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4.13 청년대학생 경주역사기행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괴로워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청년대학생들과 경주 역사기행을 하는 날입니다. 아침부터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더니 날씨가 쾌청합니다.

오전 9시 30분, 전국에서 청년대학생 220여 명이 스님과 경주 역사기행을 하기 위해 태종 무열왕릉에 모였습니다. 스님은 환한 웃음과 함께 청년대학생들을 반겼습니다.

“안녕하세요. 아침 일찍 출발해서 이곳까지 오신다고 수고들 하셨습니다.”

청년대학생들도 큰 박수로 스님을 가까이에서 마주하게 된 걸 기뻐했습니다. 오늘 청년대학생들은 하루 종일 경주에 있는 역사 유적지를 둘러보면서 그 속에서 현재 남북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통일의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그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역사 속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 스님의 설명을 듣게 됩니다. 역사기행을 하는 취지에 대해 스님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저는 그냥 노는 것은 잘할 줄 몰라요. 공부하면서 노는 것밖에 할 줄 몰라요. 오늘은 놀면서 공부하고, 공부하면서 놀아 봅시다.”

스님은 왜 역사기행을 이곳 태종 무열왕릉에서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하면서 안내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일정에 대해서도 간단히 소개해주었습니다.

“동쪽에 치우친 작은 나라였던 신라가 삼국의 하나로 발돋움하기 시작한 때가 법흥왕입니다. 그 후 신라가 영토를 넓혀서 백제와 고구려에 버금가는 하나의 나라가 된 때가 진흥왕 때입니다. 법흥왕과 진흥왕을 거쳐서 태종 무열왕에 이르러서 신라는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역사기행을 이곳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그 주역 중의 한 분인 김유신 장군묘를 그다음에 가게 되고요.

신라가 삼국통일을 발원한 곳이 황룡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황룡사터에 가서 오늘날 남북의 통일을 발원하고요. 신라는 삼국 통일의 과정에서 동맹국인 당나라와 전쟁을 하게 되는 위기에 봉착하는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세운 절이 사천왕사입니다. 사천왕사에서는 오늘날 미국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지혜롭게 대처할 것인지 교훈을 얻을 수 있어요.”

신라의 삼국통일을 따라 가보는 특별한 기행에 청년대학생들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습니다. 태종 무열왕릉 앞에서는 신라의 국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작은 부족 국가에 불과했던 신라가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비약적 성장을 거둘 수 있었던 원인은 바로 신라와 가야의 합의통일에 있습니다.

신라는 불교를 금지한 국가였어요. 가야는 초기부터 불교 국가였습니다. 이것을 요즘에 비유하면 남한은 공산주의를 법으로 금지하는 국가보안법이 있는 나라이고,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인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가야가 신라에게 요구한 첫 번째 통합의 조건이 신라가 먼저 불교를 공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북한과 경쟁하기보다는 북한을 적절하게 포용해서 통일을 하고, 그 에너지를 중국, 일본과의 경쟁에 쓰는 게 훨씬 낫잖아요.

우리가 남한 중심으로 통일을 하려면 사전에 남한 안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수용해줘야 한다는 조건을 북한에서 내걸 수 있겠죠. 만약 지금 통일을 위해 북한이 남한 안에서의 북한 노동당 활동을 허용해달라고 요구한다면, 여러분들은 찬성이에요? 반대예요?

여기에는 전제 조건이 있어요. 통일 국가의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하는 겁니다. 즉 남한이 주도하는 통일을 북한이 받아들이는 대신에 북한의 모든 사상, 정치의 자유를 남한이 보장해주겠다는 거예요. 통일을 위해 사전에 남한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금지한 법을 고칠 수 있을까요? 통일을 할 수 있다면 그렇데 하는 게 좋겠다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많은 수가 손을 들었습니다. 오늘 모인 청년들은 진보적인 성향이 강한가 봅니다.

“아무리 통일이 좋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소수이지만 상당수가 손을 들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이 정도인데, 나이가 50, 60이 된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사람들이 더 많겠죠? 그런데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통일은 어렵다고 봐야 합니다.

당시 가야의 요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불교를 공인하라는 것이었어요. 신라 입장에서는 이것을 받아들이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남한이 공산주의를 금지하듯이 신라도 불교를 법으로 금지했거든요.

두 번째 요구 조건은 신분을 보장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지면 가야 왕족은 모두 신라의 노예가 되잖아요. 그런데 가야의 왕족을 신라의 왕족과 동등하게 대우해 달라고 한 겁니다. 요즘에 비유하면 북한에 있는 정부 관리, 교사, 의사들을 통일된 국가에서도 다 인정해 달라는 겁니다. 평안북도 도당 위원장은 통일된 국가에서 평안북도 도지사가 되고, 북한 군대의 장군들은 통일국가 군대의 장군이 되도록 모두 인정해 달라는 거죠. 이런 요구를 현재 남한 국민들이 수용해줄 수 있을까요?

