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8.12 동북아 역사기행 5일째
“발해 멸망 이후 1100여 년 만에서야 이곳에 찾아왔습니다.”

안녕하세요. 동북아 역사기행 5일째입니다. 오늘은 발해의 중심이였던 상경용천부의 왕성터를 둘러보고 발해의 첫 수도 동모산을 본 후 저녁에는 독립운동사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원래 오늘은 백두산 천지에 오를 계획이었습니다. 부슬부슬 비가 내렸지만 우비와 우산을 갖추고 새벽 5시에 백두산 북편 산문으로 출발했습니다.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장백산이라고 부릅니다. 장백산이라고 적힌 산문 앞에 줄을 서서 한 시간이 넘게 기다렸는데 ‘태풍으로 오늘 입산을 금지한다’는 방송이 나왔습니다.

마주치는 눈빛 속에 아쉬움이 스쳤습니다. 다시 버스에 오르자 송수신기로 스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늘을 대신해서 사과드립니다.”(모두 웃음)

“괜찮아요!”

“좋은 마음으로 갑시다. 아침 밥도 먹을 수 있게 됐잖아요.”(모두 웃음)

백두산을 오르며 먹으려고 준비한 간식은 넣어두고 따뜻한 국과 밥으로 아침식사를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일정을 변경하여 내일 가기로 했던 발해 유적지를 가기로 했습니다.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발해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중원 대륙의 한복판을 향해 달려 갔습니다. 고구려 영토보다 훨씬 넓은 영토를 갖고 중원을 누볐던 발해인들의 기상을 상상해보며 발해진으로 향했습니다. 비는 어느순간 그쳤습니다.

한참을 지나니 용암에 막혀 만들어진 길이 23km에 달하는 호수 ‘경박호’를 만났습니다. 경박호는 계속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아 마치 바다처럼 아주 넓었습니다. 호수는 넓은 들판과 어우러져 또 다른 아름다움을 주었습니다.

발해진에 도착하기 전에 버스 안에서 발해 유적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발해 시대의 절인 흥륭사입니다.

흥륭사는 상경용천부에 있는 9개의 절 중 유일하게 유물이 나온 곳이라고 합니다.

스님은 흥륜사에서 _“발해 멸망 이후 1100여 년 만에서야 이곳에 찾아왔다”고 하면서 “민족사의 정통성이 잘 계승되고, 발해의 옛 터들이 다시 복원되고, 참배한 우리들이 부여 고구려 발해의 민족 정기를 잘 계승해 나가겠다”_며 이 인연 공덕으로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없는 항구적인 평화가 정착되고, 남북이 서로 협력하고 하나되는 통일을 이룩하기를 발원했습니다.

다음은 당시 발해의 수도 중 하나였던 상경용천부의 왕궁터 유적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박물관으로 이동해 발해의 영역 지도와 궁성 조감도를 보며 스님의 설명을 듣고 동궁 옆에 위치한 ‘어화원’ 유지를 향해 걸었습니다.

어화원 안에는 사람 얼굴 모양으로 만들어진 연못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었습니다. 스님은 이 부분이 ‘눈’, 이 부분이 ‘귀’ 라고 하면서 이곳저곳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곳곳에 코스모스가 피어 있어서 대중들을 반겨 주었습니다. 비는 내리지 않는데 흐린 날이라 걷기에 딱 좋았습니다.

“날씨 참 좋네요. 하느님이 양산도 크게 씌워주고 에어컨도 전체를 다 틀어주잖아요.” (모두 웃음)

스님의 재미있는 표현에 의병들은 다함께 웃었습니다. 기대하던 백두산 천지를 보지 못했지만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인생에는 늘 예기치 않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번 역사기행단은 교통사고도 겪고, 백두산 산문이 폐쇄하는 일도 겪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미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이미 일어난 일을 긍정적으로 보는 스님을 보며 백두산 천지보다 더 귀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스님의 안내에 따라 내성 안으로 들어가서 제 1궁성부터 제5궁성까지 차례대로 걸어가보았습니다. 웅장한 궁성은 세월에 자취를 감추고, 빈 궁궐터에는 예쁜 꽃들이 피어 있었습니다.

“궁성만 이렇게 좀 정비를 해놔도 엄청나게 넓잖아요. 우리가 많이 걸어왔지만 지금까지는 내성 중에서도 궁성, 궁성 중에서도 중궁만 걸어온 셈입니다.”

