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3.30. 용성조사 열반일 기념법회
“내가 만약 일제강점기에 살았다면”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용성조사 열반일을 맞이하여 용성조사님의 탄생지에 세워진 장수 죽림정사에서 기념법회를 했습니다.

아침 햇살이 따뜻한 화사한 봄날입니다. 오늘은 용성조사님의 열반일입니다. 용성조사님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는 장수 죽림정사에서는 매년 이날을 기념해 용성조사님의 뜻을 기리고 되새기는 다례재와 기념법회를 열고 있습니다. 죽림정사 주변에는 매화꽃이 활짝 피어 오늘 이곳을 찾은 이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오늘 기념법회에는 장수군 지역 인사분들을 비롯해 500여 명의 정토회 경전반 학생들이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었습니다.

9시 30분부터 유수스님의 진행으로 다례재를 봉행했습니다. 과거 7명의 여래불, 69명의 역대 조사, 7명의 대사를 기리는 다례재는 용성 조사님을 비롯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해지기까지 노력해 온 모든 분들의 뜻을 기리는 의식입니다.

정성스럽게 다례재를 올린 후 10시 30분부터 제79주기 용성조사 열반일 기념법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삼귀의, 반야심경 봉독에 이어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 및 호국 영령에 대한 묵념이 경건하게 이어졌습니다.

전북도의회 박용근 님의 기념 축사에 이어 유수스님의 환영사를 들은 후 다 함께 ‘온겨레의 노래’를 제창했습니다. 이 노래는 용성조사님이 작사하고, 불심 도문 큰스님이 정리한 노래입니다.

백두산이 아빠 되어 단군 겨레 이루었고 ♫
한라산이 엄마 되어 단일 기백 이루었네
북녘 송화 남녘 낙동 젖줄 되어 흐르니 ♬
자손만대 이어가며 이강산을 가꿔가세

힘차게 노래를 함께 부른 후 죽림정사 주지이자 정토회 지도법사인 법륜 스님을 모시고 기념 법문을 청해 들었습니다. 스님은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활동했던 용성조사님을 추운 날씨에 꽃피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매화에 비유하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봄이 되면 대개 매화가 가장 먼저 핍니다. 꽃만 놓고 보면 매화보다 더 아름다운 꽃들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유난히 매화를 좋아하는 것은 가장 추운 가운데서 먼저 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처럼 사람도 어떤 환경에서 그 일을 했는지를 평가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전깃불이 환한 와중에 촛불 한 자루를 켜면 촛불의 가치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칠흑 같이 어두운 밤에 빛나는 촛불 한 자루는 굉장한 가치를 지닙니다. 용성조사님의 삶은 드러난 행적 만으로도 훌륭하지만, 그 드러난 행적들이 어떤 환경에서 행해졌는지를 이해하면 여러분들도 입이 떡 벌어지며 정말 훌륭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온 역사는 2천 년 가까이 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집권층인 유생들과 사대부가 고려를 부정하는 일환으로 불교를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탄압 방식을 보면 한양의 사대문 안에는 절을 짓지 못하게 하고, 다른 도시에도 시내에 있는 절들은 모두 파괴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도시 안에 절이 많지 않은 거예요. 원래 그전까지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시내에 절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시내의 절들을 모두 없애면서 깊은 산속에 있는 절만 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승려들을 모두 환속(還俗)시키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승려가 되니까, 승려가 되면 천민 신분이 되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기생, 백정 등 일곱 종류의 천민이 있었는데, 승려를 천민 계급에 넣으면서 여덟 번째 천민층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양반들이 승려를 부를 때 ‘중놈’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승려가 천민 계급이다 보니 절에 와서 승려를 찾을 때 ‘중놈아’하고 부르게 된 거예요. 이렇게까지 탄압을 하니 양반이 절에 오거나 하면 승려가 양반의 종이 되어 심부름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승려증도 만들어서 강제노역을 시켰어요. 남한산성 등 산에 있는 성들은 거의 대부분 승려들을 강제 동원해서 쌓았습니다.

