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8.11 동북아 역사기행 4일째
“저기 북한에 뙈기밭이 보이죠?”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동북아 역사기행 4일째를 맞이하여 압록강을 따라 이동하면서 강 건너편 북한 땅을 보며 ‘북한의 현실’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습니다.

새벽 6시 기행단을 태운 버스는 림강을 출발해 압록강 상류를 따라 장백까지 달렸습니다. 중국 도로 위를 달리며 강 건너 북한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중국 쪽은 둑을 쌓고 도로를 넓히고 새로 건물이 계속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괜찮지만 홍수라도 나면 북한 쪽으로 물이 다 밀려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데도 마음이 시렸습니다.

북한 산은 온통 뙈기밭으로 덮여있었습니다. 산에 있어야 할 나무들은 혁명 전적 유적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서 있기도 힘든 가파른 곳까지 밭으로 개간되어 있었습니다. 중국의 울창한 산림과 너무나 대비되었습니다.

날이 밝자 소를 치는 사람들, 빨래를 하는 사람들,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손을 흔드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집 안에는 못 들어가고 남의 집 담장 넘어서 우리집 구경을 하고 있네요.”

압록강은 우리 민족의 장구한 역사와 함께 흘러온 강입니다. 남과 북 모두를 감싸 흐르던 강은 지금은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었습니다.

압록강을 따라 달리는 버스 안에서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4시간이 넘게 북한의 뙈기밭을 바라보며 가슴 한켠이 씁쓸했던 기행단은 궁금한 점을 묻기 시작했습니다. 어제 접촉 사고로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저녁 강연을 듣지 못한 3호차 탑승자들에게 질문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이 어느정도 잘 살았다고 하는데, 왜 북한이 지금처럼 가난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가난으로부터 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스님은 북한 식량난의 원인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압록강을 넘어온 북한 난민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이 남한보다 더 잘 살았어요.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남북이 서로 비슷해졌고요. 그런데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남북한 체제 경쟁이 아주 심해졌습니다. 특히 88올림픽을 전후로 해서 남한 경제가 고도로 성장하면서 북한도 서울의 모습에 맞먹을 수 있도록 평양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과 체재경쟁을 하면서 비경제적 분야에 힘을 쏟았고, 특히 능력에 넘치게 건설투자를 한 게 첫 번째 원인입니다.

두 번째 원인은 남북 간의 군비경쟁입니다. 남쪽에서는 일찍이 박정희 대통령이 국방자주화를 통해 엄청나게 군수산업을 일으켰죠. 그래서 북한도 그에 맞서 군수산업을 일으켰는데 한국은 국방비가 GDP의 2~3퍼센트라면 북한은 30퍼센트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런 국방비의 과다한 지출이 타격이 컸어요.

세 번째 원인은 주체사상과 김일성 신격화입니다. 중국과 소련의 갈등 속에서 주체적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중국파도 쫓아내고, 소련파도 쫓아내고, 권력을 독점하면서 주체사상을 내세웠습니다. 그런데 도가 좀 지나쳤어요. 김일성을 신격화하면서 주체탑과 동상을 세우고, 주체연구소를 만들고, 아프리카 같은 제3세계에 주체연구소를 만들고 경제적 지원을 하는 등 비경제적 분야에 돈을 많이 썼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북한 경제가 내적으로 허약해진 계기가 됐습니다. 체제 경쟁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죠.

