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1.15. 인도성지순례 11일째 (삐쁘라하와, 천불화현 탑)
“천 분의 부처님이 나타난 곳, 그 이유는...”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 Piprahwa

오늘은 카필라성 석가족이 세운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을 친견하고 기원정사 쉬라바스티로 출발하여 부처님께서 천가지 모습을 나투셨다는 천불화협 탑터를 참배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떠난 지 11일째 되는 날입니다.

새벽 5시, 다시 네팔 국경을 통과해서 인도 삐쁘라하와에 석가족이 세운 진신사리탑을 친견하러 출발했습니다. 버스 안에서 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마치자 곧 네팔-인도 국경에 다다랐습니다.

두 시간 만에 네팔-인도 국경 출입국 수속을 밟았습니다. 국경이 없다면 걸어서 가도 도착할 거리였지만, 국경을 통과해 4시간을 돌아가야 했습니다.

국경수속을 마친 버스는 울퉁불퉁 비포장된 시골길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약속대로 네팔을 넘어올 때 늦게 온 차량이 오늘은 먼저 출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오늘 가장 선두에 선 차는 5호차였습니다. 스님도 함께 차량에 탑승하여 순례객들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어떻게 할 만해요? 죽을 지경이에요?”

순례객들은 웃으며 할 만하다며 크게 대답했습니다. 차창 너머로는 연둣빛 사탕수수 밭과 노란 유채꽃 밭이 펼쳐졌습니다. 간혹 눈이 마주치는 아이들은 활짝 웃으며 손을 힘껏 흔들어주었습니다.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 Piprahwa

아침 9시, 덜컹 거리며 달린 끝에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에 도착했습니다. 국경을 먼저 통과한 차량 세 대의 순례객들은 향을 사르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면서 탑을 세 바퀴 돌았습니다.

이어서 예불 공양을 드렸습니다. 예불 공양을 하는 사이 뒤이어 차량 네 대가 도착하고 순례객들이 탑돌이를 하고 함께 예불을 올렸습니다. 진신사리탑터 앞에서 스님은 간절한 목소리로 개인은 행복하고 한반도에는 전쟁이 없는 평화가 정착되어 동아시아까지 평화롭기를 발원하였습니다.

예불과 발원문이 끝나자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이곳은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입니다. 카필라바스투는 네팔에 있고, 랑그람 사리탑도 네팔에 있는데, 왜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은 인도에 있을까요? 이곳에서부터 네팔 국경까지 2km가 채 안 됩니다. 여기 있는 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바로 인도 땅이에요. 그곳에서 왼쪽으로 가면 카필라바스투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가면 룸비니가 나와요.

만약 오늘 아침에 룸비니에서 이 방향으로 바로 왔다면 아마 걸어서도 도착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국경을 통과해서 빙 둘러오니까 먼 곳에 온 것 같이 느껴지지만 실제 위치는 룸비니에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카필라바스투 땅이었는데, 지금의 국경이 카필라바스투를 분단시키고 있습니다.

흔히 진신사리탑을 친견하는 공덕이 크다고 하는데, 우리는 8개의 진신사리탑 중 지금까지 3개를 친견했습니다. 신앙적으로 보면 진신사리탑을 친견하는 공덕이 가장 크고, 법(法)의 이치로 보면 부처님의 8대 성지를 둘러보며 법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공덕이 큰 것입니다. 우리는 성지순례를 하면서 10대 성지와 3대 진신사리탑을 다 친견하니 두 가지 공덕을 다 쌓은 셈입니다.

부처님께서 걸식을 하실 때는 조용히 마을로 걸어가셔서 일곱 집을 차례로 들르셨습니다. 음식을 주면 받고 안 주면 안 받으셨어요. 만약 아무도 안 주면 그냥 빈 발우를 들고 옵니다. 일곱 집을 반드시 다 가야하는 건 아니에요. 처음 두 집을 갔는데 발우가 다 찰 정도의 음식을 얻었으면 거기서 그냥 돌아오면 됩니다. 거지는 밥을 얻은 그 자리에서 먹지만 수행자는 환지본처(還至本處)라고 해서 본래의 그 자리, 수행도량으로 돌아가서 가사를 수하고 먹습니다.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이 몸을 유지하기 위한 양약으로 먹습니다.