그래서 통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신라도 가야와 통합을 해야 되는 상황에서 무력으로 통합할 것인가, 평화적으로 통합할 것인가의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평화적으로 하려면 상대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여야 하는 거예요.

이런 와중에 527년에 이차돈의 순교로 여론이 뒤집어지면서 528년에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게 됩니다. 그런 후 4년 후에 신라가 가야와 합병을 하게 돼요. 합병을 할 때 가야의 왕족을 신라의 왕족으로 받아들여요.

이것을 우리가 생각해보면 남북의 평화적인 통일도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신라와 가야가 평화적으로 통일했기 때문에 신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겁니다. 나중에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때 군대를 주도적으로 이끈 사람들이 김유신을 비롯해 대부분 가야 출신 사람들이었습니다. 영토만 넓어진 것이 아니고 인재풀이 넓어진 겁니다. 그리고 가야의 우수한 철기 문화가 신라에 도입되면서 신라의 국력이 급속도로 커집니다.

우리가 통일의 교훈을 얻기 위해 독일을 많이 연구하는데, 남의 나라의 경험만 볼 게 아니에요. 우리 역사 속에서도 1+1이 3이 되고 5가 되고 10이 되는 비약적 발전을 이룬 신라와 가야의 합의통일이 있었어요.

그 후 진흥왕 때 영토를 엄청나게 확장하고, 진지왕, 진평왕을 거쳐 유지 발전되다가, 선덕여왕, 진덕여왕, 태종 무열왕, 문무왕을 거치면서 삼국통일을 달성합니다.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곳은 태종 무열왕릉 앞입니다. 태종 무열왕 때 백제가 멸망했어요. 그 아들인 문무왕 때 고구려가 멸망했고요. 그 후 신라와 당나라가 8년 간 전쟁을 해서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나서야 삼국통일을 이뤄냅니다.

감이 좀 잡혀요?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요즘은 학교에서 국사 공부를 안 해도 된다면서요?”

“감이 좀 잡힙니다.” (모두 웃음)

과거의 역사를 오늘날 남북문제를 푸는 교훈으로 가져오니 죽어있는 역사가 다시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스님과 함께하는 역사기행에서만 들을 수 있는 설명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 그럼 모두 일어나서 태종 무열왕에게 인사를 하겠습니다.”

일배, 이배, 삼배를 한 후 진흥왕릉을 향해 언덕길을 올라갔습니다. 걸을 때도 스님의 설명은 계속되었습니다.

태종 무열왕릉 뒤에도 큰 무덤이 4개가 더 있었는데, 아직 누구의 무덤인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스님은 오늘 참가한 청년대학생들 중에 누군가가 연구를 해서 밝혀내길 바란다며 여운을 남겼습니다.

진흥왕릉 앞에 도착해서는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까지의 성골에서 태종 무열왕에 이르러 진골로 전환되는 왕위 계승 문제에 대해 실감 나게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우리나라에 본래부터 있었던 게 아니었음을 강조했습니다.

“신라시대와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여성이 왕도 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본래 전통에서는 남녀 차별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어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주자학이 국가의 통치 이념이 되면서 강화된 겁니다. 남녀 차별이 우리의 오랜 전통이었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진흥왕릉을 내려오는 길은 새롭게 발굴되어서 거대한 공동묘지처럼 무덤들이 곳곳에 솟아 있었습니다.

벚꽃길을 걷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는데, 지난 주말에 벚꽃이 모두 졌기 때문에 스님은 어제 스텝들과 의논하여 벚꽃길 대신 코스를 조금 변경했습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도착한 곳은 김유신 장군묘입니다.

김유신 장군묘 앞에는 솔숲길이 있습니다. 솔숲길에 들어서자 마음이 고요해졌습니다. 고요함을 지나 계단을 밟고 올라가니 난간석과 둘레석으로 둘러싸인 거의 왕의 무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봉분이 의젓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왜 김유신 장군묘가 왕의 무덤과 비슷한 모양을 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며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김유신은 왕이 아니었지만 죽은 후 신라 후대에 ‘흥무왕’으로 추존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스님의 해석이 일리 있게 들렸습니다.

김유신과 태종 무열왕은 친구인 동시에 왕과 신하로서도 아주 가까운 관계였는데요. 김유신이 어떻게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었는지, 태종 무열왕의 여동생과 연애를 하게 된 사연 등을 비롯해 여러 가지 전해 내려 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김유신의 업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설명을 마쳤습니다.

