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11.3. 경전반 특강, 영남권 행복캠프
“수입은 줄고, 지출은 늘고... 가게를 접어야 할까요?”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문경 정토수련원에서 경전반 특강을 하고 부산 민주공원에서 행복캠프에서 법문을 했습니다.

새벽 2시 반, 두북에서 일찍 아침을 먹고 3시에 문경으로 출발했습니다. 6시부터 경전반 학생들을 위한 특강이 열렸습니다. 강원 경기동부, 부산 울산, 광주전라, 경남지부에서 271명이 모였습니다.

“잘 주무셨어요? 일찍 일어나니까 좀 졸려요? 집에 있을 때는 아직 자고 있을 시간이죠?”

“예.”

“예라고 하면 어떡해요? 천일결사 입재를 했으면 5시에 일어나서 기도해야죠. 기도 안 하는 사람이 더 많군요. (모두 웃음)

이번 특강 수련 참가자는 지난 9월에 경전반에 입학한 가을 경전반 학생들입니다. 특강 수련을 오기 전 금강경 6강 또는 7강까지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자, 그러면 금강경을 배우면서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짧게 인사를 나눈 후 바로 질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불구부정이라고 했는데 왜 삼악도에 처했다는 표현을 할까요

“금강경 6강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바세계가 도덕성을 상실하고 삼악도에 처했다는 표현이 나오는 반면에 바로 뒤쪽에 불구부정이라고 더럽다는 것에 분별 내는 마음을 내면 안 된다는 표현이 또 나오거든요. 불구부정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더럽다, 깨끗하다는 분별을 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질문드립니다.”

“이 세상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냥 존재할 뿐입니다. 예토(穢土)도 아니고 정토(淨土)도 아니에요. 삼악도(三惡道)도 아니고 삼선도(三善道)도 아닙니다. 존재는 그냥 존재일 뿐이에요.

사람들은 이 컵이 크다고도 하고 작다고도 하지만, 이 컵은 존재 자체로 보면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이 컵을 마이크와 비교하면 작은 게 되고, 컵 뚜껑 하고 비교하면 큰 게 되죠.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에서는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어요. 그러나 크다 작다 하는 것은 인식상의 문제지, 존재의 문제는 아니에요. 존재 자체는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존재 자체는 새것도 아니고 헌것도 아니에요. 우리가 포장을 뜯고 컵을 꺼내면서 ‘이 컵은 새 컵이다’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새 컵으로 인식을 하는 것뿐이에요. ‘이건 커피잔이다’, ‘이건 물잔이다’ 이렇게 말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인식하는 거지, 존재 자체에 물잔이며 커피잔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물을 담으면 물잔이고 커피를 담으면 커피잔이에요.

그래서 불구부정(不垢不净), 부증불감(不增不减), 불생불멸(不生不滅), 이런 말은 존재 자체를 말하는 거예요. 사물의 존재 자체는 깨끗한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어요.

똑같은 물인데 온도가 0도 이하로 떨어지면 액체에서 고체로 모양이 달라져요. 0도 이하는 얼음이라고 부르고, 0도 이상은 물이라고 불러요. 그러나 존재 자체는 질량 불변의 법칙에 의해 그대로입니다. 세상의 만물은 그냥 존재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존재를 인식할 때는 모양이 약간 바뀌면 서로 다르게 인식합니다. 바뀌기 전과 후를 서로 다른 물체로 인식합니다. 크니 작니, 새 것이니 헌 것이니, 똥이니 밥이니, 하는 것은 인식 상의 문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객관이 아닌 주관입니다.

존재는 같지만 인식은 서로 다른 겁니다. 존재 자체는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지만, 이 컵을 마이크와 비교할 때는 작다고 인식이 되고, 컵 뚜껑과 비교할 때는 크다고 인식이 되는 겁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세상 만물은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고, 새 것도 없고 헌 것도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구별할 줄 아는 인식이 없는 거예요. 우리는 다르게 인식하지만 그 본질에는 다름이 없어요.

우리의 잘못은 자기가 그렇게 인식한 것을 갖고 실제로 존재 자체가 큰 것이 있고 작은 것이 있다고 착각한다는 겁니다. ‘이건 큰 게 아니라 작은 거잖아!’ 이렇게 주장하는데, 크다 작다는 인식 상의 문제입니다. 인식 상의 문제를 객관적인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마음속에 괴로움이 생기고, 시비가 생기고, 분별이 생기는 거예요.

