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10.19. 발우공양, 인도 출국
“미래 인류가 가야 할 길”

안녕하세요. 스님은 서울 정토회관에서 새벽예불을 드리고 발우공양을 했습니다. 주말이어서 부서별로 행사가 많다 보니 발우공양 참석자가 평소보다 적었습니다.

오늘부터 4박 5일간 INEB(International Network of Engaged Buddhist, 국제참여불교연대)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인도를 방문합니다. 올해 회의 주제는 ‘깨달음의 문화, 깨달음의 생활화’라고 합니다. 스님은 발우공양을 마치고 깨달음의 생활화가 바로 ‘일과 수행의 통일’이라며 이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

“지금 정토회에서 하고 있는 ‘일과 수행의 통일’은 미래에 인류가 가야 할 길입니다. 세속에서는 노동과 놀이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노동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런데 돈을 벌려면 하기 싫은 일이나 힘든 일도 해야 하다 보니까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남이 볼 때는 ‘저 사람은 돈을 많이 번다’, ‘저 사람은 돈을 적게 번다’ 이렇게 비교해서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개개인은 많이 벌면 많이 버는 대로, 적게 벌면 적게 버는 대로 다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을 안 하는 것, 즉 노는 것을 원합니다. 그래서 노동과 놀이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노는 걸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또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죠. 그걸 ‘놀이’라고 표현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하기 싫은 노동을 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는 자기가 좋아하는 놀이를 해요. 주로 놀이는 돈을 쓰면서 하고, 노동은 돈을 벌기 위해서 합니다. 이렇게 놀이와 노동이 나눠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좋아하는 일은 돈 쓰면서도 하길 원해요. ‘누군가가 돈을 지원해준다면 내가 좋아하는 놀이를 하면서 살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죠. 그러나 돈이라는 것은 가만히 있으면서 마음껏 쓸 수만 없잖아요. 물론 그럴 수 있는 조건에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옛날 부잣집 자손이나 요즘 말로 하면 재벌집 자손 같은 사람들은 돈을 안 벌어도 마음껏 쓸 수 있어요. 그렇게 마음껏 쓸 때는 대부분 그 종착역이 쾌락을 좇는 것입니다. 끝부분에 가면 지나친 성적 타락과 소위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고 하는 지나친 술 문화, 그렇지 않으면 마약 같은 것으로 대부분 귀착됩니다.

일반인은 놀이를 마음껏 할 수 없어서 괴롭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사람은 결국 쾌락을 좇는 것으로 귀착되기 쉽습니다. 일반적으로 노동을 하고 받는 스트레스와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놀이 사이를 계속 윤회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죠. 놀다가 돈이 떨어지면 일을 해야 하고, 일하다가 스트레스 받으면 다시 놀아야 하고, 이것을 늘 반복하는 가운데 괴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수행’이라고 하는 새로운 방향이 제시된 겁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일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해 주고, 놀이가 쾌락으로 가는 것을 막아줍니다. 욕망을 추구하다 보면 결국 쾌락을 좇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그 이유는 쾌락이 반복되면 감퇴한다는 법칙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쾌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욕구 충족을 해야 하고, 결국은 종착역이 중독 증상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육체와 정신을 병들게 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고 타인을 괴롭히는 지경까지 가게 되죠. 이렇게 쾌락으로 나아가는 부작용을 막기 위해서 욕망의 절제라는 것이 제시된 겁니다. 노동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놀이를 하고, 놀이가 쾌락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수행’이라는 것이 나왔습니다.

수행은 제3의 길이긴 하지만 크게 보면 놀이가 쾌락으로 흐르는 것을 막아준다는 측면에서 보면 수행은 분명히 쾌락과 다릅니다. 그러나 생산하느냐 소비하느냐라는 측면에서 보면 수행은 소비에 속합니다. 예컨대 명상원에 앉아서 가만히 명상을 한다면 누군가가 지어준 집에서, 누군가가 주는 밥을 먹고, 누군가가 만들어준 옷을 입고 명상을 하잖아요. 이것은 누군가의 노동 위에 놓여 있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생산 활동과 유리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현재로서는 수행이 생산 활동을 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소할 거냐에 대한 답이 되고 있지는 못합니다. 놀이로 지나치게 나아갔을 때 일어나는 부작용인 쾌락을 어떻게 방지할 거냐에 대해서는 답이 되지만, 생산 활동을 함께해주는 역할을 하지는 않아요. 다만 소비를 줄인다는 관점에서 보면 의미가 있죠.