“김유신 장군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도 많습니다. 당나라와 손잡고 민족사를 축소시키지 않았냐는 겁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다르게 볼 수도 있어요. 당나라와 손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긴 했지만, 나중에는 당나라와 8년 간 전쟁을 할 정도로 배짱 있게 싸웠던 사람이 또한 김유신 장군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예를 들어 남한과 미국이 손잡고 북한을 멸망시켰다고 합시다. 북한을 멸망시키고 나니까 미국이 북한을 남한에게 넘겨주지 않고 자기들이 군정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남한 군대가 미국 군대를 공격해서 미국과 전쟁을 할만한 배짱이 과연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러지 못할 것 같아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김유신 장군을 욕할 수가 없습니다.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해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는데, 당나라는 백제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고구려에도 안동도호부를 설치해서 자기들이 관리를 했습니다. 신라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된 거예요. 그래서 신라는 당나라를 선제공격해서 8년 간 전쟁을 합니다. 여기에 앞장선 사람이 김유신 장군이에요. 이렇게 민족의 자주성을 지켜낸 기백도 있었다는 점을 아셔야 해요.”

김유신 장군에 대한 이야기도 오늘날의 국제 관계와 비유해서 설명하니 금방 이해가 되었습니다.

김유신 장군묘를 내려와 넓은 계단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220여 명의 얼굴이 모두 환하게 나왔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죠. 김유신 장군묘 아래에 위치한 흥무공원에서 청년대학생들은 즐거운 레크리에이션 시간을 가진 후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오늘도 스님은 도시락을 싸왔습니다. 돗자리를 펴고 앉아 조용히 도시락으로 점심 한 끼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식사 후 도착한 곳은 황룡사터입니다. 아주 큰 규모의 절과 탑이 조성되었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굉장히 넓은 터만 황량하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스님은 황룡사의 남문 터라고 추정되는 곳에서 안내를 시작했습니다. 문 자리의 크기만 봐도 우리가 지금까지 본 대웅전의 크기보다 더 컸습니다.

“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은 황룡사입니다. 진흥왕 때 신라의 영토가 넓어지자 반월성에 있는 궁궐이 작아져서 이곳에 궁궐을 옮기려고 터를 닦다가 큰 황룡이 나타났어요. 이곳은 사람이 살 곳이 아니구나 싶어서 이곳을 절로 바꾸었다고 해요. 그래서 황룡사가 되었습니다. 그 규모가 동양 최대입니다. 궁궐을 지으려다가 절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렇게 큰 규모가 된 거예요.

황룡사에는 신라의 세 가지 보배 중에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 장육존불이라는 큰 불상입니다. 둘째, 9층 목탑입니다.”

중문을 지나 9층 목탑이 자리했던 곳에 이르렀습니다. 목탑의 중심축을 박았던 심초석에는 지금도 커다란 구멍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여기 보이는 주춧돌들이 탑을 세울 때 놓았던 기초석입니다. 하나도 소실되지 않고 64개가 다 남아 있습니다. 바닥에 심초석이라는 큰 돌을 깔고,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서 80m 길이의 쇠기둥을 박아서 중심을 잡았어요. 그런 후 한층씩 쌓아 올린 겁니다.”

9층 목탑의 높이는 80m, 지금 건물과 비교하면 작게 잡아도 20층 높이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큰 9층 목탑을 세운 동기는 첫째,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신라는 주위로부터 외침이 잦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삼국 통일을 발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삼국이 하나가 되면 더 이상 전쟁을 안 해도 되니까 더욱더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겠죠. 오늘날 우리와 비교하면 ‘평화’와 ‘통일’을 발원한 겁니다. 전쟁의 위험을 없애는 것이 평화이고, 전쟁을 완전히 없어지게 하는 것이 통일입니다. 선덕여왕이 이 탑을 세우고 통일을 발원한 지 30년이 되지 않아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뤄냅니다.

이곳에서 우리도 선덕여왕처럼 9층 목탑을 바라보면서 발원을 해봅시다. 첫째,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평화’가 이뤄져야 합니다. 둘째, 더 나아가서는 남북이 하나 되는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경쟁 상대는 북한이 아니에요. 북한을 포용해서 통일을 이루고, 주변국들과 세계적인 경쟁을 해야 합니다.”

스님의 제안에 청년대학생들은 잠시 9층 목탑을 향해 묵념을 한 후 평화와 통일을 발원해 보았습니다.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황룡사 박물관으로 이동한 청년대학생들은 9층 목탑을 복원한 모형을 함께 둘러보고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황룡사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긴 영상을 시청했습니다. 영상에는 거대한 9층 목탑이 몽고의 침입으로 완전히 소실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잘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스님은 박물관에 대해 설명을 마친 후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치며 말했습니다.

“전쟁이 나는 바람에 이렇게 소중한 유물들이 다 소실된 겁니다. 전쟁은 가능하면 없는 게 좋겠죠?”

“네!”

이제 오늘의 마지막 순례 코스입니다. 신라인들이 아주 신성하게 여겼다고 하는 낭산에 도착했습니다. 낭산에서는 문무왕의 화장터에 세운 능지탑, 선덕여왕릉, 사천왕사지를 차례대로 순례했습니다.



