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11.30 농사일, 공동체 대중과의 대화
“종교에 대해 거부감이 큽니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어제에 이어서 하루 종일 농사일을 했습니다.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일 나누기를 한 후 한 고랑씩 맡아서 고춧대 철거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어제 가지마다 묶어 놓은 끈을 많이 제거해 놓아서 오늘은 끈을 수거하는 작업이 한결 수월했습니다.

서울에서 5명의 행자님들이 지원도 왔습니다. 일손이 많아지니 속도도 빨라지고 여유도 있어집니다. 2인 1조가 되어서 한 사람은 끈을 풀면서 앞으로 가고, 한 사람은 끈 타래를 만들며 뒤따랐습니다.


그물망을 쳐 놓은 것도 풀어서 내년에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끈 타래로 만들었습니다. 가지 마다 그물망이 걸려있어서 하나하나 푸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재활용을 한 덕분에 고추밭에서 쓰레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끈 풀기가 끝난 고랑에는 부직포를 철거했습니다. 부직포도 흙이 묻지 않게 동그랗게 말아서 내년에 다시 사용할 수 있게 했습니다.

“아이고, 부직포를 깔아놓은 곳은 땅이 바짝 말라 있네.”

스님은 땅이 말라 있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더니 잠시 그 이유를 탐구했습니다.

“부직포를 덮어 놓아서 풀이 안 났구나 생각했는데, 습기가 없어서 풀이 안 자랐구나. 고춧대 밑에만 호스가 지나가서 물을 주니까 여기는 땅이 건조한 거야. 게다가 온실 속이니까 온도가 높잖아. 여기는 부직포를 안 깔아도 풀이 안 날 정도로 건조하다는 거지.”

옆 고랑에서는 행자님 두 명이 부직포를 깐 상태에서 고춧대를 뽑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스님이 말했습니다.

“부직포를 걷어내고 나서 고춧대를 뽑아야 부직포에 흙이 안 묻지 않을까요?”

똑같은 일도 순서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더 효율적입니다. 스님의 제안에 따라 부직포를 먼저 걷어내고 나서 고춧대를 뽑기로 했습니다.

철거한 지주대는 운반이 쉽게 10개씩 끈으로 묶었습니다. 지주대 역시 내년에 재사용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전 내내 철거 작업을 했지만 아직 비닐하우스 두 동 중에 한 동의 절반밖에 철거하지 못했습니다.

“이야, 끈 걷는 게 보통 일이 아니네. 오전 내내 해도 한 고랑을 끝내기 어렵다.”

점심 먹고 오후에 다시 일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오후에도 행자님들은 고춧대 철거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비닐하우스 한 동이 깨끗하게 철거가 되었습니다. 깨끗이 정리된 비닐하우스를 보니 마음도 시원해집니다.

한편 스님은 텃밭으로 가서 배추와 무를 수확했습니다. 지난번에 김장할 때 몇 포기는 뽑지 않고 남겨 두었습니다. 12월에는 시골에 자주 내려오지 못하고, 또 1월에는 인도 성지순례를 가기 때문에 오늘 배추와 무를 모두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이야, 무 색깔 한 번 보세요. 무가 아주 잘 컸네.”

싱싱하게 자라준 무가 너무나 반갑기만 합니다.

무를 뽑자마자 그 자리에서 무청은 칼로 잘라 따로 모았습니다.

물김치 담을 무청만 따로 분류하고 나머지는 모두 끈으로 묶어서 시래기로 만들어 먹기 위해 줄에 걸어 두었습니다.

방금 밭에서 뽑은 무는 곧바로 씻어서 맑은 소금물에 담가 두었습니다. 겨울을 지나면 맛있는 동치미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배추는 김장을 하기 위해 곧바로 소금에 절였습니다.

배추를 정리하면서 나온 겉잎은 따로 모아서 마루에 널었습니다.

“배추 시래기로 만들어서 먹읍시다.”

배추와 무를 뽑은 자리에는 다시 거름을 주고 땅을 뒤집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왜 밭을 가는지 궁금했는데, 스님이 말했습니다.

“작년에 상추를 겨울에 심었더니 약간 싹이 자란 다음에 겨울을 넘기니까 봄에 심는 것보다 월등하게 품질이 좋았어요. 이번에도 상추 씨앗을 좀 뿌려 놓읍시다.”

