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1.19. 인도 성지순례 15일째 (델리 박물관, 라즈가트), 델리 교민 즉문즉설
“부처님이 태어난 나라 인도에서 왜 불교가 쇠퇴했나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 성지순례를 떠난 지 15일째 되는 날입니다.

성지순례단은 타지마할을 관람하고 델리로 출발하여 델리 인도 국립박물관, 라즈가트, 간디 박물관을 본 후 한국으로 출국하였고, 스님은 순례단을 보낸 뒤 델리 문화원에서 델리 교민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을 하였습니다.

아그라에서 하룻밤을 잔 후 5시 30분에 숙소를 출발했습니다. 타지마할 입구에 도착하자 아침 6시가 되었습니다. 아직 깜깜한 새벽, 이미 입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타지마할을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번 성지순례는 날씨가 참 많이 도와줬습니다. 해 뜨는 타지마할 앞에서 순례객들은 마음껏 그 광경을 즐겼습니다.

오전 9시, 타지마할을 나와 델리로 출발했습니다. 아그라에서 델리로 가는 길은 지금껏 성지순례를 다니며 보았던 풍경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6차선 고속도로가 한국처럼 깨끗하게 펼쳐져 있고, 델리에 가까워질수록 양 옆으로 아파트가 줄줄이 건축되고 있었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며 만났던 맨발에 헐벗은 차림의 인도인들, 허름한 집들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풍경이었습니다.

“왼쪽에 빌딩 짓는 것 보세요. 어마어마하게 높죠. 아파트도 넓은 것은 80평, 100평씩이나 됩니다.”

특히 델리 근교의 노이다(NOIDA) 지역은 엄청난 규모의 공단이 들어서서 막 성장하는 인도 산업의 태동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 버스 안에서는 마지막 도시락을 꺼내 먹었습니다. 달리는 버스 안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마지막 여정의 아쉬움을 달래며 쉴 새 없이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델리 국립박물관

델리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델리 인도 국립박물관입니다. 많은 대중이 한꺼번에 들어가면 제대로 보기 어려워 스님은 150여 명씩 세 팀으로 나누어 세 차례 같은 설명을 했습니다.

박물관 입구에 마련된 인더스 문명관을 시작으로 마지막에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곳까지 스님은 차례대로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먼저 인더스 문명관에 들어섰습니다.

“첫째로 가보는 곳은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인 인더스 문명관입니다. 인더스 문명은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고요. 지금으로부터 4500여 년 전에서 3500여 년 전까지 인더스 강 유역에서 발달한 문명이에요. 발굴된 곳은 수십 곳입니다.

모헨조다로와 하라파는 유물이 발견된 마을 이름이에요. 여기는 주로 토기와 작은 화살촉, 바늘 같은 것들이 많이 나왔어요. 이런 목걸이는 요즘 걸어도 좋을 정도로 장신구도 굉장히 발달했습니다. 저울도 있습니다. 두 마리 소가 끄는 마차와 농기구도 많이 있습니다.

문명을 만든 민족은 드라비다족이고, 그들의 문자는 아직 해독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어서 마우리아 왕조 때의 유물이 전시된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여기는 마우리아 왕조, 즉 아쇼카왕 때 작품입니다. 이 시절은 아직 부처님을 사람 형상으로 묘사한 불상이 나오기 전입니다. 아쇼카 석주의 머리에 있던 것은 사자와 코끼리와 소와 말인데 각자 동서남북을 가리킨다고 해요. 여기도 부처님을 법륜(법 바퀴)으로만 표시해놨지 불상으로는 표시하지 않았어요.

이 그림은 부처님이 태어났을 때 아시타 선인이 부처님을 보고 ‘이 세상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되고 출가하면 부처를 이루리라’라고 예언하는 모습입니다.

여기서도 무릎에 아기를 안고 있지만 아기를 사람 형상으로는 아직 그리지 않았습니다. 정반 왕과 아시타 선인이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이에요. 여기는 1세기경 작품들입니다.”

