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1.13 인도성지순례 9일째 (룸비니 & 카필라성)
“간절히 원하던 출가를 했지만, 거친 음식에 토악질이 나오고...”

싯다르타의 탄생, 룸비니 Lumbini

오늘은 네팔국경을 넘어, 부처님 이전에 한 젊은이로서의 삶을 만나 보기 위하여 룸비니로 향했습니다. 부처님의 전생과 탄생부터 출가에 이르기까지의 발자취를 쫓아봅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인도성지순례를 떠난 지 9일째 되는 날입니다.

오늘은 네팔 국경을 넘어야 해서 다른 날보다 서둘렀습니다. 가장 먼저 출발하는 팀은 새벽 2시 30분에 일어나 3시에 출발했습니다.

이번에는 다행히 인도 출국 심사도, 네팔 입국 심사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3시간 정도 소요됐습니다. 출입국 심사를 기다리며 혹은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순례객들은 도시락으로 아침 공양을 마쳤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잘 가꾸어진 공원 숲길을 걸어가니 드디어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에 도착했습니다. 아름드리 보리수가 있는 아름다운 이곳에서 부처님께서 탄생하던 그날을 만나 보았습니다.

먼저 도착한 차량의 순례객들은 나머지 차량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스님과 개인사진을 찍고 부처님의 발자국이 찍혔다는 벽돌과 부처님 탄생 설화를 새긴 조각을 둘러보았습니다.

어느 정도 순례객이 룸비니 동산에 도착하자 예불 공양을 올렸습니다. 예불을 올리는 사이 모든 순례객이 도착했고, 스님은 부처님의 탄생과 전생담을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

부처님의 탄생과 전생이야기

“마야부인이 태중에 아기를 가졌을 때의 모습을 경전에서는 ‘봉사는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소리를 듣고, 꼽추는 허리를 펴고, 앉은뱅이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경전에서는 ‘뱀과 개구리가 함께 뛰어놀고, 토끼와 호랑이가 함께 어울린다’ 라고 표현합니다. 토끼와 호랑이는 먹고 먹히는 관계이고, 뱀과 개구리 역시 먹고 먹히는 관계인데, 이들이 함께 사는 모습으로 그려진 것은 아마도 붓다의 인격을 묘사하기 위해 후대 사람들이 그렇게 기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여기서 봉사, 귀머거리, 꼽추와 앉은뱅이는 신체적인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봐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또 스스로 독립해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종교적인 의미로 기적을 뜻할 수도 있어요.

출산에 임박한 마야부인은 왕에게 인사를 한 뒤 동문으로 성을 나와 룸비니 동산을 지나게 됩니다. 카필라 성에서 이곳까지 거리가 약 28km 정도 되니까 6~7시간 정도 걸렸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만약 오전 6시 경에 출발했다면 정오 경에 도착했을 거예요. 당시 이 동산에 아쇼카 나무의 흰 꽃들이 아주 예쁘게 피어 있었다고 합니다. 잠시 멈추어 꽃을 구경하던 마야부인이 오른손을 들어서 예쁜 꽃잎이 달린 나뭇가지를 잡는데 그 순간 산기를 느끼면서 오른쪽 옆구리로 아기를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기를 낳자 대범천이 와서 황금그물로 아기를 받고, 용왕이 더운 물과 찬 물로 아기를 씻겼습니다. 그러자 아기는 동서남북으로 일곱 발자국을 걸으면서 한 손으로 하늘 위를 가리키고, 다른 한 손으로 땅 밑을 가리키며 사자처럼 외쳤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天上天下 唯我獨尊)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

경전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신비롭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났다는 것은 싯다르타 태자의 왕족 신분을 말해줍니다. 인도의 전통 브라만 신화에 따르면 사제계급인 브라만은 신의 입을 통해 탄생하고, 왕족 계급인 크샤트리아는 신의 옆구리를 통해 탄생하고, 평민 계급인 바이샤는 신의 배를 통해 탄생하고, 노예 계급인 수드라는 신의 발바닥을 통해 탄생했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싯다르타 태자가 왕족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사방으로 ‘일곱’ 발자국을 걸었다는 것은 여섯 발자국까지가 인도 전통사상에서의 육도 윤회(六道輪廻)를 말합니다. 우리의 삶은 늘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이라는 육도를 윤회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일곱 발자국을 걸었다는 것은 육도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태어났을 때의 시점을 고려하면 ‘육도윤회에서 벗어날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천상’은 신들의 세계를 말하고, ‘천하’는 인간의 세계를 말합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은 신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통틀어서 붓다가 가장 존귀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붓다’라는 것은 싯다르타 개인을 포함해서 깨달은 이를 뜻합니다. 여러분도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깨달으면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존재가 됩니다. 이것은 인간 존엄을 선언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서양에도 천부인권(天賦人權)이라는 비슷한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신이 부여한 인간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인간의 권리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다고 했지만, 역사를 보면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사람의 권리를 해치는 일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반면 붓다가 선언한 것은 신과 인간을 통틀어서 생명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형이상학적 관념이나 믿음으로도, 물질이나 권력으로도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 구절인 ‘삼계개고 아당안지 (三界皆苦 我當安之)’의 의미도 중요합니다. 삼계(三界)라는 말은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통틀어 부르는 말로 이 모든 세상을 뜻합니다. 삼계개고(三界皆苦)는 ‘이 세상에 있는 중생이 모두 괴로움에 빠져있다’는 의미예요. 아당안지(我當安之)는 ‘내 이들을 마땅히 편안케 하리라’는 의미입니다.

