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1.17 인도성지순례 13일째 (상카시아)
“상카시아 탑 앞에서 부른 어머님의 은혜...”

상카시아 Sankasya

마지막 10대 성지, 상카시아는 부처님이 도리천에 올라가 3개월 간 어머니 마야 부인을 위해 법을 설한 후, 하강한 곳이라고 알려진 곳입니다. 이 곳에는 석가족의 후예인 불교인들이 아직 살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떠난 지 13일째 되는 날입니다.

새벽 3시 20분에 일어나 짐을 챙겨 버스에 올라탄 순례단은 4시 정각에 쉬라바스티를 출발했습니다. 버스가 출발하자 곧 새벽예불과 천일결사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버스에 불이 꺼지고 모두들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쉬라바스티에서 상카시아로 가는 여정은 10시간에 이르는 대장정입니다. 성지순례 기간 중 가장 먼 거리를 이동하는 일정이기도 합니다. 

순례자들이 부족한 잠을 채우는 사이 버스는 자욱한 안개 속으로 달렸습니다. 한참을 달리다가 사탕수수밭 옆 넓은 공터가 있는 곳에 버스를 세우고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매일 비슷한 반찬이지만 아침 햇살을 받으며 오순도순 먹는 도시락이 무척 맛있습니다.

다시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리다 스님이 _“곧 강가강이 5개의 지류로 나눠지기 전의 원류가 되는 강가강을 지날 것”_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강변 모래사장 위에 기도를 하기 위해 모인 힌두교 순례자들이 천막을 치고 있는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새벽 4시에 쉬라바스티를 출발한 버스는 오후 1시 30분이 되어서야 상카시아에 도착했습니다. 약 10시간이 걸린 셈입니다. 순례자들은 버스에서 내려 가사를 수하며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상카시아 탑을 돌았습니다.

어머니의 은혜는 가이 없어라, 상카시아 탑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부인은 부처님이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돌아가셔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느 해 안거 때 하늘의 도리천궁으로 가셔서 마야 부인에게 법을 설하고 하강하셨다고 합니다. 이후 아쇼카 왕은 이곳에 석주와 대규모 탑을 세웠습니다.

탑을 돈 후 스님은 이 곳에 탑을 세운 배경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주었습니다.

“이곳 상카시아에서의 가르침은 부처님의 담마, 진리의 성격보다는 세상에서 흔히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효(孝) 사상이 들어있는 대표적인 일화입니다.

부처님께서 어느 해 안거 때 3개월 동안 아무도 부처님을 뵙지 못했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안거가 되면 3개월 간 늘 대중과 함께 머무시는데, 그 해에는 어느 누구와도 함께 보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부처님 소식을 궁금해 했습니다. 어디에 계시는지 궁금하니까, 그 중 신통력이 가장 뛰어난 목갈라나에게 부처님이 계시는 곳을 알려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목갈라나가 자신의 신통으로 이 세상을 다 살펴봐도 안 계셨습니다. 그 다음 하늘 세계를 훑어보니 부처님께서 도리천궁에 계셨습니다.

