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5.7 즉문즉설(18) 강릉
“장애를 가진 아이가 걱정이에요.”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강릉에서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스님은 해외 일정을 마치고 오후 3시에 김포공항으로 입국했습니다. 5일간 바쁘게 해외를 다녀왔지만 스님의 하루는 여느 때와 다름없습니다. 스님은 바로 즉문즉설 강연을 하기 위해 강릉시 단오문화관으로 이동했습니다.

연두 잎이 꽃들과 앞 다투어 피어나던 봄을 지나 햇살이 뜨거워지는 여름이 오고 있습니다. 강릉에는 어제 비가 내린 뒤 개어 오늘은 더욱 맑았습니다. 노을이 드리우기 시작하는 6시, 시민들은 강당으로 입장하기 시작했습니다. 30분이 지나자 1,2층의 453석이 모두 매진됐습니다. 뒤이어 온 3백 여 분은 봉사자가 나누어준 깔개를 깔고 계단 한 편, 무대 앞 구석구석에 앉았습니다. 바닥에도 앉지 못한 분들은 강당 밖에서 영상으로 강연을 보았습니다.

스님이 입장하자 청중은 박수와 환호를 보냈습니다. 스님은 환하게 웃으며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짧게 인사를 나눈 뒤 바로 질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여기 통 속에 고민이 가득 들어있습니다. 혹시 자기가 선택이 안 되더라도 너무 섭섭해하지 마세요. 그럼 사연을 들어보겠습니다.”

남녀노소, 다양한 종교,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질문을 했습니다. 오늘은 그중 장애가 있는 아이를 어떻게 키우면 좋을지 물어본 질문자와의 대화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저희 아이에게 장애가 있습니다. 그동안 일반학교에 보내다가 아이가 특수학교를 가고 싶다고 해서 특수학교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학교를 좀 다니더니 특수학교를 가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특수학교에서는 친구들이 괴롭히진 않지만 지루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학교를 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아이의 마음의 소리에 따라 키울 수 있을까요?”

“학교를 안 다니는 게 문제예요?”

“저는 아이가 집에 있는 게 편하면 집에 있어도 되고 학교에 가는 게 좋으면 학교에 가도 되는데요. 법륜스님의 해박한 대답을 듣고 싶어서요.”

“그런 해박한 대답은 없어요.(모두 웃음) 엄마가 자기 아이를 제일 잘 알죠.

아이가 문제가 아니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엄마의 마음이에요. 대부분의 엄마들은 첫째, 모든 엄마는 자기의 아이가 남보다 뛰어나기를 원합니다. 둘째, 남보다 뛰어나지는 못하지만 남이 하는 만큼만이라도 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1등 했으면 좋겠다’, ‘중간만 했으면 좋겠다’ 하는 것은 내 바람이지 아이를 위한 마음이 아니에요. 아이가 정상적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내 바람이지 아이를 위한 마음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내 바람에 아이를 맞출 것인지, 아이 상태에 내 바람을 맞출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내 바람에 아이를 맞춘다면 아이는 내 욕망의 수단입니다. 아이가 젖 달라고 울 때 아이의 배고픔에 맞추기 때문에 그 사람을 ‘엄마’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 요구만을 주장하면 아이와 별다른 차이가 없어요.

만약에 부부가 헤어져서 아이와 떨어져 지내게 되었을 때 내가 보고 싶어서 아이를 찾으면 내가 아이입니다. 나의 보고 싶음에 응해주는 아이가 어른인 겁니다. 내가 젖 달라는 아이가 되는 것이고, 아이가 젖 주는 엄마가 되는 겁니다. 오늘날 부모들은 전부 수준이 그렇습니다. 나도 아이를 만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재판도 하고, 이것을 엄마의 권리, 아빠의 권리라고 하는데, 그 권리는 맞지만 그런 수준은 부모의 태도는 아닙니다. 아이가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데 엄마의 상황이 도저히 그곳을 갈 수가 없고 갈 형편도 안 되지만, 아이를 위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빚을 내서라도 아이를 만나러 가는 것이 엄마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자신의 욕구를 우선합니다. 부모는 없고 전부 이웃집 아줌마만 있어요. 이웃집 아줌마는 아이가 인물도 좋고 말도 잘 듣고 공부도 잘해야 그 아이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말도 안 듣고 신체장애를 가진 데다 공부도 못하면 모두가 싫어해요. 모두가 싫어하는 그 아이를 이 세상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엄마입니다. 관점을 이렇게 갖고 있어야 엄마입니다. 엄마는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지, 신체장애가 있는지, 그런 것을 따질 필요가 없어요. 다른 사람은 그걸 따지더라도 오직 엄마는 그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아이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걷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은 전생의 죗값도 아니고, 하나님의 벌도 아니고, 무슨 사주팔자도 아닙니다. 장애를 갖게 되면 다만 불편할 뿐입니다. 불편은 극복의 대상에 불과합니다. 팔이 없어 불편하다면, 의수를 하면 극복이 돼요. 아직 기술이 부족해서 원래 팔 만큼 작동할 정도는 안 되지만 앞으로 좀 더 기술이 발달해서 전자 팔이 나오면 어떨까요? 실제 사람의 팔보다 전자 팔이 힘도 더 세고 기능도 뛰어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멀쩡한 팔 자르고 전자 팔로 갈아 끼워 넣는 사람이 생길 겁니다.