다음은 쿠샨왕조 때의 유물이 전시된 곳으로 들어섰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쿠산 왕조 시대입니다. 쿠샨왕조는 마우리아 왕조 다음에 인도를 통일한 왕조이고 시기상으로는 1세기에서 3세기 정도예요. 또 활석처럼 맨질맨질한 돌 위에 아주 예쁘게 새겨놓은 이런 조각들을 ‘나가르주나콘다’ 양식이라고 해요. 저런 양식은 남인도, 특히 첸나이 인근에 많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정면에 있는 여자 조각상이 마투라 양식입니다.

오른쪽에 줄지어 있는 게 전부 나가르주나콘다에서 발굴된 나가르주나콘다 양식입니다. 여기 그림들은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그린 거예요.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한 장면 한 장면씩 그림으로 표현했어요.

이게 초기 불상입니다. 1세기 즈음의 간다라 양식인데 여길 보면 부처님 머리가 처음에 어떤 모양이었는지 알 수 있어요. 끈을 묶어서 뒤로 늘어뜨린 것을 이렇게 잘라버렸잖아요.

이 끈 묶은 자리가 초기에는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이 모양이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모양이 되었어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우리가 아는 구불구불하고 동글동글한 모양의 나발로 조각의 표현이 변한 거예요.”

부처님 머리 모양은 왜 동글동글할까 궁금했는데 스님의 설명과 함께 유적을 보니 신기하고 재미있었습니다. 다음은 굽타 시대의 유물이 전시된 곳에 들어섰습니다.

“다음은 굽타시대, 즉 4~5세기 경의 불상 작품들입니다. 굽타시대는 벌써 힌두교가 발달된 시대입니다. 그래서 불상도 많지만 신상이 아주 많아요.

이런 불상은 사르나트 양식입니다. 여길 보면 ‘A.D 5세기, 굽타, 사르나트’라고 써놨습니다. 허리에 이런 띠가 있고 얼굴이 동안이고 이런 것은 사르나트 양식입니다.”

사르나트 박물관에서도 보았던 사르나트 양식을 이곳에서도 보니 무척 반가웠습니다. 다음은 신상들이 많이 전시된 곳을 둘러보았습니다.

“여기는 7세기 이후 13세기까지의 작품들입니다. 주로 신상이 많습니다. 그 당시에는 힌두교가 발달했기 때문에 우리 한국 불교에서는 보살상이나 불상이 앉아 있는 자세가 많은데 여기 보면 한쪽 다리를 내려놓고 있어요. 이걸 유희상이라고 합니다. 경주 남산 칠불암 위쪽에 있는 신선암의 마애보살 반가상이 저런 자세예요. 인도 신상 중에는 저렇게 앉아 있는 신상이 아주 많아요.

불상처럼 생겼는데 남자 성기가 그려져 있으면 불상이 아니라 마하비라상입니다. 자이나교의 실질적 창시자인 마하비라를 묘사한 거예요.

자이나교는 무소유 사상을 강조해서 옷을 안 입으니까 자이나상도 그렇게 표현했어요. 여길 보면 불상과 비슷해 보이지만 좀 투박하고 아랫도리가 노출되어 있잖아요. 이건 불상이 아니라 마하비라상이에요. 인도에는 자이나교도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가슴에 다이아몬드처럼 마름모꼴 모양이 있는 것도 마하비라상입니다. 이렇게 옷을 입은 마하비라상은 백의파의 것입니다. 자이나교의 교파에는 나체파와 백의파, 이렇게 두 가지가 있는데 백의파는 옷을 입습니다.”

이렇게 안내가 계속 이어지던 중 드디어 부처님의 진신 사리가 모셔져 있는 곳에 다 달았습니다. 스님이 앞에 보이는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가리키자 모두들 탄성을 지르며 그 앞에 멈춰 섰습니다.

“저 앞에 보이는 금으로 만든 탑 안에 부처님의 진신 사리, 즉 부처님의 유골이 모셔져 있습니다. 너무 가까이 가진 말고 삼배드리겠습니다. 왼발을 한 발 내밀고 합장을 한 채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는 ‘우슬착지’ 자세를 취하고 고개 숙여 인사드리는 것을 세 번 하겠습니다.”