문무왕이 솔선수범으로 보여준 호국 정신, 선덕여왕이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보여준 지혜로운 여성 리더십, 강대국에 대항하기 위해 사천왕사지에서 보여준 신라인들의 염원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희들이 서 있는 이곳이 사천왕사입니다. 이곳은 신라에서 전통적으로 신들이 노는 곳이라 해서 ‘신유림’이라고 불렀어요. 당나라와 신라가 전쟁을 하게 되니까 사람의 힘만 갖고는 안 되고 신의 힘을 빌려야 된다고 해서 이곳에 사천왕사를 지은 겁니다.

이것과 똑같은 의미의 행위를 근래에 하신 분이 바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에 한 명인 용성조사님입니다. 민족대표를 몇 명으로 해야 하느냐고 의견이 분분할 때 용성조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강건한 일본으로부터 우리가 독립을 하려면 사람의 힘만으로는 안 됩니다. 신들의 힘을 빌려야 합니다. 신들의 세계인 33천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민족대표를 33명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가 됩니다.’

애국가에도 이런 가사가 나오죠. 신라 시대 때의 이런 전통을 따라서 3.1운동 때도 원용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런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약소국이 강대국에 대응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겁니다.”

신앙이 주는 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벌써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따라 오늘은 하루 종일 삼국 시대로 돌아가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자, 이제 숙소로 돌아갑시다. 저녁에는 인생 고민에 대해 편안하게 대화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숙소로 돌아가서 저녁을 먹은 뒤 저녁 7시부터는 즉문즉설 시간이 펼쳐졌습니다. 즉문즉설에 앞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오케스트라 동아리 스누토 학생들이 멋진 공연을 들려주었습니다.

“저녁 잘 먹었어요?”

“네!”

미리 질문을 신청한 사람이 스무 명이 넘었습니다. 참가자들의 적극적인 모습을 보니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정해진 시간 내에 다하기 어려우니 대학생이면서 정토회에 처음 온 사람에게 먼저 질문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정토회 다니는 게 오히려 역차별이네요. (모두 웃음) 원래 경주역사기행은 대학생, 그중에도 신입생을 위해 마련한 자리입니다. 신입생은 말할 것도 없고 점점 늙은 청년만 늘어서 대학생에게 우선권을 주는 거예요.”

대학생들은 부러움을 담뿍 받으며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관계와 진로에 대한 질문이 가장 많았습니다. 한 청년은 무한경쟁 시대 속에서 불안하게 살아가는 대학생들을 위한 조언을 요청했습니다. 스님은 빠르게 바뀌는 세상에 대해 설명해주고 미래 사회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스님의 생각을 들려주었습니다.

불안한 대학생들에게 한 말씀해주세요.

“저를 포함한 많은 대학생들은 지금 무한경쟁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은 채 출발점이 어디이고 도착점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마라톤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 대학생들에게 해주실 조언이 있으실까요?”

“어느 시대든 다 어려워요. 그 시대를 지나 놓고 돌아보면 ‘그때가 좋았다’ 이렇게 평가할 수는 있지만요. 여러분도 대학생 때인 지금만 어려운 건 아니잖아요. 초등학생 때는 안 어려웠어요?”

“어려웠어요.”

“어릴 때는 대학생을 보면 ‘나는 대학생 되면 어떨까’라고 걱정되는 게 아니라 부러웠잖아요. 초등학생 때는 중학생이 부럽고, 중학생이 되면 고등학생이 부럽고, 고등학생 때는 대학생이 부러웠어요. 고등학생 때는 고등학생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것 같았고요.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대학생이 되니까 대학생이 제일 힘들어요. 앞으로 직장 다니게 되면 ‘그래도 대학 다닐 때가 좋았다. 직장 생활은 죽을 지경이다’라고 할 거예요. (모두 웃음)

처녀 총각 때는 결혼하는 사람이 부러워요. 그런데 결혼해보면 처녀 총각 때가 좋았다고 해요. ‘아이고, 괜히 결혼을 해서...’ 이럽니다. (모두 웃음) 애를 못 낳으면 애 낳은 사람이 부러워요. 그러다 애를 낳았는데 애가 말을 안 들으면 ‘왜 애를 낳았나’ 싶어요. (모두 웃음)

이런 식으로 인생이 끝날 때까지 흘러가는 거예요. 그러니 어떤 때든 그냥 그때가 좋다고 생각하는 게 좋아요

앞으로 미래 사회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100년 전 조선시대 사람이 지금 같은 사회가 올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어요? 미래학자도 상상 못 했어요. 그래서 제일 중요한 건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적응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거예요. 세상이 농사를 필요로 하면 능히 농사를 지을 수 있고, 세상이 기술자를 필요로 하면 능히 기술을 배워서 기술자 역할을 할 수 있고, 세상에 운송을 주로 하는 일자리가 많이 생긴다면 능히 운송을 할 수 있고, 이렇게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내가 그 세상에 적응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게 최고의 교육이라고 생각해요. 워낙 세상이 빠르게 변하기 때문입니다. 10년 뒤 것을 미리 준비해봤자 쓸모가 없어요.