지금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명상은 생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서는 크게 도움이 안 되고 있습니다. 생활에 여유가 있는데도 괴로운 사람을 주 대상으로 삼고 있어요. 지나친 놀이 문화에 의해 일어나는 문제를 심리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처방이 주로이기 때문에 지속 가능한 인간의 삶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좀 부족합니다. 인간이 병든 걸 치유하는 효과는 있지만, 처음부터 병들지 않게 예방하는 효과는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데서 ‘생산’과 ‘수행’을 어떻게 일치시킬 것인가라는 문제가 대두합니다. 이렇게 보시에 의해서 소비하면서 수행하는 것을 극복하고자 옛 선조들이 내놓은 것이 선농일치(禪農一致)입니다. 수행이 사회 기득권층의 보시에 의존해 하나의 새로운 놀이문화가 되는 것을 탈피해서 수행을 생산 활동과 연결시켰습니다.

물론 수행자가 경제 사정이 굉장히 어렵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할 때는 어차피 생산 활동과 수행을 함께할 수밖에 없습니다. 재정적인 기반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서 보시가 들어오면 대부분의 경우 선농일치는 없어져버리고, 다시 남이 생산한 기반 위에 수행이라는 이름의 소비 형태가 자리 잡습니다.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뭘 안 먹는다’, ‘잠을 안 잔다’, ‘결혼 안 한다’ 이렇게 세상 사람이 하기 어려운 특이한 것을 내세워서 존경을 받고, 또 그것을 통해 보시를 받아서 삽니다. 이런 문화는 사실 보편적이고 지속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떻게 생산과 수행을 함께할 수 있느냐를 고민해서 나온 것이 ‘일과 수행의 통일’입니다. 지금까지는 생산 활동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놀이로 풀었다면, 생산 활동을 하는 가운데 스트레스를 덜 받도록 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겁니다. 이것은 병을 예방하는 활동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일과 수행의 통일을 말할 때, 일이라는 것은 생산 활동이라는 개념도 있지만,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과 대비하여 사회의 부조리를 개선하는 운동도 포함합니다. 세상의 부조리를 개선하고 환경을 개선하는 활동인 ‘운동’ 또는 ‘일’과 자기 내면의 변화를 가져와서 편안해지는 ‘수행’을 어떻게 조화를 이루게 하느냐의 문제예요. 세상을 외면하고 자기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세상살이 가운데 다만 한 측면에 불과합니다.

수행자가 세상의 정의와 세상 사람들의 행복에 기여하면서도 자기 마음이 편안하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문제는 주로 대승불교인들이 많이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는 이름으로 자기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를 함께 일치시켜 나가는 것을 추구했습니다. 이것은 또한 생산 활동과 자기 수행을 어떻게 일치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선불교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일과 수행의 통일’에는 사실 이런 두 가지 면이 모두 포함돼 있습니다.

노동을 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놀이를 하면서 소비하는 것은 모순이에요. 놀이하면서 소비하려니 돈이 필요하고, 노동을 하면서 돈을 벌자니 스트레스를 받고, 스트레스를 풀려니 돈을 쓰면서 놀이를 해야 한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노동과 놀이를 어떻게 일치시킬 것인지 고민이 필요합니다. 나아가서는 수행과 놀이가, 수행과 생산 활동 혹은 노동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미래에 인간의 삶과 문화에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자 주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INEB, 전 세계 참여불교 활동가 네트워크가 많은 활동을 해오고 있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요. 그동안 불교에서는 자기 수행만 강조하고 사회의 정의를 외면하는 경향이 컸습니다. 불교인들이 어떻게 사회 정의에 참여를 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 참여불교의 주 내용입니다. 불교인들도 자기 내면의 얘기만 하지 말고 환경문제, 성차별 철폐, 계급 차별 철폐, 인권문제 같은 사회 정의에 대해 좀 참여하자는 게 참여불교의 지금까지 활동이었어요.