원래 성형수술은 화상을 당하거나 얼굴을 다친 사람이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서 나온 기술인데, 고치다 보니 원래보다 더 잘 고칠 수 있게 되니까, 멀쩡한 얼굴을 고치는 성형수술이 나온 겁니다. 성형수술이 나온 것을 보면, 앞으로 의안도 전자 눈이 나올 겁니다. 실제 사람의 눈은 벽 뒤를 못 보는데 의안은 벽 뒤를 훤하게 볼 수 있게 된다면, 자기 눈 대신 전자 눈을 넣는 사람이 나올 거예요.

눈이 안 보이거나, 팔이 하나 없거나, 장애를 가졌다는 것은 전생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징벌과도 아무 관계가 없어요. 다만 불편할 뿐입니다. 불편하다는 것은 극복의 대상에 불과합니다. 걸어 다니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에 차를 만들고, 차를 타고 다녀도 불편하니까 비행기를 만든 것과 같아요. 그런데 우리는 고래로부터 장애 아이를 낳으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아이를 낳았나’ 하면서 괴로워합니다. 장애를 나쁜 결과물로 생각하는 이것 자체가 인권 차별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런 생각에 나도 모르게 세뇌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엄마의 욕망이 결합합니다. 내 아이가 지능이 80이어서 학습을 못 따라가면 엄마는 어떻게든 아이를 훈련시켜서 지능을 100이 되도록 맞추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것을 엄마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지능이 100이 되기는 어려워요. 그러면 아이에게는 ‘나는 부족하다’, ‘나는 모자란 사람이다’ 하는 열등의식이 생기게 됩니다. 부모의 욕심이 아이에게 열등의식을 심어주게 되는 겁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같이 놀다가 스스로 열등의식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부모는 이렇게 말해주어야 해요.

‘괜찮아. 달리기를 빨리하는 사람도 있고. 천천히 하는 사람도 있고, 셈본을 빨리 하는 사람도 있고, 천천히 하는 사람도 있는 거야. 너의 존재 자체로도 소중해 그러니 너는 행복할 수가 있어.’

운전면허 시험을 치면, 열 번 만에 붙는 사람도 있고, 한 번 만에 붙는 사람도 있듯이, 이것은 차이일 뿐, 지능이 100인 사람도 행복할 수 있고, 지능이 80인 사람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지능이 80이면 80에 맞게끔 훈련을 시켜줘야 합니다. 자꾸 지능을 100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부모의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부모의 욕망입니다. 부모 때문에 아이가 결국 상처를 입게 됩니다.

부모가 이렇게 관점을 가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이를 아무리 고치려고 해 봐야 안 됩니다. 먼저 아이의 지능과 신체조건, 여러 가지를 살펴봐서 장애가 없는 아이들과 함께 지내기에 얼마나 뒤처지는지 체크를 해야 합니다. 학습이 조금 뒤처지는 정도라면 일반 학교를 다니게 하고 부족한 건 보충을 해주면 됩니다. 이때 보충을 할 때도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맞추려고 하면 안 됩니다. 아예 못 따라가면 안 되지만 조금 뒤처지거나 꼴찌를 하더라도 같이 갈 수 있는 정도면 일반 학교에 다니는 것이 좋아요.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비장애인들과 분리되어 살아야 할 이유는 없어요. 불편하지만 비장애인들과도 같이 살 수 있어요.

그러나 일반적인 교육 방식으로는 도저히 문자도 읽을 수 없고, 셈본도 배울 수가 없을 때는 이런 아이들만 특별히 가르치는 특수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들을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수화로 교육을 하듯이, 이런 아이들은 아무리 교육을 시키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특수학교에 보내야 해요. 이 아이도 뭔가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배울 권리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박탈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시각 장애나 청각 장애뿐만 아니라 지체부자유 등이 다 포함됩니다.