그런데 1980년대 후반부터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이 붕괴되기 시작했어요. 이로 인해 북한의 모든 수출 판매가 멈춰버렸어요. 자본주의 사회와의 교역은 미국의 봉쇄전략 때문에 모든 길이 막혔고, 동유럽과의 무역도 전부 붕괴되어버린 거예요. 북한에서 만들어 수출하던 상품들이 1990년대 초에 태산같이 쌓인 채 그냥 썩어갔습니다. 그리고 중국은 시장경제화 해버렸어요. 그래서 중국과 외상 거래하던 게 다 없어지고 이제는 전부 현금거래를 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북한의 외화가 다 떨어져버렸어요. 외화가 없으니까 석유를 수입하지 못하게 돼서 에너지난이 생겼습니다. 에너지난이 생기니까 전기 공급이 중단되었고, 전기 공급이 중단되니까 모든 공업이 멈추었고, 비료 생산을 못했습니다. 비료 생산을 못하니까 연달아서 농업 생산량이 떨어졌고, 농업 생산량이 떨어지니까 노동자에게 배급을 못 줘서 노동자들이 굶어죽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더 식량사정이 악화돼서 이제 농민들까지 식량이 떨어지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국가의 최소 유지를 위한 식량을 우선 가져가버리니까 그 식량을 생산하는 농민들까지도 식량이 부족해진 거예요. 1995년부터 1997년까지의 이 시기를 북한 사람들은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릅니다. 이 고난의 행군 시기에 수백만 명이 굶어 죽는 비극을 겪게 됐습니다.

우선 북한 내부의 원인이 있었고, 미소 간의 경쟁에서 공산권이 밀려버린 국제적 환경 변화로 인해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 외부적인 원인도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첫째, 북한 지도부의 잘못입니다. 어찌됐든 국민이 굶어죽는 것은 막아야하는데 그러질 않았으니까요. 둘째, 그 굶어죽는 참상을 정치적 이유로 외면하고, 긴급구호를 막아 수백만을 죽도록 한 남한 지도부도 잘못한 것입니다. 통일된 뒤에는 다 역사적 평가를 받을 거예요. 그 당시에는 ‘민족사적으로 이건 엄청난 범죄다!’ 이렇게까지 얘기를 했습니다. 가을에 낙엽 떨어지듯 사람이 막 죽어가는데 그걸 외면했으니까요.

지금은 그 비극을 북한도 안 밝히고, 남한도 안 밝히지만, 통일이 돼서 다 밝힌다면 6.25전쟁보다 어쩌면 더 비참한 참상일지도 몰라요. 수많은 북한 난민들이 우리가 지금 지나가는 이 곳으로 넘어와서 산속을 숨어다녔어요. 이 산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장백에 살던 조선족 할아버지 집에서, 아침에 나가보면 이런 옥수수밭에서 애들이 기어나오면서 ‘아바이, 아바이, 살려주시오’ 이러고, 탑이 있어서 ‘탑산’이라 부르는 뒷산에 올라가보면 무덤 옆에 부처님 고행상처럼 갈비뼈가 앙상한 여자가 아기를 안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북한 식량난 얘기만 하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납니다. 강변에는 봄만 되면 시체가 떠다니고요. 겨울에 빠져 죽어서 얼음 밑에 있던 시체가 봄에 얼음이 녹으면 떠올라서 기슭에 둥둥 떠다녔습니다. 산속을 지나가면 여기저기서 애들이며 청년들이 나타나서 살려달라고 했어요.

좋은벗들에서 북한 난민을 도와줬다는 영수증이 남아있는 경우만 해도 2만 명이 넘습니다. 우리가 했다기보다 중국 조선족 어른들이 해주셨죠. 지금은 다 70대 80대가 돼서 걸음도 겨우 걸을 정도지만, 20년 전에 그분들이 정말 엄청난 일을 하셨어요. 우리는 뒤에서 난민을 지원할 수 있도록 난민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하였습니다.

그때 대학 다니다가 그만두고 이곳에 와서 북한 난민 돕기에 매진했던 젊은이들도 있었어요. JTS에서는 북한 아이들의 영양실조를 면하게 하려고 나진선봉에 영양식 공장을 마련해서 계속 물자를 지원했고, 온성에 비료를 공급해서 식량을 증산시키는 일도 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북한 난민들을 돕는 활동을 하다가 어느날 중국 정부에 국경법 위반으로 잡혀서 결국 중국에서 추방되면서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때 북한 난민 돕기를 했던 분들이 저한테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스님, 우리가 하는 일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지 않습니까? 누가 봐도 훌륭한 일인데 왜 우리가 이 일을 죄 지은 사람처럼 숨어서 두려워하면서 해야 합니까?’

