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8.23.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7일째
“정말 웅장하죠? 이것이 고구려의 기상입니다”

안녕하세요.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7일째 날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오전 내내 압록강변을 따라 북한 땅을 바라보는 일정입니다. 오후에는 집안으로 가서 고구려의 유적인 환도산성과 국내성을 둘러보았습니다.

깜깜한 새벽 4시, 스님과 청년 역사기행단은 탑산으로 향했습니다. 탑산에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발해의 탑, 영광탑이 있습니다. 새벽부터 산에 간다고 하니 주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다리가 부러져서 깁스를 했거나 병원에 실려가야할 수준이 아니면 예외가 없습니다. 놀러 온 게 아니잖아요. 이거 보러 이렇게 멀리까지 왔는데 어지간하면 갑시다. 천천히 갈게요.”

청년들은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을 펴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동네를 지나 새벽 안개 속으로 탑산을 오르는 440여 개의 계단이 나타났습니다.

하늘까지 끝없이 펼쳐진 계단을 한 발 한 발 오른 청년들은 산 정상에 있는 커다란 탑을 보고 모두들 탄성을 내질렀습니다.

탑 앞의 비석에는 ‘영광탑’ 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스님은 영광탑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있는 이곳은 길림성 백산시 장백현입니다. 장백현의 이 뒷산을 탑산이라고 불러요. 높이가 869m입니다. 굉장히 높죠. 여기서 저 건너편을 보면, 인구 30만 정도 되는 혜산시가 한 눈에 내려다 보입니다. 발해 시대 때 이곳에 탑을 쌓은 겁니다.

발해 시대의 탑은 청나라 말기까지 서너 개가 남아 있었을 뿐 다 파괴되고 없고, 유일하게 남아 있는 탑이 지금 여러분 앞에 보이는 영광탑입니다. 모양이나 보존 상태가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있어요. 이 영광탑을 보기 위해서 이 먼 곳까지 왔습니다.

대부분의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데, 이 탑은 무덤탑입니다. 이 탑 밑에 벽화까지 있는 무덤이 있었어요. 고구려의 전통은 무덤실을 만들고, 거기에 벽화를 그리고, 관대를 놓죠. 이런 자신들의 전통에 더해서 불교인으로서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탑을 쌓은 겁니다. 지하에는 자신들의 전통적 무덤을 만들고, 지상에는 봉분을 만드는 대신 탑을 쌓은 거예요.

발해 멸망 이후 1100년 만에 우리가 다시 이곳에 찾아왔습니다. 탑 앞에 섰으니까 조용히 아침 예불을 올리겠습니다.”

예불을 마친 스님은 역사기행을 하고 있는 청년들을 위해 축원과 더불어 남북의 평화 통일을 간절한 마음으로 발원하는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스님의 간절한 기도에 청년들도 한 마음이 되어 평화와 통일을 함께 발원했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에는 다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발해 시대의 탑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탑이라는 생각이 드니 더욱더 이 순간이 소중하게 다가왔습니다.

탑산 공원에서는 장백시 너머로 압록강과 북한의 혜산시가 내려다 보입니다. 오늘은 비가 온 뒤라 안개가 가득했습니다. 안개 속에서 혜산을 더듬어보며 이곳에서 20년 전 좋은벗들이 북한 난민 돕기를 했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춥고 배고픈 난민들을 도왔던 이야기에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오전 6시, 스님과 청년들을 태운 버스는 압록강 강변도로를 지나 림강, 통화를 거쳐 집안으로 향했습니다.

버스가 강변 도로를 달리는 동안에는 압록강 건너편으로 북한의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건너편은 혜산시 위원이라는 곳입니다. 걸어가는 북한 주민들이 보이네요.”