아이의 장애가 어느 정도인가를 객관적으로 체크해서 전문가와 의논해 보세요. 일반 학교의 학습과정을 좀 못 따라가고 심리적인 자극을 받더라도 여기에서 공부하는 것이 낫겠다 싶으면 정상 학교에 보내고,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겠다 싶으면 이런 아이도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할 귄리가 있기 때문에 특수학교에 보내면 됩니다.

그런데 특수교육은 부모가 교육할 수가 없어요. 부모보다 특수교사가 돌보는 것이 낫다면 아무리 보고 싶어도 부모는 아이를 위해서 떨어져 줘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이에게 도움이 되면 내가 돌봐야 하고, 아무리 보고 싶어도 내가 돌보는 것보다는 다른 특수학교에 보내는 것이 낫다면 부모는 아이를 보내야 합니다. 자꾸 ‘내가 보고 싶다’, ‘내가 힘들다’ 이렇게 나를 기준으로 잡으면 안 됩니다.

내가 돌보아야 하면 내가 돌보지만, 아이를 위해서 내가 떨어져 있는 것이 좋으면 가슴이 아파도 떨어져 있어야 해요. 조금 차별을 받아도 장애가 없는 아이들 속에 있는 것이 아이의 미래를 위해 낫다면 차별받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일반 학교에 보내야 합니다. 이런 것에 대한 이해가 없는 다른 아이들을 욕할 필요는 없어요. 반대로 아무리 일반 학교에 보내고 싶더라도 학습을 따라갈 수가 없으면 특수학교에 보내야 합니다. 이렇게 아이를 위하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어느 학교에 보내느냐 하는 것은 스님이 조언할 일은 아니에요. 전문가와 의논해서 판단하시면 돼요. 그러나 이 판단에 자기의 욕심이나 귀찮음이 끼어들면 안 됩니다. 관점을 이렇게 잡고 판단했으면 좋겠어요.”

“스님, 감사합니다.” (모두 박수)

“엄밀히 말해 ‘정상’이라는 것은 없어요. 예를 들어 어떤 집단을 조사해보면 포물선 곡선을 그립니다. 이때 양쪽 끝을 잘라서 가운데에 일정한 범위를 ‘정상’이라고 하고, 양쪽으로 떨어진 부분을 ‘비정상’이라고 말하는 거거든요. 이것은 우리들의 관념일 뿐 존재에는 정상과 비정상이 없습니다. 모든 존재는 그대로 다 존엄합니다. 눈이 안 보인다고 비정상이 아니에요. 그냥 눈이 고장 난 겁니다. 차가 고장 나면 차를 고치면 되는 것처럼 장애가 있으면 시정을 하면 되는 거예요.

원래 정상이 있었다고 생각하니까 고장이 나면 원래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원래’라는 것은 없어요. 그 ‘원래’라는 것이 다 천차만별이에요. 육체만 따져봐도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남성 성기가 달린 사람이 있고, 여성 성기가 달린 사람이 있고, 아주 드물지만 두 가지 성기가 모두 달린 사람도 있고, 모두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슨 벌을 받아서 이렇게 생긴 것이 아니라 이 모두가 다 정상입니다. 성애의 종류에는 남성이 여성을 좋아하고, 여성이 남성을 좋아하는 ‘이성애’가 있고, 남성이지만 여성에게는 성애를 못 느끼고 남성에게 성애를 느끼는, 또는 그 반대인 ‘동성애’가 있고, 남자든 여자든 양쪽 모두에게 감정을 못 느끼는 ‘무성애’가 있고, 남자나 여자 모두에게 성애를 느끼는 ‘양성애’가 있습니다. 남성, 여성은 육체에 기준을 두는 것이고 ‘성애’는 심리적 작용에 기준을 두는 거예요. 이 모두가 다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 한 개를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나머지는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관점을 가지니까 차별을 하는 겁니다. 어떤 성(性)을 가졌든, 어떤 성애(性愛)를 가졌든, 모두 다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어요.

장애에 관해서도 관점을 이렇게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인권’이라고 합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다 행복할 권리가 있어요. 얼굴이 검다고 불행해야 할 이유가 없고, 아버지가 없다고 불행해야 할 이유도 없고, 내가 장애아를 가진 엄마라고 해서 불행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요.