지금 여러분에게 부모님이 살아왔던 사고방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혼은 언제 해야 하고, 집은 어느 정도 크기를 사야 하고, 어떤 직장을 구해야 하는 등 30년, 50년 전에 살았던 삶의 방식을 따라가는 것은 지금 시대와 맞지 않아요. 옛날에 할아버지가 농사짓고 살았다고 해서 농사짓고 살던 당시의 윤리와 도덕을 지금 우리가 따라가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부모님은 자기가 살아온 경험밖에 모르니까 그걸 근거로 여러분에게 조언하지만 여러분이 지금 살아가는 시대와는 좀 안 맞는 거예요. 부모의 경험을 소중하게 여기는 건 좋아요. 여러분은 아직 경험이 적고, 부모님은 경험이 많으니까요. 그런데 그 부모의 경험을 무조건 받아들이면 여러분이 고달프죠. 부모가 살던 사회와 달리 지금 사회는 자꾸 바뀌어나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자기 삶은 자기가 살아야 해요.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가치관을 하나하나 정립해야 해요.

앞으로 내 이익을 위해서 남을 해치는 ‘제로섬 게임’은 미래 사회에 맞지 않아요. 세계는 지금 ‘공유경제’와 같이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단독으로 작업하기보다 협업을 하는 게 앞으로 훨씬 도움이 될 거예요. ‘중지를 모으다’ 이런 말이 있죠? 개개인이 창의적인 것도 좋지만, 몇 사람이 중지를 모아서 공동의 지혜를 마련하는 게 굉장히 중요해질 거예요.

앞으로 정해진 룰에 따라서 일해야 하는 직업은 점점 사라질 겁니다. 그런 일은 앞으로 다 기계화되어 가거나 그 일을 하고 있는 다른 사람이 이미 충분히 있거든요. 그래서 세계적인 기업에서는 오히려 엉뚱한 사람을 자꾸 찾습니다. 엉뚱한 사람은 세상에서 볼 때 엉뚱하긴 하지만, 다른 사람이 안 해본 어떤 생각을 해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책상에 앉아서 연구하라고 하지 않고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연구하게 합니다. 여러분도 딴 일 하다가 갑자기 어떤 생각이 딱 떠오를 때가 있잖아요. 기업들도 그렇게 다른 활동을 하면서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유도합니다. 이렇게 직장에서 근무하는 방식도 다 달라질 겁니다. 9시에 출근해서 저녁 6시까지 일하는 게 별 의미가 없어져요.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다 자동화되어 버리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금방 다 바뀌는 건 아니에요. 서서히 바뀝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과거 사회의 유습도 남아 있고, 새로 바뀌는 문화도 공존하는 가운데에 놓여 있다 보니까 헷갈리죠. 어떤 건 바뀐 줄 알았는데 내내 계속 존재하는 것도 있어요. 그래서 옛날에 집착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렇다고 옛날식으로만 하려니 세상이 자꾸 바뀌어서 불안하죠. 이런 이유 때문에 여러분이 지금 중심을 못 잡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조언해주고 싶어요.

‘세상이 지금 좋아졌는지 나빠졌는지 따지지 말고 밥 먹고 살만한 세상이면 된다고 생각하고 여유를 좀 가져보세요.’

우리나라에서 지금 굶어 죽을 일은 거의 없잖아요. 그러니 조금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어떤 일이든 도전해 보세요. 농사짓자고 하면 농사도 지어 보세요. 무엇을 하자고 해도 할 수 있게끔 되는 게 필요합니다. 직업의 귀천을 따지거나 좋은 직장을 따지지 마세요. 이렇게 자기 삶의 중심을 딱 잡고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해요. 제가 드리고 싶은 조언은 그래요.”

“예, 감사합니다.” (모두 박수)

다음으로 어릴 때 받은 상처로 인해 지금도 비난을 받으면 너무 힘들다는 질문자와의 대화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저에게 욕을 하고 비난을 많이 했습니다.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데 지금도 비난을 받으면 옛날 상처가 덧나고 너무 괴로워요.”

“마음고생 많이 하셨어요. 질문자는 지금 과거의 상처에 지배당하는 상태예요. 먼저 병원에 가서 상담을 하고 아버지로부터 받은 심리적 상처를 치유해야 합니다. 각오하고 결심한다고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치유를 못하면 지금처럼 계속 힘들어요. 누가 욕을 하면 옛날에 아버지가 욕을 하던 게 연상되고, 결혼을 해서 남편이 조금만 언성을 높여도 아버지가 연상되기 때문에 결혼생활도 원만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지금 결혼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우선 상처를 치유해야 합니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다 상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산에 갔다가 뱀에게 물려서 엄청 놀랐다고 합시다. 이게 상처가 되면 다음부터는 겁이 나서 산에도 못 가요. 새끼줄 토막만 봐도 뱀인 줄 착각해서 깜짝 놀라요. 이걸 트라우마라고 합니다. 우리 옛날 속담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고 하죠? 트라우마는 내 현재와 미래의 삶에 굉장한 장애가 됩니다.