욕계에는 6개의 천상계가 있는데 바로 사왕천,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그리고 마왕이 있다고 하는 타화자재천입니다. 도리천은 이 중 두 번째 천상으로 수미산 꼭대기에 있고, 33천이라고도 부릅니다. 이곳은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야 부인이 있는 곳입니다. 마야 부인은 싯다르타 태자를 낳은지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은 어머니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고 그 공덕으로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았는데, 정작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기에 이 좋은 법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도리천에 계신 어머니를 위한 설법을 하러 안거 동안 도리천에 가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런 일화는 종교적인 의미가 커요. 석가족의 수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상카시아 주변 지역에 석가족이 계속 머무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이런 일화에 대한 그들의 종교적 귀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목갈라나의 신통력을 통해 부처님께서 도리천에 계시다는 것은 알게 되었습니다. 대중들이 그 다음으로 궁금해 한 것은 안거가 끝나는 날 부처님께서 어디로 내려오실 것인가, 부처님을 어디로 마중 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중들은 다시 목갈라나에게 부처님께서 어디로 내려오실 것인지 여쭈어봐 달라는 청을 합니다. 목갈라나는 신통으로 도리천에 올라가서 부처님께 여쭈어보니 부처님께서 ‘상카시아 성 밖으로 내려갈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평소에도 성 안으로 들어가는 경우는 별로 없이 주로 성 밖에 머무셨습니다. 그렇게 안거가 끝나는 날 상카시아 성 밖에 대중들이 부처님을 마중하기 위해 운집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상카시아로 내려오실 때 도리천이 신들에게 부탁해서 부처님이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을 만들어, 부처님이 가운데로 내려오시고 한쪽에는 제석천(인드라천)이 일산(日傘)을 들고 내려오고 다른 한쪽에는 브라만천(범천)이 불자(拂子)를 손에 쥐고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본떠 불상이 만들었습니다. 불상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계단 3개에 발자국만 그리곤 했었습니다. 불상이 나오기 전에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은 발자국이었고, 그 이전에는 보리수 나무였습니다.

상카시아 일화와 함께 전해지는 이야기는 당시 어느 비구니 스님이 부처님을 마중하면서 ‘부처님, 제가 가장 먼저 부처님을 뵙습니다’ 하고 은근히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사리불과 마하가섭이 함께 했지만, 자기가 대중들 가장 앞에 서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아니다.’ 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니 자기가 가장 앞에 서 있는데도 부처님께서 ‘가장 먼저 마중 나온 사람은 수보리 존자다.’ 라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법을 보는 자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 법을 본다. 여래를 본다는 것은 곧 법을 보는 자다.’

그때 수보리는 영축산에서 정진을 하고 있다가, 부처님을 마중 가기 위해서 일어서는 순간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쳐서 다시 그 자리에 앉았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그걸 아시고 그 이야기를 했는데, 이건 형상보다 법(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는 일화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도 온갖 천상의 신들이 꽃비로 공양을 올리지만 ‘이것이 제1의 공양이 아니다.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하는 것이 제1의 공양이다.’ 라고 말씀하신 일화도 법(法)의 중요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슬퍼하는 아난다 존자에게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비록 육신은 너희를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희 곁에 남아 있으리라.’ 라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또 ‘계율을 지키고 있으면 나와 함께 있지 않아도 늘 나와 함께 있는 것과 같고,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비록 나와 함께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를 모른다.’ 라는 말씀을 통해 계율의 중요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런 다양한 일화들은 모두 우리가 바른 행을 하고 정신을 맑게 하여 늘 깨어있는 것이 부처님을 보는 것임을 강조하는 이야기입니다. 금강경에서도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라고 표현하는데, 이것도 ‘무릇 상이 있는 것은 모두 다 허망하다. 상이 있는 것은 무상하고, 항상함이 없고, 공(空)하다고 보는 것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부처님과 깊이 관계된 장소들이 8대 성지가 되었습니다. 아쇼카 왕 당시에 이미 8대 성지는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부처님 열반 후 200여년 경이 지난 후 아쇼카 왕이 집권했으니까 이러한 설화는 아주 초기부터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설화는 종교적인 믿음을 가진 관점에서는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믿음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 수행적 관점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습니다. 해석을 하려면 그 설화가 만들어진 배경을 알아야 하는데, 현지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이 사람들도 주로 믿음에 기초하기 때문에 자세한 역사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배경에 대해 물어보면 오히려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에 상카시아로 하강하셨다는데 뭐가 더 궁금하냐고 해요. (모두 웃음) 그래서 여기에 있는 석가족들은 법(法)에 대해 잘 몰라도 믿음이 강한 편입니다.

