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8.19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3일째
“이 곳에 와보니 우리 나라의 역사가 전설이 아니죠?”

안녕하세요. 오늘은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3일째입니다. 러시아에서의 기행을 마무리하고 중국으로 이동하는 날입니다.

청년 역사기행단은 새벽 5시에 우수리스크를 출발했습니다. 먼저 어제 강이 넘쳐 가지 못한 이상설 유허비를 찾았습니다.

“어제 이상설 유허비를 못갔는데, 한번 더 가보겠습니다. 하는데까지 해보겠습니다.”

여전히 강물이 빠지지 않아 경찰이 유허비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아쉽지만 버스를 돌렸습니다. 그래도 세 번 답사하고, 두 번 찾아왔으니 미련은 없습니다.

가로등도 없는 허허벌판을 버스는 구비구비 달렸습니다. 동트기 전 새벽별이 희미하게 빛나는 중에 청년들은 못다 채운 꿀잠을 잤습니다. 3시간 30분을 달려 오전 8시 30분에 크라스키노 마을에 위치한 염주성에 도착했습니다.

러시아에서 염주성 발굴 조사 작업을 하고 있는 겔만 교수님과 발굴조사팀이 역사기행단을 반갑게 맞이해주었습니다. 기행단은 발굴조사단에 선물을 여러 가지로 준비해 와서 드렸습니다.

염주성은 바닷가 늪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곳에서 염주성까지 1시간 가량 늪지를 걸어야 합니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미리 준비한 비닐 장화를 신거나 우비를 입는 등 무장을 하고 염주성으로 출발했습니다.

엊그제 1차 팀이 이곳에 왔을 때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늪지에 온통 물이 차 있었습니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왔는데, 2~3일 사이에 물이 많이 빠져 있었습니다.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있긴 했지만 예상보다 가볍게 늪지를 걸었습니다.

염주성 가는 길에는 사람키보다 더 높은 야생풀들과 야생화들이 끝도 없이 가득했습니다. 사람 손이 닿지 않은 길이라 자연 그대로 아름다웠습니다.

1시간을 걸어 염주성 발굴터에 도착했습니다.

물이 가득 차서 발굴터라고 알려주기 전에는 전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스님이 먼저 염주성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었습니다.

“이곳은 발해의 동경용원부 산하에 있는 염주성 터입니다. 발해는 689년에 돈화에 있는 동모산에서 건국된 후 926년에 수도인 상경용천부가 있던 발해진에서 멸망하기까지 229년 간 유지된 동북아시아의 큰 나라였습니다. 발해에는 5경이 있었어요. 수도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5개가 있었습니다.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 이렇게 5개의 경(京)과 15개의 부(府), 그리고 그 산하에 62개의 주(州)를 거느린 대국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은 동경용원부 산하에 있는 염주성입니다. 동경용원부는 우리가 오늘 러시아 국경을 넘으면 도착하게 될 훈춘에 있었어요. 염주성은 일본으로 가는 교통 요지이자 소금을 생산한 곳이기 때문에 ‘소금 염(鹽)’ 자를 써서 ‘염주(鹽州)’라고 불렀습니다.

여기 계신 극동대학교 겔만 교수님이 염주성을 20여 년 간 발굴해 오셨습니다. 오늘 교수님의 안내를 받아서 이 염주성과 염주성에서 나온 유물에 대한 설명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날씨도 궂은데 아침 일찍부터 여러분에게 설명해주러 나오신 게르만 교수님을 뜨거운 박수로 환영해주시기 바랍니다.”

기행단은 환호하며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우리의 역사인 발해 유적지를 러시아 사람인 겔만 교수님이 열정적으로 발굴하고 연구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 감사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동지 여러분. 이렇게 날씨도 흐리고 길도 안 좋은데 발해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용기를 내어 여기까지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염주성도 여러분을 반기고 있다고 믿습니다. (모두 박수)

오늘은 제가 염주성 터의 가이드가 돼서 염주성의 모습이 어떠했고, 발해 사람들이 염주성에서 어떻게 숨을 쉬었고, 어떤 생활을 했는지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여기 존경하는 법륜스님께서 이미 많은 걸 얘기해 주셨겠지만, 저는 좀 더 자세하게 몇 가지를 더해서 이번 역사기행이 더욱 재미있도록 얘기해드리겠습니다.