그런데 거꾸로 이럴 수도 있어요. 평소에 뱀을 무서워했는데 뱀에게 물려서 병원에서 주사 한 대 맞으니까 조금 붓기만 하고 괜찮아졌어요. 그러면 ‘뱀에게 물린다고 죽는 게 아니구나. 괜히 뱀을 겁냈네. 물리면 얼른 치료받으면 되는구나’ 이렇게 경험이 될 수도 있어요. 경험으로 삼으면 오히려 적응력이 생깁니다.

부모에게 한 번도 야단맞지 않고 자란 사람은 직장에서 욕이라도 한 번 들으면 어쩔 줄 몰라합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어릴 때부터 늘 욕을 얻어먹고 살았기 때문에 그런 정도의 욕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어요. (모두 웃음) 다른 동기들은 선배가 욕하고 왕따 시키는 걸 못 견뎌서 다 떨어져 나가도 질문자는 끄떡없을 수 있는 거죠.

‘너는 선배들이 그렇게 욕하는데도 괜찮니?’
‘나는 어릴 때 아버지가 그거보다 열 배 더한 욕을 해도 살았는데 뭐. 이 정도는 별거 아니야.’

이렇게 되면 과거에 아버지가 욕을 했던 것이 트라우마가 아니라 경험이 된 거예요.

연애도 한두 번 실패해서 트라우마가 되면 다음에 다른 사람을 못 만나요. 이 사람이 또 나를 배신할까 봐 겁이 나서 마음이 조마조마하거든요. 그런데 과거를 경험으로 삼는 사람은 달라요. ‘전에는 이렇게 말하니까 상대가 싫어하더라’ 하면 그걸 경험으로 삼아서 이번에 만난 사람에게 그런 말은 자제하는 거예요.

상대에게 순종을 했는데 상대가 떠났을 수도 있고, 반대로 내가 솔직하게 내 의견을 말하고 주장을 했더니 떠났을 수도 있어요. 사람마다 반응이 달라요. 내 주장을 딱 세우면 ‘야, 줏대 있네’라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아이고, 고집이 세서 같이 못 살겠다’라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요. 또 ‘예’ 하고 고분고분하면 어떤 사람은 ‘아이고, 착하네’하고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착한 걸 겁내요. 착한 게 좋다고 하지만 같이 살아보면 착한 사람이 무서워요. 착한 사람은 자기가 틀린 줄을 모릅니다. 어릴 때부터 늘 착하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에요. 착한 사람은 겉보기엔 고집이 안 센 것 같지만 실제 속 고집은 황소고집이에요. 그래서 착한 걸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연애를 한 번 해보고 두 번 해보고 세 번 해보고 네 번 해보면 ‘아, 사람마다 다르구나. 그러니까 적당하게 밀당을 해야 하겠구나’하고 경험이 쌓입니다. 때로는 상대의 말에 ‘네’ 하고 동의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 의견을 솔직하게 말해보기도 하면서 다양하게 시도해보면 상대가 어느 쪽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어요. 그러면 ‘아, 이런 사람은 이렇게 대응하면 되고 저런 사람은 저렇게 대응하면 되겠구나’하고 조금씩 요령이 생겨요.

그래서 연애를 한 열 번 정도 하면 많은 경험이 쌓입니다. 내가 사람을 자꾸 바꾸면 아무 경험이 안 쌓여요. 그런데 상대가 자꾸 내 곁을 떠나 주면 나에게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지만, 경험이 쌓일 수도 있습니다. 경험으로 삼으면 큰 자산이 돼요. 내 곁을 떠나는 사람을 여러 번 경험해보면 ‘아, 어떤 이유로 떠나는구나. 어떤 문제가 있구나’ 이걸 알아서 갈수록 연애를 잘하게 돼요.

면접도 여러 번 떨어져 보면 면접을 잘하게 되는 사람이 있고, 겁이 나서 면접을 아예 가지 못하게 되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는 대부분 어떤 사건이 경험이 되기보다 트라우마가 되기 쉬워요. 과거에 내가 경험한 것이 현재와 미래에 장애가 되면 그건 다 트라우마예요. 그러면 치유를 받아야 해요. 치유하면 경험이 됩니다.