부처님께서 상카시아로 하강한 날은 음력으로 9월 15일입니다. 우리 달력으로 따지면 10월 중순경이고, 인도 달력으로는 7월 30일입니다. 인도 달력이 우리 음력보다 2개월 느립니다. 그래서 인도는 한 해 시작은 우리(양력) 기준으로 3월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백중 행사는 인도 달력의 날짜를 따와서 음력 7월 15일에 합니다. 인도 달력으로는 이 날이 연중 7번째 달의 마지막 날입니다. 보름날이 우리는 15일이지만, 인도는 그 달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는 하강하는 날이 되면 석가족들이 대략 10,000명 정도 모입니다. 많이 모인 해는 100,000명까지도 왔다고 합니다.

저기 위에 보이는 작은 탑은 힌두 사원인데, 불교가 쇠퇴한 후 상카시아 탑 위에 힌두 사원을 만들어서 약 700년 간 사용해 온 거예요. 그래서 이곳이 중요한 장소인 것은 알지만 탑을 복원하는 것은 쉽지 않아요. 불자들에게는 저 탑이 불교 탑이고, 힌두교도들에게는 힌두 탑입니다. 그래서 30년 전에는 둘 사이에 충돌이 있었습니다. 여기 들어오는 입구에 경찰이 주둔하는 모습을 보셨을 텐데 그 충돌 이후에 이 지역에 경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당시 제가 이곳에 왔을 때도 분쟁이 심해서 이렇게 조언해 주었어요.

‘성지를 가지고 분쟁하는 모습은 좋지 않고, 또 힌두교 사람들이 그 탑을 700년 동안 사용해왔으니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 탑이 자기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니 그 옆에 땅을 하나 사서 탑을 새로 세우고 더 이상 충돌하지 마라.’

대신 이 말이 씨가 되어서 지금 탑을 하나 지어줘야 해요. (모두 웃음)

그래서 현재 땅은 사두었는데, 아직 탑은 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큰 탑을 쌓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상카시아 석가족 사람들 신앙의 중심이 될 수 있는 탑을 하나 세우려고 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담마는 아직 부차적입니다. 우선 종교적인 상징물이 하나 있어야 하고, 그 후에 법을 가르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이곳은 아직 분쟁이 있는 곳입니다.”

스님의 설명이 끝나고 경전을 함께 독송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성지순례의 마지막 경전 독송이었습니다.

상카시아에 대한 경전 독송 후 마지막으로 부루나존자의 전법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부루나존자는 아주 거칠고 사나운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도 기꺼이 들어가서 전법을 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 상카시아가 이번 성지순례 일정 중에서 마지막으로 순례하는 곳입니다. 마지막으로 이곳을 참배를 하면서 두 가지를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첫째, 부모의 은혜, 조상의 은혜, 선조들의 은혜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둘째, 전법입니다. 전법을 하는 것이 불교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아셔야 합니다. 전법을 할 때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는지를 부루나 존자가 보여주었어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어떤 반대나 해침을 주더라도 그들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 법을 전하러 내가 갔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법을 전하는 자세에 대해서 되새겨 보면 좋겠어요.

앞으로 여러분들이 서방에 법을 전하려면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될 수도 있어요. 그때는 ‘그들이 비난할지언정 때리지는 않는다’ 라고 생각하고, 때린다면 ‘때릴지언정 죽이지는 않는다’, 죽인다 하더라도 ‘제행이 무상하니 그들이 나를 열반에 들게 하는구나’ 이렇게 긍정적인 자세를 갖는 것이 진정한 인욕(忍辱)입니다. 이를 악다물고 참는 게 인욕이 아니라 참을 것이 없는 게 인욕입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난 후 다함께 법륜 스님이 쓴 발원문을 함께 독송하며 같은 마음으로 발원을 해보았습니다. 발원까지 마친 후 마지막 예불을 드렸습니다.

“이번 예불이 가사를 수하고 수행자가 돼서 그것도 8대 성지에서 올리는 마지막 예불 공양입니다. 옷매무새를 바로하고 마음가짐을 바로 해서 부처님께 이번 성지순례 마지막 공양을 올리겠습니다.”