이제는 그 모습을 알아볼 수 없는 빈 터였지만, 궁궐터가 무척 넓어서 다 도는 일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발해가 얼마나 강성했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발해가 시작 된 곳인 동모산으로 향했습니다.

저녁 7시가 되어 해가 질 무렵 동모산에 도착했습니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동모산이 잘 보이는 곳으로 걸어갔습니다. 큰 평지에 삿갓을 덮어놓은 듯한 모양새의 낮은 산이 덩그러니 있었습니다. 성을 쌓기에는 좀 밋밋해 보이는 산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방이 평지인 지형 위에 있어서 조금만 올라가도 주변이 훤히 보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발해 유적을 답사하고 숙소로 이동해 저녁 식사를 한 후 8시 반부터 ‘독립운동의 역사’를 주제로 저녁 강연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만주지역에 조선말기부터 조선인이 정착하고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된 과정,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배경과 과정에 대해 자세히 소개했습니다. 다만 전투의 승리가 결국 막대한 민중의 희생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조금 더 민중의 입장에서 성찰이 필요함을 강조했습니다.

북간도 지역의 항일독립운동사

“청산리 전투가 일어난 이 일주일 동안 죽거나 다친 일본군이 약 3,300명에 달합니다. (모두 놀람)

봉오동 전투와는 비교가 안 되는 규모죠. 그 당시 사단 병력이 1만 명에서 1만 2천 명 정도 되는데 3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니까 사단 전체가 휘청거릴 정도라고 할 수 있어요. 이런 대대적인 승리를 거둔 게 청산리 전투입니다.

그런데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승리로 끝난 게 아니에요. 일본 군대가 대단위 병력을 이 지역에 투입해서, 산골짜기에 들어와 개간하고 농사지어 살던 모든 조선인들에게 소개명령을 내렸습니다. 즉, 유격전의 근거지가 된다고 해서 전부 산속에서 나오라고 한 거예요. 어렵게 이민 와서 몇 십 년 걸려 황무지를 개간해서 집 짓고 농사지어 놨는데 다 버리고 나오라면 여러분은 나오겠어요? 안 나오죠. 그런데 안 나오면 그냥 집에 불지르고, 저항하면 죽여 버렸어요. 이걸 ‘경신대참변’이라고 불러요. 엄청난 수의 민중이 재산을 잃고 죽임을 당하는 대학살이 벌어졌습니다.

우리는 전쟁의 승리만 얘기하지, 전쟁으로 인해 민중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는 크게 관심이 없어요. 이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어요? 제 나라가 보호 안 하고 착취하니까 여기까지 피신해온 것이고, 황무지를 죽어라 개간해서 겨우 먹고 살만하니 나라 잃었다며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이 찾아와서는 돈 달라 하고 아들 데려가고..., 그래도 그것까지는 좋았어요. 그들도 나라의 독립을 원하니까요.

역사 기록에서는 청산리 전투에서 이겼니 봉오동 전투에서 이겼니 하지만, 일본군은 그에 대한 분풀이로 엄청나게 많은 양민들을 학살했습니다. 전쟁에 관계없는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은 정말 나쁜 범죄 행위입니다. 그것은 국제협약에 위배 돼요. 그래서 일본제국주의가 잔혹하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역사를 기록할 때는 이런 승리만 중시할 게 아니라, 전쟁이 가져오는 민중의 고통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일본과의 경제 전쟁도 마찬가지예요. 정치인들은 막 싸우라고 큰소리치지만 그런 갈등 때문에 한일 양국 경제인들이 얼마나 힘들고 불편해요?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가 안 돼서 힘들고, 여행도 가기 어렵잖아요. 사람이 죽는 정도까지의 일은 아니지만 살아가기 힘들어요. 그렇기 때문에 가능하면 전쟁 없이 문제를 푸는 게 최고이고,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한다 하더라도 그 피해 규모를 최소로 줄이는 게 필요합니다.

경신대참변을 저지르고도 일본은 대대적으로 독립군 섬멸작전을 벌였어요. 그러다보니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해주던 장작림(장쭤린)도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좀 봐줬지만 일본이 저렇게 세게 나오니까 도저히 보호를 못하겠다고 한 거예요. ‘너희 모두 우리 땅을 떠나라’ 이렇게 동북3성을 떠나라고 요구하니까 독립운동가들이 갈 데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러시아 쪽으로 연락해서 연해주 쪽 사정을 알아봤습니다. 그쪽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백군과 적군이 나뉘어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혁명이 대충 마무리되어가는 중이었어요. 모스크바는 혁명군이 1917년에 일찌감치 중앙정부를 장악했지만 변방은 장악을 못하다가, 이제 어느 정도 장악이 된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안정이 되니까 러시아에서도 ‘이리로 넘어 오면 러시아에서 오히려 지원을 해주겠다’ 이렇게 된 거에요.