이 구절은 붓다의 삶을 축약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구절인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은 성도하시기 전까지의 수행을 상징하고, 뒷구절인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는 성도 후 붓다의 교화 여정을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경전의 표현을 받아들일 때 한 가지 유념해야 하는 점은, 인도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붓다와 같은 위대한 성인이 그저 6년 동안 고행해서 탄생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가 힘들고 전생부터 한량없는 생에 걸쳐 쌓은 공덕으로 그와 같은 도(道)를 이루었다고 믿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경전에 붓다의 전생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세상에 붓다의 삶으로 보이는 것은 비교적 잠시이고, 실제 붓다가 되기 위해서 과거 생에 한량없이 쌓은 공덕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붓다의 과거 전생 이야기를 기록해놓은 경전을 팔리어로는 자타카(jātaka), 우리말로는 본생담(本生譚)이라고 합니다.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부처님의 전생이야기는 547가지입니다. 그 이야기 하나하나가 모두 독립된 생애 이야기입니다. 제가 볼 때는 인도 전통의 재미있고 교훈적인 우화를 부처님의 한 생으로 묘사해서 누가 들어도 금방 이해할 수 있도록 적어두지 않았나 싶어요.

본생담을 하나씩 읽어보면 모두가 교훈적인 내용입니다. 제가 547가지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중 교훈이 깊은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부처님이 전생에 코끼리왕으로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코끼리왕이 코끼리 무리를 이끌고 숲을 지나는데, 그 앞에 집을 짓고 이제 막 새끼를 낳아 기르던 메추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메추리가 생각하기에 코끼리 무리가 지나가면 그 주변이 모두 쑥대밭이 되니까 자기가 지은 집도 무너지고 자칫 새끼도 깔려 죽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코끼리왕을 찾아가서 이 앞에 집과 새끼가 있으니 제발 밟지 않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그러자 코끼리왕이 메추리 집과 새끼를 보고는 그 옆을 지키고 서서 코끼리 무리가 지나갈 때까지 그들을 지켜줍니다.

그렇게 코끼리 무리는 무사히 지나갔는데 그보다 한참 뒤에 성질 더러운 코끼리 한 마리가 일행보다 뒤쳐진 채로 자기 볼일을 다 보면서 오는 거예요. 그런데 코끼리왕은 앞서 간 코끼리 무리를 이끌어야 하니까 메추리에게 뒤에 오는 코끼리에게는 직접 부탁할 것을 청하고 길을 떠납니다. 메추리가 조금 전 코끼리왕에게 했던 것처럼 뒤쳐진 코끼리를 찾아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같은 부탁을 하는데, 이 코끼리는 ‘좋아, 내가 네 부탁을 들어주면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니?’ 하고 묻는 거예요. 덩치 큰 코끼리에 비해 너무도 작은 메추리가 코끼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걸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렇게 아무 말 못하고 있으니 성질 나쁜 코끼리는 일부러 메추리 집을 밟아서 망가뜨리고 그곳에 오줌을 누고는 떠났습니다. 그 일을 겪고 한 맺힌 메추리는 원수를 갚기로 결심을 합니다.

자기보다 훨씬 더 큰 코끼리에게 메추리가 어떻게 복수를 하겠어요. 한참 고심을 하다가 아이디어를 하나 내게 됩니다. 메추리는 우선 까마귀를 찾아가서 친절을 베풀고 점수를 많이 땁니다. 먹을 것도 가져다 주고 잘해주니까, 까마귀가 자기는 메추리에게 해주는 것이 없으니까 자기가 뭘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습니다. 메추리는 거듭 사양하다가 정 그러면 나중에 자기가 정말로 부탁을 하나 할 때 꼭 들어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까마귀를 자기 편으로 만든 메추리가 이번에는 개구리를 찾아가서 똑같이 정성을 들여 개구리를 자기 편으로 만들고, 그 다음에는 파리를 찾아가서 정성을 들여 파리도 자기 편으로 만듭니다.