저 사람은 이 컵을 ‘크다!’라고 주장하고, 이 사람은 이 컵을 ‘작다!’라고 주장한다면, 상대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서로 인식을 달리하고 있는 겁니다. ‘아, 저 사람은 나와 인식을 달리 하는구나’ 이렇게 받아들이면 서로 갈등이 안 생겨요. 인식을 달리할 뿐인데 객관의 문제로 생각하니까 ‘어떻게 저 인간은 작은 것을 크다고 그러느냐, 미친놈 아니냐’ 이렇게 말하게 되고, 갈등이 생기는 겁니다.

상대가 자신의 이해관계, 습관에 의해 나와 달리 인식하는 것을 틀렸다고 보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겁니다. 이렇게 갈등이 생기면 그게 괴로움이 되는 거예요. 그 괴로움의 정도가 가장 극심한 곳을 ‘지옥’이라고 부르고, 그다음으로 괴로운 곳을 ‘아귀’, 그다음으로 괴로운 곳을 ‘축생’, 이렇게 지옥, 아귀, 축생을 삼악도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전쟁을 일으키고, 기아 문제가 일어나고 하니까 마치 ‘삼악도’와 같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깨닫고 나서 이런 인식상의 오류가 다 시정되고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내가 인식하는 세계에서는 세상을 극락세계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인식 상의 오류를 갖고 세상을 보면 세상이 삼악도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지혜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악몽을 꾼 것과 같아요. 꿈을 깨면 삼악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꿈에서 깨면 남을 헤치는 행위를 하지 않게 돼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어서 다음 질문자가 일어나 궁금한 점을 물었습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법칙도 결국 변하는 것 아닌가요?

“얼마 전 목사님이 저한테 질문을 던졌어요. ‘불교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해서 모든 것은 다 사라지고 변한다고 하더라. 그러면 제행무상이라는 법칙 역시 무상하지 않으냐?’ 이렇게 물으니까 제가 대답을 못하겠더라고요. 어떻게 대답을 해야 올바른 답변일까요?”

“질문자가 그 목사님한테 말이 딸렸군요. (모두 웃음)

지구 상에 있는 그 어떤 물체도 밑으로 떨어진다고 하면 맞는 말입니까? 지구 상에서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물체가 없잖아요. 그래서 ‘모든 물체는 떨어진다’ 이건 법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떨어진다고 하는 이 법칙도 떨어진다’라고 하면 맞는 말일까요? 지구 상에 있는 모든 것이 떨어진다고 했으니까 ‘떨어진다’라고 하는 이 법칙도 떨어져요?”

“아니요.”

“이런 걸 사변이라는 합니다. 그것처럼 ‘지구 상에 있는 모든 물체는 변화한다’라는 법칙이 있어요. 그러면 변화한다고 말했다고 해서 이 법칙도 변화할까요?”

“아니요.”

“이제 이해하시겠어요?”

“...” (질문자 침묵)

“만약 ‘어떤 물체도 고열을 가하면 탄다’ 이런 법칙이 있다고 한다면, ‘이 법칙도 탄다’ 이렇게 얘기하면 맞는 말이에요?”

“아니요.”

“모자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걸 궤변이라고 해요. ‘모든 것은 떨어진다’는 것은 하나의 법칙입니다. 실제로 실험해보면 다 떨어지잖아요. 그걸 보고 어떤 사람이 머리에서 궤변을 생각해낸 거예요. ‘그러면 그 법칙도 떨어지는가? 그 법칙도 떨어져 버리는 게 아니라면 말이 안 맞지 않느냐?’ 이런 궤변을 하는 겁니다.

지구 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변한다는 것도 하나의 법칙입니다. ‘모든 존재는 떨어진다’라고 하듯이 ‘모든 존재는 변화한다’ 이것도 하나의 원리예요. ‘그러면 그 변화한다는 법칙도 변화해야 하지 않느냐? 그렇지 않으면 말이 안 맞지 않느냐?’ 이러는 게 궤변이에요.

만약에 ‘모든 것이 다 물에 젖는다’ 이런 법칙이 있다고 한다면, ‘그럼 그 법칙도 물에 젖는다’ 이렇게 말해야 할까요?”