이게 현실이었어요. 중국에서는 이 사람들을 못 돕게 하니까요. 중국 법에는 이 사람들을 돕는 게 범죄에 속해요. 국경 관리법에 위반되거든요. 당시에 북한 난민들도 이렇게 말했어요.

‘옛날 일제 강점기 때는 눈물의 두만강이었다면, 지금은 피눈물의 두만강이다’

역사기행을 시작하면서 북한 사람들이 굶어죽는 줄을 알게 됐고, 북한 동포를 돕고 중국 조선족 동포를 돕기 시작했는데, 이 조선족 동포들이 북한 난민들을 많이 도왔습니다. 당시 중국 조선족 동포 사기사건이라고 들어보셨을 거예요. 그것 때문에 좋은벗들에서 그 사람들을 도왔고, 그 인연으로 그 사람들이 북한 동포들을 돕는 데 앞장섰던 거예요. 제가 북한에서 난민이 많이 발생했으니 좀 돕자고 했더니 처음에는 ‘지금 우리들도 사기를 당해서 내 살기도 바빠서 안 됩니다. 우리는 중국 공민이기 때문에 중국 법을 지켜야 합니다’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조선족 지도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들이 어렵다고 해서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도왔는데, 정작 당신들은 남 어려운 것을 안 돕는다면 어찌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알았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최선을 다해서 북한 동포를 돕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북한 난민 돕기에 나섰던 거예요. 조선족 분들이 나서서 돕기 시작한 덕분에 우리가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었어요.”

스님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 같았습니다. 얼마 전 수행법회에서 옥수수 1만톤을 지원받은 북한의 탄광기업소 노동자들이 너무나 기뻐했다는 소식에 눈물을 글썽였던 스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지난 25년 간 한결같이 북한 동포 돕기를 해오고 있지만 ‘아직도 압록강에서 만난 굶주린 북한 어린이의 고통이 해결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스님의 모습에 가슴이 숙연해집니다.

아침 6시에 출발한 버스는 6시간 30분이 지나 12시 30분이 되어서 장백현에 도착했습니다. 장백에는 발해 시대의 탑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영광탑이 있습니다.

영광탑 앞에서 스님은 광활한 만주 벌판을 누빈 발해인들의 기상을 이어받아 새로운 통일 코리아를 열어갈 것을 발원했습니다. 통일의병들도 함께 두 손을 모으고 마음을 모아 발원했습니다.

그리고 양강도의 수도인 혜산을 내다보며 이곳에서 20년 전 좋은벗들이 북한 난민 돕기를 했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춥고 배고픈 난민들을 도왔던 이야기에 마음이 먹먹해졌습니다.

이제 버스는 백두산으로 향했습니다. 버스는 이내 백두산의 깊은 산속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자, 우리는 지금 백두산 속을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백두산을 못봤다고 하면 안 돼요. 백두산 천지를 못봤다는 말은 맞지만, 이렇게 백두산의 가슴 속을 휘젓고 다녀놓고는 백두산을 못봤다고 하면 안 돼요.(모두 웃음) 저기 야생화를 보세요. 나무도 참 아름답죠? 이렇게 멋진 숲 속을 이렇게 오랫동안 드라이브할 일이 잘 없을 겁니다. 풍경을 감상해보세요.”

스님과 참가자들은 백두산 속으로 스며드는 듯 하염없이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습니다.

저녁 무렵 기행단은 백두산 천지 아래 마을인 이도백하에 도착했습니다. 다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스님은 방금 전 백두산 산록에서 꺾어온 풀로 여치집을 만들었습니다. 짚을 꼬듯이 두 손으로 풀을 꼬고 각을 세우고 감고 하더니 금새 멋진 여치집이 만들어졌습니다. 어릴 때 만들고 놀았을 법한데 아직도 손은 그대로 그 솜씨를 기억하는지 능란한 손놀림에 옆에 있던 스텝들도 모두 놀랐습니다.

스님은 예쁘게 만들어진 여치집을 역사기행 실무 스텝을 맡고 있는 조신 님에게 선물했습니다.