그래서 발우 공양을 할 때는 가사를 다 수하고 먹고, 그걸 법공양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우리도 그렇게 가사장삼을 수하고 법공양을 해봅니다. 음식 먹는 데 집중해서 깨어있도록 해봅니다. 둘러앉아서 서로 이야기하면서 먹지 말고, 오늘은 수행자들이 모여서 밥을 먹듯이 조용히 먹어봅니다. 원래 성지에서는 음식을 못 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가짐이 그러하면 우리는 여기서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법공양을 체험해보는 게 됩니다. 마음을 편하게 해서 조용히 먹어보세요. 아시겠지요?”

“네!”

밥을 먹기에 앞서 10분 동안 명상을 하고 공양을 했습니다.

제일 마지막으로 차량 세 대가 도착하여 탑돌이를 하고 진신사리탑 앞에 앉았습니다. 스님은 마지막으로 도착한 팀을 위하여 다시 한 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또 예불 공양과 발원을 한 후 가장 먼저 도착했던 차량 세 대와 출발했습니다.

오늘 순례객들은 세 팀으로 나뉘어 시간은 다르지만 같은 일정을 가졌습니다. 네팔-인도 국경수속을 4백여 명이 동시에 통과할 수 없고, 또 오후에 순례할 천불화현 탑에 4백여 명이 동시에 올라갈 수 없기에 스님은 시간을 최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진행했습니다.

진신사리탑을 나와서 스님은 구걸하는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사탕을 준다고 하면 너도 나도 달려드는데, 스님은 질서 있게 줄만 서면 똑같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줄 서는 것부터 알려준 뒤 똑같이 사탕을 주었습니다.

다음 순례지는 쉬라바스티의 천불화현 탑입니다. 5시간이 걸리는 길입니다. 버스가 출발하자 송수신기로 스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졸려요? 저녁 법회로 질문을 모두 소화할 수가 없어서 버스 안에서 질문을 좀 받도록 하겠습니다. 한 시간 쯤 하고 주무세요.”

비는 시간은 어떻게든 활용하는 스님입니다. 순례객들은 기뻐하며 박수를 쳤습니다. 총 세 명이 질문할 수 있었습니다.

  • 이 좋은 법을 외국인에게도 전하면 좋겠습니다.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전법계획이 있으신가요?
  • 보왕삼매론에서 억울함을 밝히지 말라고 했는데 소송에 연루되었을 때 법정에서 억울함을 밝히면 안 되나요?
  • 전생은 힌두교의 사상이라고 했는데, 부처님의 전생을 다룬 경전은 어떤 검증을 거쳐 경전으로 인정받았나요?
  • 싯다르타가 ‘왜 하나가 살려면 하나가 죽어야 되는가’라는 의문을 가졌다고 했는데, 스님은 그 질문에 어떻게 답변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 대승경전도 역사적 사실인가요?

버스 안 즉문즉설이 끝나자, 순례객들은 단잠을 자기도 하고, 옆에 앉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며 쉬라바스티로 향했습니다.

천불화현 탑

오후 3시, 작은 산 앞에서 버스는 멈췄습니다. 산이 아니라 탑이었습니다. 케사리아 탑이 발견되기 전 까지 가장 큰 탑이었던 천불화현 탑입니다. 스님을 따라 한 줄로 서서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탑 위로 향했습니다.