사실 발해의 역사는 러시아인들에게는 그렇게 무관심한 대상이 아닙니다. 한국 사람들처럼 러시아 사람들도 발해에 관심이 있고, 특히 고고학자들은 더 많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발해의 역사는 한국인들의 역사일 뿐 아니라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기에 세계인들도 이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아마 오래 전부터 발해사 연구가 이루어졌겠지만, 러시아에서는 러시아 정교회 신부 중 한 분이 발해의 역사를 처음으로 발견하셨습니다. 그 분은 중국 쪽 문헌을 읽고 ‘여기쯤 염주성터가 있겠다’ 하고 다니면서 찾다가 이 염주성 터를 처음으로 발견하셨습니다. 19세기 말에 그분이 드디어 여기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분이 오신 길이 오늘 여러분이 오신 길과 같아요. 똑같은 역경과 어려움을 뚫고 여기에 도착하셨습니다. (모두 박수)

아쉽게도 성터의 발굴은 그보다 훨씬 더 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발굴 계획은 1950년부터 있었지만, 첫 번째 발굴은 1980년에 이루어질 정도로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처음 발굴을 할 때 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곳에 유적은 있는데 이 유적이 어느 민족의 것이며 어느 시대 것이냐?’ 라는 문제였습니다. 처음에 봤을 때는 금나라로 추정했지만, 결국은 발굴하면서 금나라 것이 아닌 발해의 것임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리고 금나라 시절에는 여기가 성스러운 땅으로 여겨져서, 사람들이 여기서 살지 않고 돌아가신 분들을 묻으러 오는 장소였습니다.”

이어서 겔만 교수님은 바로 앞에 보이는 물웅덩이 밑에 무엇이 발굴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세세한 설명을 들으니 이 발굴터가 정말 발해인이 살고 생활했던 곳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겔만 교수님의 설명을 다 듣고 나서 염주성터 공동 발굴과 후원에 대해 제안을 했습니다.

“발해성터를 한국학자가 공동으로 발굴한 사례는 러시아밖에 없습니다. 중국은 아예 현장을 보지도 못하게 하고, 발굴 내용도 공개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북한에도 발해 유적이 있지만 그건 아직 남북이 공동으로 발굴한 적이 없고요. 유일하게 발해 유적을 발굴하는 작업에 한국 학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장소가 이곳 연해주입니다. 이걸 지속적으로 더 많이 지원을 해야 하는데, 올해는 한국에서 지원이 중지됐어요. 그러니 여기 계신 분들 중 자기가 정부 관계자이거나 아버지가 관리로 있는 사람은 좀 영향력을 행사해서 이런 중요한 발굴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우리도 돈을 조금씩 내서 도우려 합니다. 교수님과 의논해서 이 앞에 비석을 세워서 ‘여기가 발해의 염주성터입니다’ 이렇게 알리는 표시를 예쁘게 만들어 세우려고 해요. (모두 박수)

그리고 이곳에서 농장을 운영 중인 유니베라 현지법인장과도 지원 문제를 의논 중입니다. 얘기가 잘 되면 이곳에 발해 박물관을 만들어서 발굴된 유물을 전시할 수 있게 할 계획입니다. 여기서 발굴된 유물이 지금 블라디보스톡 주립 박물관에 일부 전시돼 있는데, 아주 중요한 것만 전시하지, 발굴된 유물 다수는 그냥 창고에 있거든요. 그것을 여기 크라스키노 마을에 작은 박물관을 지어서 전시를 하면 이곳 현장까지 못 들어오는 사람도 발해 유물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우리처럼 여기까지 못 들어오는 사람들은 유물을 아예 안 보는 게 나아요? (모두 웃음)

이곳에 관광객이 100명 오면 염주성 터에는 한 명도 안 와요. 다 그냥 지나가죠. 일반 여행객은 바쁘잖아요. 그러니 여기 안 들어오는 사람들이 작은 박물관에서라도 발해 유물을 볼 수 있도록 우리가 서비스를 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역사기행을 하고 남은 돈을 그런 사업에 정기적으로 쓸 생각입니다.