거름을 뒤섞은 밭에는 새로 두둑을 만들었습니다.

내일모레 씨 뿌리고 비닐을 씌워 놓으면 겨울을 이긴 싹이 봄에 아주 싱싱한 잎을 드러낼 것입니다. 오후 5시가 되자 벌써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녁에는 같이 모여서 마음 나누기를 합시다. 씻고 나서 좀 있다 봐요.”

농사일을 돕기 위해 바쁜 일 제쳐두고 서울에서 내려온 행자님들을 위해 스님이 줄 수 있는 보답은 법문입니다. 스님의 제안에 조촐한 대화의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오늘 일하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함께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명씩 오늘 일하면서 들었던 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비닐하우스 안이 깨끗해지니까 기분이 상쾌해졌습니다.”

“마무리를 함께 하니까 지난 1년의 시간이 기억나면서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고추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조금씩 자라나는 기분을 느꼈어요. 마무리를 하면서 고추와 함께 성장한 내 모습을 다시 떠올려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고춧가루가 내 앞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고가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물망을 걷는 게 너무 어려웠어요. 한꺼번에 확 잡아당기고 싶었는데 그러면 더 엉키니까 하나하나 잡아주면서 걷어야 했어요. 어부가 그물망에 잡힌 물고기를 건져내는 기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도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물을 걷기가 어려웠다고 하는데 저는 생각보다 그물을 걷는 게 쉬웠어요. 여러분들이 늘 늦게까지 고추밭에서 일한다고 해서 ‘뭐 한다고 그렇게 늦게까지 일할 게 있냐’ 이렇게 문제 제기를 했는데, 오늘 철거를 해보니까 끈을 가지마다 묶어 놓았더구먼요. 그래서 ‘아, 내가 그 과정을 같이 안 해서 몰랐구나. 일이 참 많았네’ 하고 느꼈어요.

역시 사람이 많으니까 일이 수월하네요. 혼자서 하려니까 좀 힘들었는데, 둘이서 분업을 하니까 훨씬 효율적이었어요. 한 사람은 끈을 걷어내고, 한 사람은 끈을 말고, 이렇게 하니까 빨리빨리 일이 진행되었어요. 오늘 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하루 종일 노동을 한 행자님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 스님은 노동의 가치와 화폐의 가치에 대해 느낀 바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올해 농사를 화폐 가치로 계산한다면

“오늘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한 해 동안 정성 들여 키운 고추를 1kg에 3만 원으로 계산한다면, 그건 우리 노동력의 값어치를 너무 낮게 계산하는 것 아닌가. 다시 말해 고추농사에 투여한 우리의 노동력을 단순히 고추를 팔고 얻은 돈으로 환산한다면 우리 노동의 값어치가 너무 없게 된다는 겁니다.

화폐 가치로 노동을 평가한다면 올해 우리가 농사를 지은 건 큰 가치가 없어요. 만약에 제가 유료 강의를 한다면, 1년 동안 여러분들이 밭 갈고 씨 뿌리고 농사지은 총매출액은 제가 몇 번 강의하면 되는 액수예요.

현재와 같이 노동의 가치를 화폐로 평가하는 사회에서는 부자가 되거나 가난하게 되는 것은 가치 부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물론 개인이 가진 재능과 부지런함이 부자가 되거나 가난하게 되는 데에 영향을 주긴 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노력만으로 부자가 된다는 건 아주 일부분에 해당하는 요소예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분배의 구조를 비교적 균등하게 조정하는 게 필요하다는 문제 제기에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해결책은 화폐 가치로 노동의 가치를 판단하는 걸 버리는 거예요. 우리가 화폐 가치로 자기 삶의 가치를 부여한다면 이 문제는 해결되기 어렵습니다. 평등하게 부를 분배하는 것도 물론 쉬운 일이 아니지만, 과연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은 그럼 평등한 것인가, 이런 문제가 또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동의 가치를 화폐 가치로 평가하면 올해 우리가 농사를 지은 일이 초라해집니다. 그러나 화폐 가치로 계산하지 않는 삶을 산다면 우리가 농사지은 건 굉장히 보람 있는 행위입니다. 노동을 화폐 가치로만 계산하는 사고방식을 초월하는 인생관을 가지면 어떤 일이든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노동을 화폐 가치로만 판단한다면 자신이 하는 일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에서 벗어나기가 좀 어려울 겁니다.