스님의 말씀에 따라 대중들은 마음가짐을 새로이 하고 두 손을 모아 예불 공양을 드렸습니다.
스님은 예불에 이어 축원 및 발원 기도를 하였습니다. 성지순례를 무사히 마친 것에 감사드리고, 순례한 인연공덕으로 한반도의 평화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발원하는 스님의 모습에 순례객들도 합장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했습니다. 

발원 기도 후 다른 성지와 달리 해탈주를 함께 독송했습니다. 이곳은 부처님이 어머니의 은혜를 갚고자 했던 의미가 있는 곳이기에 우리들도 돌아가신 부모님과 조상 영가님들을 생각하며 왕생극락을 발원하였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부모님 계시죠? 부모님의 성질이 더러워서 자랄 때 야단을 많이 맞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건 우선 제쳐두고 그래도 부모님이 낳아주고 키워줬으니까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거잖아요. 부모님의 낳아준 은혜, 키워준 은혜를 생각하면서, 또 종교와 법(法)을 떠나서 우리에게 가장 은혜로운 사람이 부모님입니다. 그러니 다같이 ‘부모의 은혜’ 노래를 함께 불러 봅시다.”

스님의 제안에 따라 다함께 ‘어머님 은혜’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은혜는 가이 없어라.”

머나먼 이국에서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니 그 마음이 더욱 애틋합니다. 순례자들은 문득 사무치는 마음에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습니다.

명상으로 그 마음까지 가만히 지켜본 뒤 순례객들은 상카시아 탑을 돌아 나왔습니다.

석가족의 환영

다시 버스를 타고 5분 쯤 가니 스님이 상카시아 석가족을 위해 담마 센터를 지어주려고 마련한 부지에 다다랐습니다.

석가족들은 순례단을 무척 환영해주었습니다. 부지로 들어서자 석가족 사람들은 순례객 한 명 한 명에게 환영의 의미로 꽃목걸이를 걸어주었습니다.

스님에게 꽃목걸이를 계속 걸어주자 스님은 뒤에 오는 순례단의 목걸이가 부족할까봐 정중하게 사양했습니다.

스님의 우려와 달리 모든 순례객들에게 꽃목걸이가 돌아갔습니다. 꽃목걸이를 걸고 몇 걸음 걸어가자 이번에는 흙으로 만든 잔에 짜이를 건네주었습니다. 따뜻하고 달콤한 짜이 한잔을 들고 부지 안쪽으로 더 걸어가자 알록달록 예쁜 천으로 무대가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무대 앞으로 순례객들이 앉을 수 있도록 자리도 깔아져 있었습니다.

제 30차 성지순례 회향식

순례단이 모두 자리를 잡고 앉자, 제30차 인도성지순례 회향식이 시작 되었습니다. 스님은 성지순례를 회향하는 마음 자세에 대해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둥게스와리에서 수자타 아카데미 학생들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이곳 상카시아에서는 부처님의 후예인 석가족(샤카족)에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석가족을 단순히 종교가 같은 불자라고 느끼지만, 석가족들은 의식 속에 자기들의 친척을 만나는 것 같이 느낍니다. 여기서 불자는 석가족밖에 없으니까 불자라고 하면 이 사람들은 다 석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마도 환영하는 마음이 따뜻하리라고 짐작합니다.

성지순례는 물론 한국에서 시작했고, 끝나는 것도 한국에 돌아가야 끝이 나지만, 우리가 가사를 입고 수행자로서 공양을 올리고 순례를 하는 것은 이것이 끝입니다. 사르나트에서 가사를 받았고 오늘 이곳에서 가사를 반납하겠습니다.

그런데 가사를 반납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 질서를 안 지켜요. (모두 웃음) 그래서 ‘위의가 참 중요하구나’ 이런 생각을 했는데, 가사를 반납한다고 순례가 끝난 것은 아니에요. 오늘 가사를 반납하는 의식을 하면서 성지순례를 끝낸다고 하지만, 아직 우리가 밥을 해먹고 도시락을 싸는 공동생활 전체 일정이 남았습니다. 내일 아그라에 가서 관광을 하긴 하지만 그래도 단체생활이기 때문에 질서를 지켜주세요.