“이제 이해했습니다.”(모두 박수)

이 외에도 3시간 동안 궁금했던 점을 마음껏 물어볼 수 있었습니다.

“해탈하면 영원히 소멸하잖아요. 해탈하고 싶다가도 영원히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해탈하기가 싫어요.”
“배워도 실천은 잘 안돼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정진하기 힘들어요.”
“스님 책을 읽어보니 봉사를 통해 전적으로 자기실현을 할 수 있다고 적혀있었어요. 저 같은 중생이 어떻게 봉사를 통한 자기실현을 할 수 있을까요?”
“아침에 매일 읽는 경전에 요즘 ‘미증유법’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미증유법이란 무엇입니까?”

법문을 마치고 경전반 학생들이 오늘 들은 법문을 가슴에 새기며 명상을 하고 있는 사이 스님은 곧바로 부산으로 출발했습니다.

3시간을 달려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점심식사로 국수를 먹고 민주공원 민주항쟁기념관으로 갔습니다. 스님은 강연을 하기 전 잠시 민주공원을 산책한 후 행사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전국에서 300여 명의 행복학교 참가자들이 모여 오전부터 행복캠프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오후에 참가하여 ‘생방송 행복학교’와 ‘즉문즉설’을 함께 했습니다. 1시부터 생방송 행복학교를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영상으로만 뵙던 법륜 스님을 직접 모시고 행복학교를 진행해 보겠습니다.”

영상으로 진행하는 행복학교를 생방송으로 진행해보았습니다. 스님이 무대에 등장하자 뜨거운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스님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습니다.

양심에 찔리는 일을 한 적이 있나요?

스님에게 질문을 하기에 앞서 사회자가 참가자들에게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한 일 중에 양심에 찔리는 일’을 물었습니다.

“아들을 두드려 팬 일”
“친구에게 과자 훔치라고 시킨 일”
“고등학생 때 부모님을 속여 교재비를 더 많이 받은 일”
“시어머니가 만들어준 음식을 몰래 버린 일”

솔직한 대답에 청중석은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이어서 점포 운영이 어려워져 직원들에게 최저시급을 못 맞춰주니 양심에 찔린다는 분이 일어나서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수입은 줄고 지출은 늘고, 가게를 접어야 할까요

“저는 15년 차 자영업자입니다. 처음 장사를 시작하고 10년가량은 점포 운영을 그럭저럭 잘 해왔지만 최근 몇 년 들어 운영에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습니다. 언론에 나오다시피 경기침체도 오고, 매출이 많이 하락하고 있고, 지출 경비는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년부터 직원을 좀 줄이고 제가 근무를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올해는 직원들한테 최저임금도 맞춰주기 힘든 상황이 되었습니다. 직원들하고 협의를 하긴 하였으나 저는 자동으로 범법자가 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점포를 계속 운영해야 하는지, 아니면 접어야 하는지 고민입니다.”

스님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마음으로 어려운 시기를 현명하게 대처해 나가야 하는지 그 마음가짐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접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접기 전에 이런 점은 고려해보세요. 예를 들어 전에는 이익이 매달 1000만 원씩 남다가 요즘은 이익이 팍 줄어서 매달 500만 원 이익이 남는다고 할 경우에, 점포를 안 접고 계속 운영하면 앞으로는 그 이익이 300만 원으로 줄어들고, 그다음에는 200만 원으로 줄어들어요.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점포를 운영해야 합니다.

전과 비교하면 500만 원 이익은 1000만 원 이익에 비해 ‘에이, 별로 남는 게 없다’ 이렇게 생각이 들지만, 점포를 접고 집에서 논다고 생각하면 500만 원조차 이익이 생길 일이 없잖아요. 점포를 접은 뒤 다른 일을 하려고 할 때 500만 원의 이익이 생길 일이 금방 떠오르지 않는다면, 하던 일을 그대로 하는 게 좋아요.

그러나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이익이 다시 700만 원 선으로라도 오를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해야 합니다. 이익은 계속 줄어들어요. 다만 300만 원으로 줄어들 때 접을 건지, 200만 원으로 줄어들 때 접을 건지, 아예 제로가 될 때 접을 건지, 적절한 시기를 택해서 접는 게 좋아요.