올해 고추 농사를 지어보니까 고춧가루 한 봉지에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지 알 수 있잖아요. 우리가 고추 농사를 안 짓는다면 고추를 수확하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지를 알 수 없는 거죠. 그것처럼 세상의 어떤 것에도 사람들의 노고가 깃들여져 있어서 우리가 생활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그 과정을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결과물이 그냥 저절로 쉽게 주어진 것 같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어요. 이렇게 고추를 수확하는데 필요한 노고를 직접 경험해본다는 게 중요합니다.

이처럼 경험한다는 것은 진실을 아는 거예요. 오늘 우리가 한 일들은 가상이 아니고 다 실제잖아요. 끈 하나 푸는 것에도 다 우리의 손길이 들어가야 하는 거잖아요. 노동을 화폐 가치로만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인생의 중심을 어떻게 잡고 살 건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이 안 잡히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죽을 때까지 돈의 노예가 되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 나누기를 모두 마치고, 스님은 “혹시 묻고 싶었던 것이 있으면 질문을 해보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질문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자 한 행자님이 망설임 없이 손을 들고 질문했습니다.

정토회에서 살고 있지만, 아직 종교에 대해 거부감이 있어요

“법문에서 ‘공동체 대중은 머리만 안 깎았다 뿐이지 스님이다’라는 말씀에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저는 스님이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정토행자는 머리 안 깎은 스님이라고 하시니 정토회에 대한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봉사하는 건 너무 재밌고 좋은데 스스로 수행자라는 자부심이 없는 게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어릴 때부터 저희 집에서는 종교 자체에 대해서 싫어했습니다. 아버지가 교회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하신 걸 들으며 자라다 보니 내적으로는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있습니다. 공동체에서 사는 건 재밌는데 제가 종교에 대해 거부감이 있다 보니 공동체에 사는 것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이 있습니다. 제가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정토회에 온 지 몇 년 됐어요?”

“공동체에 생활한 지 1년 10개월 됐습니다.”

“네, 그러면 정토회와 처음으로 인연이 된 건 언제예요?”

“2년 6개월 정도 되었습니다.”

“그러면 불교대학은 졸업했나요?”

“백일출가에서 불교대학과 경전반을 마쳤습니다.”

“질문하는 내용을 들어보니 행자님은 정토회에서 무엇을 가르치는지 전혀 모르고 그냥 사람들과 어울려서 놀러 다니는 수준으로 지내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은 종교가 아니라고 수도 없이 얘기를 했는데, 행자님이 종교로서의 불교에 대한 질문을 하니까 도대체 정토회에 들어와서 무엇을 배웠는지 궁금하네요. 또 법사님들이 백일출가에서 뭘 가르치는지, 불교대학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는지 제가 오히려 의문이 들어요. 즉문즉설을 할 때 일반 사람들이 그렇게 질문하면 이해가 되는데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행자님이 그런 질문을 하니까 이상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행자님이 집중해서 법문을 안 듣는다고 밖에 볼 수가 없어요. 한 번도 법문을 내 문제로 받아들여서 들은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살면 공동체에서 10년을 살아도 도대체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모인 것인지 전혀 모를 거예요. 행자님은 정토회를 그냥 세상 사람들이 말하듯이 불교라는 종교 단체로 이해하고 있어요.

‘내가 어려울 때 하나님한테 부탁하든 부처님한테 부탁하든 누구한테 부탁하면 나의 어려움을 그분이 도와준다.’

이게 종교의 핵심이에요. 첫째, 그런 도움을 줄 만한 능력이 있는 존재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게 바로 부처나 신에 대한 믿음이죠. 둘째, 내가 기도하면 그분이 나를 도와준다고 믿습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해서 믿으면 신자가 되는 거예요. 그걸 안 믿는 사람은 신자가 아니에요. 즉 종교인이 아니에요.