압록강 상류는 폭이 넓지 않고 수심이 얕아 보였습니다. 금방이라도 양쪽을 오갈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청년들은 “진짜 가깝다.”, “우와!”하며 신기해했습니다. 창밖으로 녹슬고 낡은 공장과 광산, 야트막한 작은 마을들이 줄지어 지나갔습니다. 상수도 시설이 없는 북한의 강변에는 여인들이 무리지어 빨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산에는 나무가 거의 없고 온통 뙈기밭이었습니다. 간간히 나무가 우거진 지역은 혁명전적지로 벌채가 금지되어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스님은 북한 주민들이 어떻게 뙈기밭을 일구게 되었는지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저 산 위에 있는 땅들이 뙈기밭입니다. 북한의 식량난이 점점 어려워지자 많은 사람들이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 내고, 그곳에 개인이 땅을 일구어서 거기서 나온 소출을 자기 소유로 가져갔습니다. 저 넓은 곳에 좋은 논과 밭들은 모두 집단 농장 소유입니다. 집단 농장은 공동으로 작업을 하고, 소출도 공동으로 관리합니다. 원래는 농민들에게 1년 먹을 양식으로 1인당 200kg을 먼저 배급합니다. 그것을 뺀 나머지는 정부 식량 가격으로 계산해서 농민들에게 돈을 주는 거예요. 여기에 농자재, 비료값을 다 빼고, 남는 돈을 현금으로 배분합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런 배급 방식을 통해 북한 농촌이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와서 북한 경제가 피폐해지면서 비료 생산을 못했습니다. 외환이 부족해졌고, 외환이 부족하니까 기름 수입이 안 되고, 기름 수입이 안 되니까 공장이 안 돌아가고, 공장이 안 돌아가니까 비료가 생산이 안 되고, 비료가 생산이 안 되니까 농업 생산량이 급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서 농민들 먹을 것을 빼버리면 정부에 줄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었어요. 그러나 정부에서는 관리와 군인을 먹여야 하잖아요.

이 과정에서 노동자가 제일 먼저 굶어 죽었습니다. 함경도 사람들이 먼저 굶어죽은 이유는 함경도는 농촌이 적고 탄광이나 제철소, 화학공장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생산한 곡물을 함경도 노동자들에게 공급했는데, 농업 생산량이 적어 식량 배급을 못하게 되니까, 지역적으로는 함경도가 먼저 굶어 죽었고, 계급적으로는 노동자가 먼저 굶어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동을 못하게 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식량을 구하러 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식량을 이용해서 돈 버는 사람들도 생겼고요.

시간이 흐르면서 정부에서도 농민에게 배급하는 식량의 양을 200kg에서 180kg으로 줄였습니다. 나중에는 150kg으로 줄였고요. 그것도 부족하게 되니까 농민 식량 배급양을 100kg으로 줄이고 나머지를 정부가 다 가져가 버렸어요. 100kg이면 아무리 아껴 먹어도 8개월 밖에 못 먹거든요. 그래서 4개월치 식량이 부족하게 됐습니다. 그 결과 농민들마저 굶어죽는 일이 생겼습니다. 식량 사정이 더 안 좋아지자 당원도 굶어 죽는 일이 생겼고요.

계급적으로는 노동자, 농민, 당원 순서로 굶어 죽었고, 지역적으로는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순서로 아사자가 확대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대량 아사 상황이 오게 된 거예요.

식량난이 일어난 초기부터 사람들은 자기 먹을 것을 생산했어요. 산에 올라가서 소유권은 없지만 자신의 경작지를 만들어서 식량 확보를 했는데 그것이 뙈기밭입니다.

도시 근교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걸어갈 수 있는 최대한도로 걸어가서 땔감을 확보하고, 뙈기밭을 만드는 바람에 산림이 황폐화 되었고요.

뙈기밭은 문전옥답에 비해 소출이 5분의 1도 안 됩니다. 그러나 뙈기밭은 적게 생산이 되어도 자기 것이 되고, 문전옥답은 소출이 많아도 자기 것이 안 되니까, 뙈기밭에 정력을 많이 쏟게 되겠죠. 공동 노동하는 것은 하는 둥 마는 둥 하게 되고요. 그 결과 국가 전체의 식량 생산량은 더욱더 떨어지게 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 거예요.

65세가 넘어서 은퇴한 노인들이 자식을 위해서 뙈기밭에 가서 살고, 아이들도 학교를 가지 않고 뙈기밭에 가서 살았어요. 이 식량난이 북한의 삼림을 황폐화시킨 큰 원인입니다. 비가 조금만 와도 홍수가 나고, 조금만 비가 안 와도 가뭄 피해가 심해지고, 자연환경이 크게 훼손 되었어요. 남한은 공장 때문에 자연환경이 훼손되었다면, 북한은 식량 부족으로 자연환경이 훼손되었어요. 정부가 아무리 단속을 해도 식량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었어요. 그래도 살아 남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요.