스님의 말씀대로 다 함께 우슬착지로 공경의 예를 표했습니다.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은 엊그제 순례단이 직접 참배한 곳이라 진신 사리의 친견은 더욱 뜻깊었습니다. 다시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이게 여러분들이 참배했던 삐쁘라하와에서 나온 사리예요. 아래쪽을 보면 사리함이 있어요. 원래는 사리가 저 사리함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탑을 처음 발굴했을 때 탑 안에서 저 사리함이 나왔고 그 속에 사리가 들어 있어요. 그런데 보면 사리함이 두 개입니다. 처음에 영국 사람이 발굴했을 때 사리가 발견되어서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인도가 독립하고 나서 더 깊이 파봤더니 아래쪽에서 또 다른 사리함이 나왔어요. 시대에 따라 탑을 덧붙이면서 아마 사리를 구해서 넣었나 봐요.

원래 그냥 모셔져 있었는데 태국 분들이 기증을 해서 저 안에 모시게 되었어요. 그럼 한 줄로 조용히 보고 돌아 나오겠습니다."

특히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코 앞에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니 모두들 믿기지가 않는지 꿈인지 생시인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습니다.

이렇게 불교 유적에 대한 부분만 스님이 자세히 안내를 해준 후 나머지 미술 작품이나 조각품, 신상 등에 대해서는 안내를 하지 않고 각자 둘러보았습니다. 시간 여유가 있어 1층부터 2층, 3층까지 모든 곳을 꼼꼼히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충분히 관람할 것을 당부하며 스님은 원고 교정 업무 등을 보았습니다.

라즈가트

다음은 ‘라즈가트’를 참배했습니다. 라즈가트는 인도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마하트마 간디를 화장한 곳입니다. 넓은 공간에 잔디밭으로 둘러싸여 공원처럼 잘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간디를 화장한 후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고 해서 지금도 계속 불꽃이 타고 있도록 해놓고 있었습니다. 순례단은 간디의 뜻을 기리며 불꽃을 한 바퀴 빙 둘러 걸어 나와 라즈가트를 나왔습니다.

라즈가트를 나와 길을 건너니 간디 박물관이 나왔습니다. 간디의 전 생애가 다양한 사진들로 전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간디가 얼마나 인도 민중의 행복을 위해 전 생애를 바쳤는지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라즈가트에 대한 설명과 안내를 모두 마친 후 스님은 인도성지순례팀과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저녁에 델리 한국 문화원에서 델리 교민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순례하시느라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제가 일일이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6시부터 델리 교민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이 있어서 공항에서 배웅을 못하고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건강히 잘 돌아가세요.”

스님과의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제30차 인도 성지순례를 모두 마쳤습니다. 순례단은 델리 공항으로 이동해 밤 11시를 전후해서 모두 한국으로 출국했습니다.

델리 교민을 위한 즉문즉설

스님은 곧바로 델리 시내에 위치한 한국 문화원으로 이동했습니다. 한국 문화원에는 델리 교민들 50여 명이 스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문화원에 도착하자마자 문화원 원장님 내외 분을 비롯해 참석한 내빈들 몇 분과 담소를 나누다가 강연장으로 이동했습니다.

문화원 원장님이 스님을 소개하면서 스님이 보드가야 근교에 세운 수자타 아카데미에 대한 소개를 했습니다. 소개에 이어 무대에 오른 스님은 수자타 아카데미를 세우게 된 과정에 대해 더 자세한 스토리를 들려준 후 즉문즉설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2시간 30분 동안 4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항상 걱정이 많고 남을 의식하느라 에너지가 쉽게 소진되는데, 남들에게 너무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요. 그리고 얼마 전 집을 구하다가 인도인들에게 사기를 당했는데, 너무 화가 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좋은 결혼 상대자를 고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2600년 전 부처님 말씀이 어떻게 번역이 되어 전래가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지금 인도는 힌두교가 대부분인데, 불교가 왜 쇠퇴하게 되었나요.

그중에서 마지막 질문인 불교가 왜 인도에서 쇠퇴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오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에게는 오늘 델리 박물관에서 본 불교 유물들에 대한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될 것 같습니다.

인도에서는 왜 불교가 쇠퇴했나요?

“시간이 날 때 델리 주위를 다녀보면 인도 사원의 대부분이 힌두교인데도 불교적인 모습이 많이 보여요. 자이나교 사원에 가보면 불교와 굉장히 유사해 보이고, 부처님과 비슷한 형상을 모셔놓기도 하고요. 지금 인도는 힌두교가 80퍼센트라고 하니, 불교가 인도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불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 한편 1950년대인가 1960년대에 암베드카르를 따라서 불가촉천민들이 힌두교를 버리고 갑자기 불교로 개종한 일도 있었지만 다수가 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인도에서 불교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흘러와서 지금 이렇게 소수가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스님은 먼저 부처님의 가르침의 특징에 대해 다양한 비유를 통해 설명했습니다.