정토회에서는 그런 얘기는 안 하잖아요. 그렇다고 종교를 부정하지도 않아요. 개인이 그런 걸 믿든지, 안 믿든지 그건 개인의 문제라고 봅니다. 그에 반해 정토회에서는 수행을 통해 개인의 번뇌와 괴로움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도록 안내합니다. 우리의 번뇌와 괴로움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면 사라집니다. 괴롭다든지 슬프다든지 하는 부정적인 정신 반응은 모두 인식 상의 오류로 인해서 생겨나는 겁니다. 사실대로 알지 못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상태로부터 우리의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고추 농사를 예로 든다면, 어떤 노동이든 그걸 화폐 가치로 계산할 수 없다는 게 진실인 거예요. 고추 농사를 짓는 건 인간의 하나의 행위예요. 행위의 결과를 화폐로 계산해서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가격을 낮게 책정하면 나의 존재도 별 볼 일 없게 되는 겁니다. 반대로 높게 책정되면 훌륭한 존재라고 인식하게 돼요. 이게 바로 인식의 오류입니다. 잘났니, 못났니 하는 건 다 인식 상의 오류입니다. 인식 상의 오류가 시정되면 열등의식과 우월의식은 없어져버려요.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공부를 하기 위해 정토회에 나오는 거예요.

‘내가 누구를 미워했는데, 진실을 알고 보니까 미워할 일이 아니었구나.’

‘내가 잘했다고 생각해서 화를 냈는데, 실제는 잘했다고 할 게 없구나. 다만 그건 그 사람의 생각이었고, 이건 내 생각이었구나.’

‘아! 그게 화날 일이 아니구나’

이렇게 진실을 발견하면 화가 사라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랫동안 인식 상의 오류를 가진 상태에서 지금까지 살아왔고, 거기에 근거해서 집착하기 때문에 삶이 계속 힘들었던 거예요. 그러나 삶 자체는 아무런 힘들 일이 없어요. 토끼도 잘 살고, 다람쥐도 잘 살잖아요.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담배를 안 피워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런데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게 힘들어요. 담배 피우는 습관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그것처럼 인식 상의 오류에서 벗어나면 아무런 괴로울 일이 없어요. 인식 상의 오류가 발생하면 괴로움이 발생하는 거예요.

이런 이치를 알아도 금방 괴로움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오랫동안 자기도 모르게 인식 상의 오류 위에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아, 놓쳤구나. 이번에 내가 또 집착했구나. 집착을 안 한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집착하고 있었구나. 내가 옳다는 생각을 안 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옳다고 나도 모르게 붙들고 있었구나.’

이렇게 꾸준히 알아차려야 인식 상의 오류를 개선해 나갈 수 있어요. 왜 그런 오류가 반복되는지 살펴보면, 무의식에서 자기 생각을 움켜쥐고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을 움켜쥐고 있으면 인식 상의 오류가 눈에 잘 보이지도 않고, 귀에 잘 들리지도 않아요. 그래서 꾸준히 알아차려야 하는 거예요.

그런 공부를 하는 사람이 수행자입니다. 전통적으로 머리를 탁 깎으면 ‘나는 수행자이다’ 하는 입장이 서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생겨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도 ‘아, 내 생각에 사로 잡혔구나’ 하고 금방 알아차릴 수 있어요. 내가 수행자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입장을 확실히 갖는 거예요. 욕심을 내려고 해도 ‘오, 그건 내가 갈 길이 아니지’ 이렇게 알아차리게 되죠.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수행자와 종교인을 같게 보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어요. 스님이라는 단어에 수행자와 종교인의 개념이 겹쳐 있는 거죠. 그런데 보통 종교인은 일반 사람인 신도보다 높은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잖아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는 역할을 하다 보니 자꾸 목에 힘을 주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수행자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수행자가 되면 임금한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아야 하고, 부모한테도 절을 못 하게 해요.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절을 못 하게 하는 게 아니라 수행자로서 다른 이에게 절을 못 하게 하는 거예요. 수행자는 귀신한테도 절을 하면 안 되고, 신한테도 절을 하면 안 돼요. 그래서 천도재를 지낼 때는 가사를 입고 하지만 문상을 할 때는 가사를 탁 벗어 놓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뜻을 왜곡해서 자기가 잘난 걸로 인식하고 목에 힘을 주고 ‘내가 스님이네’ 하는 병폐가 생겼습니다. 수행자로서의 자부심을 가지라고 한 게 자부심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교만과 아만으로 존재하게 된 겁니다. 정토회에서 머리를 깎이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런 부작용을 없애려고 머리를 길러 놓으니까 이번에는 자기가 수행자라는 인식을 자꾸 놓칩니다. 욕심을 내고 성질을 내도 ‘내가 그 정도면 많이 했지’, ‘뭐 그만하면 됐지’, ‘이 정도 욕심은 누구나 있는 거야’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머리를 길러 놓게 하는 이유는 이런 마음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머리를 기르고 있지만 머리 깎은 사람처럼 자부심을 가져라. 동시에 머리를 기르고 있기 때문에 목에 힘주지 말고 타인에게 겸손해라.’