‘뙈기밭이 있어서 우리가 살아 남았다.’

그리고 어떤 북한 노인은 죽을 때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자기 아들한테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이제 더 이상 국가와 당을 믿지 마라. 믿을 것은 두 손밖에 없다. 이 두 손으로 뙈기밭을 일구어서 너희들을 먹여 살렸다.’

이런 유언을 했다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을 정도로 북한의 식량난은 정말 심각했습니다. 저기 보세요. 절벽 위에도 뙈기밭이잖아요.”

스님이 이야기하는 동안에 압록강을 타고 저 멀리서 나무를 운반하는 뗏목이 내려왔습니다.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오징어처럼 앞머리가뾰족하도록 길게 나무를 엮고, 앞에서 한 사람이 조정을 하면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뗏목은 이렇게 7~8차례에 걸쳐 연달아 내려와 연신 탄성을 자아내었습니다.

스님은 청년들과 즉문즉설의 시간도 가졌습니다. 청년들은 “조선족, 고려인은 현재 어떻게 살고 있고 그들을 도우려면?”, “통일을 위해 청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고구려와 발해의 기상을 가졌던 우리 민족이 왜 조선시대부터 사대를 했는지?” 등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스님은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며 이동시간을 아주 유익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중간에 검문소에서 검문을 받느라 1시간 정도 지체되었습니다.

청년들은 기다리는 동안, 검문소의 너른 마당에서 플래시몹을 선보였습니다. 오랜 시간 버스를 타도, 검문소에서 예상보다 긴 시간이 걸려도 문제없습니다. 그 어떤 시간도 버려지는 시간은 없습니다.

2시 반이 되어서야 통화에 도착해 점심 식사를 한 뒤, 다시 버스를 타고 집안으로 향했습니다.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집안은 험준한 산맥이 둘러싸고 있는 천연의 요새 지형이였습니다. 집안으로 향하는 길은 협곡과 가파른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첩첩산중을 지나면서 적의 공격을 차단하기 위한 ‘관마산성’이 있었던 자리도 잠시 지나쳤습니다. 그리고 장군총과 광개토대왕비를 쌓는데 사용되었던 큰 돌을 채취하였던 채석장도 창문 밖으로 엿볼 수 있었습니다.

도착하기 1시간 전에 스님은 단잠에 빠진 청년들을 깨워 공부를 했습니다. 환도산성과 국내성, 관마산성과 채석장에 대해 미리 배웠습니다.

환도산성에 도착하자 산 기슭을 따라 웅장한 성벽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청년들은 감탄하며 성벽을 바라보았습니다.

산성을 둘러보기 전에 다함께 성벽이 잘 보이는 곳에 서서 기념사진을 촬영했습니다.

스님의 안내에 따라 환도산성을 둘러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들이 도착한 이곳이 환도산성입니다. 옆에는 통구하 강이 흐르고 산성은 기슭으로 죽 이어져 전체 길이는 7km 정도입니다. 유리왕 21년(서기1년)에 설지라는 사람이 이곳을 발견하고, 2년 후인 유리왕 23년에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게 됩니다.

여기 환도산성은 옹성이 잘 남아 있습니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성벽을 옹성,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성을 치성이라고 하죠.”

이어서 성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연못이 나타났습니다.

연못에서 조금 더 올라가니 2.5km 떨어져 있는 국내성이 훤히 보이고, 적들의 침입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전망대가 나타났습니다.

전망대 앞에는 솔숲 속에 병영 유지로 추정되는 곳이 있었습니다. 발굴 중에 천년 전의 인분이 섞인 흙무더기가 발견되어 화장실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학자들의 발표가 있었다고 합니다. 청년들도 모두 신기해 하며 감탄을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산성의 깊숙한 곳에는 왕이 머물렀다고 하는 궁전터가 있었습니다. 중국 관리인이 팻말 앞에서만 둘러보도록 해서 전체를 둘러보지 못했습니다. 팻말에 한글 번역은 궁전이 아닌 공전이라고 잘못 표기되어있었습니다. 스님은 가이드 선생님에게 관리소에 오타를 수정하도록 이야기해달라고 했습니다.