승려들이 착했는지 바보였는지, 그렇게 자신들을 탄압했던 왕조가 일본의 침략을 받고 무너지려고 하니까 승병까지 일으켜서 싸웠습니다. 그렇게 왜구를 막아냈으면 승려와 사찰에 대한 탄압을 풀어줄 만도 한데, 다시 불교가 융성할까 싶어서 억압이 더 심해졌습니다. 심지어 개혁시대라고 할 수 있는 영조 때는 환성 지안조사를 제주도로 귀양 보내서 결국 사약을 내려 순교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절이 피폐해지고, 승려들은 강제 노역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런 조선왕조가 무너져가는 중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나면서 승려의 도성 출입금지가 풀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노비 문서가 소각되면서 승려의 천민 신분도 풀리게 된 거예요. 그렇게 불교가 일어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동시에 일본 불교가 물밀듯 밀려들어오면서 한국불교는 두 번째 위기를 맞게 됩니다. 우리나라 절이 일본 종파에 소속된 사찰로 바꾸면 지원을 받을 수 있게 하니까 우리나라 절 중 많은 곳이 일본 종파 소속으로 바뀌게 됩니다.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통치에 불교를 이용했습니다. 일본 불교는 승려의 결혼을 허용하고 술과 고기를 먹는 것도 허용하니까 당시 승려들이 모인 자리에는 술도 한 잔씩 돌아가곤 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그런 자리에 끼면 승려 자격이 없다고 보는데, 당시에는 오히려 그런 곳에 참석하지 않으면 주지 스님이 될 수 없도록 한 거예요. 또 일본에 유학을 가서 일본 불교를 배워오면 사찰의 주지 자리를 주고, 본사 주지의 지위를 도지사급으로 대우해주고 그들에게 일본의 정책에 동조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암울한 시기에 바른 불교를 지켜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조선시대 500년간 탄압을 거치면서 유생들도 불교 알기를 우습게 알았고, 게다가 19세기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불교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용성조사님은 ‘복을 빌고 점을 치는 것이 불교가 아니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서 부처가 되는 길을 가르치는 것이 불교다’라는 불교의 지성화를 주창하셨습니다. 그리고 참선, 염불, 주력, 간경, 불사의 5대 수행을 제시하셨습니다. 또 불교의 위대함에 대한 글을 써서 정법을 펼치는 운동을 하셨습니다. 용성조사님의 위대함은 이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 정법(正法)을 지켜내었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가 정책적으로 불교를 탄압하니까 관리가 된 사람은 불교를 믿으면 안 되었습니다. 불교를 믿으면 스님을 존경하고 따라야 하는데, 스님의 신분이 천민이니까 불교를 믿기가 어려웠던 거예요. 그러다 보니 불교를 믿는 사람은 대부분 여성이었습니다. 유교가 남성 중심이다 보니 억압받는 여성이 불교를 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불교가 여성 중심인 것이 비판적 요소를 지니기도 하지만, 반면 여성 덕분에 우리나라 불교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당시 여성에게는 글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은 경전을 읽지 못했고, 그저 복을 비는 신앙으로 불교를 믿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대중이 불법(佛法)을 이해하고 수행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하셨어요. 삼장역회를 조직하셔서 한문으로 된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셨어요. 사찰들이 모두 산속에 있으면 대중들이 접근하기 어려우니까 종로에 민가를 구입해서 대각사를 여셨습니다. 그리고 부인들도 참선을 할 수 있도록 부인들을 위한 선방을 만들고, 어린이들도 와서 불교를 접할 수 있도록 일요학교도 운영하셨습니다. 60이 넘은 나이에도 직접 풍금을 치면서 아이들과 같이 활동을 하셨고, 요즘으로 보면 학예회 같은 행사도 같이 진행하셨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대중화입니다.

불교의 지성화와 대중화에 이어 불교의 생활화도 주창하셨습니다. 일상생활이 바로 수행이 될 수 있도록 선농당을 만드시고, 승려들이 신자들에게 받은 시주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생산하도록 하는 생산 불교를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승려들도 낮에는 밭에 나가서 일하고 저녁에는 참선하고, 또 농사를 지으면서 마음 수행을 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선농 불교를 개척하셨습니다. 만주에 210만 평 정도 되는 두 개의 농장을 경영하시고, 함양에도 백운산 과수원을 열어서 선농 불교와 생활불교를 직접 실천했습니다.