이런 얘기를 일반 대중을 상대로 안 하는 이유는 일반 대중은 법문에서 사용하는 용어나 개념을 잘못 알아듣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공동체에 사는 수행자들에게만 이 얘기를 하는 거예요.

현재 행자님은 그런 법문을 들을 수준이 전혀 안 되는 사람인데 그런 법문을 들었기 때문에 오해가 발생한 거예요. 제가 말한 스님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정확히 모르고 있어요. 공동체에 들어올 때부터 ‘내가 하루를 살더라도 수행자로 살아봐야 되겠다’ 이런 목표를 갖고 살면, 아무리 늦어도 3년 안에 변화가 옵니다. 단박에 올 수도 있지만 늦어도 3년 안에는 자기중심이 잡힙니다. 이것을 ‘득도’라고 해요. 도의 이치를 알았다는 의미입니다. 옛날에는 그때서야 비로소 머리를 깎아줬어요. 머리 깎는 행위는 ‘너는 이제 수행자의 길을 갈 준비가 되었다’ 하는 표시예요. 득도라는 말은 완전히 깨달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음의 작용을 알아서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길에 일단 첫발을 내디뎠다는 의미예요. 이 방향으로 서서 계속 연습을 하면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길로 가지는 거예요.

행자님은 이 방향 자체를 모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확하게 그게 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해가 안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취지에 동의도 안 되고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머리만 안 깎았지 우리는 스님이다’라고 얘기를 해도 무슨 말인지도 못 알아들은 겁니다. ‘나는 스님이 되려고 여기 오지 않았는데 왜 나보고 스님과 같다고 생각하라는 거지?’ 이렇게만 받아들이는 거예요. 행자님만 그런 게 아니라 여기 행자님 같은 사람이 몇 명 더 있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길게 설명해 주는 겁니다. (모두 웃음)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는 내가 그 방향으로 가겠다는 목표의식이 분명해야 해요. 목표의식이 분명하려면, 그 일을 하면 뭐가 좋은지, 왜 좋은지, 왜 나는 그 길로 가려고 하는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이런 자기 입장이 서야 ‘아, 이 길로 가야겠다’ 하는 확신이 생깁니다. 이런 확신이 생겨도 이 길로 잘 안 가져요. 가다가 넘어지고 자빠지고 이래요. 그래도 꾸준히 연습하면 안 되는 것 같지만 돌아보면 이만치 앞으로 나아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상처로 받아들여질 일들이 이제는 그 정도 일로는 상처가 안 되는 거예요.

부모님이 전화해서 야단을 쳐도, 과거에는 힘들어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아, 부모님이 지금 힘드시구나’ 이렇게 부모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꾸준히 연습하면 안 되는 가운데도 조금씩 진척이 되는 거예요. 자전거 타는 연습을 할 때 어제는 5번 넘어졌고 오늘은 2번 밖에 안 넘어졌다면 조금씩 자전거를 타는 쪽으로 나아간 것과 같습니다. 이 마음공부라는 것은 어떤 때는 확 좋아지는 것 같아요. 그러다가 어떤 때는 또 오랜 시간 동안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어요.

‘오히려 뒤로 물러나는 거 아닌가? 이렇게 해도 안 되는 거 보니 정말로 안 되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그것 또한 자연의 이치예요. 봄에 날씨를 한 번 보세요. 날씨가 따뜻해질 때 쭉 따뜻해지는 게 아니잖아요. 3월 달에 갑자기 따뜻해져서 벚꽃이 확 펴서 겨울이 다 간 줄 알았더니 4월 초에 거꾸로 날씨가 추워지는 경우도 있잖아요. 하지만 길게 보면 봄은 조금씩 오는 거예요. 하루하루를 비교해보면 오히려 오늘 날씨가 한 달 전보다 더 추운 날일 수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따뜻한 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꾸준히 해나가야 해요.