높은 성벽 위로 올라가 산성하 무덤떼도 바라보았습니다. 탁 트인 들판에 큼직큼직한 무덤들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 선조들도 이 곳에 서서 너른 들판을 바라보곤 했겠구나 상상이 되었습니다.

다시 아래로 내려가 산성하 무덤 사이로 직접 걸어보았습니다.

“정말 웅장하죠? 이것이 고구려의 기상입니다.”

사람보다 훨씬 큰 무덤 사이를 걸으며, 성벽 위에서 본 것과 또 다른 웅장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산성하 무덤떼까지 본 뒤 환도산성 답사를 마쳤습니다.

오후 6시가 지나 해가 질무렵 국내성에 도착했습니다. 환도산성에서 버스로 불과 5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고구려 2대 왕인 유리왕으로부터 제20대 장수왕 시기까지 425년 간 수도였던 곳이 바로 국내성입니다. 스님과 청년들은 성의 북동쪽 모서리를 출발해서 북쪽 성벽을 지나 서쪽 성벽으로 꺾은 다음 남쪽 성벽으로 꺾어지는 모서리까지 걸었습니다.

옛 모습이 많이 남아있는 환도산성과 달리 국내성은 시가지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내성도 고구려 성의 전형적인 축성 방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기단은 계단식으로 일곱 개를 쌓은 다음, 그 위로 수직으로 쌓아올린 모습이었습니다. 스님은 국내성의 모서리 부분의 특징에 대해 특히 강조하며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국내성의 동쪽 성벽과 북쪽 성벽이 만나는 모서리 지점에 서 있습니다. 동쪽 성벽과 북쪽 성벽이 만나면 각이 져야 하잖아요? 그런데 각이 지면 적이 공격할 때 방어에 불리해 집니다. 적은 3면에서 공격하고, 우리는 1면에서 방어를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모서리에 각을 주지 않고 둥글게 만들었어요. 여기에 양쪽으로 치를 둠으로써 각루를 방어하기 쉽도록 했습니다.”

버스에서 공부했던 내용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청년들은 선조들의 지혜에 다시 한 번 놀라워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성벽을 따라 걸으며 스님은 고구려 성벽의 특징에 대해 짚어주었습니다.

북쪽 성벽은 사람들이 집을 짓는다고 돌을 가져가서 다시 쌓아서 고구려 성벽의 원형이 남아있지 않은 곳이 있었습니다. 세월의 흐름과 적의 침공으로 인해 허물어진 성벽이 많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인들은 독특한 축성법으로 아주 견고한 성을 쌓았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걱정 어린 마음을 내비쳤습니다.

“고구려성을 중국식으로 복원하다 보면 나중에 고구려식이 무엇인지 논쟁이 생기거나, 고구려식을 잃을 수도 있어요.”

현재 중국에서 복원하고 있는 성벽들은 고구려만의 견고하고 독특한 방식의 원형을 잘 살리지 못하고 있어 아쉬운 마음도 함께 들었습니다.

국내성의 서쪽에는 ‘통구하’라는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고구려 시대에는 물의 양도 더 많았을 것이고, 물길도 지금과는 달리 성벽 가까이로 흘러서 자연 해자의 기능을 했었을 겁니다.”

서쪽 성벽은 강변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쌓기도 하고, 배수로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성문은 공자형으로 만들어 홍수와 적의 침입을 대비했습니다. 성의 곳곳에 홍수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지혜가 스며들어있었습니다.

서쪽 성벽을 지나 남쪽 성벽으로 접어드니 드디어 압록강이 나타났습니다. 압록강을 너머에는 북한 땅이 바로 보였습니다. 산에 나무가 없고 뙈기밭을 만든 흔적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북한 땅 같았습니다. 화려한 불빛이 넘실거리는 이편과 달리, 북한 땅은 깜깜했습니다.

스님은 컴컴한 북한 땅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북한동포돕기 운동을 처음 시작하게 되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바로 이 강변에서 스님은 굶주리는 북한 아이를 만났지만 국경에 가로막혀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저는 충격을 받았어요. ‘날아다니는 새도 양식이 없으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와서 먹을 수가 있는데, 사람이 어떻게 한쪽에는 음식이 풍부하고 한쪽에는 굶어죽는데 음식을 줄 수가 없느냐. 그것이 국가이고, 그것이 국경이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거냐.’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또 ‘나는 저 멀리 인도까지 가서 가난한 아이들을 돕고 있었는데, 어떻게 턱밑에 있는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는 것을 왜 모르고 있었느냐’ 하면서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북한동포돕기 운동을 시작한 겁니다.”