길게 봐서는 접어야 하는데, 어느 시점에 접을 건지가 관건입니다. 내가 어느 시점에서 접는 게 이익 면에서 효과적인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접으면 점포의 권리금을 1000만 원 받고, 2년 후에 접으면 500만 원을 받는다고 합시다. 그런데 2년 벌어봐야 그만한 돈을 벌 수가 없다면 지금 접는 게 낫겠죠. 또는 아예 지금도 권리금을 받을 수가 없다면 이렇게 생각해야죠.

‘지금 특별히 할 만한 다른 일도 없고 하니 이익이 조금이라도 남아서 내 인건비라도 나올 동안은 그냥 하는 게 좋겠다. 그러나 내 인건비도 안 나올 정도가 되면 그때 가서 접는 게 낫겠다.’

이런 요소를 계산해서 지금 접을지, 1년 후에 접을지, 3년 후에 접을지, 5년 후에 접을지 본인이 설계를 해나가는 게 좋습니다.

자영업이 안 되는 이유

자영업이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첫째, 한국 경제가 저성장 국면에 있기 때문입니다.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연간 10퍼센트까지 성장하던 고성장 국면에서는 가게를 운영하든 뭐라도 하면 10명 중 7~8명이 성공하고 2~3명이 실패했어요. 고성장 가운데서도 실패하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성공할 확률이 높았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도 있고 실패하는 사람도 있다는 점은 저성장 국면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나 저성장 국면에서는 10명이 가게를 열면 성공하는 사람이 2~3명에 불과하고 실패하는 사람이 7~8명이나 됩니다. 이처럼 한국 경제가 고성장을 한 뒤에 저성장에 이어 정체 국면에 들어섰다는 점이 첫 번째 원인입니다.

둘째, 이제 소비자들의 구매환경이 바뀌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구매가 점점 확대되고 있습니다.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는 경우가 점점 줄어드니까 저성장 국면에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타격이 옵니다. 구매 방식이 안 바뀌어도 가뜩이나 장사가 덜 되는데 거기다가 인터넷 구매가 확대되니까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이 급격히 줄어들죠. 지금은 이 구매 방식의 변화가 더 큰 원인이 됐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지금처럼 상가 건물을 계속 지어서는 더 이상 이익을 창출하기 어렵습니다.

셋째, 지금 자영업이 과잉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직장을 그만두면 돈이 없으니까 막노동을 하든 다른 직장을 구해서 봉급을 계속 받는 쪽으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직장을 다니다가 명퇴를 하든 퇴직을 하면 퇴직금이 나옵니다. 1억이든 2억이든 퇴직금을 받고 나오니까 노동자도 자본이 있는 거예요. 퇴직하면 그냥 그 연금으로 생활하면 돼요. 그런데 이 돈을 곶감 빼먹듯이 까먹으려니 마음이 불안한 거예요. 그래서 이 돈을 투자해서 지속적으로 수입이 생기는 방식을 자꾸 강구하다 보니까 제일 쉬운 게 전문기술 없이도 비교적 쉽게 개업할 수 있는 자영업입니다. 그래서 분식집이나 통닭구이집, 식당, 숙박업소처럼 전문적인 기술 없이도 할 수 있는 자영업자의 수가 과하게 늘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 도시에 어떤 업소가 100개가 필요하다고 하면 현재는 적어도 130개가 있고, 많은 경우는 150개가 있습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보면 자영업, 특히 식당의 수가 엄청나게 많아요. 서울의 어느 전철역 반경 500미터 안에 치킨집이 78개라고 하죠. 이렇게 과잉 경쟁을 하기 때문에 이익이 안 남는 거예요. 자영업이 어려운 데는 이런 원인들이 지금 겹쳐 있어요.

그러면 최저임금제 시행을 안 하면 자영업 형편이 나아질까요? 최저임금제는 자영업이 어려운 원인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주 52시간 제도 아무 관계가 없어요. 정권이 바뀌어도 똑같아요. 자영업의 쇠락은 최저임금제나 주 52시간제와 무관한 큰 사회적 변화의 흐름입니다.

한때 우리나라에 농업 인구가 80~90퍼센트에 달했어요. 그 농업인구가 점점 줄면서 농촌이 붕괴되어가고 농촌에 있던 사람들이 도시로 와서 젊은이는 노동자가 되고, 나이 든 사람은 공장에 못 들어가니까 도시빈민으로 전락한 게 1960~1970년대에 일어난 큰 사회적 현상이었습니다. 농업이 사양산업이 된 거죠.