이런 작업은 공동으로 해야 합니다. 현지에 있는 법인 쪽에서 좀 도와줘야 이걸 할 수 있지, 우리가 단독으로 할 수는 없거든요. 겔만 교수님의 발굴 작업도 러시아가 중심이 되고 우리는 서포트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게 됩니다. 문화유산은 ‘내 것, 네 것’을 따질 게 아니라 인류 문화의 공동 유산이기 때문에 공동으로 잘 보존해나갈 필요가 있어요. 그러니 여러분의 지속적 관심을 바랍니다.”

겔만 교수님은 설명을 모두 마친 후 한국에서 온 기행단을 향해 기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오늘 저의 설명을 들으면서 발해 사람들의 생활과 삶, 발해성터와 발굴된 유물들이 좀 더 마음속에 깊이 남았길 바랍니다. 여기 오신 분들이 새로이 알게 된 것을 한국으로 가져가서 다른 분들에게 더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돼서 정말로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박수)

기행단도 겔만 교수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이 염주성터 방문을 마무리는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와서 보니까 발해는 전설의 나라가 아니죠?”

“네!”

“이렇게 발로 밟을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아주 구체적인 나라입니다. 남한에는 발해 유적이 하나도 없어서 확인을 못하니까 ‘발해’라는 얘기만 있고 우리가 눈으로 볼 수는 없었어요. 남쪽에 찬란한 신라 문명이 꽃을 피울 때 신라와 동시대에 발해라고 하는 큰 제국이 북쪽에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렇게 와서 직접 보고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거진 풀숲에서 발해를 느끼며 청년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다시 한 시간을 걸어 진흙탕 길을 걸어나오니 4시간이 지나있었습니다.

흙을 털고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스님의 고무신과 양말이 진흙 범벅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버스는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 기념비로 향했습니다. 단지동맹 기념비 위에는 안중근 의사가 단지동맹을 결의하기 위해 왼손 무명지를 잘랐던 손 모양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스님은 먼저 안중근 의사를 포함한 12인의 동의단지회 열사들이 얼마나 동아시아의 평화를 간절하게 바랬던가에 대해 설명해주었습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를 제창하고, 애국 선열들을 기리며 잠시 묵념을 했습니다.

묵념이 끝나자 스님은 청년들에게 _“선조들의 은혜를 생각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나가자”_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틀 동안 이곳 연해주 지역을 답사하면서 오늘날 우리의 편안한 삶이 어떤 희생 위에 이루어졌는지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잃었을 때는 목숨 걸고 독립운동을 하고,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피땀 흘린 선조들이 있었어요. 또 민주화 시기에는 ‘우리가 한 번 자유롭게 살아보자’라고 해서 청년 대학생들이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과정이 있었던 덕분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에 대한 선조들의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후손들을 위해 남은 과제를 우리가 해결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선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항구적인 평화를 구축해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북한과의 갈등을 해소하고 통일을 향해 나아가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일들을 우리가 해나갈 때 우리의 다음 세대들도 통일된 한국에서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살아갈 수 있어요. 이렇게 먼저 내가 앞장서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짐하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네!”

청년들은 큰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이어서 러시아 일정 동안 기행을 잘 할 수 있도록 통역과 봉사를 해준 오미령님과 남편 장민석님, 아들 장하연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역사적 사건이 한 사람만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듯, 역사기행도 보이게 보이지 않게 도와주는 여러 사람의 힘으로 완성됩니다. 오미령님은 러시아를 떠나는 기행단에게 우유를 한 병씩 선물했습니다.

