌아봤을 때 이렇게 추억을 하게 될 겁니다.

‘우리 그때 설악산 올라갈 때 다리가 참 많이 아팠어, 목도 많이 말랐는데 얼마 안 남은 물을 서로 나눠마셨을 때 참 좋았어.’

인생이라는 게 별 거 없습니다. 정토회가 나중에 큰 역할을 했다고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는 건 산 정상에 올라가서 주변을 둘러보는 것과 같습니다. 정상에 오르겠다는 목표를 세웠으니 그것을 달성하는 것도 소중한 일이지만,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건 한 발 한 발 오르면서 어려움을 함께 극복해가는 과정입니다. 삼천 배를 마친 것도 중요하지만 삼천 배를 하는 과정에서 올라오는 갖가지 마음의 장애를 뛰어넘는 것이 정말 소중한 것과 같습니다.

이런 관점을 갖고 해 나가신다면 오늘 죽거나 내일 죽어도 후회가 없습니다. 일을 성취하고 이루는 것에만 목표를 두면, 중간에 그만두거나 실패를 하게 되면 ‘못했다’는 생각으로 인해 후회를 하게 됩니다. 이루지도 못할 일에 에너지를 낭비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수행적 관점을 가지게 되면, 가는 데까지 가는 거예요. 오늘 죽든 내일 죽든 다시 산다고 해도 이 길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후회하는 일들이 많았잖아요. 어릴 때를 돌아보면 바보 같은 짓을 많이 하고 살았잖아요. 이제는 바보 같은 짓을 덜하고 살자는 거예요.

지난 3년 동안 모두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기적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 내부를 들여다보면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우리 몸의 작은 세포처럼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정토회가 있는 겁니다. 밥하는 분은 밥을 하고, 청소하는 분은 청소를 하고, 그런 일들 하나하나가 모여서 지금의 정토회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3년을 회향하며 서로를 격려해 줍시다. 또 부족했던 부분은 재정비를 해서 내년 봄에는 30년 만일결사의 마지막 3년인 10차 천일결사를 반갑게 맞이합시다.” (모두 박수)

이어서 대중공사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중공사는 관습, 윤리, 도덕,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어떤 길이 올바른 길인지 자유롭게 대화하는 자리입니다.

“제9차 천일결사를 회향하면서 개인 수행이든, 정토회 운영이든, 개선점이나 좋았던 점이 있으면 자유롭게 대화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안을 하셔도 좋고, 선전을 하셔도 좋고, 질문을 하셔도 좋아요. 이야기하실 분은 손을 한 번 들어보세요.”

스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손을 들었습니다.

12명이 다양한 건의사항과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이 바로 답변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 내용에 대해 비슷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일어나서 질문자에게 경험담을 들려주고, 마지막에 스님의 생각도 함께 나누어주는 방식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 퇴근하면 밥 먹을 힘도 없을 정도로 피곤합니다.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직장일도 하고, 정토회 봉사도 할 수 있을까요?
  • 불교대학에 조현병이나 우울증이 있는 사람이 오면 담당자들이 힘들어합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 친했던 두 사람이 서로 싸우고 나서는 법문을 들으러 나오지 않습니다. 어떡하죠?
  • 남편이 조울증입니다. 직장에서 문제를 일으켜서 퇴사한 후 줄곧 집에만 있는데, 집에서 자꾸 저를 시비합니다. 남편 이야기가 너무 듣기 싫고 힘듭니다.
  • 명심문 중에 ‘예하고 합니다’라는 말에 대해 오해가 많습니다.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 스님께서 대중에게 법문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직장 내에서 성희롱 발언이 사회 문제가 될 때가 많습니다. 정토회에서도 성희롱 교육이 구체적으로 이뤄지면 좋겠습니다.
    ......

대화가 오가는 중에 벌써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6명이 더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부족해 차례가 오지 않았습니다.

각자 싸 온 도시락 반찬을 펼쳐 놓고, 정토수련원에서 공양 바라지들이 준비해 준 밥과 국을 떠서 맛있게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 후에는 대청소 시간을 가졌습니다. 전 대중이 역할을 나눠 청소를 하고 나니 수련을 시작하기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깨끗해졌습니다.

다시 대수련장에 모여 1박 2일간의 수련을 마치는 회향식을 가졌습니다. 스님은 앞에 대중공사 시간에 미쳐 질문하지 못한 6명에게 질문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 법당에서 봉사하는 거사님들이 늘었는데, 보살님들이 남편 부려먹듯이 거사님들을 대해서 힘들어합니다.
  • 불교대학 학생 중에 왜 남자가 적게 들어오는지 고민입니다. 이번에는 남자가 한 명도 안 들어왔습니다. 정토회에는 왜 여자가 많을까요?
    ......

건의사항을 받다 보니 마쳐야 될 시간이 되었습니다.

“건의사항들 모두 잘 들으셨죠? 가능하면 우리의 지혜를 모아서 정토회를 잘 운영해 보자는 취지예요.”

마지막으로 스님은 "내년 2월 1일은 정토회의 대표와 행정처장을 선거하는 날이고, 2월 2일은 지역 정토회 대표와 총무 그리고 지역 대의원과 전국 대의원을 선거하는 날” 이라고 하면서 “선거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은 정토회 회원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다 함께 세 문장을 따라 하게 하면서 회향 법문을 마쳤습니다.

“나는 행복한 수행자입니다.
나는 법을 전하는 수행자입니다.
나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추구하는 수행자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가래떡에 김을 말아서 하나씩 나눠주었습니다. 대중들은 가래떡을 한 입씩 먹으면서 도반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문경 수련원을 내려갔습니다.

“12월 15일 회향식 날 다시 만나요.”

대중들이 모두 가고 서울 공동체와 문경 공동체에서 상주하는 활동가들은 다시 모였습니다. 스님이 물었습니다.

“어제 대중들에게는 선물을 다 나눠주었는데, 여러분은 절을 많이 하라고 안 불렀어요. (모두 웃음)

지금 선물을 주려고 하는데, 고춧가루가 좀 부족해요. 그래서 고춧가루를 꼭 받고 싶다는 사람만 손을 들어 보세요. 나머지는 사인한 책을 선물로 드릴게요.”

모두 손을 번쩍 들고 받고 싶은 선물을 신청했습니다. 책은 그 자리에서 선물로 나눠주고, 고춧가루는 따로 챙겨서 주기로 하고 모임을 마쳤습니다.

문경 수련원을 출발한 스님은 곧바로 필리핀으로 출국하기 위해 인천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오늘 밤 비행기로 필리핀에 도착하면 9일부터 12일까지 3일 동안에는 민다나오 JTS 사업장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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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앞으로의 불만 불평을 어떻게 나아갈지 알게됬어요....고마워요😭

2023-02-12 20:21:18

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참가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2020-02-02 13:14:28

김정화

고맙습니다 덕분입니다 ????

2019-12-17 15:4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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