압록강변에서 저녁 식사를 한 후 8시 30분부터 저녁 강연이 시작됐습니다. 오늘 저녁 강의 주제는 ‘고구려의 역사’입니다.

스님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주몽 신화를 당시 상황에 맞게 어떻게 현실적으로 해석해볼 수 있는지 얘기하면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주몽 신화를 좀 더 현실적으로 해석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몽이 북쪽에서 내려와서 소서노와 결혼해서 금방 왕이 됐다고 하면 좀 이상하잖아요. 쫓겨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금방 왕이 되겠어요? 뭔가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겠죠. 고주몽은 아마도 다물군에 참여한 것 같아요. 고조선의 옛 땅을 되찾고자 일어난 의병운동이 다물군인데, 고주몽은 여기서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해서 소서노의 눈에 띄었고, 그 인연으로 소서노와 결혼해서 왕위에 오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신화에 대한 현실적인 해석

그리고 고구려는 국가가 건설되자마자 국가의 규모가 빠른 속도로 커졌습니다.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국가와는 양상이 달랐어요. 예컨대 6부 촌장을 중심으로 해서 발생한 신라 같은 경우는 왕을 갖춘 고대왕국으로 성장하는 데 500년이 걸렸거든요. 그런데 고구려는 3대 대무신왕 때 이미 고대국가로 거의 자리 잡습니다.

고구려를 세운 사람들에게는 부족들이 모여서 하나의 국가를 만드는 개념이 아니라,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다는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제국을 빠른 속도로 이루었다고 보는 게 오히려 맞지 않을까 해요. 고구려의 건국이념이 다물(多勿) 사상이거든요. 잃어버린 옛 고조선의 영토를 되찾자는 것이 다물 사상입니다. 그게 건국정신이 됐다는 것은 주몽도 다물군에 참여를 했다는 것이고, 거기서 뛰어난 역량을 보였고, 그게 소서노의 눈에 띄었고, 그래서 소서노의 재정적 지원을 받고 그런 의병운동을 했고, 결국엔 결혼을 하고 새로운 나라를 건국했다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데서 조금 연대 차이가 있는 것은 전문 학자들이 앞으로 연구해서 교통정리를 좀 해줘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거기에 왕 이름 한두 개가 빠졌다, 연대가 10~20년 차이난다, 이런 건 학자들한테는 중요한 얘기지만, 역사 전체를 보는 눈에서는 크게 중요하지는 않아요. ‘내가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다’라고 하면, 다리 밑에서 주워 와서 아버지가 아들로 삼았든, 어머니가 밖에서 낳아서 데리고 왔든,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그 사람이 똑똑하면 됐지, 출신이 무슨 상관이겠어요? 목수네 아들이라고 해서 예수의 가치가 떨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자수성가한 사람을 표현하는 방법

그런데 당시는 혈통사회였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왕도 될 수 없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아버지가 없고 엄마만 있는 사람이 많아요. 예수님도 그렇고, 주몽도 그렇고, 아버지가 없거나 아버지가 신적인 존재, 다시 말해 누군지 불분명한 경우가 많아요. 이런 사람들은 인류문화사적으로 볼 때 전부 자수성가한 사람들입니다.(모두 웃음)

‘우리 아버지가 왕이기 때문에 내가 왕이 됐다’, ‘우리 아버지가 제사장이기 때문에 내가 제사장이 됐다’ 이것은 혈통사회를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제사장이 아닌데도 내가 제사장이 됐거나, 우리 아버지가 왕이 아닌데도 내가 왕이 됐다고 합시다. 이럴 때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밝히면 내가 왕이 될 자격이 없잖아요. 그래서 아버지는 하느님이 되든지 아예 없어야 해요.”

신화에 대한 현실적인 해석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고구려의 전반적인 역사의 흐름에 대해 주욱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고구려의 멸망에 대해서는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며 북한을 예로 들었습니다.