“붓다는 출가 이전에 젊었을 때는 욕구를 따라갔어요. 지금 우리가 욕구를 따라가잖아요. 욕구가 일어나면 그걸 채우고 충족시켜서 그 만족감으로 기쁨을 삼잖아요.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가고 싶을 때 가고, 그게 안 되면 성질을 내요. 이게 쾌락주의입니다.

그런데 욕구라는 것은 채워서 끝나면 좋겠지만 좀 있으면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서 끝이 안 나요. 그렇기 때문에 욕구는 씨를 말려야 한다는 게 고행 주의예요. 어떤 것도 용납을 안 해야 한다는 입장이죠. 부처님이 출가 후 이 길을 따랐기 때문에 생존에 대한 욕구까지도 억눌렀습니다. 먹는 것도 멈추고, 나중에 보면 숨 쉬는 것까지 멈추는 고행을 하거든요.

그런데 그래도 해결이 안 되니까 그때 자기의 수행을 돌아봤는데, 고행과 쾌락은 정반대의 길 같지만 사실은 같다는 사실을 붓다가 발견한 거예요. 욕구를 따라가는 것과 욕구를 억제하는 것은 모두 욕구에 대한 반응이잖아요. 반응을 어떻게 할 거냐 하는 차이만 있지, 둘 다 욕구에 대한 반응을 한 겁니다.

그런데 붓다가 발견한 중도(中道)는 욕구를 따라가는 것도 아니고 참는 것도 아니에요. 욕구를 따라가면 과보를 받고, 참으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우리 인생은 항상 욕구가 있으면 따라가거나 참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그래요. 참다가 못 참아서 터지고, 터지고 나면 시끄러워지니까 또 후회하고, 또 참고, 또 터지고, 또 후회하고, 늘 인생이 이렇습니다. 이게 곧 돌고 도는 윤회예요.

붓다가 발견한 건 욕구에 반응을 안 하는 거예요. 참는 것도 반응이거든요. 욕구에 반응을 안 하는 게 바로 알아차림이에요. ‘욕구가 일어나는구나’ 하고 알아차릴 뿐이지, 욕구를 참아야 하겠다든지 욕구를 따라가야 하겠다든지 하는 반응을 안 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붓다가 독창적으로 발견한 알아차림이라는 거예요. 이걸 통해서 깊은 선정에 들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서 법을 전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붓다와의 대화를 통해서 지금까지 해결 안 되던 고뇌들이 이제 해결됐어요. 불교는 이렇게 사물을 보는 관점이 완전히 다른 거예요.

붓다와의 대화는 이런 방식이에요. 어떤 사람이 부처님이 걸식하러 가니까 부처님을 보고 막 욕을 해요.

‘사지육신이 멀쩡한 놈이 왜 얻어먹으러 다니느냐!’

우리라면 어떻게 할까요? 얻어먹으려면 참아야 하잖아요. 안 그러면 ‘야, 안 주면 말지, 왜 욕을 하느냐!’ 이렇게 대응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붓다는 빙긋이 웃어요. 그러자 그 사람은 웃는다고 또 욕을 해요. 그때 붓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집에 가끔 손님이 옵니까?’
‘오지!’
‘선물도 가져와요?’
‘선물? 가져오지!’
‘그런데 그 선물을 안 받으면 그건 누구 거요?’
‘그야 가져온 사람 거지. 그런데 그걸 왜 물어?’
‘당신이 나한테 욕을 선물했는데 내가 안 받으면 이 욕이 누구 거요?’

그랬더니 욕을 했던 사람이 탁 하고 뭔가를 자각한 거예요. 그래서 ‘어서 오십시오’ 이렇게 붓다를 정중히 대접했습니다.

이건 답이 아니에요. 뭔가 깨우친 거예요. 본인이 자각하는 것이지, ‘그러면 된다, 안 된다’라는 윤리의 개념이 아니에요. 어떤 사람이 붓다에게 질문을 했어요.