시일이 지나 코끼리 떼가 다시 돌아올 때가 되었습니다. 코끼리왕과 한 무리가 지나가고 이번에도 성질 나쁜 코끼리는 무리와 떨어져 혼자 뒤쳐진 채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메추리가 이때다 싶어 까마귀를 찾아가서 ‘까마귀님,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하고 청합니다. 무슨 소원인지 궁금해 하는 까마귀에게 ‘저 코끼리 머리 위에 앉아있다가 눈을 쪼아주세요’ 라고 부탁을 합니다. 까마귀에게 쪼는 일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니 까마귀는 메추리의 청을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그 다음으로 메추리는 파리를 찾아가서 까마귀가 쪼는 자리에 알을 낳아달라고 청합니다. 알 낳는 것이 파리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일이니 파리도 메추리의 청을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까마귀는 코끼리의 눈을 쪼게 되고, 그 자리에 파리는 알을 낳습니다. 코끼리는 처음에 그냥 따끔하기만 했지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눈이 안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무리들은 이미 지나갔는데 눈이 안 보이는 코끼리는 우왕좌왕하면서 길을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메추리는 개구리를 찾아가서 언덕 위에 올라가서 잠시 울다가 코끼리가 그곳에 오면 다시 언덕 밑으로 내려가서 울어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우는 일이야 개구리에게는 너무나 쉬우니 개구리는 메추리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목이 말라진 코끼리는 개구리가 우는 곳에 물이 있을 줄 알고 언덕 위를 올라가는데, 그때 개구리가 다시 언덕 밑으로 내려와 울기 시작합니다. 다시 그곳이 물가인 줄 안 코끼리는 언덕 밑으로 내려가다가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그만 굴러떨어져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모습을 본 메추리는 코끼리 위에 올라타 ‘원수를 갚았노라’ 라고 말하며 만세를 부릅니다.

이 일화에서 정작 부처님은 코끼리왕으로 조연으로 등장하지만, 메추리를 보면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힘 약하고 작다고 무시했다가 자칫 이런 일을 당하게 됩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지금 한반도 정세를 둘러싸고 변화를 일으키려면 메추리와 같이, 원수를 갚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작은 힘들을 모아 기적을 일궈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어서 부처님의 탄생 과정이 쓰여져 있는 경전을 독송한 후 명상을 하였습니다. 스님은 뒤에 도착한 차량의 순례객들에게 “먼저 온 팀이 특별히 한 건 없어요. (웃음) 자유시간을 드릴 테니 여유롭게 참배하고 나오세요.” 라며 섭섭했을지도 모를 대중들의 마음을 살펴주었습니다.

출가하기 전 29년, 카필라바스투 Kapilvastu

안온한 룸비니 동산을 뒤로하고 먼지가 푹푹 날리고 덜컹거리는 길을 달려 다음 순례지인 부처님의 고향 카필라성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곳은 부처님께서 출가하기 전 29년 동안 사셨던 카필라성입니다. 부처님의 인격이 형성된 매우 중요한 곳이죠.”

순례객들은 가사를 여법하게 수하고,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스님을 따라 카필라성의 서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지금은 벽돌 무더기만 남아있지만, 그 옛날 화려했을 왕궁과 석가족의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경주의 반월성처럼 생긴 성터에 자리를 잡고 앉자 스님은 부처님께서 출가하시기 전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싯다르타 태자는 처음 농경제에 참여했는데, 그 농경제에 참여했다가 첫 번째로 본 게 얼굴이 검고 옷이 다 떨어진 데다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이 가득한 농부여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고 해요. 피부가 검다는 것만 봐도 노예라는 걸 알 수 있죠. 노예들은 헐벗고 굶주린 상태에서 일을 하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있느냐’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또 그런 농부가 소를 채찍질하면서 쟁기질을 하는 모습을 봤어요. 자기 편리를 위해서 소를 학대하는 거죠. 그러자 ‘하나가 편하기 위해서 왜 하나가 고통스러워야 하느냐?’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쟁기가 땅을 탁 뒤집으니까 그 속에서 굼벵이 같은 벌레가 나오는데, 새가 쟁기 뒤를 따라가면서 계속 벌레를 주워 먹는 거예요. 그러자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왜 하나가 죽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우리는 그런 걸 봐도 아무도 그런 생각 안 하는데요.

하나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왜 하나가 고통스러워야 하는가.
하나가 편리하기 위해서는 왜 하나가 불편해야 하는가.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왜 하나가 죽어야 하느냐.

이렇게 의문이 세 가지였어요. 이 중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할 때는 ‘하나가 살기 위해서 왜 하나가 죽어야 하는가’ 라는 세 번째 것만 주로 이야기하지만 경전에는 이렇게 세 가지로 나옵니다.