탑의 중심에 미얀마에서 온 스님과 순례객이 기도를 하고 있어, 정토회 순례단은 사람이 지나다닐만한 공간을 두고 탑을 향해 섰습니다.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하고 삼배를 드린 후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코살라국은 신흥강국이었습니다. 신흥강국의 장점은 풍성한 경제와 강한 군사력입니다. 대신 문화수준이 그리 높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통력처럼 신기한 것을 좋아하고, 삿된 믿음이나 가르침을 많이 따랐다고 해요. 오히려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 대해서는 이해가 부족한 편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왕사성에 3년째 머무르고 있을 때, 사위성의 수닷타 장자가 왕사성에 사업 차 방문을 했다가 친구의 인연으로 부처님의 법을 듣고 지혜의 눈이 열려서 부처님을 이곳 사위성으로 초청합니다. 그리고 왕사성 밖의 죽림정사(竹林精舍)처럼, 이곳 사위성 밖에 이곳 말로 ‘제따바나’ 라고 하는 기원정사(祇園精舍)를 건립하게 됩니다. 수닷타 장자는 부처님의 십대제자에 버금갈 만큼 교단에 큰 기여를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위성 사람들은 대개 삿된 법을 좋아하고, 정법(正法)에는 눈이 멀고 귀가 어두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곳의 불자들이 부처님께 ‘여기 사람들이 삿된 법을 좋아하니 부처님께서도 무언가 기적을 보여주십시오’ 하고 청하니 부처님께서 그 청을 들어주셨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인격을 비추어 봤을 때 의외의 모습이긴 한데, 일단 경전에는 그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어느 날 어느 때에 사위성의 동문 밖에 대중들을 모으시고 망고 씨앗 하나를 땅에 심으셨대요. 조금 있으니까 그곳에서 싹이 터 나오더니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고목나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 망고 열매가 열려 노랗게 익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망고들은 모두 부처님 모양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을 두고 천불화현(千佛化現), 천 분의 부처님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 모습을 보고 사위성 사람들이 감동해서 그 후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코살라국의 왕도 부처님의 법에 귀의해서 신심 있는 제자가 되었는데, 그 분도 처음에는 법에 대해 질문을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훌륭한 왕이 됩니까?’ 이런 질문을 했고, ‘작은 것 가운데 큰 게 무엇입니까?’ 이런 수수께끼와 같은 질문을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런 질문에도 늘 적절한 대답을 해서 결국 그 왕도 부처님의 법에 귀의하고 교단에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그가 바로 프라세나짓 왕입니다.

이곳 사위성은 부유한 도시이다 보니, 천불화현의 자리에 이렇게 커다란 기념탑을 쌓아둔 것 같아요. 케사리아 탑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이 탑이 성지 중 가장 큰 탑이었습니다. 맑은 날 탑 위에 올라가서 주위를 보면 지구가 둥글다는 말을 실감할 정도로 넓은 지역까지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8대 성지 중 왕사성, 바이샬리, 사위성, 상카시아 4개 도시는 기적과 관련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왕사성은 코끼리가 무릎을 꿇은 곳, 바이샬리는 원숭이가 꿀 공양을 올린 곳, 사위성은 천불화현이 이루어진 곳, 상카시아는 부처님께서 도리천에 가셨다가 하강하신 곳입니다. 자, 그럼 천불화현 하신 곳에서 잠시 명상을 하겠습니다.”

스님의 설명이 끝나자 순례객들은 천불화현 탑에서의 옛일을 생각하면서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른 두 팀도 탑을 참배하고 스님의 설명을 들은 후 천축선원으로 향했습니다.

천축선원은 쉬라바스티에 있는 한국 절입니다. 부처님 성지에 있는 흔치 않은 한국 절인데다가 순례자 숙소를 이용할 수 있어서 더 없이 좋은 곳입니다. 순례객들 대부분은 오늘과 내일 이 곳에서 머물기로 했습니다. 4백여 명은 다 수용할 수 없어 근처의 스리랑카 절에도 일부 묵었습니다. 

천축선원에서 순례객들을 위해 따뜻한 무국과 저녁식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순례객들은 무척 감사하며 맛있게 먹었습니다.

즉문즉설

저녁 7시 30분, 천축선원 마당에서 저녁예불을 드린 뒤 저녁법회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천축선원의 주지 대인스님과 총무 역할을 하고 있는 적조행 보살님의 환영인사를 들었습니다.

천축선원에서는 사찰 운영뿐 아니라 순례자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 초등학교를 운영하며 교육기자재와 급식을 제공하고,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도서관 운영과 컴퓨터 교육을 하고 있고, 주말마다 보건소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인스님과 적조행 보살님은 20년째 인도 천축선원에서 지내고 있는데요. 이역만리 먼 타국에서 좋은 일을 하고 계시는 두 분에게 순례객들은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작년보다 포근한 날씨에 천축선원에서 추울까봐 마당에 카펫트도 깔아주었습니다. 활기찬 분위기 속에 법륜스님의 법회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은 먼저 순례 중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중 ‘춘다의 공양’ 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소개드립니다.