“어제 3호차 버스가 접촉 사고가 나고, 숙소 문제로 많이 힘들었는데, 조신 님에게 특별한 격려가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젯밤 어느 스텝의 제안이 생각이 났는지, 스님 방식의 특별한 격려였습니다.

저녁 식사를 다 마치자 곧바로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내일 오를 백두산 천지의 지형과 봉우리, 천지를 두고 북한과 중국의 국경이 어떻게 나눠줬는지 역사적 배경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마침 강의장 뒷 벽면에 백두산 천지 그림이 크게 그려져 있어 설명이 한 눈에 쏙 들어왔습니다.

이어서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받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 발해 영광탑을 보고 와서 그런지 발해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 갔습니다. 총 4명이 질문했습니다. 그 중 한 분은 “발해의 민족 구성에는 말갈인도 많았는데, 우리 민족과 어떻게 소통하며 지냈는지, 발해는 왜 200년 정도 밖에 유지되지 못했는지?”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스님은 발해의 민족 구성에 대해, 그리고 동북아 지역의 주도권이 변화되어 온 과정을 이야기하며 우리가 어떻게 역사를 통합적으로 봐야 하는지 강조했습니다.

“발해는 민족 구성이 다양했어요. 고구려 시대의 말갈족은 그때까지 어떤 통일국가를 이뤄본 경험이 없었습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군 단위 정도로 모여 살면서 여기도 추장이 한 명 있고 저기도 추장이 한 명 있는 식이었어요. 그런 가운데 말이 비슷하고 문화가 비슷한 사람들이 동북 지역에 살고 있었던 거예요. 이 사람들은 몽골족이라고 하지 않고 퉁구스 계열이라고 부릅니다. 인류학적으로 보면 조금 오래된 토착민들이라고 볼 수 있죠.

이 사람들은 고구려 시기에는 다 고구려에 속해 있었어요. 요즘 중국의 지배하에 장족이 있고 몽골족이 있고 조선족이 있듯, 그냥 그 안에서 살았어요. 지금도 조선족은 조선말을 하면서 중국 안에 살고, 몽골족은 몽골말을 하면서 살고, 장족은 장족말을 하면서 살고 있잖아요. 그들도 이렇게 산 거예요.

말갈족도 고구려에서 관리까지 했지만, 높은 관리로는 진출하지 못 했어요. 중국에서 조선족이 시장 정도는 할 수 있지만, 중앙정부에 올라가 장관 같은 건 될 수 없는 것과 같아요. 시에서도 당 서기까지는 할 수 없어요. 예를 들어 연변 조선족자치주 주장은 되지만 연변 조선족자치주 공산당 서기장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직위는 다 한족이 차지하고 있어요. 행정이나 경제는 좀 맡기더라도 정치는 한족들이 장악하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고구려 시대에는 말갈족이 중간층 아래에 포진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가 당나라 또는 다른 상대와 싸울 일이 생기면 고구려국 안에 있던 말갈족도 1만 명씩 군대를 동원해서 함께 싸웠어요. 당 태종이 쳐들어왔을 때도 안시성 전투를 비롯해 여러 싸움에서 말갈 병사가 군대를 몇 만씩 동원해서 늘 함께 싸웠습니다. 같은 고구려 백성이니까요.

이렇듯 고구려는 단일민족국가가 아니었어요. 우리는 자꾸 현재를 기준으로 해서 옛날을 생각하기 때문에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현재 우리가 단일민족이다 보니 고구려도 단일민족국가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안에 선비족도 있었고, 말갈족도 있었고, 몽골족도 있었어요. 요나라도 마찬가지예요. 요나라 안에 말갈족도 있고, 고구려족도 있고, 선비족도 있고, 여러 부족이 많았습니다. 그중에서 주도하는 왕족 및 귀족이 누구냐가 다른 거죠.