단지동맹비 참배를 마치고 기행단은 하산 전투 승전기념탐으로 향했습니다. 승전기념탑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가 일본의 공격을 막아낸 것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는 전망대입니다 그 사이 스님은 유니벨라 법인장님과 함께 발해 박물관으로 사용할 건물과 터를 답사했습니다.

다행히 유니벨라 측에서 소유한 빈 건물과 땅이 조용한 곳에 있다고 해서 위치가 괜찮은지 둘러보았습니다. 마침 유니벨라 본사의 상무님도 함께 하셔서 “9월 정도에 최종 결정이 날 것 같다”며 발해 박물관 건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보겠다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스님은 법인장님과 상무님에게 뜻 깊은 일에 마음을 내어준 것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발해 박물관 건립에 대한 의견도 말했습니다.

“여기가 중요한 이유는 러시아와 한국이 합동 발굴 조사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중국은 다 통제를 하잖아요. 합동 발굴을 하면 그 유적에 대해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수 있거든요. 그리고 발굴 현장에 계신 겔만 교수님이 중심이 되어서 이 사업이 진행되도록 하면 좋겠어요. 우리도 적극 돕겠지만, 현장에 계신 분이 중심이 되어야 이 사업이 오래갈 수 있습니다.”

법인장님도 스님의 뜻을 잘 받들어 회사에서 적극적으로 준비해보겠다고 했습니다.

답사를 마친 스님은 역사기행단이 있는 전망대로 향했습니다. 기행단이 오전 내내 헤집고 다녔던 염주성 가는 길이 한 눈에 쏙 들어왔습니다. 둥그런 모양을 하고 있는 염주성터의 모습도 확연히 보였습니다.

저 멀리 동해바다와 염주성터를 배경으로 삼삼오오 모여 기념사진을 찍은 후 다시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이제 스님과 청년들은 버스를 타고 중국 훈춘으로 넘어가기 위해 러시아 국경지대에 도착했습니다. 입출국 수속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졌고 3~4번에 걸쳐 여권 확인을 하면서 러시아 출국과 중국 입국을 완료하는 데에 7시간이 걸렸습니다.

국경을 무사히 넘어온 기행단을 향해 스님은 다들 수고했다고 격려하며 한 마디 덧붙였습니다.

“이곳 중국과 러시아의 교두는 중국 쪽은 훈춘이고, 러시아 쪽은 하산입니다. 크라스키노 마을은 하산에 속합니다. 하산군 크라스키노와 훈춘시는 국경이 맞닿아 있는데, 오늘 국경을 넘는데 7시간이 걸렸어요. 아마 우리가 걸어갔어도 벌써 저 앞까지 갔을지도 몰라요. 이렇게 멀지 않은 거리인데 인위적으로 만든 국경이 도대체 무엇인지 사람들을 이렇게 피곤하게 해요. 오늘은 참 수월하게 온 편인데도 결과적으로 7시간이나 걸렸습니다.”

그래도 중국은 시간이 2시간 느려서 러시아 시간으로 저녁 8시에 도착했지만, 중국시간으로는 6시였습니다. 2시간을 벌었습니다. 훈춘을 지나 도문에서 한반도 최북단 온성과 조중우호다리를 보고 숙소에 가기로 했습니다. 스님은 훈춘, 도문, 한반도 최북단, 두만강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중국에서 역사기행을 시작하며 주의할 점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이제 중국으로 넘어왔는데요. 우리가 역사기행을 왔지만, 중국에서는 어느 유적지에서든 플랜카드도 걸지 못하게 하고, 태극기도 들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유적지에서 설명까지 못하게 합니다. 이런 행동을 하면 중국 공안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극렬하게 반응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기분이 굉장히 나빠져요.