“춘다의 공양을 받아들인 부처님의 모습과 태도를 설명하실 때 걸식의 원칙을 지키시느라고 음식을 받아들이셨다고 하셨는데요. 부처님은 제자들의 목숨은 구하시고 당신의 목숨은 내려놓으신 것 같아요. 생명을 구하는 것이 그렇게 소중하다면 내 목숨도 남의 목숨과 똑같이 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음식에 독성이 들어있다는 걸 아셨다고 하니 그 원칙을 살짝만 어기면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어떤 부분에서 이해를 못하고 있는 걸까요?”

“의문을 가질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선 부처님께서는 이미 공양을 드시기 전에 병이 나있었고, 음식에 독성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신 채로 드셨는지, 안 그러면 미리 아셨는지, 그건 후대에 어떻게 기록했느냐의 문제죠.

저는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봐요. 부처님이 음식을 먹기 전에 독성이 있는지를 알았느냐 몰랐느냐 하는 게 그리 중요한가요? 제가 볼 때는 그건 수행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핵심은 그 음식을 먹고 병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취하는 태도입니다. 저 같으면 ‘야, 주려면 좀 똑바로 주지, 그런 걸 주냐!’ 이렇게 짜증이나 감정이 일어날 텐데 부처님께서는 그런 마음이 없으셨어요.

우리가 부처님의 일생을 살펴보았듯이, 부처님은 수행하실 때 이미 죽고 사는 문제를 넘어서셨습니다. 뱀이 몸을 감아도 괜찮았고, 코끼리가 와서 공격을 해도 편안했고, 앙굴리말라가 칼을 빼들고 달려왔을 때도 태연자약하셨잖아요. 우리는 아직 살고 싶은 욕구가 약간은 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만, 붓다는 이미 수행 중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떠나버린 거예요. 그렇다고 일부러 자살할 필요는 없어요. 그러나 인연이 다 되어 죽을 때가 되었는데도 우리는 안 죽으려 하니까 ‘윽’ 이렇게 피하려 하는데, 부처님은 그런 게 없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음식을 주면 음식을 당연히 받으셨어요. 그 사람이 의도적으로 죽이려고 주든 살리려고 주든 붓다는 그런 걸 개의치 않으셨어요. 그냥 주는 대로 받아 드셨고, 병이 나도 병이 나는 대로 거기에 대응을 하셨죠. 이렇게 부처님은 평소처럼 드시고 병이 났을 뿐인데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춘다를 비난하니까 춘다를 위로하는 설법을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이미 3개월 후에 열반에 드신다고 선언하셨고, 이미 자신의 몸이 노쇠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루하루 사는 것을 낡은 수레에 비유했어요. 우리도 고장 난 물건을 억지로 쓸 때가 있잖아요.

그날 춘다의 공양을 안 드셨다면 안 돌아가셨을 거라고 이해하면 안 돼요. 그날 그걸 안 드셨다면 한 3일 있다가 돌아가셨거나 5일쯤 있다가 돌아가셨을 거라는 정도의 차이밖에 없어요. 건강한 사람이 설사했다고 바로 돌아가시지 않잖아요. 몸이 워낙 노쇠한 상태에서 급성장염을 앓으니까 그게 직접적인 사인이 됐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미 몸이 노쇠한 상태에서 공양을 받으신 겁니다. 가령 여러분들도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폐렴이든 뭐든 어떤 병이나 사건이 있어서 돌아가시잖아요. 그렇다고 꼭 그 병 때문에 돌아가신 건 아니에요. 늙어서 마지막 숨넘어갈 때 병명이 뭐냐, 이 문제거든요. 그건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싶어요.

붓다가 먼저 공양을 받았고, 음식에 약간 문제가 있어 보이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주지 마라’ 이렇게 이른 뒤에 당신이 받은 공양은 그냥 받으신 대로 드신 거예요. ‘이걸 먹으면 내가 100퍼센트 죽는데 주니까 일부러 먹어야 한다’ 이런 것은 아니에요. 음식을 받아서 발우에 받아보니까, 또 그 맛을 보니까 이건 조금 상했거나 이상이 좀 있겠다 싶어서 ‘만든다고 수고는 했지만 이건 다른 사람에게는 주지 마라’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보시면 돼요.