질문자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트라우마가 생긴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결혼을 하고 남편이 아버지 같은 행동을 조금이라도 하면 확 뒤집어져서 그 길로 파탄이 나버릴 수 있어요. 내가 어릴 때는 힘이 부족하니까 아버지와 못 헤어졌지만, 지금 남편이 그러면 ‘내가 너 같은 놈한테 왜 이런 일을 당하고 사나?’ 하고 대번에 이혼을 해버리거나 도망을 갈 수 있어요. 질문자가 우선 트라우마를 치유하지 않는다면 결혼생활 같은 건 꿈도 꾸지 말아야 해요.

이 트라우마를 치유하면 아버지로부터 욕을 먹은 경험 덕분에 배짱이 있으니까 나중에 남편이 뭐라고 험한 소리를 해도 끄떡도 안 해요. (모두 웃음) ‘너 같은 것쯤이야 울 아버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너보다 열 배는 더 센 아버지 하고도 살았는데 너하고 못 살겠니?’ 이렇게 딱 자기 배짱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니 질문자는 트라우마를 우선 치유해서 그걸 경험으로 삼아야 해요.

그리고 선배가 군기 잡는다며 유난히 혹독하게 구는 학과나 직업이 있습니다. 해병대 같은 곳도 그렇죠. 군기 잡기로 유명한 직업 가운데 하나가 간호사예요. 이건 이미 사회적으로 많이 문제가 되고 있죠. 그러니까 간호학과 갈 때는 이미 그걸 딱 각오하고 가야 해요. 선배가 막 뺑뺑이 돌려도 질문자는 끄떡없어야 하는 거예요. ‘너희가 까불어봐야 아버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딱 생각해서 끄떡없이 버티면 좀 괴롭히다가도 수그러들어요. 이게 괴롭히려고 괴롭히는 게 아니라 신입을 딱 손에 잡으려고 그러는 것이거든요. 그게 그 조직의 까르마가 돼 있는 거예요. 질문자가 선택한 직업에 그런 면이 있습니다. 이건 물론 개선해야 하지만 나 혼자 개선할 수는 없어요. 사회적으로는 개선해야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직업을 가지려면 그런 면도 수용을 해야 해요. 간호사를 지원할 때 이미 그 정도는 각오해야 합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아버지로부터 학대받은 것이 트라우마가 돼 있기 때문에 더 못 견디는 거예요. 그러니까 질문자가 앞으로 간호사를 하려면 그걸 딱 각오해야 하고, 그럴 때 항상 이렇게 생각해야 해요.

‘아버지가 욕한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어릴 때 이것보다 더 심한 욕을 먹으면서도 살았는데, 스무 살이 넘은 지금 너희 같은 것들이 무슨 대수라고?’

이렇게 경험으로 삼으려면 아버지를 미워하면 안 돼요. 아버지를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트라우마가 치유되지 않습니다. 치유를 하려면 오늘부터 아버지에게 감사 기도를 해야 해요. 아버지가 그렇게 욕은 했지만 그래도 질문자를 학교에도 보내주고 키웠잖아요. 트라우마를 경험으로 만들려면 아버지에게 오히려 감사기도를 해야 해요. 그게 자기 치유예요.

‘아버지가 욕을 심하게 하기도 했지만 저를 이렇게 잘 키워줘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아버지에게 감사기도를 해서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치유되면 질문자가 아버지로부터 학대받은 것이 거꾸로 자기 경험이 됩니다.

질문자가 지금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은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거예요. 그런데 수행이라는 건 자가 치유예요. 이런 걸 알아서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치유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버지, 키워줘서 감사합니다’라고 감사기도를 해야 해요. 욕은 했지만 그래도 키워줬으니까요. 그냥 무조건 아버지니까 감사하다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가 욕을 해서 나에게 내가 어릴 때 상처도 많이 줬지만 종합적으로 따져보면 키워준 공덕이 더 크니까 감사하다는 거예요. 이렇게 아버지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어야 과거의 사건이 트라우마가 되지 않고 경험이 됩니다.

이게 자가 치유인데, 지금 질문자 수준에서는 잘 안 될 거예요. 확 깨달아야 전환이 일어나거든요. 지금 질문자가 질문하면서 우는 걸 보니까 먼저 병원에 가서 치유받는 게 필요해요. 병원에 가서 초기 치료를 받고, 조금 치유가 되면 지금 제가 말한 자가 치유를 해야 합니다. 즉 수행을 해야 한다는 말이에요. 수행의 핵심은 아버지에 대한 상처를 치유하는 거예요. 지금 아버지가 ‘옛날에 내가 잘못했다’라고 하면서 질문자를 달래주면 그건 위로 수준이지, 치유는 안 돼요. 자기가 자기를 치유해야 해요. 자기가 자기를 치유하려면 아버지가 날 키워준 것에 대해 감사기도를 해야 해요. 감사기도를 하면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없어지고 상처가 치유되면서 과거의 상처가 도리어 경험이 됩니다. 그러면 더 강해질 수 있어요. 치유하고 나서 돌아보면 어릴 때 아버지가 해준 욕을 나를 강하게 키워준 경험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그게 단점을 장점으로 전환하는 방법이에요.”