집안에 장애아가 한 명 생기면, 부모가 그 아이를 보살피느라 자기 삶을 제대로 못 사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요즘 선진국에서는 이 문제를 사회가 공동으로 책임지는 사회보장제도까지 갖추었습니다. 장애를 가진 아이가 엄마와 같이 사는 것이 그 아이에게 좋다면, 그 엄마가 이 아이를 돌보며 생활할 수 있도록 사회가 지원을 합니다. 이 아이가 부모와 떨어져서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이 좋겠다면 거기에 따른 지원을 합니다. 이것이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아이가 장애를 갖고 태어나면 그 가족 전체가 힘들어집니다. 누구나 다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어요. 그래서 누구나 다 이런 사회적 보장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회적인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한데, 아직도 여러분들은 돈과 성장만을 주장하잖아요.

질문자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두 가지예요. 첫째, 자기가 행복해야 합니다. 이런 아이를 가진 엄마도 행복할 권리가 있어요. 아이가 뛰어나도 행복하지만, 아이를 돌봐야 해도 행복한 겁니다. 둘째, 우리 아이도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아이 때문에 엄마가 불행해도 안 되고, 엄마 때문에 아이가 불행해도 안 됩니다.

일단 아이의 객관적인 상태가 어떠한지 전문가와 의논해 보세요. 옛날에는 장애가 있으면 전부 개인이 책임져야 했어요. 그래서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경쟁에서 뒤처지니까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버림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사회가 발전하면서 이런 사람들도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만 모아서 보호시설에서 보살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보호시설을 잘 만들었다고 해도 엄격하게 말하면 이것은 수용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스스로 어느 정도 움직이는 사람들은 3~4명을 한 그룹으로 만들어서, 큰 시설이 아니라 아파트를 하나 얻어서 이들을 보살피는 사람이 한 명 같이 살도록 합니다. 즉 정상 사회 속에서 일원으로 생활하도록 하는 것이 지금의 추세입니다.

노인들의 경우도 노인요양시설에 모아 놓는 것이 아니라 집에 자기 부모 외에 한 두 명 정도를 더 모셔다가 자격 있는 간호사를 채용해서 돌보게 하는 형식으로 바뀌고 있어요. 고아들도 시설에서 따로 모아서 돌보지 않고, 지금은 입양을 시켜서 각 가정에서 생활하도록 하는 것이 추세예요. 이렇게 하면 정부에서 전부 지원금이 나와요. 미국 같은 경우는 이런 추세가 아주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신호등도 시각 장애자를 위해서 소리가 나도록 하고, 휠체어가 지나갈 수 있게 계단을 바꾸는 것처럼, 장애를 가져도 일반 사회 속에서 우리의 이웃으로 똑같이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가 변해가고 있어요. 장애가 있더라도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바뀌어 가는 거죠.

그런데 우리들의 의식은 아직도 옛날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들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장애아 돌보는 게 힘들다고 갖다 버리거나, 자기 인생을 버리고 아이 돌보는 데에만 헌신하거나, 이런 것은 모두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부모도 한 사람으로 행복할 귄리가 있고, 아이도 행복할 귄리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 부모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이 아이에게 가장 좋은지 전문가의 조언을 따르면 돼요. 특수교육을 받는 것이 좋은지, 일반 학교에 다니는 것이 좋은지, 전문가와 의논하면 돼요. 일반 학교에 가면 뒤처지니까 왕따를 당할 수도 있고, 심리적으로 타격을 받을 수도 있어요. 이럴 때 부모는 아이가 심리적으로 상처를 받지 않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특수학교에 가면 본인이 다른 아이들보다 좀 나은 것 같으니까 학교생활이 재미가 없을 수 있어요. 별로 배울 게 없다고 생각되면 약간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이때 부모는 아이가 더 큰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도와주도록 안내를 해줘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가 지루할 여가가 없어지고, 굉장한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장애가 없는 사람을 기준에 놓고 보면 이 아이가 보살펴야 할 사람이지만, 더 어려운 사람을 기준에 놓고 보면 이 아이도 베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열등의식을 가진 아이들의 심리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지체부자유아 시설에 가서 봉사를 하게 하면 큰 도움이 됩니다. ‘아, 내가 좀 뒤뚱뒤뚱 걷지만 못 걷는 아이에 비해서 엄청나게 좋구나’, ‘말을 좀 더듬거리지만 말을 못 하는 아이에 비해서는 월등하게 혜택을 받았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열등의식이 치료됩니다.

너무 욕심내지 마세요. 전문가와 상담도 해보시고요. 이것도 자기 인생입니다. 이 상황을 너무 힘들게 생각하지 마세요. ‘자식 덕에 이런 것도 공부하네’ 하면서 자기 인생을 즐기세요. 또 장애자 권익을 위해서 투쟁도 하면서 사회활동도 해보시고요. ‘아이를 위해 내가 희생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이 아이로 인해서 내가 세상에 눈을 뜨고, 인간의 평등을 생각하게 되는구나. 이것은 아이가 나에게 준 복이구나.’