이번에 열리는 INEB의 주제는 ‘깨달음의 문화’인데,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은 이제 겨우 사회 참여를 넘어서서 깨달음이라는 것이 내 삶에서 일상화되기 시작했다는 뜻이에요. 일상화된다는 것은 한쪽은 생산 활동이고 한쪽은 놀이라고 할 수 있겠죠. 깨달음이 어떻게 이런 일상, 즉 삶 속에서의 문화로 정착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렇게 주제는 제시되었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얘기를 들어보면 좀 막연한 얘기들을 하고 있어요.

동남아 스님들과 불교인들이 한국 정토회를 자꾸 견학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도 정토회에서는 이 문제를 과제로 삼고 있고,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고, 그것이 또 대중 속에서도 실현되고 있거든요. 정토회에서는 수행을 머리 깎은 스님들만 하는 게 아니잖아요. 생산 활동과 동떨어져서 수행만 하는 것도 아니고요. 정토회 활동가들은 명상센터에 들어가서 아예 직업적으로 수행만 하는 게 아니에요. 세속에 살면서 놀이와 노동 속에서 오락가락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수행을 통해서 노동의 스트레스를 풀어나가고 놀이의 쾌락화를 막아내느냐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토회의 활동은 사회 정의를 위해 일반 대중이 얼마나 관심을 갖고 참여하느냐에 대한 실험이기도 해요. 사회 운동이라는 건 늘 엘리트 계층이 제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일반 대중은 먹고사는 데만 관심이 있지 사회 정의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잖아요. 일반 대중도 환경 실천, 인권 개선, 빈곤 퇴치와 같은 사회적 정의를 위해 자기 삶의 일부를 투여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런 면에서 정토회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한국 안에서의 실험이고 불교 안에서의 실험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차원에서도 중요한 실험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늘 옛날 관점을 가지고 있어요. 불교라는 데 치중하면 ‘승려를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사회운동에 방점을 찍으면 ‘NGO처럼 운동을 활발히 해야 한다. 밖에 나가서 운동을 해야지 왜 수행을 하고 있느냐?’ 이런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런 속에 지금 정토회는 제3의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머리를 길러놓으면 그냥 세상 사람처럼 살려고 하고, 머리를 깎여놓으면 승려라는 상에 빠져서 목에 힘을 주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내면에 ‘일과 수행의 통일’이라는 중심이 잡혀 있어야 합니다.

‘나는 머리를 깎고 출가한 스님이다.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떠난 사람이다. 그러나 현재 사회적인 환경에서는 승려의 외양을 갖추면 대우를 받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새로운 기득권으로 나아가기 쉽고, 정신적으로도 마치 내가 일반인 위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나는 머리도 기르고 세상 옷을 입고 이렇게 산다.’

이렇게 수행자로서의 당당함을 가지는 동시에 겸손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에게 꼭 자기를 낮추라는 게 아니에요. 나와 상대를 똑같이 생각하면 그게 곧 겸손이에요. 그런 겸손한 자세로 정진을 해나가야 합니다.

물론 쉽지는 않겠죠.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실험입니다. 부처님은 이것을 당시에 다 실험해보고 상가 안에서 그것을 실현시켰지만, 그것이 전해오는 과정에서 세상에 물들여 버렸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세상의 관습이 오히려 상가 속으로 들어와서 세속화하는 과정을 걸어왔습니다. 그러다가 혁신이 일어나고 다시 퇴화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한 끝에 오늘에 이르렀어요.

일과 수행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자발성입니다. ‘나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겠다’ 자기 스스로 관점을 이렇게 잡아야 해요. 이게 타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면 언젠가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어떤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면 ‘도로아미타불이 된다,’ ‘그 나물에 그 밥이 된다’ 이런 말을 하잖아요. 까르마가 그만큼 무섭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여러분이 삶의 방향을 자발적으로 잡아야 합니다. 억지로 이를 악물고 하면 안 돼요.

‘이것이 나를 위하는 길이다. 우리가 세상을 위하는 길을 지속적으로 가면 그게 곧 나를 위하는 길이다.’