나아가 용성조사님은 일반인에게도 수행자가 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기독교에서 세례를 받듯이 불교 신자도 불교에 대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원래 불교에도 이런 의식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삼귀의 오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500년 동안 불교가 탄압을 받으면서 삼귀의 오계가 불교 안에서 사라졌습니다. 용성조사님은 이걸 부활시켜서 돌아가실 때까지 약 3만 명에게 삼귀의 오계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삼귀의 오계와 더불어 ‘세간 오계’도 주셨는데, 그중 첫 번째 계율이 ‘나라에 목숨 바쳐 충성하라’입니다. 홍범도 장군과 윤봉길 의사에게도 이 오계를 주고 독립운동에 뛰어들도록 했습니다. 이런 시스템을 만드신 분이 바로 용성조사님입니다. 오계를 받은 사람의 수가 3만 명이 되었다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바른 불교, 대중 불교, 생활 불교를 행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용성조사님이 주창하신 불교의 지성화, 불교의 대중화, 불교의 생활화입니다. 물론 당시 조건이 워낙 나빴기 때문에 이런 활동들이 겉으로 드러날 만큼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일본이 용성조사님이 운영하신 대각교당을 항일 운동의 본거지로 보고, 대각교를 유사 종교라는 모함을 씌워 강제 해산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이런 소중한 유산이 유실되었고, 오히려 일제시대 때 친일에 동조한 세력이 번창하여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다 보니 한국 불교는 민족의식이 투철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용성조사님의 제자 중에는 친일 불교의 모습에 크게 실망하여 승려라는 모습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참여한 분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새로운 불교를 주창하셨기에 우리는 용성조사님을 근대불교의 중흥조이자 한국불교의 뿌리라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용성조사님은 새로운 불교 주창과 더불어 독립운동을 하셨습니다. 용성스님의 행적 중 불교를 위한 활동은 그래도 알려져 있는 편이지만 나라의 독립과 민(民)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하신 활동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나마 알려진 것은 3·1 독립운동의 민족대표로 서명한 것 정도만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용성조사님은 고승이셨기 때문에 돌아가실 때는 범어사나 해인사에서 삶을 정리하실 법도 한데 조선총독부가 그걸 방해해서 돌아가시는 장소도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럴 만큼 많은 탄압을 받으셨어요. 결국 민간인 집을 사서 사찰로 만든 대각사에서 해방의 기쁨도 누리지 못하시고 1940년에 눈을 감으셨습니다.

이렇게 극도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많은 활동을 하셨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적이 화려하기 때문에 훌륭하신 게 아니라 그 엄혹한 겨울 같은 시대에 봄을 맞기 위해 씨앗을 뿌리신 분이기 때문에 정말 훌륭하신 겁니다. 그 씨앗이 자라서 오늘날 대한민국이 되었고, 오늘날 한국 불교가 된 것입니다.

경전반 학생 여러분이 오늘날 불교를 공부할 수 있는 토대는 바로 용성조사님이 만드셨습니다. 우리 모두 보이지 않게 그 은혜를 받고 있고, 그 은혜를 갚는 길은 이 좋은 법을 널리 전하고, 우리나라가 평화 통일이 되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에 더욱더 성숙한 민주주의가 발전되고 정착할 수 있도록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노력하는 것이 용성조사님의 유업을 계승하는 일입니다."

법문을 하는 내내 스님은 용성 조사님이 어떤 조건 속에서 활동을 하셨는지 그 배경을 강조했습니다. 대중들은 절로 감탄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활동만을 볼 게 아니라 그 활동을 했던 사회환경을 자세히 듣고 나니 용성조사님의 뜻이 더욱더 깊이 다가왔습니다.

가슴이 숙연해질 무렵 이어서 즉문즉설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이 오늘 죽림정사에 처음 온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자 대다수가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참석한 많은 대중들에게 오늘 스님의 법문이 더욱더 새롭게 와 닿았을 것 같았습니다.