고구려는 고구려족이 나라를 주도했어요. 그런데 고구려의 귀족이 당나라에 패해서 항복을 했잖아요. 그래서 상층 귀족들, 우리로 말하면 장차관급 이상은 전부 다 중국으로 잡혀가서 흩어져 버렸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고구려 사람이라 해도 지위가 중간 이하가 되는 사람들이에요. 대조영처럼 오늘날에 비유하면 지방 군수 정도 되거나 군대에서는 중령, 대령쯤 되는 사람들은 비교적 가까운 영주로 유배되었어요. 별을 단 사람들은 다 멀리 잡혀갔으니까요. 그 정도 지위를 가진 사람들 중에는 말갈족도 있어요. 걸사비우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걸사비우와 대조영은 친구 사이였습니다. 종족은 다르지만 지위는 비슷했거든요.. 그래서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들을 대표하고, 걸사비우는 말갈족 유민을 대표하고, 또 이진충은 거란족 유민을 대표한 거예요.

그런데 거란족 추장이 반란을 일으켰어요. 그 반란을 틈타서 대조영과 걸사비우가 자기 유민들을 데리고 함께 도망을 갔습니다. 말갈족은 원래 고구려 안에 있는 민족이었으니까 같은 국가 국민이라고 생각한 거죠.

그렇게 도망치면서 쫓아오는 당나라 군대와 싸우다가 걸사비우가 죽었어요. 걸사비우가 죽었으니 말갈족 안에서 말갈족을 통솔할 리더를 새롭게 뽑아서 협력을 해야 하는데 대조영한테 군사지휘권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조영의 아버지가 대중상이라고 하지만 걸걸중상이라고 기록된 문헌도 있거든요. 이런 이름을 보면 대조영의 집안이 고구려 귀족이긴 한데 종족적으로 보면 부모가 고구려족인지 말갈족인지 좀 불분명한 것 같아요. 어쨌든 말갈족은 새로운 지도자를 따로 세우지 않고 대조영한테 군사지휘권을 줍니다. 그렇게 단일지휘체제로 쫓아오는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저 멀리 국경부근까지 가서 발해를 세웠습니다.

추대를 받아 왕이 됐으니까 대조영의 입장에서는 간부를 등용할 때 고구려족만 등용하는 게 아니라 양쪽을 공평하게 등용하려 했겠죠. 애초에 고구려족이 중심이 돼서 나라를 세웠는데 말갈족이 있었다면 말갈족이 하층민이 되겠지만, 이 경우는 같이 도망 와서 나라를 함께 세운 일종의 동업관계니까요. 왕은 고구려족이 됐지만 말갈족도 우리로 말하자면 장관급 정도의 고위직까지는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 파견된 사신 명단을 보면 사신의 대부분이 대씨 아니면 고씨예요. 즉 지배족은 대부분 고구려족이라는 뜻이죠.

중국에서는 발해를 ‘말갈족이 세운 나라’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따지면 지배층은 고구려를 다시 일으킨 사람들이었어요. 즉 고구려족이 지배층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문화도 고구려 문화를 계승했지만, 일부 말갈의 문화도 예전에 비하면 상층 문화로 더 많이 올라오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건이 하나 생깁니다. 말갈족은 고구려 영역 안에 있는 말갈과 고구려 영역 밖에 있는 말갈이 있었어요. 후자가 흑룡강 부근에 자리한 흑수말갈이에요. 그동안 흑수말갈은 당나라와 교류하려면 늘 고구려의 허락을 얻은 뒤에 교류가 되었는데, 고구려가 당나라에게 멸망한 뒤로는 자기들이 당나라하고 직접 교류를 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다시 발해가 들어서니까 이 사람들하고 마찰이 생긴 거예요. 흑수말갈 입장에서는 당연히 당나라하고 계속 직접 연결하고 싶어 하겠죠. 예를 들어 우리도 일본을 통해서 미국하고 연결하다가 일본이 없어져버렸다면 미국하고 직접 교류하다가 일본이 또 일어났다고 해서 다시 일본을 통해서 교류하려고는 하지 않을 거잖아요.