이런 모습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건 맞아요. 우리는 살고 죽는 것이 제일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붓다는 이미 수행 중에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고, 그때 이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어진 상태예요. 그래서 마왕의 유혹에서도, 화룡굴에 들어갈 때도, 성난 코끼리가 올 때도, 앙굴리말라가 덤벼들 때도 ‘여래는 두려움이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일부러 죽으려고 마음먹은 게 아니라, 설령 그 음식을 먹고 죽는다 하더라도 여래는 거기에 대한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는 거예요. 춘다의 공양 얘기는 부처님의 이런 인격을 말하는 거예요.”

이 외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경전을 보니 과거에 여러 부처님이 계셨던 것 같은데 성지순례에서는 왜 석가모니부처님의 발자취만 따르나요?
  • 성지순례를 돌아보니 다 벽돌 탑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석탑도 있고 목탑도 있는데, 인도에는 벽돌 탑만 있나요?
  • 깨달음을 얻는데 지식도 필요하지 않나요? 

즉문즉설 끝에 스님은 목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순례객들을 독려했습니다.

“수행이든 뭐든 자기 목표와 정체성이 분명해야 그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성지순례도 성지순례에 대한 자기의 정체성이 분명하면 아무 문제가 안 돼요.

그런데 정체성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여기 온 사람들이 있어요. 주로 처음으로 해외여행 한다고 온 사람들이에요. 이런 사람들은 지금 죽을 지경입니다. 돈 들여 가지고 보름이나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덜덜 떨면서 다니니까 지금 엄청나게 후회하고 있을 거예요. (모두 웃음)

저는 굉장한 의미를 갖고 첫 성지순례를 왔었어요. 그런데 일정을 보니까 네팔까지 와서 룸비니만 달랑 보고 간다는 거예요. 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아침 10시에 룸비니 가서 참배하고 오후에 떠난다고 하길래 새벽 4시에 나가면 카필라성까지 갔다 올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깜깜한 새벽에 나와서 손짓발짓을 해서 조그마한 릭샤를 하나 대절했어요. 카필라바스투 가는데 얼마나 걸리냐고 하니까 한 시간 반 걸린대요. 5시에 출발하면 왕복 3시간, 둘러보는 데 1시간 해서 9시나 10시까지 룸비니 가는 일정에 맞춰 돌아올 수 있잖아요.

그래서 출발하려는데 같이 온 어떤 스님이 어디 가느냐고 물어요. 카필라바스투 간다니까 자기도 간대서 ‘그래, 타라. 가자’ 이렇게 됐어요. 가는데 막 털털거리고 차 뒤가 오픈되어 있으니까 먼지가 계속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먼지 때문에 못 살겠다고 가는 내내 불평을 하기에 제가 도중에 릭샤를 세우고 그 분에게 내리라고 했어요. ‘어디 부처님 성지에 가는데 짜증을 내고 그래요? 내리세요!’ 그랬어요. 이것도 어폐죠. 저도 지금 성질내고 있잖아요. 그쪽은 먼지 때문에 성질내고, 저는 먼지 들어온다고 성질내는 사람 때문에 성질낸 거죠. (모두 웃음)

저는 그때 그런 마음으로 성지순례를 다녔어요. 칠엽굴도 다른 사람들은 앞에서만 보고 그냥 가니까 저는 동굴에 기어들어가 보고 그랬어요. 그때 처음 영축산에 올라갔는데 거기서 산 능선을 타고 죽림정사까지 걸어가서 야단을 맞았어요. 사람이 안 보이니까 잃어버렸다고 난리가 났거든요. 그런 신심으로 다녔어요. 그런 신심으로 다니면 먹고 입고 자는 건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게 없어요. 그러나 그런 자기 목표의식을 안 가지고 있으면 ‘잠자리가 이게 뭐냐’, ‘이건 또 왜 이러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일을 할 때는 목표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도 성지순례는 이런 목표의식이 있는 사람만 가자. 그냥 여행객은 여행사로 가라’ 라고 여러 번 공지했는데도 다들 ‘스님 따라가면 좋겠지’ 이렇게만 생각해서 와요. 좋긴 뭐가 좋아요? (모두 웃음)