“신라가 남쪽에서 강성해지기 시작하자 고구려는 백제와 동맹을 맺습니다. 백제와 신라 사이에 원한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적의 적은 동지’라고 이번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을 맺은 거예요. 이게 여제동맹(麗濟同盟)이에요. 백제는 또 일본하고 친했습니다. 고구려는 돌궐과도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 결과 신라가 동쪽에 고립이 되었습니다. 백제는 잃어버린 한강 땅을 되찾겠다고 하면서 신라를 침공했고, 고구려도 빼앗긴 땅을 되찾겠다고 하면서 신라를 침공했습니다. 신라는 영토를 확장했지만, 그 결과 외침이 잦아졌습니다. 신라가 도움을 청할 곳은 바다 건너 중국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이 시기 중국에서는 수나라가 581년에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신라는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를 못살게 구니 좀 말려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래서 수나라가 고구려한테 ‘야, 신라 좀 괴롭히지 마라’라고 했지만, 고구려가 이 말을 들을 리가 없죠. 꼭 요즘 북한처럼 말을 안 들었어요.(모두 웃음)

원래는 이해관계가 없었지만, 수나라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천하를 통일했는데 고구려가 말을 안 들으니 기분 나쁘잖아요. 그래서 고구려를 침공한 거예요. 598년부터 시작해서 수차례 침입을 했는데, 수 양제 때인 612년에 이르면 130만 대군을 동원해서 침공했습니다. 130만 대군이라고 하지만 그 뒤의 보급부대까지 합치면 실제로는 200만 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어요. 그렇지만 을지문덕 장군에 의해 우리나라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살수대첩에서 대패하고 침공에 실패합니다. 고구려 침공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그때 무리한 것을 회복하지 못하고 나라가 아예 망해 버렸어요.

거기서 다시 일어난 나라가 당나라예요. 그래서 신라는 당나라한테 또 ‘고구려가 못살게 구니까 도와 달라’ 이런 부탁을 합니다. 당나라가 또 고구려한테 ‘야, 신라 좀 괴롭히지 마라’라고 했지만, 고구려는 이번에도 당나라 말을 안 들었어요. 그래서 당나라가 기분이 나빠져 있었습니다.

그러자 강성한 당나라에 대해 고구려도 방비를 해야 하니까 천리장성을 쌓았습니다. 이 천리장성의 공사 책임자가 연개소문이었어요.

당나라가 강성해지는 것을 두고 고구려 안에서는 두 가지로 견해가 갈렸습니다. ‘조공을 바치고 화친을 해서 당나라와 가능하면 평화를 유지하자’ 이런 온건세력이 있었고, ‘무슨 소리냐? 조공은 말도 안 된다!’ 이런 강경세력이 있었습니다. 연개소문은 강경세력이었고, 당시의 왕은 가능하면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를 유지하려는 입장이었어요.

연개소문이 태도가 강경하고 왕의 의견조차 안 들으니까 온건세력들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역으로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을 죽이고 온건세력도 다 척결하고 이제는 당나라에게 강경하게 대응을 하게 되었습니다.

약간 고개를 숙여줘야 봐줄 명분이 있는데, 딱 고개를 쳐들고 덤비니까 봐줄 명분이 없잖아요. 그래서 당 태종이 30만 대군을 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습니다. 이럴 때 또 신라에서 김춘추가 당나라로 갔어요. 그때까지 고구려와 백제가 계속 신라를 침공했기 때문에, 김춘추를 파견해서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치기로 한 거예요. 그 싸움에서 당나라가 승리하면 한강 이남 땅은 신라가 갖기로 구두약속을 했습니다.