이때는 농업이 줄고 공장이 늘어났는데, 우리 사회에서 두 번째로 급격히 사양산업이 된 게 공장입니다. 특히 ‘IMF 사태’라고 부르는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공장이 완전히 사양산업이 되었고, 망하지 않은 일부 공장은 자금을 들고 중국과 베트남 등 해외로 대부분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서비스 업종으로 급격히 인구 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세 번째로 사양산업이 된 것이 바로 자영업입니다. 자영업이 사양산업이 되기 전에 한 단계 앞서서 일어났던 일은 대형마트의 확대입니다. 재래시장이나 전통적인 가게가 있던 도심이 아닌 변두리에 대형마트가 생겼잖아요. 전에는 이 가게에서 식품을 사고, 저 가게에서 구두를 사고, 또 다른 가게에서 옷을 샀다면, 교외의 대형마트 한 곳에 가면 식품도 있고 미장원도 있고 이것저것 다 있어요. 규모도 크고 가격도 싸니까 기존의 가게나 재래시장이 어려움을 겪었어요. 그런데 지금 같은 인터넷 구매 시대에는 대형 할인마트나 백화점마저도 사정이 어렵습니다. 구매 방식이 거의 인터넷 구매로 바뀌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통 구조의 변화로 생긴 일

대형 할인마트가 생긴 것은 자동차가와 냉장고가 나왔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그래서 자동차를 타고 변두리에 위치한 대형마트에 가서 일주일치 먹을 것을 한꺼번에 사 와서 대형 냉장고에 보관하는 게 가능했습니다. 그 전에는 매일 구멍가게에 가서 오늘 반찬거리를 사야 하잖아요. 이렇게 사회 조건이 바뀌면서 생겨난 문제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유통구조가 인터넷 유통으로 크게 바뀌면서 자영업의 어려움이 생기는 것이고요.

그렇다고 자영업이 아예 안 되는 것은 아니에요. 농업인구가 팍 줄었지만 앞으로도 농업은 계속되겠죠. 공산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도 팍 줄었지만 개중 얼마의 수는 계속되겠죠. 지금 자영업이 과잉 상태죠. 자영업을 필요로 하는 수가 앞으로 계속 줄어드는데 반해 오히려 점포를 여는 공급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어요. 퇴직하고 나와서 달리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계속 가게를 열려고 하니 엎친 데 덮친 격이 돼서 어려움이 더 가증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은 자영업을 하려고 하더라도 인터넷으로 구매하기 어려운 품목이나 아주 특수한 것을 잡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보면 옛날에 동네마다 있던 그 많던 서당들이 다 없어졌어요. 그런데 요즘에도 도시 한두 군데에서는 서당이 되는 곳도 있어요. 아이들이 한자를 익혀서 고전을 배우려는 수요가 조금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부산에도 서당이 두세 군데 있습니다. 옛날에는 서당이 100개가 있었다면 많이 없어지긴 했지만 아예 다 없어진 건 아니라는 거예요. 시장마다 있던 대장간도 요즘은 거의 다 없어졌지만 아직도 한두 군데는 있어요. 이처럼 거의 다 줄어도 특수한 수요는 있어서 한 두 군데 있듯이, 이런 변화 속에서도 꼭 필요한 것은 경우는 예외입니다. 그렇지 않은 이상 전체적인 흐름은 사양길이라고 볼 수 있죠.

지금 최저임금 인상 내역을 보면 1년에 시간당 1000원 정도 올린 셈에 불과해요. 인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당 만 원도 안 되잖아요.

최저 임금 인상 정책이 간과한 것

그런데 지금 자영업의 소득이 줄어들고 있는데, 임금이 오르니 그게 아무리 작은 돈이라도 지출이 늘어난단 말이에요. 그래서 자영업 하는 사람은 지금 장사가 안 되고 힘든 게 마치 최저임금 인상 때문에 생긴 것 같이 느껴져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장사가 안 되는 건 최저임금 인상 때문은 아니에요. 최저임금 인상은 종업원에게 인건비를 조금 더 주는 것이지, 손님이 오고 안 오고 와는 아무 관계가 없잖아요. 지금 장사가 안 되는 건 손님이 안 오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가뜩이나 현상 유지도 어려운 가운데 인건비까지 오르니까 저항이 따르는 거죠.