그래서 독립군 부대들이 중러 국경 지역인 밀산에 다 모였어요. 그 규모가 3,000명이 넘었습니다. 아마 여기서 200명, 저기서 100명 하는 식으로 동북지역에 있던 독립군들이 전부 모였던 거예요.

‘러시아로 넘어갔을 때 우리가 각자 움직이면 대우를 못 받을 테니 여기서 연합군을 편성하자.’

이렇게 해서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단이라는 큰 조직을 이루어서 러시아의 자유시로 넘어갔어요. 우리말로는 자유시라고 하는데, 러시아 이름은 ‘스보보드니 알렉세예프스크’입니다.

당시 연해주에는 독립운동을 하는 집단이 크게 두 가지가 있었어요. 하나는 상해임시정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고, 하바롭스크가 있는 극동공화국 군부의 승인을 받은 상해파 세력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러시아 공산당에 참여해서 활동하는 이르쿠츠크파 세력이었어요.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동조한 사람들이었죠.

그런데 갑자기 수 천 명의 조선독립군이 한꺼번에 넘어오니까 그 군권을 누가 가질 것인지를 두고 러시아 안에 있던 두 독립군 계열이 싸우게 된 거예요. 세력을 따지자면 상해파 세력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좀 강한 사람들이었어요. 반면 이르쿠츠크파 세력은 약하지만 권력은 셌고요. 후자는 러시아 공산당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권력이 세고, 민족 의식보다는 공산주의 의식이 좀 더 강했습니다.

러시아로 건너간 독립군들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어요. 어느 쪽 편을 들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고, 러시아로 넘어오라고 해놓고는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다가 러시아 공산당과 밀접히 관계된 이르쿠츠크파 세력이 러시아 적군과 연합해서 상해파를 포위해버렸어요. 이것은 우리끼리 싸운 게 아니에요. 러시아 공산당과 밀접하게 관계하던 사람들이 러시아 적군을 데려와서 상대를 포위한 거죠. 그렇게 포위한 상태에서 무기를 버리라고 했는데 무장해제를 안 하니까 러시아 적군이 공격을 한 거예요. (모두 탄식)

화력으로 보나 군대 규모로 보나 독립군들이 러시아 적군한테 어떻게 이기겠어요? 이 사건으로 수많은 독립군들이 죽고 흩어져버렸어요. 이것이 1921년에 일어난 ‘자유시 참변’입니다. 이때 이 사람들은 공산주의와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러시아 적군에 의해 수많은 독립군들이 이 참변으로 완전히 풍비박산이 나버린 거죠.

그 이후 독립운동은 러시아에서는 다 러시아 공산당에 참가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북간도에서는 다 중국 공산당에 참가한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코민테른은 일국일당 원칙을 표방했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에는 공산당을 하나밖에 둘 수 없다는 원칙입니다. 예를 들어 중국 안에 조선 공산당이 있고, 중국 공산당이 있으면 안 돼요. 중국 안에서는 전부 중국 공산당, 조선 안에서는 조선 공산당, 러시아 안에서는 러시아 공산당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중국 안에 살면서 ‘나는 중국 공산당하고 관계없이 대한 독립운동을 하겠다’ 해도 여기서 활동하거나 공산당과 같이 뭘 하려면 중국 공산당에 가입해서 해야 하는 거예요.

이곳 북간도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중국 공산당에 다 참여해야 했습니다. 중국 공산당도 한족만이 아니라 만족, 조선족 등 연합군으로 편성되어 있었던 거예요. 이걸 동북항일연군이라고 해요. 일종의 연합군 혹은 혼합군이죠.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려면 동북항일연군에 참여해야 했고, 연해주에서 독립운동하려면 러시아 공산당에 참여해야 했어요.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독자적으로 싸우는 군대는 발붙일 데가 없어진 겁니다.