행자님이 여기서 이런 관점이 없이 살아도 정토회에는 큰 문제가 안 돼요. 그러나 이곳은 수행자의 모임이라고 늘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얘기하잖아요.

‘정토회는 수행공동체이다. 여기는 수행자들의 모임이다. 수행자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농사도 짓고, 통일운동도 하고, 사회운동도 하는 것이다.’

제가 정토회 말만 꺼내면 늘 이런 얘기를 하잖아요. 그래서 통일의병이 되려고 해도 수행자라는 자기 입지를 정하고 나서 통일의병이 될 수 있어요. 그냥 ‘나 통일운동할래’ 한다고 해서 통일의병을 시켜주지 않아요.

행자님이 이곳에 온 이유가 누가 시켜서 온 것도 아니고, 행자님이 자발적으로 온 거잖아요. 그런데도 이런 삶에 거부감이 든다면, 여기 와 있는 건 상관없는데 ‘왜 저렇게 자기 인생을 낭비할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제 말은 이왕 왔으니까 정신 좀 차리라는 겁니다.”

“네.”

“지금 같은 마음으로 여기에 살고 있는 건 성냥개비를 성냥갑에 슥슥 긋고 있는 것과 같아요. 성냥개비에 불을 붙이려면 마찰력이 300도가 넘어야 불이 붙어요. 인의 점화 온도가 300도예요. 그런데 300도 밑으로는 아무리 그어도 불이 안 켜져요. 만 번 긋는다고 해서 불이 켜지는 거 아니에요. 한 번을 그어도 300도가 넘어야 해요. 그런 것처럼 행자님이 정신을 차려야 부처님 법이 들립니다. 그래서 제가 정토회에 나온 지 몇 년 됐는지 물어본 거예요. 그렇게 살면 10년을 여기서 살아도 수행하고는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이에요. 물론 봉사자는 될 수 있어요. 행자님이 봉사를 해주니 일적으로는 아주 도움이 돼요. 그런데 행자님 자신을 위해서 어떤 것이 좋겠느냐는 겁니다.

그냥 봉사만 하겠다고 해도 되지만, 그러면 시간이 흐른 뒤에 행자님이 자기 자신을 돌아볼 때 ‘내가 시간 낭비했다. 허송세월 보냈다. 괜히 거기 가서 일만 해줬다’ 이렇게 후회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행자님 자신이 얼마나 초라해져요?

우리가 등산을 할 때 땀을 뻑뻑 흘리고 올라갔다 와도 고생한 대가를 받지 못했다고 후회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왜냐하면 자기가 선택해서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등산하는 행위 자체에 자기 삶의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대가를 바랄 필요가 없는 거예요.

이런 관점을 딱 가지고 공부를 해야 돼요. 젊다 보니까 떠들고 놀고 자빠지고 엎어지기도 하지만, 정토회는 부처님께 복을 빌어서 문제를 해결하는 그런 단체가 아니잖아요. 물론 질문자의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정토회도 다른 불교단체와 똑같거니 생각하셔서 반대할 수 있어요. 그러나 행자님은 여기서 수도 없이 법문을 들은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마치 오늘 길 가다가 처음 법문을 들어본 사람이 질문하는 것처럼 말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관점을 제대로 갖고 마음공부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수행자의 관점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볼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밤이 깊었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두북 수련원 뒷산에 초승달이 떠 있었습니다.

내일은 새벽에 문경으로 이동해 6시부터 불교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졸업 수련 특강을 한 후 오후에는 대전으로 이동해 통일특별위원회 멤버들과 함께 통일의병 대회를 함께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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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대중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_^

2020-01-07 17:39:26

이호신

저도 비슷하게 생각한면이 있었는데 큰 가르침 감사합니다.
불대를 다니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좋은 습관들이 쌓여 스며들고 있습니다. 좀더 정진해야겠습니다.

2019-12-07 16:07:35

보디사트바

준엄한 경책과 가르침... 감사합니다. _()_

종교라는 단어에 대해서 모두 정의가 달라서 오해가 많은 것 같습니다. ㅎㅎ
개인적으로 이제 종교라는 단어가 대중들에게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간다는 사실이 너무 가슴 아픕니다.
전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단어이 보살이란 호칭을 쓰지 말자는 건의도 봤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단어의 의미가 많이 다르게 인식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2019-12-04 16:5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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