정부가 최저임금을 인상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 빈부 격차가 너무 벌어지지 않도록 하려는 목적입니다. 전 세계적으로는 인구의 1퍼센트가 전체 자산의 5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해요. 100명 중 1명이 전체 자산의 절반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앞으로 이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은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어떻게 생산할 거냐’보다 ‘소득분배를 어떻게 해서 빈부격차를 줄일 거냐’가 큰 사회적 과제입니다. 지금 세계 각국에 폭동이 계속 일어나는 것도 빈부 격차가 급격하게 벌어지기 때문에 생긴 일이에요. 이걸 완화시키려고 최저임금을 인상한 겁니다.

그런데 최저임금을 인상한 자체는 좋았는데, 의도한 효과가 제대로 나지 않았어요. 최저임금 인상을 통해서 재벌이 갖고 있던 돈이 극빈층으로 갔다면 정책이 효과가 있었겠지만, 재벌 기업은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를 고용한 경우가 거의 없어요.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를 가장 많이 고용하는 쪽은 말이 사업자일 뿐 그냥 월급 받는 직장인보다 더 어려운 영세 자영업자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빈부 격차를 줄인다는 정책 취지는 맞지만 실제로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열악한 처지에 놓인 사람과 그다음으로 열악한 처지에 놓인 사람이 경쟁하는 셈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다음 열악한 사람의 돈을 제일 열악한 사람에게 주는 식의 결과가 되니까 두 번째로 열악한 사람들의 저항이 심해졌죠. 그래서 사회 전체로 보면 최저임금을 올려도 빈부 격차 해소가 하나도 안 됐어요. 재벌들이 갖고 있는 돈이 옮겨간 게 아니라, 어려운 층의 돈이 그보다 더 어려운 층으로 일부 옮겨간 것에 불과했으니까요. 최저임금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나온 정책인데, 사회 전체적인 지표로 보면 빈부 격차가 해소되지 않고 그 흐름이 그대로 벌어지는 경향이 나타나니까 많은 비판이 따르게 된 겁니다.

지금 장사가 안 되는 것은 최저임금 인상 때문도 아니고, 주 52시간제 때문도 아닙니다. 빈부 격차 해소라는 정책 의도는 좋았지만, 시행 시기나 예상 효과 등에 대해 상세한 점검이 안 됐어요. 책상머리에 앉아서 그냥 큰 틀만 생각해서 ‘아, 우리 사회에 이게 문제다. 이렇게 개선해야 해!’ 이렇게 했는데, 구체적으로 딱 적용해보니까 현실에서는 이런 문제가 발생해서 지금 비판을 받게 된 거예요.

빈부 격차를 완화하려면 소득주도형 성장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소득이 1000만 원이라고 합시다. 쓸 만큼 쓰고도 300만 원이 남아서 저축하고 있는데 200만 원 소득이 더 생겼다면 쓰지 않고 저축하겠죠. 그런데 내가 씀씀이를 최대한 아껴도 200만 원은 있어야 하는데 소득이 지금 150만 원밖에 없어서 못 쓰고 있어요. 그럴 때 50만 원이 생긴다면 그 돈을 다 써버리겠죠. 쓸 필요가 있는데도 돈이 없어서 못 쓰는 사람한테 수익이 들어가게 되면 그걸 저축하지 않고 다 쓰게 되니까, 돈이 흐르고 경제가 돌아간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고소득층한테 돈이 들어가면 그 돈은 잘 돌지 않습니다. 그래서 돈을 푼다고 해서 경제가 무조건 움직이는 게 아니고 가난한 사람에게 돈이 들어가야 떡볶이를 사 먹든, 김밥을 사 먹든, 라면을 사 먹다가 우동을 사먹든 해서 경제가 돌아갑니다. 이론적으로는 그럴듯하죠. 이렇게 소득주도형 성장을 통해 경제를 다시 일으키려고 최저임금 인상을 시행했는데, 막상 실행해보니까 기대했던 효과는 안 나타나고 자영업자들의 반발만 사게 돼서 지금과 같은 비판이 제기된 거예요.