‘저 바라문들이 말하기를 사람이 아무리 죄를 많이 지어도 강가강에 가서 목욕을 하면 죄가 싹 없어지고 천국에 태어난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붓다는 ‘그게 사실이다’, ‘사실이 아니다’라고 답하지 않습니다. 붓다의 대답은 ‘그들의 말이 맞다면’이라고 시작해요. ‘그들의 말이 맞다면’ 이건 그들의 주장을 수용한 거잖아요.

‘그들의 말이 맞다면 강가강에 사는 물고기가 제일 먼저 하늘나라에 태어나겠구나.’

목욕 한 번 했다고 하늘나라에 나면 아예 거기서 태어나서 자란 것은 하늘나라에 바로 날 거 아니에요. 그렇게 얘기하면 질문자는 바로 알아들어요. 그래서 ‘알겠습니다, 부처님’이라고 답했습니다.

이게 깨달음이라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군가가 결정해준 것을 따르지만, 붓다의 가르침은 누군가가 결정해주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자각하는 거예요. 이것이 깨달음이라는 용어의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깨달음을 약간 신비주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스님이 즉문즉설에서 이런 괴로움에 대해 얘기할 때도 한번 보세요.

‘남편 때문에 못 살겠어요.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요.’
‘아, 그래요? 못 살면 헤어져야지 어떡해요.’
‘애 때문에 어떻게 헤어져요?’
‘아, 그래요? 그러면 계속 살아야지 어떡해요.’
‘술 마시는데 어떻게 살아요!’
‘아, 그러면 헤어져야죠.’
‘아니, 애가 아직 어린데요!’
‘아, 그러면 살아야죠.’

제가 이렇게 대화를 할 때 어떤 사람은 ‘스님이 지금 무슨 말장난하나?’ 이러는데, 핵심은 이게 남편 문제도 애 문제도 아니고 결국 자기 문제라는 걸 자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옆에서는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대화를 하는 본인은 어느 순간에 이렇게 자각하는 거예요.

‘아, 이건 내 문제구나. 애 문제도 아니고, 남편 문제도 아니구나. 지금 이혼할 거냐, 안 할 거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내 문제구나.’

그러면 번뇌가 탁 사라지고 ‘알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이런 대화는 모두 자각을 일으키려는 거예요.

까르마라는 건 변하기가 어렵습니다. 무의식 속에서 작용과 반작용을 일으키니까요. 까르마가 변하려면 오직 그 열쇠는 자각뿐입니다. 자각을 통해서만이 변화가 일어납니다. 말썽꾸러기 아이가 갑자기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면 선생님이 야단쳤기 때문도 아니고, 스님이 상담해줬기 때문도 아니고, 부모가 어떻게 해줬기 때문도 아니에요. 그 아이가 선생님하고 대화하든 스님하고 얘기하든 어떤 순간에 스스로 자각이 일어나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붓다가 발견한 것은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자각입니다. 이것이 모든 변화의 원동력이에요. 그러니 운명론을 부정하는 셈이죠. ‘돌고 돌 수밖에 없다’는 운명론적 태도에서 이걸 자각하면 그 돌고 도는 사이클에서 벗어나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인공지능이 앞으로 아무리 발달해도 자각 기능은 생기기 어렵습니다. 인공지능이 자각 기능까지 가능해지면 인간이 필요 없어집니다.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으니까 누가 업그레이드 안 해줘도 되잖아요. 그러면 제3의 인류가 출현하는 거예요.

이런 것이 불교의 특징입니다. 불교는 인도에서 일어났지만 굉장히 비인도적인 거예요. 이건 어쩌면 인도 안에 있는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과 같은 거예요. 탐구를 통해서 진실을 발견해가는 방식이거든요. 그래서 붓다가 말했잖아요.

‘진리란 과거로부터 전승된 윤리나 도덕, 관습이나 습관, 경전이나 계율에 의해서 검증할 수가 없다.’

엄청난 얘기죠.”

불교의 특징에 대해 질문자가 이해할 만큼 충분히 설명한 후 스님은 왜 불교가 쇠퇴하게 되었는지 그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런데 아까 얘기했듯이 시간이 100년, 200년, 300년 지나면서 해석 주의로 자꾸 빠지게 되는 문제가 생겼어요.