당 태종이 645년에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고구려에서 그걸 막아냈어요. 당태종이 엄청난 화력을 갖고 가서 난공불락이라던 요동성을 결국 함락시킬 정도의 전과를 얻었는데도 사실은 큰 성이 아닌 안시성 전투에서 실패한 거예요. 그때 당태종은 부상을 입고 돌아왔고, 3년 후에 죽어버렸어요. 중국의 전 역사에서 최고의 황제라고 칭해지는 사람이 당 태종입니다. 대련에 있는 비사성에 가면 당왕전이라는 건물이 있어요. 비사성은 그때 함락됐던 성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비사성에 가면 꼭대기에 당왕전을 지어놓고 당나라 황제를 신으로 모셔놨어요. 그만큼 당 태종은 숭앙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안시성 전투에서 발목이 잡혀서 결국은 실패한 거예요. 그래서 당 태종이 ‘고구려는 침공하지 마라’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 고종 때였어요. 당시 백제 의자왕이 계속 신라를 침공하니까 신라가 또 당나라에 가서 도움을 청한 거예요. 당나라에서 계산해보니 고구려를 직접 침공해서는 승산이 없어요. 대신 고구려와 돌궐,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연맹이 돼 있으니까 고구려의 한쪽 날개를 먼저 꺾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를 침공한 게 아니라 방향을 바꿔가지고 백제를 침공한 거예요. 그래서 백제를 660년에 먼저 제압한 뒤 661년에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또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666년에 죽었어요. 그러자 그 아들들 사이에 권력 분쟁이 일어났고, 한 명이 당나라에 투항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내분이 일어나서 결국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고구려 역사의 마지막 모습이에요.

고구려가 번성할 때 중국은 통일돼 있었던 게 아니라 분열돼 있었어요. 400여 년간 분열돼 있었는데, 이 시기가 위진 남북조 시대입니다. 고구려 초기에는 중국이 한(漢)나라였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초기에는 한나라의 요동태수와 갈등이 심했어요. 그러다 한나라가 멸망하고 위, 촉, 오 삼국 시대가 되자 고구려는 위나라와 부딪혔어요. 그 후 북방민족이 내려와서 5호16국을 세웠을 때는 그중에 연나라와 부딪혔어요. 그러다가 5호16국이 북위로 통일이 됐어요. 고구려와 북위는 대등한 관계로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다가 중원이 다시 수나라로 통일되니까 고구려와 수가 부딪쳤고, 당나라가 또 중원을 통일하니까 당나라와 부딪친 끝에 결국은 멸망한 것입니다.

고구려와 북한의 닮은 모습

결국 나라가 망하기는 했지만, 끝까지 동북아의 강자로서 고개를 숙이지 않고 버텼습니다. 신라는 아예 고개를 숙이고 예를 취해서 자기의 국익을 도모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죠. 요즘 북한이 하는 걸 보면 그 정신만큼은 고구려의 정신과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모두 웃음)

그런데 이런 면을 생각해봐야 해요. 저도 옛날에는 연개소문 같은 사람을 마냥 좋게 생각했는데 요즘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어요. 연개소문이 천리장성을 마련한 것은 요새 북한이 핵개발을 했던 것과 똑같고, 연개소문의 독재정치도 북한의 현재 정치하고 비슷해요. 그런데 저는 북한 인민들의 고통을 보면서 ‘이게 꼭 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회의가 좀 들어요. 국가적 측면에서는 중국이나 미국에게 맞대응하는 것이 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목에 힘을 주는 동안 북한의 2천만 민중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어떤 관점에서 볼 거냐가 중요합니다. 국가적 관점에서 사물을 봐야 하느냐, 인민의 관점에서 사물을 봐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어느 한 쪽으로만 치우쳐서 결정할 수는 없죠. 그래서 저는 북한 문제를 보면서, ‘그건 참 잘했다!’ 이렇게 생각했던 옛날 역사도 다시 검토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국가적인 위기를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민중이 고통스럽지 않도록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했어요.

아무튼 고구려는 이렇게 끝까지 자주권을 지켰습니다. 고구려의 정신은 바로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지키고 계승해왔다’ 하는 데 있습니다. 그 정통성을 계승한다면, 중국과 같은 큰 나라라 하더라도 우리가 고개를 숙일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장점이 있는 반면에, 국제적 변화 속에서 꼭 그런 갈등을 감수했어야만 했는지는 조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중원을 통일한 수나 당과 꼭 그렇게 맞부딪쳐야 했을까? 적절한 외교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국가를 안정시키는 어떤 전략이 필요하지는 않았을까?’

이런 것도 우리가 다시 한 번 고려해보면 좋겠습니다.”