자영업 대책은 경제 정책일까요, 복지 정책 일까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자영업은 지금은 사양산업에 속합니다. 그래서 자영업의 문제를 해결하는 정책은 그동안에는 경제 정책에 들어갔지만, 복지 정책에 들어가야 할 거예요. 사양산업을 내버려 두면 그곳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어야 하잖아요. 그러니 이걸 연착륙시켜야 해요.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정부 정책에서 교육 정책에 들어가지만 앞으로는 사회 보장 정책에 들어갈 수 있어요. 학생 수가 줄어드니까 교사 수도 줄어야 하고, 대학 교수의 수도 줄어야 하잖아요. 그냥 내버려 두면 대학이 줄줄이 부도가 나고 여기에 종사한 사람들이 전부 실직하고 형편이 어려워지니까 이걸 어떻게 연착륙시킬 거냐가 관건이에요. 지금까지는 계속 대학에 보조금을 주는 식으로 해왔지만 이런 방식은 이제 한계에 도달했어요. 어차피 이제는 교통정리, 소위 구조조정을 할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는 고통과 저항이 따릅니다. 이걸 어떻게 연착륙을 시킬 거냐 하는 문제는 오히려 사회 보장을 어떻게 할 거냐 하는 문제에 가깝습니다.

그런 관점을 가지시고 앞으로 대응을 해나갈 수밖에 없어요. 희망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모두 박수)

행복학교에서는 법문을 듣고 나서 그 법문을 직접 실천해 보는 ‘행복연습’도 함께 합니다. 즉문즉설이 끝나고 사회자가 행복연습을 제안했습니다.

“참 어려운 시기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가족들, 자식들, 빠듯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 어려운 시기를 살아가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문자를 보내는 행복연습을 해보겠습니다.”

모두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답장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답장 온 내용을 함께 공유했습니다. “나도 고마워”“사랑해”라는 답장도 많았지만, 어떤 분은 “갑자기 왜 그래? 자살하지 마” “스님이 그렇게 말하래?”라고 답장이 왔다고 이야기해서 모두 크게 웃었습니다.

생방송 행복학교 프로그램을 마치며 법륜스님의 희망편지 중 ‘주인의 의무와 책임’을 함께 읽었습니다.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세상의 주인입니다.
내가 인생의 주인이니까 내가 나의 행복을 위해 애써야 하는 것처럼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니까 우리가 사는 사회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책임질 의무가 있습니다.”

오늘 생방송 행복학교는 개인의 행복뿐 아니라 세상의 행복에 대해서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스님에게 자유롭게 질문할 수 있는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시댁 식구를 만날 때마다 답답하고 화가 나요.”
“제 딸이 의사인데, 기득권적 사고를 해요. 엄마가 자기 생각에 동조 안 하면 엄마 번호를 차단해요. 어디까지 다름을 인정해야 할까요?”
“중학교에 다니는 딸이 자퇴를 하고 싶어 하고, 자해를 해요.”
“어린 시절 사랑을 못 받고 자라 화를 잘 냅니다. 전기충격기를 살까 고민 중입니다. 어떻게 제 성격을 고쳐야 할까요?”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기만 하고 제 이야기를 잘 못하니까 우울증이 왔어요.”
“남편의 욱하는 성질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편은 성격을 고칠 생각도 없어요.”
“훌륭한 장교의 길을 걷던 착한 아들이 지난달에 하늘나라로 갔어요. 매일 스님의 법문을 들을 때는 ‘그렇구나’하다가도 10분만 지나면 아들이 생각나요. 마음이 너무 아파요.”

스님은 모든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강조하며 즉문즉설을 마쳤습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

“아내가 죽은 남편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남편이 죽은 아내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어요. 자식이 죽은 부모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행복할 권리가 있어요.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아이가 학교를 안 가도 우리는 행복해야 하고, 남편이 욱해도 행복해야 하는 거예요.

항상 두 가지 길이 있어요. 남편이 욱하는 것을 내가 못 견디겠으면 ‘안녕히 계십시오’ 이렇게 인사하고 헤어지면 됩니다. 다만 항상 맞절하고 헤어져야 해요. ‘네가 성질을 내서 못살겠다!’가 아니라 ‘당신 성질을 제가 도저히 감당을 못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수준이 이것밖에 안 됩니다. 저를 좀 봐주세요’ 이렇게 사과하고 나서 물러나야 해요. (모두 웃음)