붓다 당시에 인천 사람이 서울 가는 길을 물어서 동쪽이라 했고, 수원 사람이 서울 가는 길을 물어서 북쪽이라 했고, 이것을 기록한 것이 경전입니다. 그런데 불멸 후 춘천 사람이 서울 가는 길을 물었어요. 붓다라면 서울 가는 길을 춘천 사람이 물으면 서쪽이라 하고, 의정부 사람이 물으면 남쪽이라 답할 수 있는데, 오직 붓다 당시에 남아 있는 문답에 따라 동쪽으로 가라는 것과 북쪽으로 가라는 것밖에 모르니 해석 주의로 자꾸 빠져서 학문화가 된 겁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불교가 두 종류로 또 나뉘었어요. 하나는 인도의 전통처럼 종교의 길입니다. 여기서 출가수행자는 사제가 되어 버립니다. 또 하나는 철학의 길이에요. 다시 말해 학문의 길이에요. 그런데 이건 ‘불교’란 이름을 붙여도 이름만 불교일 뿐이에요. 종교의 길은 브라만교하고 비슷하고, 철학의 길은 우파니샤드 철학하고 비슷해요. 그리고 수행이라는 것이 사라졌어요. 이런 현상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난 거예요.

그런데 이 대승불교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한쪽은 종교의 길, 한쪽은 철학의 길로 갈라졌죠. 그래서 현재의 한국 불교는 종교와 철학, 두 개예요. 종교로서도 훌륭하고 철학으로서도 훌륭해요. 그러나 이건 붓다의 근본 가르침이 아니에요.

브라만교가 결국은 쇠퇴하고 불교가 번창하다가, 불교가 이렇게 바뀌는 과정 속에서 브라만교가 불교의 영향을 받아 다시 새롭게 일어난 게 힌두교예요. 힌두교에서는 브라만교 시절부터를 힌두교라고 부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브라만교가 불교의 좋은 점을 채용해서 다시 종교화한 것이 힌두교입니다. 유교의 경우도 비슷해요. 한나라 시기에 유교가 번창하다가 수당 시기에 불교가 번성한 후 송나라 시기에 불교의 문제의식을 채용해서 새로운 유교가 일어난 게 주자학이에요.

그런 것처럼 인도에서 힌두교가 새로 부흥하기 시작한 게 굽타 시대예요. 굽타 시대에는 불교가 융성하는 가운데 힌두교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그 이후에는 불교가 오히려 힌두교에 밀리게 되었죠. 왕국이 주로 힌두 왕국이 많이 생겼으니까요. 그렇게 밀리면서도 13세기까지는 그래도 독자적으로 내려왔는데, 13세기에 와서 무슬림이 침입하니까 거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불교가 사라졌어요.

이건 마치 기독교가 들어올 때 한국의 상황과 비슷해요.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불교를 탄압했어요. 그런데 기독교가 들어오니까 불교하고 유교가 비슷해졌어요. 지금은 유교가 불교 속으로 들어가 버리다시피 해서 유교라는 게 따로 없잖아요. 그것처럼 힌두교와 불교가 서로 관점이 달라도 무슬림 입장에서 볼 때는 이 둘은 비슷해 보였어요. 힌두교는 혈통적으로 내려오는 것이고 민속 신앙이니까 없앨 수가 없잖아요. 그렇지만 불교는 출가해서 수행하니까 출가자만 죽여 버리고 경전만 불태워 버리면 없애기 쉽단 말이에요. 그래서 불교가 형식적으로 없어져 버렸어요. 그리고 모든 불교 절이 다 힌두 절이 돼 버렸어요. 그래서 오늘날의 모든 불적지는 다 힌두교 소유입니다. 불적지마다 탑꼭대기에 조그마한 힌두 절이 하나씩 다 있어요. 마하보디 대탑마저도 힌두교 소유입니다. 700년 동안 힌두교에서 그 탑을 관리하면서 거기에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인도에서는 불교를 힌두교와 다른 종교로 보지 않고 비슈누 신의 여덟 번째 화신으로 봅니다. 인도 사람들이 불교를 특별히 내세우지도 않지만 불교를 배척하지도 않는 것은 불교를 그냥 힌두교의 한 부분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슬림들이 들어오면서 사찰을 파괴하고 탑을 파괴하고 승려를 죽였기 때문에 불교가 사라졌습니다. 이런 외부적인 압력이 불교가 사라진 하나의 원인입니다. 또 하나는 불교가 민중화하면서 붓다 담마(법)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종교화했기에 힌두교나 불교나 별 차이가 없어졌어요. 티벳 불교도 이름은 ‘불교’라고 하지만 종교의식하는 걸 보면 힌두교 종교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비슷한 예로, 한국의 서원 아시죠?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서원과 절에 가보면 비슷하지 않을까요? 안에 들어가면 불상이 있느냐, 없느냐, 이런 정도의 차이만 있지, 집도 비슷하고 색깔도 비슷해서 둘 다 그냥 한국 문화라고만 생각합니다.