스님의 역사 강의는 과거의 일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가도록 해주는 힘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독창적이었던 고구려의 정신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면서 강의를 마쳤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지금까지 세 가지를 살펴봤습니다. 첫째, 고구려의 시작에 대한 신화의 해석을 살펴봤어요. 둘째, 고구려의 전반적인 역사의 흐름을 살펴봤습니다. 셋째, 고구려의 정신이 어떤지를 함께 살펴봤습니다.

고구려가 남긴 유물과 유적은 무덤과 성, 이 두 가지가 핵심이에요. 내일 광개토대왕릉과 장군총 무덤에 가서 직접 보겠지만, 고구려의 무덤은 독특해요. 성도 특징이 뚜렷합니다. 어느 나라나 다 성이 있긴 하지만 고구려는 성을 쌓을 때 첫째, 성벽이 무너지지 않게 쌓는 특별한 기술을 갖고 있었어요. 바깥은 반듯한 돌을 줄지어 쌓았지만 속에서는 돌이 서로 맞물리도록 쌓았어요. 이걸 ‘개이빨식’이라고 합니다. 개가 한번 물면 놓치지 않듯이 딱 맞물리게 했어요. 그래서 바깥의 성벽이 무너져도 성벽 전체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돌담이라면 와르르 무너지지만, 고구려의 성벽은 밖의 돌이 떨어져도 성벽이 그대로 유지돼 있어요. 모레 백암산성을 가보면 알 수 있겠지만, 성벽 바깥이 무너져서 안에 삐쭉삐쭉하게 나온 부분을 볼 수 있는데, 그게 개이빨식 축성법입니다. 한 부분이 큰 돌에 맞아서 무너지면 그 부분만 떨어지지 전체가 무너지지 않게 쌓는 기술입니다.

그리고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옹성이나 공자형 성문을 만들었습니다.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서 치성을 쌓았고요. 이런 것들은 고구려의 성 쌓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특징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평지성과 산성을 쌍으로 만들어놓고, 평소에는 평지성에서 살다가 여차하면 산성에 가서 안거하고, 또 적이 물러나면 평지성에 돌아와서 살았어요. 이런 여러 가지 문화적인 면이 고구려 문화의 특수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에 요하문명이 발견됐는데, 무덤 양식이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고구려처럼 돌로 7단을 쌓은 무덤이 발견됐어요. 그런데 지금은 5천 년이나 됐으니까 돌만 있는 게 아니라 거기에 흙먼지가 날아가서 쌓이고 그 위에 나무가 자랐어요. 고구려 시대의 장수왕릉을 비롯한 여러 유적도 다 그 위에 나무가 자랐습니다. 그러나 요하문명의 무덤과 고구려의 무덤은 기본 골격이 실제로 거의 비슷해요. 제단도 위치가 거의 같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요하문명의 흐름이 고구려로 계승됐고, 발해는 고구려의 문명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를 중심에 놓고 고구려의 앞과 뒤를 보면 돼요. 우리가 발해 유적에서 직접 보았듯이 고구려는 발해로 이전됐어요. 그럼 고구려는 어디서 계승해왔을까요? 배달나라, 고조선, 그리고 부여를 계승해 왔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우리가 고구려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고구려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고구려의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고조선과 배달나라를 생각해볼 수 있고, 그 흔적으로서 요하문명에 대해 좀 더 깊은 연구를 해나갈 수 있습니다.”

고구려를 시작으로 해서 고조선, 배달나라, 요하문명까지 더 깊은 연구를 해나갈 수 있다는 얘기에 새삼 고구려 역사의 중요성이 더 깊이 다가왔습니다.

이어서 내일 답사할 장군총, 광개토대왕비와 광개토대왕릉에 대해 설명한 후 강의를 마쳤습니다. 2시간이 넘게 열강을 해준 스님에게 모두가 큰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내일은 새벽 5시에 숙소를 나와 고구려인들이 천제를 지낸 곳인 국동대혈로 갑니다. 그리고 다시 집안으로 돌아와 장군총, 광개토대왕릉을 보고 환인으로 이동해 고구려의 첫 수도 홀본산성까지 답사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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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여러 봉사자님들과 역사기행 참가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_^

2019-09-06 01:38:55

김정임

과거 역사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도록 안내하시는 스님 진심으로 고맙고 존경합니다

2019-08-27 08:23:36

이민정

역사의 중요성을 알게됩니다 감사합니다

2019-08-26 22:3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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