여기 와서 제가 좋은 일 하나 하고 있는데, 그게 뭔지 알아요? 평소에 ‘법륜 스님은 좋은 사람이고, 우리 남편은 나쁜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던 사람도 여기 와서 3일만 지나면 우리 남편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를 깨닫게 돼요. 제가 이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한다니까요. (모두 웃음)

저는 부처님의 위대함은 우리가 미래에 어떻게 살아갈지를 보여주셨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같은 시대에는 어떤 것을 기준으로 삼느냐가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부처님의 삶을 보면 어떤 핑계를 댈 수가 없어요. 먹는 건 남의 집에서 얻어먹고, 입는 건 주워 입고, 자는 건 나무 밑에서 잤으니까요. 내가 아무리 어려워도 그것보다는 지금 잘 입고 잘 먹고 잘 자니까 사실 할 말이 없어요. 붓다가 그런 모범을 보여줬기 때문에 불교가 부패한 속에서 요만큼이라도 유지되는 겁니다. 법륜스님더러 훌륭하다고들 하지만 훌륭한 게 아니에요. 모두 부패하게 살다보니 제가 그래도 좀 나아보이나 봐요. 부처님에 비하면 사실 저도 형편없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그런 부처님을 모델로 삼아 공부해 보자는 거예요. 부처님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지금 불법이 이만큼이라도 유지될 수 있지, 부처님이 그렇게 살지 않고 주는 대로 다 받아먹고, 왕궁에 가서 자고 그랬으면 아마 2500년까지 오기는커녕 당대에 다 깨졌을 거예요. 그래서 금강경(金剛經) 서분(序分)이 중요한 거예요. 부처님 일상의 모습이 나오잖아요. 부처님이 ‘어디 가서 무슨 법을 전해라, 어떻게 해라’ 하시는 게 전법인 줄 알았는데, 부처님이 살아가시는 삶의 모습이 미래의 수행자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보여주신다는 것을, 정말 미래의 수행자들을 염려해서 그렇게 하고 계신다는 것을 수보리가 깨달았어요. 그래서 감격한 거예요. 내내 부처님과 같이 지내면서도 그것을 모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걸 보게 된 겁니다. 그래서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이렇게 시작됩니다.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순례를 왔으니까 한번 이겨봅시다. 알았죠?”

“네!”

“아프면 아픈 대로 그냥 다녀보세요. 4호차 조수는 지금 엄청나게 아프고, 7호차 운전사도 지금 심한 감기가 들어서 아파요. 그런데도 운전하고 다니잖아요. 밥을 먹고 살려면 여러분도 그렇게 해야 해요. 우리가 지금 밥 벌어먹는 일이 아니니까 조금 아프다고 쉬려고 하는데, 성지를 순례하는 자세를 밥벌이하고 비교하면 안 됩니다.

‘천금을 준다 해도 내가 이걸 하고 말겠다!’

이런 자세로 임하면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밥도 다 먹고, 잠도 다 자고, ‘아이고, 춥다’ 그래도 옷 다 껴입고, 바닥에 깔판까지 깔았잖아요. 그러니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알았죠?”

“네!”

“내일은 기원정사까지 가겠습니다. 당시 부처님과 수행자들은 기러기처럼 한 줄로 걸어가서 탁발하고, 한 줄로 돌아오셨는데요. 내일은 도시락 싸들고 그렇게 한 줄로 서서 기원정사를 가보려고 합니다.”

성지순례에 온 첫 마음을 되새긴 순례객들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올바른 수행적 관점을 가질 때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음을 느낍니다.

내일은 새벽 정진으로 하루를 시작해 기원정사와 앙굴리말라 탑, 수닷타장자 탑, 동원정사를 참배할 예정입니다. 부처님께서 성도 후 가장 오래 머무셨다는 이곳 쉬라바스티에서 하루 종일 부처님의 숨결을 느끼며 머물 예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전체댓글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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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수

늘 울림을 주시는 말씀 감사합니다

2019-01-22 08:51:53

김혜경

녜 감사합니다. 스님 건강하소서.^^

2019-01-22 06:57:06

월광

고맙습니다.

2019-01-21 10: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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