10대 성지를 쭉 둘러보고 부처님의 3대 진신사리탑을 보니 어땠어요? 첫째는 ‘부처님이란 분이 참 위대하신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네!”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나 활동하셨다고 해도 위대하시겠지만, 시간이 2,600년 전인데다 장소가 한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고 인도라는 사실을 생각해봐야 해요. 인도라는 나라가 지금도 사는 방식이며 사고방식이 이런데, 그 당시에 여기에 태어나셔서 이런 문화 속에서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경전의 말씀을 하셨다는 것 자체가 제가 볼 때는 가히 불가사의한 일이에요.

두 번째로, 출가 승단 안에서나마 계급의 평등을 실행하셨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말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모델은 만들었어요. 그것을 사회적으로까지 다 실현시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것이 얼마나 위대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죠. 인도에서 태어나신 분이지만 남기신 말씀이나 실천하신 것을 보면 인도를 뛰어넘어 가히 혁명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500년쯤 지나다 보니까 불법이 세상을 변화시킨 게 아니라 세상이 오히려 불교 속으로 들어와서 불교가 다시 인도 문화화 해버린 폐단이 생겼기 때문에 대승불교로 가는 운동이 새로이 일어났어요. 그러나 그것도 시간이 흐르면서 또 인도화되었습니다.

대중화라는 게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습니다. 대중화가 되면 세속적인 게 많이 들어옵니다. 대중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세속적인 문화, 까르마를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소위 엘리트층은 그걸 고집할 줄도 알지만 버릴 줄도 아는데, 대중은 고집할 줄도 잘 모르고 버릴 줄도 잘 몰라요. 나중에 밀교에 이르면 가르침만 불교지 모든 의식은 힌두교와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완전히 인도화됐다, 혹은 종교화됐다, 이렇게 볼 수 있겠죠.

한국에 들어와 있는 불교의 의식도 보면 그래요. 중국화와 한국화를 거치기도 했지만, 한국 불교의 종교적인 측면은 사실 인도의 전통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도 볼 수 있어요. 윤회사상부터 시작해서 대부분의 종교의식을 보면 인도의 문화가 그대로 묻어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담마(Dhamma, 法)에 근본을 두고 종교 문화적인 부분을 포용한 게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인 담마는 오히려 없어져버리고 이런 인도적인 종교 문화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한국 불교의 현재 모습이에요.

그래서 첫째, 붓다가 그런 인도의 환경 속에서 깨달음의 길로 가셨다는 게 정말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고요. 또 현실 속에서는 결국은 대중이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의 위력이 엄청나게 세구나 싶습니다. 아무리 성인이 길을 제시해도 결국 세월이 흐르면 사람들의 일상이 세상을 점령하게 된다는 걸 우리가 인도 현지에서 많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붓다가 가졌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야만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붓다 당시보다는 지금이 좀 더 쉽지 않을까요?’

저는 이런 생각을 해요. 지금이 어렵다고 하지만 그래도 부처님의 법을 전하기가 2,600년 전 인도보다는 오늘날의 미국이나 유럽이나 한국이 쉽지 않을까요? 만약 오늘날의 전법이 더 어렵다면 여러분들은 엄청나게 위대한 사람들이에요. (모두 웃음)

오늘날이 더 쉽다면 여러분들이 그렇게 위대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습니다. 시대가 바뀌어서 누구나 다 이 법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오늘이 더 어렵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진짜 천금 같은 존재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 법을 우리가 오늘날 사회에서 좀 보편적으로 실현하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불교라는 어떤 형식과 울타리에만 가둬놓을 게 아니라, 종교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더라도 그 가르침의 보편성을 모든 인류가 수용을 하게 된다면 개개인은 더 행복해지고 우리 사회도 좀 더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합니다.