이렇게 아이를 돌보는 일을 내가 점점 성인이 되어가는 계기로 삼아 보세요. 이 아이 덕분에 인간의 지나친 욕망이 갖는 부작용을 알아갈 수 있는 거예요. 이 아이는 질문자에게 커다란 복을 안겨주는 존재임을 깨닫게 될 겁니다. 그러면 질문자도 아이도 함께 행복해질 수 있어요.”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작년부터 병이 생기고 허리를 다쳐서 직장도 그만두고 빚까지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인데 이런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기도를 하면 잡생각이 들고 집중이 잘 안됩니다.
  • 신랑과 성격이 너무 달라서 힘들어요.
  • 신은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다른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고 복을 짓고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 스님은 기독교인의 보시를 받아도 거부감이 없나요?
  • 큰아들이 특전사로 군 복무 중인데 아들이 군에 말뚝을 박았으면 좋겠어요.
  • 사회적 약자를 위해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여자니까’, ‘결혼을 했으니까’라는 이유로 스무 번 넘게 면접에서 떨어졌습니다. 억울하고 답답해요.
  • 남자 친구가 소심하고 가정적이에요. 1박 2일로 데이트도 하고 싶은데 저랑 있으면 불편해하는데 어떡하죠?
  • 아파트 관리소 소장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술이 덜 깬 채로 출근하는 직원을 해고해야 할까요?

오늘은 올해 처음으로 신청한 모든 질문자와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질문자들의 소감을 들어보았습니다.

특전사인 큰 아들이 군대에 말뚝을 박으면 좋겠다는 질문자는 “제 욕심이었네요.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모두 잘했다는 듯이 박수를 쳐주는데 스님이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아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하면 안 돼요. 질문자가 뭔데 허락을 해요? 아들이 알아서 하도록 지켜보면 됩니다. 제대하라고 말할 필요도 없어요. ‘엄마는 항상 너를 믿는다. 특전사를 계속해도, 그만둬도 너를 지지한다. 네가 결정하면 엄마는 항상 찬성이다.’라고 하면 돼요. ‘네 인생 네가 알아서 해라. 엄마는 모르겠다.’라고 하면 아들은 내쳐진 것처럼 느껴요. 또 이래라저래라 하면 간섭처럼 느껴요. 엄마는 ‘나이가 들어서 잘 모르니까 네가 결정해라. 다만 어떤 결정을 하든 엄마는 너를 존중하고 너를 지지하겠다.’ 이렇게 표현하면 돼요.”

신이 없다면 왜 선행을 해야 하는지 물었던 30대 직장인은 개운해진 얼굴로 소감을 말했습니다.

“제가 간단한 문제를 너무 어렵게 생각했네요. 잘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가 특전사를 나왔는데 스님께서 제 속을 너무 잘 헤아려주고 말씀해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남편과 성격이 달라 고민이라는 질문자는 “가정 문제를 잘 이끌어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하여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박수치죠? 저는 ‘아이고. 머리 아프겠다’ 싶어요. 왜 그럴까요? 사람들은 뭐든지 잘하겠다. 노력하겠다고 하는데 그 말이 좋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노력한다는 것은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한다는 거예요. 인생은 노력할 만한 가치가 없어요. 그냥 사세요. 가정을 잘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일이 복잡합니다.”

청중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쳤습니다. 스님은 진정한 자유와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며 강연을 마쳤습니다.

“삶에는 늘 우여곡절이 있습니다. ‘이런 일은 안 생기면 좋겠다, 저런 일은 안 생기면 좋겠다’라며 전전긍긍하지 마세요. 이런 일이 생기면 이런대로, 저런 일이 생기면 저런 대로 적응하고, ‘일어날 일은 뭐든지 일어나라! 난 끄떡없이 살 거야.’라는 마음으로 살 때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유로운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스님은 책 사인회를 하고 봉사자들과 기념사진 촬영까지 마친 후 서울로 이동했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부터 평화재단에서 종교인들과 모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녁에는 순천에서 즉문즉설 강연이 이어집니다.

전체댓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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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태

감사합니다!!!^_^

2019-06-03 23:29:52

정지나

내가 허락한다~상대방에 인생에 이래라 저래라!
참 건방지구나 알아차려집니다~ 솔직하게 가볍게
지금에 나를 자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2019-05-15 22:22:28

수행

말씀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2019-05-12 10: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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