그런데 발해의 두 번째 왕인 대무예, 즉 무왕이 ‘우리 쪽을 통해서 교류해라’ 이렇게 압박을 한 겁니다. ‘너희는 원래 우리 쪽을 통해서 교류하지 않았느냐. 고구려가 망해서 없어졌을 때는 그렇다 쳐도, 이제 우리가 다시 계승했으니 우리를 통해서 해야 하지 않느냐’ 이러니까 당나라에서 ‘네가 왜 거기에 간섭하느냐’라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당나라와 발해 사이에 갈등이 생긴 가운데 대무예가 군사력을 동원해 흑수말갈을 공격했습니다.

이때 대무예의 동생인 대문예가 당나라에 있다왔습니다. 왕이 동생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흑수말갈을 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릴 때부터 당나라 가서 공부하고 당나라 관리까지 된 사람이니까 당나라 입장이 어떤지 알잖아요. 그래서 왕의 명령을 따랐다가는 당나라하고 원수가 되겠다 싶었던 거예요. 우리가 지금 미국 말 안 듣고 뭘 하려는데 미국에 유학 다녀온 친미파를 장군으로 임명한다면 그 사람이 명을 따르지 않을 확률이 높은 것과 같아요. 미국한테 밉보일 것 같으니까요. 그래서 대문예가 당나라로 도망을 가버렸어요.

그래서 대무예가 대장군 지위를 다시 자기 삼촌에게 주어서 흑수말갈을 점령해버렸습니다. 당나라가 거기에 항의하니까 이제 거꾸로 산둥반도를 점령해버렸어요. 당시에는 발해가 그만큼 강했습니다. 이때 당나라는 측천무후 때인데, 측천무후는 평화주의자니까 화친을 맺자고 제의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점령했던 산둥반도는 당나라에 돌려주기로 하고 당나라와 발해가 화친을 맺었어요.

흑수말갈까지 이제 발해 땅으로 되었으니까 고구려 시절에 비해 발해는 그 영토가 두 배 이상 커져버렸어요.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은 다 말갈이잖아요. 발해 시대 초기에는 고구려와 말갈이 반반이었다면, 이제 그 배나 되는 말갈족들의 수가 통합되면서 말갈이 인구 구성의 4분의 3이 된 거예요. 이렇게 해서 발해는 인구 구성으로 보면 말갈이 월등하게 많아졌습니다. 어쨌든 이런 인구 구성이 돼서 말갈족은 발해에서 왕을 제외한 상당히 높은 귀족까지 오를 수 있으니 발해가 자기 조국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거란족의 요나라가 쳐들어와서 발해가 망해버렸어요. 고구려의 후예들이 발해 부흥운동을 했지만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어요. 숫자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의지도 없었거든요. 원래 지위가 높으면 희생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 다음으로 말갈족이 일어나서 나라를 세운 게 금나라예요. 정확히는 말갈족의 후신인 여진족이 일어나서 세운 나라죠. 그래서 금나라는 요나라를 원수같이 여겼습니다. 자기들의 조국인 발해를 없애버린 나라니까요.

이 사람들은 발해에 살면서 국가경영의 기술을 터득했기 때문에 비로소 새로운 왕조를 세울 수 있었던 거예요. 그 전에는 국가경영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금나라를 세우기는 했지만, 처음 나라를 경영해보는 것이다 보니까 서툴러서 머지않아 망하고 말았어요. 그러나 그 경험을 기반으로 해서 300년 후에 청나라를 세웠을 때는 중원을 수백 년간 잘 통치했습니다.

이런 역사를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말갈은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우면서 독립했고, 우리는 청나라로부터 병자호란을 당하다보니 이들과 원수가 돼서 이들을 ‘오랑캐’라고 자꾸 배척하는데, 사실 이 사람들은 모두 우리 사촌들이에요. (모두 웃음)

예전에는 여진족이 늘 우리 조선족의 동생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청나라를 세우고 나라가 커지니까 형님더러 ‘네가 동생해라’ 이런 거예요. 그러면 세력을 살펴서 동생을 하면 됐을 텐데, ‘미친놈’이라며 욕을 하고 거부했단 말이에요. (모두 웃음)

그것 때문에 청나라가 군사적으로 쳐내려왔고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전쟁에 져버렸어요. 전쟁에서 지면 상대를 죽여버리기 마련인데, 그래도 옛날 형님이 무릎 꿇고 비니까 살려준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동생이 아니라 아예 신하를 하기로 하고 철수한 거예요.