다만 여기서 생각해볼 게 있어요. 불교를 공부해보면 불교가 개인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는 데는 확실히 탁월하다고 여겨지는데, 과연 불교인들이 사회적인 변화까지 가져오는 실천력을 갖고 행해낼 수 있느냐란 문제는 정말 우리가 깊이 생각해봐야 해요. 부처님의 일생을 살펴보면 상당부분 그런 사회적 실천력을 갖고 계셨지만 오늘날은 근본불교를 계승한다는 남방불교까지 살펴봐도 억압된 자의 편에 서는 게 좀 부족해 보입니다. 분노로써 저항한다는 게 아니라 붓다처럼 평화롭게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변화를 가져오는 실천력이 담보 되느냐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 과제예요.

지금 서양에서 불교가 많이 유행하고 있는데, 한국에 비하면 좀 더 부처님의 가르침, 즉 담마에 입각한 불교를 수용하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그 사람들은 종교적인 면에서는 이미 기독교가 있기 때문에 굳이 불교를 새로운 종교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거든요. 그래서 종교를 넘어서는 수행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수행에는 좀 개인주의적이고 약간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있어서 이런 사회적 실천력을 갖추는 데까지는 아직 가지 못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이런 실천력을 갖춘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인게이지드 부디즘(Engaged Buddhism)’, 즉 참여불교라는 이름으로 모임을 갖고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아직은 소수의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정토회의 활동은 이런 사회적 실천력을 어떻게 담보해낼 것이냐가 과제입니다. 이는 정토회의 발전이나 한국 문제를 넘어서서 세계 불교인에게도 우리가 앞으로 모델을 만들어야 할 일이에요. 그래서 매년 6월에는 동남아에서 비구 스님들과 비구니 스님들이 정토회를 방문합니다. 방문의 핵심은 어떻게 정토회가 젊은이들과 연계하고 또 사회적인 실천력을 담보해내는가, 자원봉사의 원리나 적용은 어떻게 돼 있는가, 이런 걸 일주일 동안 와서 견학하고 돌아갑니다. 이것이 우리 정토회가 앞으로 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정토회 10대 과제에도 있지만, 정토회는 꼭 정토회나 불교라는 이름만 가진 사람과 함께하겠다는 게 아니라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나라 사람이거나 다른 종교인이라도 함께 손잡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르침의 형식보다는 붓다의 가르침인 담마와 내용이 유사한지 여부가 중요하기 때문에, 비록 타 종교인이거나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리와 진리의 입장에서 동일한 방향을 갖고 있다면 종교라고 하는 문화적 형식이 조금 다르더라도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여러분들에게 제일 소중한 것은 성지순례를 통해서 개인이 어떤 교훈을 얻었느냐일 것 같아요. 집에 돌아가서 어떤 삶의 변화가 일어날까요? 입 열면 고생했던 얘기만 할까요?‘인도 가서 똥 밟았다’, ‘인도 가서 오줌 누는 데 힘들었다’, ‘추웠다’ 이럴 수도 있겠죠. (모두 웃음)

이런 것도 인도를 방문한 하나의 추억이 되겠지만, 여러분들이 여기 와서 이렇게 생활하면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첫째,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거냐를 생각해보셨으면 해요. 인도의 아이들을 보면서 ‘과연 나는 어떤 삶을 지향하고 내 재능을 어떻게 세상에 써야 할 거냐’ 이런 생각을 해보면 좋겠어요. 둘째,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서 ‘내가 수행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생각해 보셨으면 해요.