욱하는 성질이 있는 상대라도 쓸 만하다면 성질을 잘 알아서 적응해야 해요. ‘아, 이런 경우에는 욱하더라. 건드리지 말아야겠다’ 하고 알아야죠. 욱할 때 건드리면 물불을 못 가려요. 그럴 땐 절대로 건드리면 안 돼요. 욱하면 무조건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합니다’ 이렇게 한 발 물러나야 해요. 그러면 성질이 가라앉습니다. 성질이 가라앉은 뒤에 ‘이게 어디 성질을 아무 데나 부리냐!’ 이러면서 촛대 뼈를 팍 까버려요. (모두 웃음)

그래서 상대가 또 욱하면 ‘죄송합니다’ 하고요. 이렇게 조절하면서 사는 거예요. (모두 웃음)

살아보면 별 인간 없어요. 지금 헤어지고 새로운 상대를 만나서 다시 서로 맞춰가려면 시간이 꽤 걸리잖아요. 시집만 가도 낯선 남자를 시아버지라 부르고, 낯선 여자를 시어머니라 부르고, 형이며 동생이라 부르는 사람이 생기고 관계가 복잡하잖아요. 거기다 결혼을 한 번 더 하면 이 집 애며 저 집 애며 해서 관계가 더 복잡해져요. (모두 웃음)

윤리도덕 때문에 재혼이 문제라는 게 아니에요. 인간관계가 복잡해지니까 어지간하면 지금 맞춰 사는 게 낫다는 거예요. 물론 아무리 복잡해도 도저히 안 되겠으면 ‘안녕히 계십시오’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아주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이왕 같이 사는 상대하고 조금 조절하면서 사는 게 낫지, 아예 새로 바꿔서 처음부터 다시 맞추려면 힘들어요. 상대가 사고로 죽은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어지간하면 조금 맞춰서 사는 게 편해요.

여러분이 힘든 건 사주팔자 탓도 아니고, 하느님이 내린 죄도 아니고, 전생의 업도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이 지혜가 부족한 거예요. 적응을 할 줄 몰라요. 며칠만 같이 살아봐도 ‘아, 저 인간은 성질이 이러저러하구나’ 하고 알 수 있잖아요. 그렇게 파악을 한 뒤에 필요한 게 있으면 살살 칭찬해주고 또 어떤 때는 조금 숙여주세요. 이렇게 조절해 가며 살면 되지, 그게 뭐 그리 어렵다고 그 야단이에요.” (모두 웃음)

마지막으로 행복학교를 개근한 사람들에게 장미꽃을 선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이 직접 꽃을 주었습니다.

장미꽃을 받아 든 행복학교 참가자들 얼굴이 꽃처럼 피었습니다. 무대에 장미꽃을 든 참가자들이 꽉 찼습니다.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스님은 바로 강연장을 나왔습니다.

“어서 가자.”

해 지기 전에 생강을 캐기 위해 서둘렀습니다. 행복학교 참가자들은 오늘 하루를 담은 영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두북으로 출발했습니다.


한 시간 만에 두북에 도착하여 바로 일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해가 지는 속도보다 빠르게 생강을 캐기 시작했습니다. 흙을 푹 파내자 생강향이 코 끝에 밀려왔습니다.


생강을 모두 캐자 어두워졌습니다. 생강 대와 뿌리를 잘라내고 흙을 대충 털어내었습니다. 세 상자가 나왔습니다. 밭에서 나와 밝은 불빛 아래에서 다시 생강을 깔끔하게 다듬었습니다. 점차 시장에서 볼 수 있었던 생강 모습이 되었습니다.

“생강은 자급자족이 되겠다.”


생강 손질을 마치고 늦은 저녁을 먹었습니다. 어두운 새벽에 시작한 스님의 하루는 어두운 밤에 끝이 났습니다.

내일은 서울 세종대학교에서 강연이 있습니다. 스님은 차가 막힐 시간을 피해 새벽 3시에 두북에서 서울로 출발했습니다.

전체댓글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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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여러 봉사자님들과 참가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_^

2019-12-08 14:02:26

김정화

고맙습니다 덕분입니다

2019-12-01 12:54:46

보리수

네, 지금 현재를 통찰하는 스님의 견해 잘 들었습니다. 사회가 변해감에 따른 사양산업은 경제가 아니라 복지로 풀어가야 한다. 그래서 소득주도형 성장이 필요하다는 말씀 정리가 됩니다. 고맙습니다~

2019-11-09 10:5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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