총 3명이 스님에게 질문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 음주가무를 하지 말라는 계율이 있는데, 정토회에서는 각종 행사에서 노래를 부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 상한 음식이 담긴 춘다의 공양을 받지 않았다면 부처님께서 더 많은 활동을 하실 수 있었을 텐데, 부처님께서는 왜 그 사실을 미리 알고서도 공양을 드셨을까요?
  • 수행자는 검소해야 한다고 배웠는데, 탱화를 보면 스님들의 옷이 무척 화려해 보여서 이상합니다. 여기 죽림정사 건물도 검소해 보이지는 않고요. 그리고 스님이 올해 6400평 농사를 짓는다고 하셨는데, 법당에서도 봉사가 부담스러운데 농사일까지 도우러 가야할 것 같아서 부담이 됩니다.

스님이 질문에 답하자 대중들은 박장대소를 하기도 하고 박수를 치기도 하며 공감을 했습니다. 질문 내용을 들으며 수행자들이 얼마나 원칙을 제대로 지키고 사는지에 대해 대중들의 관심이 높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홍서원으로 기념법회를 모두 마친 후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500여 명의 대중들은 각자 싸온 도시락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 즐거운 점심시간을 보냈습니다. 모두 도시락을 가져왔기 때문에 가장 부산스러울 식사 시간임에도 경내가 아주 조용했습니다.

오후에는 법사님들의 안내로 경내 순례를 했습니다. 총 3개 조로 나뉘어 교육관 내부, 외부, 대웅전 앞에서 신속히 모여 용성조사님의 일대기가 그려진 그림들을 보며 법사님들의 자세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대중들이 경내 순례를 하는 동안 스님은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 이사회와 총회를 연이어 가졌습니다. 이사회 구성원들과 함께 2018년 사업 결과에 대해 보고받고, 2019년 사업계획을 승인했습니다.

용성조사님이 하신 독립운동의 의미를 배우고 시대적 과제인 통일교육과 체험의 공간이 될 ‘용성연수원'을 건립의 첫삽을 3.1 운동 100주년인 올해에 뜰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눈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이어서 오후 3시 30분부터는 KBS 방송과 인터뷰 촬영을 했습니다. KBS에서 ‘나의 독립 영웅’이라는 주제로 5분 영상을 4월에 방영할 예정인데, 법륜 스님에게는 용성조사님에 대해 인터뷰를 하고 싶다며 죽림정사로 찾아왔습니다.

스님은 KBS 촬영팀을 보자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다른 촬영이면 승낙을 안 할 텐데, 용성조사님에 대해 인터뷰한다고 하니까 승낙을 한 거예요. 제가 용성조사님의 제자이니까요.”

스님의 이야기에 환하게 웃으며 인터뷰가 시작되었습니다. PD님은 먼저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며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백용성 조사님을 생각하시면 무엇이 가장 인상 깊으신지요?”

“수행자로서 승려로서 똑바로 사셨다는 점을 들 수 있죠. 또 불교를 대중화하셨고요. 그리고 국민의 고통과 사회적인 과제를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받아서 독립운동에 나서셨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이 그 당시에 승려로서 꼭 해야 하는 일이었을까요?”

“승려가 뭐냐가 중요하죠. 자기 마음공부만 하는 게 승려라면 ‘승려가 안 해도 될 일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중생의 고통을 더는 게 승려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죠. 당시에는 나라를 빼앗겨서 외세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외세의 지배가 중생이 받는 고통의 가장 근본 원인이니까 중생의 그 고통을 해결하려면 나라가 먼저 독립이 되어야 했습니다.

물론 나라가 독립이 된다고 백성들의 고통이 다 해결되는 건 아니었어요. 왕이 주인인 나라는 나라가 독립이 돼도 국민들이 괴롭기 때문에 독립을 하는 것과 동시에 백성이 주인이 된 나라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용성조사님은 3.1 독립운동이 대한제국 부흥운동이 아니라 대한민국 수립운동이 되도록 향도하셨습니다.