이게 훗날 광복 이후에 큰 문제가 됩니다. 우리가 엄청나게 독립운동을 했어도 연해주에서 벌인 활동은 다 러시아 군대가 한 것이 되고, 중국에서 활동한 내용은 다 중국 공산당에서 한 것이 되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한국 독립을 위해서 뭘 했냐고 하면 세계에 내놓을 만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장개석(장제스) 정부 밑에 있던 상해임시정부가 있긴 하지만 임시정부는 군대가 없었어요. 1940년이 넘어서 광복군이라는 이름으로 500명 정도를 모집해서 훈련하고 2차 세계대전에 참가하려고 준비했지만, 그러던 중에 일본이 항복해버려서 갑자기 광복을 맞았어요. 그러니 이것도 세계에서 성과를 인정받기 어려웠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같은 일이 있었기에 장개석 정부에서는 임시정부를 그나마 보호하고 인정했지만,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이런 활동상을 전혀 모르니까 우리의 독립적인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장개석이 참여한 국제회의인 카이로 선언(1943. 11. 27)에서는 조선의 독립을 약속했지만, 그 후의 포츠담 회담(1945. 7. 26)에서는 조선의 독립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포츠담 회담에는 장개석이 빠졌으니까요. 스탈린이 모택동(마오쩌둥)과 장개석 중 장개석만 참석하면 절대로 안 된다고 반대해서 둘 다 빠지고, 영국의 처칠과 미국의 루즈벨트, 소련의 스탈린이 모인 회의였거든요. 이 사람들은 조선을 일본의 일부로만 봤던 거예요. (모두 탄식)

이렇게 해서 광복 후 우리는 바로 독립을 못하고 신탁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미소 양 세력이 서로 한반도를 장악하려고 하는 와중에 분단이 되었고, 한쪽에는 미국 편인 정부가 들어서고, 다른 한 쪽에는 소련 편인 정부가 들어섰어요. 이런 현대의 비극은 독립운동의 과정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분단이 된 건 아니에요.

어쨌든 1920년의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를 끝으로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은 막을 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유시 참변 이후 김원봉을 비롯한 일부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일종의 무정부주의자로서 싸웠습니다. 일본과 싸우려면 부대의 규모를 키우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으니 소부대가 암살을 중심으로 할 수밖에 없다고 본 거예요. 이렇게 여러 가지 형태로 나뉘어 흩어져서 활동하게 되면서, 홍범도 부대나 김좌진 부대처럼 독립부대적 성격이 뚜렷한 경우는 그 이후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습니다.

그리고 1920년까지의 독립운동가들은 거의 100퍼센트 가까이가 대종교 사람들이었어요. 단순히 대종교 신자들이 독립운동에 많이 참여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려면 대종교를 믿고, 대종교를 믿으면 곧 독립운동가가 되는 거예요. 대종교를 믿는다는 건 곧 내가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얘기이고, 독립운동을 한다고 하면 그 당시에는 사상적인 지주가 대종교밖에 없었기 때문에 곧 대종교에 귀의하는 셈이었습니다. 이 당시 독립운동가들, 예를 들어 홍범도나 김좌진 같은 인물들도 모두 대종교의 일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1930년 이후에 등장하는 사회주의적 독립운동가들은 조금 달라요. 사회주의적 관점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이런 이념을 내세웠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이념이 좀 약했습니다. 나중에 가면 이것이 또 민족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입장 차이와 분열이 일어나는 하나의 큰 원인이 됩니다.

한편으로는 서로를 통합하려는 노력도 있었어요. 중국의 국공합작처럼 국내에서도 나이든 사람들 위주인 민족주의 세력과 젊은 사람들 위주인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하려는 노력이 있었어요. 신간회를 구성한 것이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스님은 미진한 부분은 내일 항일 유적지를 더 답사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면서 강연을 마쳤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스님은 이번 역사기행을 운영하기 위해서 곳곳에서 수고하고 있는 스텝들을 불러 모아 격려도 해주고 애로점이 무엇인지 경청하는 시간을 밤12시까지 가졌습니다.

내일은 청산리 전투터, 봉오동 전투터, 대종교 3인묘, 일송정, 용정중학교 등을 둘러보며 독립운동의 생생한 현장을 더 자세히 살펴볼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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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나윤

감사합니다. 🙏

2023-11-09 09:28:49

전은주

독립운동가들께 감사드립니다

2019-09-12 15:59:27

고맙습니다

그 수많은 목숨건 노력도 주변정세에 따라 별다른 평가를 못 받을수도 있군요.. 주변정세를 잘 알고 관리, 이용하는 능력이 팔요함을 배웁니다

2019-09-03 21: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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