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3.27 고구려 신성, 원수림, 봉황산성 답사
“한반도를 지켜낸 천혜의 요새, 고구려 산성을 찾아”

안녕하세요. 중국을 방문한 지 3일째 되는 날입니다. 오늘은 무순에 도착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고구려 산성인 ‘신성’과 ‘봉황산성’을 답사하고, 장작림의 무덤이 있다고 알려진 ‘원수림’을 둘러보았습니다.

어제 저녁 5시 57분에 연길 역을 출발한 기차는 오늘 아침 6시 44분에 무순 북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장장 12시간에 걸친 기나긴 이동이었습니다.

“밤기차를 타면 시간도 아끼고 숙박비도 아낄 수 있지.”

스님의 한마디에 작은 깨우침을 얻습니다. 무순 북역에 도착하니 매년마다 중국 역사기행을 함께 하는 진신 님이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나 인사를 하고, 아침식사로 간단히 죽을 먹은 후 고구려 신성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고구려 신성은 무순시 북쪽의 고이산 공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고이(高爾)란 고려를 애써 지우기 위한 다른 표기법으로 고려를 뜻합니다. 고구려 시대 신성으로 불렸고, 수나라와 당나라 시기에 많은 전투가 벌어진 고구려 천리장성의 일부입니다. 서기 335년에 축조하였고, 4세기 후반 선비족과의 대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7세기에는 수·당의 침략을 저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스님은 철령으로 넘어가는 길 중간에 내려서 산을 올랐습니다. 아래에서 볼 때엔 야트막한 동산인 줄 알았는데 산 정상에 오르니 무순 시내와 서북쪽의 구릉과 평야지대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조망이 탁월하였습니다.

성벽은 능선을 따라서 토성의 흔적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었고, 크게 동쪽성과 서쪽성 2군데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산성은 동쪽성이 성의 중심부가 있는 내성으로 보였고, 서쪽성은 외성 구실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성 안은 비교적 넓은 편으로 수・당의 대군과 맞서 싸워도 굳건히 버틸 만큼 컸고 산 정상을 향할수록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서 방어에 한층 유리한 지형이었습니다. 산성의 동쪽은 개천이, 남쪽은 혼하가 성벽을 보호하면서 흐르고 있습니다.

신성에서 내려와서 같은 고이산 자락에 있는 요・금 시기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8각 9층 전탑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몸체는 8각이며 전체 높이는 9층인 전탑 양식인데, 요양 시내의 백탑보다는 작은 규모지만, 마치 산 정상에서 무순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탑의 모습에 위용이 넘쳐 보였습니다.

스님은 탑을 참배한 후, 고구려의 명장 강이식 장군 무덤으로 알려진 원수림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원수림 공원은 무순시 동쪽 대화방 저수지의 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곳의 마을 이름은 ‘고력촌(高力村)’으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고력은 고려와 동일하게 발음되는데 고구려를 뜻합니다.

원수림에는 수나라 문제와 맞서 싸운 강이식 장군의 묘가 있었는데, 고구려로부터 먼 훗날인 일제시대에 이 무덤은 장작림의 무덤으로 불려지게 됩니다. 일제시대에 만주의 군벌 총책임자인 장작림이 일제의 공작에 의해 열차가 폭발하여 사망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시신이 다 흩어져버렸는데, 그 아들 장학량이 흩어진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여 강이식 장군의 무덤 위에 뿌리고, 그 무덤을 장작림의 무덤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스님이 장작림의 무덤을 찾은 이유는 용성 조사님과 장작림의 인연 때문입니다. 용성 조사님은 일제의 잔혹한 식민 통치로부터 백성들을 구하고자 장개석을 만나 ‘1만 대한의사군을 조직하여 조중연합군을 창설하자’는 제안을 했는데, 아마 용성 조사님은 장작림을 통해 장개석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장작림의 무덤이 이곳 원수림 공원 안에 있기 때문에 참배하고자 한 것인데, 출입이 금지되어 참배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고려촌 주위에 돌거북이 있다’라고 해서 주변의 밭을 뒤지며 찾아 찾아보았습니다.

밭에서 일을 하는 동네 주민들에게 물어 겨우 비석 받침인 돌거북을 찾았습니다. 비석은 사라져 버리고 비석 돌을 끼운 받침만 쓸쓸히 빈 들판에 남아 혼하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또 돌비석의 바로 위에 이장하고 속이 빈 듯이 남아있는 고구려 시대 무덤이 보였습니다. 무덤 안쪽으로 일정하게 돌로 테두리가 둘러져 있어서 혹시 이전하기 전의 강이식 장군의 무덤일까 싶기도 했지만 사실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고려촌 남쪽의 대화방 저수지 끝으로 가니 원수림공원이 나왔습니다. 공원 안에 장작림의 묘가 있기 때문에 강이식 장군의 무덤을 정확히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져 보았지만, 공원 정문이 폐쇄되어 있었습니다. 안내판의 문의전화번호로 연락을 해 보니 “무순시에서 관람 금지 방침이 내려졌다”고 하여 들어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강 건너 고구려 산성이 있었다는 철배산을 잠시 바라본 후 봉황산 산성이 있는 봉성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무순에서 본계를 지나 봉성으로 가는 이 길은 단동으로 이어져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를 지나 한반도 내부로 들어가는 주요 교통로입니다. 또 심양에서 단동을 지나 북한으로 가는 철도가 함께 지나가는 길입니다. 일제는 이 철도 부설권을 얻어내는 조건으로, 백두산정계비의 내용 중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해석하여, 간도를 중국 영토로 간주하게 해주는 간도 협약을 맺게 됩니다.