첫째, 나라가 독립이 되어야 했고, 두 번째, 국민이 주인이 된 나라를 만들어야 했어요. 이것이 중생을 구제하는 첫발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독립운동이 당시 승려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법륜 스님께서 일제강점기 때 계셨으면 어떻게 하셨을 것 같으세요?”

“당연히 용성조사님이 가셨던 길을 그대로 갔죠. 다른 길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 길이 어떤 길인가요?”

“첫째, 수행의 길입니다. 복을 비는 길이 아니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수행의 길을 가야 합니다. 둘째, 사람들을 괴롭게 만들고 있는 사회적인 조건들을 개선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나라를 빼앗겼다면 독립운동을 해야 하고, 독재시대라면 민주화운동을 해야 하고,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된다면 불평등을 해소하는 일을 해야 하고, 인권이 침해된다면 인권을 개선하는 일을 해야 하고, 난민들이 생긴다면 난민 구호활동을 해야 하고, 사람들이 굶주린다면 굶주림을 해소하는 구호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수행자가 가야 할 보편적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와 미래에 우리가 백용성 조사님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요?”

“백용성 조사님은 단순한 종교인을 넘어서서 사회인의 한 사람으로서 시대적 과제를 두 개라고 보셨습니다. 하나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거예요. 즉 독립이죠. 그런데 1945년 해방이 되었지만 우리는 아직도 자주독립 국가를 못 만들었어요. 연합군에 의해서 해방이 됐기 때문에 연합군이 자기들끼리 38선을 나눠서 따로따로 관리를 하다가 조국이 분단되고 전쟁이 일어나기까지 했잖아요. 그러니 그 당시 조사님께서 말씀하셨던 자주독립의 정신을 계승한다면 지금은 평화적 통일로 가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민이 주인이 되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즉 민주주의가 발전해야 합니다. 4.19 혁명, 5.18 민주화 운동, 6.10 항쟁, 촛불 혁명을 거쳐 왔듯이 민주주의의 발전을 계속 이뤄나가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나라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 용성조사님의 뜻이었어요. 용성조사님의 뜻을 이어받아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민주주의 발전을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만약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났다면 스님은 어떤 길을 가셨겠느냐는 질문에 스님은 잠시의 망설임 없이 용성조사님이 가셨던 길을 갔을 것이라고 대답하는 모습이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얼마나 스님의 가치관이 확고한 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경내로 나가 대웅전, 교육관, 용성조사님 생가, 기념관에서 다양한 모습을 촬영했습니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발이 시렵고 얼굴이 얼얼할 정도였지만, 스님은 촬영팀이 원하는 모습이 나올 수 있게 같은 동작을 여러 번 반복하며 촬영에 임해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용성조사기념관에서는 용성조사님이 경전을 한글로 번역한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당시의 경전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대중은 한문을 모르니까 경전을 읽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용성조사님께서는 ‘부처님의 말씀이 한문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 이걸 해방시켜야 한다’라고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한문을 다 한글로 번역해서 누구나 다 부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불교를 대중화하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경전을 한글로 번역한 데는 항일의 의미도 있습니다. 일제가 한글을 못 쓰게 하고 일본어를 쓰게 했기 때문입니다. 강제로 성과 이름을 바꾸는 창씨개명도 했잖아요. 그런 것에 반대해서 우리 글을 쓸 수 있도록 하자는 항일운동의 뜻으로도 경전 번역을 하신 겁니다.”

경전 번역이 항일 운동의 의미도 있었다는 말씀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촬영은 해질녘이 되어서야 끝났습니다.

스님은 KBS 촬영팀에게 수고하셨다고 인사를 한 후 두북으로 향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농사일을 한 후 오후에는 통일특별위원회 제1차 구역장 회의에 참석해 즉문즉설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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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던이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용성큰스님과 법륜스님의 뜻을 이어받읍시다!!! ㅋㅋ

2019-06-07 00:46:38

임규태

감사합니다!!!^_^

2019-04-05 20:46:08

정명 데오

\"용성조사님이 주창하신 불교의 지성화, 불교의 대중화, 불교의 생활화입니다.\" 감사합니다.~~^^

2019-04-03 23: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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