이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되새겨 본다면 지난 15일의 시간과 몇 백만 원의 돈이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단기적인 여행을 한 것에 그쳤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여러분께 좋은 여행의 경험이 됐으리라 믿고, 마무리를 잘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고생을 시켜서 미안합니다. 항상 ‘빨리빨리’라고 독촉하고 밀어붙여서 죄송합니다. 고생을 시키려고 하다 보니 저도 고생을 좀 했어요. (모두 웃음)

오늘 회향하면서 고생했던 것에 대한 분별심은 다 내려놓으시면 좋겠습니다. 뭔가 부족한 게 있었다면 법사님들 부족한 것까지 제가 대신해서 다 참회하겠습니다. (모두 박수)

좀 아쉽죠? 수행 좀 더 하고 싶죠? (모두 웃음) 아닌가요? 속이 시원해요? 그러면 가사 반납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스님이 격려 말씀에 모두들 크게 웃으며 기쁜 마음이 되었습니다. 비록 성지순례는 이렇게 끝이 나지만 수행자로의 삶은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곧이어 가사를 반납했습니다. 먼저 스님을 비롯하여 순례를 이끌어주신 법사님들께 삼배를 했습니다.

스님은 불가에서는 일곱 번까지 출가를 거듭할 수 있다며 “한 번 나갔다오겠습니다.” 하고 절하는 거라고 하자, 가사를 반납하며 아쉬웠던 마음이 털어졌습니다. 또 상카시아 탑을 바라보며 부처님께 ‘앞으로도 수행 잘하겠습니다.’ 하고 다짐을 했습니다.

모두들 아쉬움이 컸는지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15일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24시간 고락을 함께했기에 정이 많이 들었나봅니다.

사홍서원을 끝으로 회향식을 마친 후 석가족 사람들이 준비한 성지순례단 환영 행사가 열렸습니다.

상카시아에는 전 인도에서 석가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데 약 200만 명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대부분 힌두교이고 절도 없고 해서 스님은 오래 전부터 이곳 석가족 집성촌 마을에 불상 점안식을 해주고 법회와 수련도 일 년에 한 차례씩 해오고 있습니다.

먼저 석가족을 대표하여 YBS(석가족 청년회) 회장 수바스지의 인사가 있었습니다. 오늘 행사를 위해 석가족 10개의 시군에서 왔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이곳까지 오셔서 성지순례를 무사히 마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을 환영하기 위해 10개의 시군에서 석가족들이 왔습니다.

스님께서 이 곳에 오시면 밤에 오셔서 새벽에 나가고 없으십니다. (웃음) 쉬라바스티처럼 이 곳에서 하루를 더 머물러 주십시오. 그래야 우리 석가족 사람들이 천천히 많은 분들을 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두 박수)

400여 명의 식사를 준비하느라 고생했을 석가족 사람들에게 순례단은 큰 박수와 환호를 보냈습니다.

스님에게 각자 마을에서 준비한 꽃을 전달하고 기념사진을 찍은 뒤 아이들의 춤 공연도 선보였습니다. 소박하지만, 하나하나 얼마나 스님과 순례단을 환영하는지 그 마음이 전해졌습니다.

한편, 마당에는 석가족 사람들이 400여명의 순례단을 위해 정성껏 준비한 인도 전통 음식인 짜파티와 달, 사부지, 야채가 준비되어있었습니다. 순례단은 손을 씻고 인도인들처럼 손으로 저녁식사를 해보았습니다.

이렇게 석가족들과 순례단이 서로 조금씩 친해져갈 무렵, 이제는 행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식사 후 저녁에는 성지순례 회향의 기쁨을 다시 상기하며 조별로 마음 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서로 정이 많이 들었나 봅니다. 나누기가 진행되는 방마다 웃음과 박수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순례단이 잠자리에 든 사이 스님은 석가족들이 모여 있는 상카시아 인도 절로 이동해 석가족들을 위해 법문을 했습니다. 원래 성지순례를 마치고 상카시아에서 석가족들을 위한 법문이 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내일 모레 스님이 로힝야 난민들에게 가스 버너 10만 개를 전달하는 일정이 급히 잡히면서 오늘 석가족들을 위해 법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일은 무굴제국의 요새였던 아그라로 향합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전체댓글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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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눈으로 본 성지순례였습니다.감사합니다

2019-01-28 17:14:08

김혜경

스님 감사드립니다. 항상 감동이 됩니다. 건강하시길^^

2019-01-21 20:41:35

권향복

스님
존경합니다

2019-01-21 11: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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