“감사합니다.”

질문을 하며 울음을 터뜨렸던 질문자의 목소리가 밝아졌습니다. 다른 질문자의 사례에서도 스님은 과거가 인생의 자산이 되도록 긍정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끊임없이 알려주었습니다. 질문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심각하게 꺼내놓았지만, 스님과 대화를 하다 보니 무슨 일이든 좋은 일이 되었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빠졌던 경험도 자신의 취약점을 알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곧 결혼합니다. 남들처럼 결혼식을 준비하려고 하니 비용도 많이 들고 일회용품을 사용하는 등 환경적으로도 나빠 걱정됩니다. 또 경상도 출신인 시어머니와 서울 출신인 친정어머니가 사이가 안 좋아서 스트레스받아요.
  • 20대 초반에 1년 동안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가 이상해서 그만뒀습니다. 제 자신에 대해 혼란스럽습니다.
  • 사람을 만나면 처음엔 좋다가 3개월 정도 지나면 피하고 싶고 소모되는 느낌이 듭니다. 관계를 오래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심적으로 힘들어하는 친구들을 도와주려다 오히려 상처를 줄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부드럽고 친절하게 도와줄 수 있을까요?
  • 여러 활동을 하며 바쁘게 살고 있고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고 기분 따라 하고 싶은 대로 할 때가 있습니다. 현명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어렸을 때 엄마를 힘들게 했던 것에 자꾸 죄책감이 듭니다.
  • 저를 키워준 할머니가 시한부 선고를 받았어요. 직장도 다니고, 봉사도 해야 하는데 집중이 잘 안되고 예민해져요.
  • 직장생활을 꾸준히 한 적이 없었습니다. 나이에 비해 경력도 없고 뒤처지는 것 같아요.
  • 어릴 때부터 꿈에 그리던 웹툰 작가가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됐지만 생계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 삼삼오오 노는 동료를 보면 접근하고 싶으면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저는 혼자 있을 때 편한데 왜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들까요?

즉문즉설을 시작한 지 어느덧 두 시간 반이 흘렀습니다. 스님이 내일 청년들의 일정을 고려하여 즉문즉설을 마치려 하자 곳곳에서 아쉬운 탄성이 쏟아졌습니다. 한 명만 더 질문을 받아달라는 요청에 한 명 더 질문을 받고 즉문즉설을 마쳤습니다.

“이번 경주역사기행을 통해 정토회와 처음 인연 맺은 사람들은 정토회를 종교 단체라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이걸 공부하는 곳이라고 생각하세요. 여기에서는 ‘결혼을 해라’, ‘좋은 직장을 다녀라’ 이런 얘기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어디를 다니든 뭘 하든 그건 개인의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세 가지만 신경 쓰면 됩니다.

첫째, 내가 이익을 보는 건 좋지만 남을 손해 끼칠 자유는 없어요. 내가 사는 건 좋지만 남을 해칠 자유는 없습니다. 내가 즐거움을 추구하는 건 좋지만 남을 괴롭힐 자유는 없어요. 그런데 요즘 뉴스에 나오는 클럽에서는 자기가 즐겁기 위해서 남을 괴롭힌 겁니다. 그건 나쁜 거예요.

둘째, 말로도 남을 괴롭혀서는 안 돼요. 욕설하거나 거짓말하지 마세요.

셋째, 술 먹고 취해서 남을 괴롭혀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도 어릴 때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어머니와 자식들 괴롭히는 거 많이 보고 경험했잖아요. 술 먹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술을 먹는 건 자유이지만 술에 취해서 남을 괴롭힐 권리는 없습니다.

이것만 딱 지켜도 세상이 밝아져요. 그 외에는 자유롭게 살면 돼요. 인생을 뒤쳐졌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아직 젊은데 그렇게 인상 쓰고 살 거예요? 나랑 바꿀래요? (모두 웃음) 내일도 좋은 시간 가지세요.” (모두 박수)

오늘은 참 많이 웃었습니다. 청년들이 오늘만큼 환하게 웃고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쉽지만, 스님과 함께하는 역사기행은 오늘로 마무리했습니다.

내일은 정토 연수원 개원식과 저녁반 활동가 나들이가 있을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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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태

감사합니다!!!^_^

2019-04-23 22:27:04

정지나

상처로 아님 경험으로...과거를 떠올리면 아직 두렵고 외로운걸 보니 상처로 된것같습니다 그 시간이 지금으로 이여지고 다시 내일!!! 가볍게 가볍게 쌀과자처럼 바삭바삭
\"아~나를 넒히고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였다\" 문장하나로 지금 여기서 자기치유로 턴입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2019-04-22 22:59:15

무량명

즐거웠어요. 유튜브나 수행법회에서 다시 들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2019-04-18 14:3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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