이런 자세로 해야 지속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남을 위하는 것은 잠시는 할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하기는 어렵습니다. 손해 보고 하는 것도 잠시는 할 수 있지만 오래는 못합니다. ‘이 일은 나를 위하는 일이고, 나한테 이익이 된다’ 이게 자각이 되면 죽을 때까지도 이 일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다 세상의 발전을 위해서 매일매일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를 위해서도 다 자기 역할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 그분들을 격려해주고, 그분들에게 감사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강의를 할 때 강사료를 줘야 강의를 하고 강사료를 안 주면 강의를 안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어집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 우리나라를 위해서, 우리 인류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 모두가 우리 도반들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거기에는 거래 같은 게 있을 수 없어요. 다 우리 가족이니까요. 여러분이 자기 스스로 이런 안목을 딱 갖고 살아야 하는데, 지금은 늘 자기라는 울타리를 치고 있어요. 그래서 도반 사이에도 이런 식입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이건 네 일이고, 이건 내 일이다. 이러면 내가 손해다. 내가 해놓은 것을 가지고 네가 생색을 내는구나.’
늘 이런 관점을 갖고 임하니까 시기하고 질투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거예요. 조금 더 넓게 생각하면, 우리가 세운 이 원(願)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이에요. 취향과 성격과 능력이 다를지는 몰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있어야 우리가 세운 원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저 길거리에 가는 사람들마저도 다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저들이 있어야 교화의 대상이 있고, 저들이 있어야 보시를 하고, 저들이 있어야 봉사도 할 수 있잖아요. 대중이 없다면 우리가 뭘 갖고 원을 실현하겠어요?

그러니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소중합니다. 길거리에서 처음 만난 사람도 모두 소중한 사람들이에요. 관점을 이렇게 갖고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가족도 마찬가지예요. 부모라서 집착을 할 게 아니라, 부모도 한 사람의 중생으로서 우리가 어여삐 여겨야 할 대상이에요. 또 우리의 후원자이고, 언젠가 우리의 멤버가 될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 부모이기 때문에’, ‘내 가족이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접근하는 것은 세속적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원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20년 전에 비하면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 공인을 받고, 사람들도 더 많이 관심을 가져주고 있어요. 20년 전에는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어요. 그러나 앞으로 가면 갈수록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이 문제는 특정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류가 미래에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하는 문제로 대두될 겁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삶을 살 때 지속 가능한 삶이 될까요? 지속 가능한 삶이 가능하려면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삶이어야 하고,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은 삶이어야 합니다.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해도 안 되고, 현재를 위해서 미래를 희생해도 안 되고, 나를 위해서 남을 희생해도 안 되고, 남을 위해서 나를 희생해도 안 돼요. 이중 어느 하나라도 삐끗하면 이것은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런 조건들을 갖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이 가능할까요? 연기적 세계관을 가지면 이런 삶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삶이 됩니다. 반면에 세계를 아(我)의 집합 혹은 개별 존재의 집합이라고 인식한다면 이런 삶은 하나의 이상이나 꿈에 불과하다고 평하게 됩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요. 여러분은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이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이 일을 하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잘 몰라요. 그래서 자존감이 떨어지고 당당함이 떨어집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모르기 때문에 교만이 생기는 거예요. 그들이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세상을 일궈주는 사람이고, 우리의 원을 성취해주는 사람인 줄을 안다면, 상대의 얼굴과 이름을 알든 모르든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소중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럴 때 겸손한 자세가 저절로 나오는 거예요. 그런 자세로 정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공양을 마치고 스님은 짐을 정리해 인천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 스님은 오늘부터 다음 주 수요일까지 4박 5일 간 인도 다람살라에서 열리는 INEB(국제 참여불교 네트워크) 행사에 참석합니다. 달라이 라마 성하를 만나고 실천불교에 대해 발표한 후 귀국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3

0/200

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참가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_^

2019-11-29 14:26:29

감로향

오랜 세월 나를 너무 움켜쥐고 살아와 습관적으로 살아가지만 덕분에 알아차림도 빨라졌음에 감사합니다_()_

2019-10-25 09:16:24

홍예지

교만이라는것이 생기는 이유
-이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소중한지 모르기때문에....

항상 궁금했던부분을 너무나 명확하게..알려주십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2019-10-25 06:58:22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