이런 이유 때문에 청나라 만주족은 원래 우리의 사촌이고 늘 우리 역사 속에 함께 했던 민족구성원이었는데도 그 역사를 떼어내고 중국 역사에 갖다 붙여 버린 모양새가 된 겁니다. 거란도 중국에다 갖다 붙여버리고, 원나라도 중국 역사에 갖다 붙여버렸죠. 그렇게 하다 보니 우리 역사는 볼품없고, 중국 역사는 규모가 엄청난 것처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북의 역사, 중원의 역사 이렇게 나눠서 역사를 봐야 세력 균형이 제대로 맞습니다. 우리는 조선족이라는 한 개 민족만을 역사라 하고, 중국은 56개 민족을 자신들의 역사라고 하니 그 규모가 어떻게 비교가 되겠어요? 이는 우리 스스로 우리 역사를 축소시키고 왜곡시킨 겁니다.

그래서 사관이 바뀌어야 해요. 사관이 바뀌면 문명사관도 바뀝니다. 크게는 차이나-티벳 어족과 우랄-알타이 어족으로 나누어 봐야 하고, 우랄-알타이 어족의 역사를 살펴서 우리의 여러 사촌형제들이 어떻게 힘을 길렀는지를 크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사촌들 중 제일 먼저 나라를 세운 게 선비족입니다. 그 다음에 여러 민족들이 나왔어요. 4-5세기에는16국이 있었지요. 10세기 들어서는 순서대로 거란족이 요나라를 세우고,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우고, 몽골족이 원나라를 세우고, 마지막에 일본 제국주의도 중원을 점령했어요. 문명의 제일 후진 세력이었고, 막내 뻘이었던 일본이 마지막으로 제일 강성해진 거예요.

이제 막내까지 한 바퀴 돌았으니까 다시 맏이로 올 차례입니다. 한 바퀴 다 돌았으니까요.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모두 박수)

거란, 여진, 몽골이 모두 우리의 사촌형제들이라는 말씀이 무척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역사를 보는 안목이 한층 더 넓어진 느낌입니다. 큰 박수와 함께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내일은 이도백하에서 백두산 북편으로 올라 천지를 볼 예정인데, 저녁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내일 맑은 하늘 아래 백두산 천지를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내일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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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나윤

감사합니다. 🙏

2023-11-09 09:13:32

소소원

동북아 역사기행에 많이배웠습니다.
스님 고맙습니다.

2019-10-07 21:27:00

이향애

북한 식량난에 대한 스님의 설명을 들으며 차창 밖, 북한 뙈기밭을 보는 일은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저기를 어떻게 올라갔을까 싶은 곳까지 밭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며, 삶의 처절함과 절박함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집 안에는 못 들어가고 남의 집 담장 넘어서 우리 집 구경을 하고 있네요.”

스님의 이 말씀은 새삼 분단국가의 현실을 다시 자각하게 했고, 서울로 돌아와서까지도 종종 생각나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 북한의 식량난이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에서 물놀이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냥 평화로워 보이지만은 않았습니다.

혜산을 내다보며 20년 전 좋은 벗들이 북한 난민 돕기를 했던 이야기는 가슴을 뭉클하고 먹먹하게 했습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난민을 도운 일화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발해의 민족 구성과 동북아 지역의 주도권이 변화되어 온 과정에 대한 스님의 법문은 역사를 왜 통합적으로 봐야하는지를 깨닫게 했습니다. 현재를 기준으로 해서 역사를 생각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말씀에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돌아봤습니다.
스님의 역사 강의를 통해 어설프게 알고 있거나, 단면만 보던 것들을 다시 돌아보고, 관점의 전환이 중요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2019-09-02 15:5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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