인도의 경우에도 그것이 자이나교든, 그것이 불교든, 그것이 힌두교든, 그건 인도 문화예요. 불상 새기던 사람이 힌두 신상 새기고, 힌두 신상 새기던 사람이 자이나 신상을 새기는 겁니다. 조각하는 사람이야 힌두교에서 돈 주면 힌두 신상 새겨주고 불교에서 돈 주면 불상 새겨주는 거예요. 아잔타-엘로라 석굴도 보면 바위에다가 자이나교 굴도 파고, 불교 굴도 파고, 그 옆에 또 힌두교 굴도 파 놨잖아요. 우리도 절에 단청할 때 불교와 크게 관련 없는 내용도 그리잖아요. 마찬가지로 그 사람들도 불교 절이어서 안에는 불상을 모시지만 기둥에는 신상도 새겨놓고 하는 거예요. 모두 인도 문화니까요.

인도의 불교는 인도화한 불교입니다. 원래 부처님은 비인도적인 문제의식을 가졌는데 나중에 불교는 인도화한 불교가 됐어요. 지금 한국 불교는 인도에서 인도화한 불교를 받아들인 거예요. 그래서 지금의 한국 불교는 이미 힌두화 된 불교라고 이해하시면 돼요. 그래서 우리가 행하고 있는 종교로서의 불교는 거의 90퍼센트가 힌두의 종교적인 입장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경전을 읽으면 차이가 많지만, 종교의식이나 이런 건 별 차이가 없어요.

그래서 불상 뒤에 탱화를 그릴 때도 사천왕상이며 대범천이 들어가고 신중단도 있잖아요. 신중단(神衆壇)이라는 게 인도 신들을 모아놓은 거예요. 인도는 신이 많잖아요. 신중(神衆)이라는 건 ‘신들’이라는 뜻이에요. 신들을 거기다 다 그려놓고 신이 불법을 옹호한다고 한 거예요. 인도인들이 온갖 신을 믿었지만 부처님은 이걸 배격하고 법을 전했는데, 나중에 종교 화하면서 인도의 신들이 모두 불법을 옹호하는 신으로 전환되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상카시아에 가면 부처님이 하늘나라에서 내려올 때 양쪽에서 부처님을 시립 해서 내려오는 신이 브라만과 인드라입니다. 지금은 인도의 최대 신이 시바와 비슈누이지만 그 당시에는 브라만 하고 인드라였거든요. 일반인들에게 부처님이 얼마나 위대했는지 부처님이 신보다 더 높다고 한 거예요. 그래서 여래를 천인사(天人師)라고 하잖아요. 붓다는 사람과 신들의 스승이라는 뜻이에요. 불교인들은 붓다의 개념을 신 위에 둡니다. 신을 배격한 게 아니라 신을 붓다 아래에 거느려 버리는 식으로 해서 인도의 전통사상을 포용했죠. 우리가 산신 믿고 칠성 믿는 전통신앙을 절 안에 포용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외부에서 무슬림이 침공해 오니까 불교가 힌두교와 섞여 비슷해진 속에 불교 형식은 없어지고 힌두 형식만 지금 남아 있어요. 그래서 인도 사람들은 불교가 꼭 따로 있어야 될 필요성을 잘 못 느껴요. 인도 사람들은 ‘힌두교 안에 불교가 다 들어 있지 않냐’ 이렇게 생각해요. 우리가 볼 때는 전혀 아니지만요.