3시간 여를 달려 봉성시에 도착했습니다. 봉성은 봉황산성의 준말입니다. 그 형태가 복잡하고 주요 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있어 고구려 성벽을 정확히 확인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그래서 관광지로 알려진 구간이 아닌 고성리란 지명이 남아있는 마을로 가 보았습니다. 마을 초입에 ‘봉황산 산성’이라는 표지석이 있었고, 그 옆으로 상당한 높이의 성벽 언덕빼기가 보였습니다.

마을 촌로가 지나가다가 언덕빼기 뒤편을 안내해 줘서 가보니 고구려인들이 쌓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벽체가 보였습니다.

성 안에서는 동서 쪽 양편으로 봉황산의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어 장관이었습니다.

특히 서쪽면은 정상 부근에 출렁다리를 만들어 계곡을 가로지르는 도보 구간도 있고, 암봉 옆면으로 등산객을 위한 길도 조성한 모습이 보였습니다. 멀리서 볼 때는 성벽이 어느 구간에 남아있는지 알 길이 없어서, 기암괴석이 가장 낮은 북쪽으로 무작정 가 보기로 하였습니다.

북쪽에 북문과 장대, 망대, 치성 등이 있다는 자료만 믿고 올라가 보았습니다. 도로 끝 지점의 민가에 차를 두고 걸어서 30분 정도 올라가니 북문 자리가 나왔습니다. 북문은 기초가 또렷하게 남아있었는데 성벽에서 성문을 향해 ‘ㄱ’ 자 모양으로 돌출한 옹성 구조가 잘 남아 있었습니다. 성문 주변으로는 2겹으로 성벽을 쌓아서 방어력을 높인 흔적이 보였습니다. 북문의 동쪽 편에는 또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치성이 돌출되어 있었습니다.

북문의 서쪽 편으로는 장수가 전쟁을 지휘하는 장대가 보였는데 올라가 보니 성 안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봉황산성은 길이가 16km가 되는 고구려시대 제일 규모가 큰 성의 하나이며 주변 산세가 워낙 험악해서 성 서쪽 산록은 지금 관광지로 개발되어 유명합니다. 성벽은 자연 절벽 8.5km, 인공 성벽 7.5km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니 고구려인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사람의 힘과 천연자원을 잘 활용한 흔적을 볼 수 있어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북문 옆 산 꼭대기에는 다시 고구려의 개이빨식 축성 구조를 가진 장대의 기초석들이 잘 남아있었습니다.

봉황산성은 고구려의 오골성으로 알려져 있고, 수·당 전쟁 시기에도 많은 활약이 있었지만, 요동성과 안시성처럼 생생한 역사적 사실과 전쟁사의 기록은 아직 빈약한 편입니다.

요동 방어선인 천리장성을 이루는 성은 아니지만 요동을 돌파한 모든 적들이 평양을 공격하려면 반드시 봉성의 오골성과 단동의 박작성을 지나기 마련이니, 그런 의미에서 요동에서 한반도로 들어오는 길목을 지키는 천혜의 요새였습니다.

봉황산 산성을 나와서는 오늘 숙박을 할 중국JTS 사무실이 있는 단동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단동에 도착하여 숙소로 이동하기 전 압록강 철교를 둘러보았습니다. 일제시대 단선 교각이 만들어졌고, 교통량이 늘어 다시 복선 교각을 더 만들었지만, 6.25 전쟁 시기 미군의 폭격에 의해 둘 다 폭파되었습니다. 이후 복선 철교만 수리하고, 단선 철교는 부서진 채로 둬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압록강 하류를 따라 이동하니 신단동 지역이 한참 개발 중이었고, 멀리 신압록강대교가 보였습니다.

신압록강대교는 사장교로 만들어져 단동시와 신의주시를 잇는데 2011년 12월 31일에 착공되었다고 합니다. 중국 쪽은 거의 공사가 끝났지만, 북한 쪽이 아직 준비가 덜 되어 정식 개통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북미관계가 진전되고 교류협력 및 경제지원이 이루어질 경우 신압록강 대교는 많은 인원과 물자 이동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숙소에 도착해 중국JTS 사무실에서 박지나 JTS대표님과 실무자들이 정성스레 준비한 저녁을 먹고 하루를 마무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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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데오

"스님이 장작림의 무덤을 찾은 이유는 용성 조사님과 장작림의 인연 때문입니다. 용성 조사님은 일제의 잔혹한 식민 통치로부터 백성들을 구하고자 장개석을 만나 ‘1만 대한의사군을 조직하여 조중연합군을 창설하자’는 제안을 했는데, 아마 용성 조사님은 장작림을 통해 장개석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감사합니다.~~^^

2020-04-18 07:33:23

임규태

감사합니다!!!^^

2019-04-04 23:11:12

정지나

감사합니다 꾸벅^^

2019-04-02 20:3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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