그런데 우리가 중국을 욕하려고 이곳에 여행을 온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가 지금 당장 그런 중국을 고칠 수도 없고요. 그렇기 때문에 이 조건에 맞춰서 우리의 볼 일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옛날 우리 선조들이 여기에 살았고, 그들은 어떤 포부를 갖고, 어떤 방식으로 살았는지를 공부해서 우리나라가 앞으로 어디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소소한 문제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최대한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되 제재를 가하면 거기에 맞춰서 해나가면 됩니다. 중국을 겁내서가 아니라 우리 볼 일을 안전하게 보자는 겁니다. 그러니 꼭 좀 유의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버스는 도문 시내를 지나 두만강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건너편에는 북한 함경북도 온성군이 있었습니다. 이 곳이 한반도 최북단입니다.

어둠이 내린 북한 땅에는 불빛 하나 없었습니다. 반면 반대편 중국 땅은 휘양찬란한 불빛이 넘쳐 났습니다. 스님은 어두컴컴한 북한 땅을 바라보며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 직접 만났던 탈북 난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1994년부터 2001년까지의 시기는 북한이 엄청나게 어려웠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수백 만 명이 아사했습니다. 북한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였어요. 그 때 이 두만강을 건너서 중국으로 넘어온 난민이 많았습니다. 전체 탈북 난민의 80%는 두만강을 넘어온 사람들이예요. 두만강 곳곳에서 넘어 왔지만, 그 중에서 이곳 도문으로 넘어온 사람들이 가장 많았습니다. 온성에서 도문으로, 회령에서 용정으로, 무산에서 화룡으로 넘어왔어요. 난민의 60%가 함경북도 사람들이였습니다. 아무래도 국경과 가까우니까요.

두만강을 넘어와 중국에서 공안에게 잡히게 되면, 저기 오른편에 보이는 변방 감옥에 가두었다가 한 트럭씩 태워서 북한으로 다시 돌려보냈습니다. 저 변방 감옥의 고통은 차마 듣기 어려운 아픈 사연들이 많습니다. 당시 좋은벗들이 조사한 바로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 최소 30만 명 이상의 난민이 중국에 넘어와 있었습니다. 북한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있고, 중국에 정착한 사람들도 있고, 한국으로 넘어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제가 만난 한 탈북 난민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중국은 사회주의 천국입니다. 개도 이밥을 먹습니다.’

북한은 사람도 쌀밥을 못 먹는데, 중국은 개도 쌀밥을 먹는다는 얘기죠. 이런 아픈 사연들은 나중에 남북문제가 다 풀리고, 북한이 자유롭게 되어야 아마 그 고통이 세상에 다 밝혀질 겁니다.”

깜깜한 두만강의 풍경처럼, 처절한 눈물을 흘리며 두만강을 건너야 했던 북한 동포들의 이야기는 아직 어둠 속에 묻혀있습니다. 도문 세관에 내려 조중우호다리도 보았습니다.

이제 버스는 두만강과 작별을 고하고 다시 연길시로 향했지만, 북한동포들이 겪어야 했던 수많은 고통들이 자꾸만 생각나서 가슴이 아련해졌습니다.

버스를 타고 연길에 도착하여 본 도시의 풍경은 참으로 신기하였습니다. 대부분의 건물 간판이 한국어와 중국어를 함께 쓰고 있었습니다. 이곳에 우리와 같은 동포인 조선족이 사는 곳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치니 중국시간으로 저녁 10시였습니다. 러시아 시간으로는 밤 12시입니다. 오늘은 러시아에서 새벽 4시에 기상해서 아침부터 염주성의 늪지대를 걸었고, 또 국경을 넘어 오느라 다소 무리한 일정을 가졌습니다. 내일도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납니다. 늦은 시간이라 저녁 강연을 하지 않고, 내일 아침에 버스를 타고 가면서 공부를 하기로 했습니다.

내일은 새벽 3시에 기상해서 4시에 연길 시장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백두산을 오른 후 다시 연길시로 돌아올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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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여러 봉사자님들과 역사기행 참가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_^

2019-09-01 18:32:15

고경희

여기온 이유~

2019-08-23 00:00:12

하심

스님의 고무신과 양말까지 위대해보이네요‥감사합니다_()_

2019-08-22 21: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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