그런 역사 속에서 현재 불교가 남아 있는 곳은, 북쪽으로는 히말라야 산맥을 쭉 따라 분포된 티벳 불교입니다. 동부로는 미얀마 땅을 따라서 테라밧다(남방불교)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암베드카르(B. R. Ambedkar)가 개종을 하면서 불교인이 좀 늘었어요. 암베드카르는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법무부 장관이에요. 오늘날 인도 헌법을 만든 사람이 닥터 암베드카르예요. 이분이 보기에 힌두교를 가지고는 계급 해방을 못 하고 신분 차별을 못 벗어나는데, 붓다의 가르침은 신분 차별을 부정했잖아요. 본인이 독립운동을 했으니까 기독교로 개종을 하기는 어렵고, 그래서 불교로 개종하면서 그 카스트가 통째로 다 불교로 개종을 해버렸어요. 그 수가 한 200만 됩니다. 또 상카시아에 가면 석가족이 있습니다. 자기 선조들이 부처님이라는 걸 이제 알아서 힌두에서 불교로 개종한 석가족이 많습니다. 그 수가 30만 정도 돼요.

그래서 현재 인도에서는 불교인의 수가 600만에서 700만 정도 됩니다. 인도 전체 인구의 0.5퍼센트 정도니까 크게 눈에 안 보이죠. 이게 인도 불교의 현실입니다. 이중에 가장 파워가 있는 것은 그래도 암베드카르 계열의 불교예요. 이 사람들은 계급 해방을 주장하는 정치운동을 하잖아요. 그래서 천민을 중심으로 하는 당이 있어요. 국회의원도 수십 명을 배출하고 있고, 지방 정부를 장악한 경우도 많고, 연정 하면 대통령도 돼요. 지금 대통령은 아닙니다만 코빈드 전 대통령이 천민 계급 출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인도에서 새로이 영향을 미치는 것 중에 고엔카(Goenka, 고엥까) 센터가 있습니다. 이건 전 세계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고엔카는 미얀마에서 태어난 인도계인데 원래 장자, 즉 사업하는 사람이었다가 미얀마 스님한테서 위빠사나(Vipassana)를 배워서 인도로 돌아와 엄청나게 붐을 일으켰죠. 지금은 세계적으로 몇백 개의 명상 센터를 갖고 있습니다. 인도 안에도 100여 개 있어요. 어지간한 도시에는 다 있어서 위빠사나를 가르치죠. 이 사람은 승려가 아니고 재가 수행자입니다. 종교는 따지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수행하기 때문에 인도의 상류층 사회에서도 고엔카 센터에 가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이 많이 생겼어요. 한국에도 센터가 하나 생겼고, 미국에는 이미 수십 군데 있습니다.

석가족은 ‘우리가 부처님 종족이다. 부처님이 우리 할아버지다’라고 하면서 개종 운동을 하고 있고, 암베드카르 불교는 불교 중에서도 계급 해방 운동을 하는 쪽에 있습니다. 이렇게 인도에 지금 새로운 기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만, 앞으로 어떤 바람이 불지는 지켜봐야죠.”

성지순례를 마치자마자 피곤한 몸을 이끌고 2시간 넘게 열정적으로 강연을 해준 스님에게 델리 교민들도 큰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참석한 교민들과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문화원 식당에서 조촐하게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강연을 열심히 들은 한 분은 스님에게 “최근에 크게 웃을 일이 없었는데, 스님 말씀 듣고 정말 많이 웃었습니다. 촌철살인에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라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고, 또 한 분은 “인도 불교에 대해 궁금했던 점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된 느낌이다” 라며 기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오늘 밤 스님은 델리 교민 분 집에서 하룻밤 머물 예정입니다. 내일은 오전에 델리 불자회 분들과 대화 시간을 가진 후 오후에는 로힝야 난민촌에 가스스토브 10만 개를 지원하는 전달식을 하기 위해 방콕 콕스 바자르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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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baraj

The birthplace of buddha was Nepal (lumbini) not a india.

2020-05-08 19:50:47

김영란

신이 아닌 인간 붓다.
그래서 더 위대하게 느껴집니다.
2600년전 부처님을 만나게 해 준 스님께 감사드립니다.

2019-02-01 10:19:41

고경희

자각. 알아차림~변화~가슴 뭉클한 단어들~

2019-01-25 19: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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