함께 사는 길은 없을까.
함께 편리한 길은 없을까.
함께 행복한 길은 없을까.

그런 의문이 들어서 농경제 참여에 흥미를 잃고 염부수(閻浮樹) 아래에서 홀로 깊이 명상에 들었어요. 행사가 끝나고 아버지인 정반왕이 아들을 찾았는데 아들이 안 보여요. 그래서 아들을 찾으러 갔더니 숲속에서 홀로 명상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거룩해 보여서 아버지가 자기도 모르게 절을 했다고 해요. 왕이 아들인 싯다르타 태자에게 평생 세 번 절을 했다고 나옵니다. 처음에 아이가 태어났을 때 전륜성왕이 아니면 부처가 될 거라는 예언을 듣고 절을 한 번 했고, 그 다음에 염부수 나무 아래에서 명상 중인 모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절을 했고, 마지막으로는 붓다가 되어서 돌아왔을 때 절을 했다고 해요.

태자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스승에게 자기가 품은 의문을 물었지만 스승은 대답을 못 했어요. 부모님한테 물었더니 부모님도 대답을 못 했어요. 세상의 모든 가르침은 ‘어떻게 하면 내가 이기느냐’ 하는 승리에 대한 학문이지, ‘어떻게 하면 함께 살고 함께 행복해지느냐’ 하는 가르침은 아니잖아요. 거기에 대해서는 선생님도 생각을 안 해봤겠죠. 그래서 홀로 사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게 바로 탐구죠. 전에는 밝게 웃고 즐겁게 노는 걸 좋아했는데, 그 이후로는 놀다가도 또 그 생각이 떠오르면 사색하고 또 사색하게 되었습니다. 경전에는 특히 소의 그 큰 눈에서 눈물을 봤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중생의 고통을 보고 아파한 거예요.

거기에서 더 나아가 직접 세상의 이치를 알기 시작한 게 사문유관(四門遊觀)으로 표현이 됩니다. 이 길을 따라 저 앞에 보이는 저기가 동문입니다. 경전에는 동문으로 나가서 늙은 사람을 봤다고 돼 있어요.

그런데 그 늙은 사람을 묘사해놓은 게 아주 생생합니다. 머리는 하얗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하고, 이빨은 빠지고, 턱은 어떻고, 이렇게 늙은 것의 고통이 절실하게 묘사돼 있는 이유가 뭘까요? 성안에도 늙은 사람이 있었을 텐데요. 그 묘사된 내용을 보면 늙어서 길거리에 버려져 보호 받지 못하는 사람을 봤다는 얘기예요. 노예는 늙거나 병들면 버리게 됩니다. 가치가 없으니까요. 젊을 때나 비싼 돈을 주고 노예를 사지, 늙으면 버리고, 중병이 들어도 버려요. 치료비가 더 들잖아요. 이것이 나중에 단순히 ‘늙음’이라고 표현되면서 너무 추상적으로 변해 버렸어요. 너무 관념화됐다고 볼 수 있죠. 그러나 경전에 나온 것은 철저하게 늙어서 보호 받지 못하고 버려진 모습입니다.

또 남쪽 문으로 나갔다가 병들었는데도 보호 받지 못하고 버려진 사람을 봅니다. 병들어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비참한 모습이 경전에 아주 잘 묘사돼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방금 들어왔던 서쪽 문으로 나갔을 때는 죽은 사람을 마주쳤는데, 그 역시 죽어서 길거리에 버려진 사람이었습니다. 성안이라고 죽은 사람이 없었겠어요? 이 세 가지의 경험을 통해서 중생의 고통을 체험한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참 묘한 게, ‘나도 저렇게 늙는가? 나도 저렇게 병드는가? 나도 저렇게 죽는가?’ 라는 질문이 반드시 따라옵니다. 그건 무슨 뜻일까요? 단순히 남의 문제로 보고 불쌍하게 여기는 게 아니라 그것이 곧 자기 일이 될 수가 있다는 거예요. 부처님이 출가를 안 했다면 그 고통을 고스란히 받았을 거예요. 훗날 석가족이 전쟁에 져서 출가한 사람만 살아남고 거의 대부분이 전멸하다시피 했거든요.

사문유관은 궁중에서 자라던 싯다르타가 성 밖에 나가서 세상의 실상을 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북쪽 문으로 나갔을 때는 수행자를 만났어요. 수행자는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몸도 비쩍 말랐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가난한 사람하고 별 차이가 없었어요.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고통스러워하는 불쌍한 존재였는데, 수행자는 늠름하고 두 눈은 샛별처럼 빛났습니다. 수행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싯다르타 태자는 고민하던 문제에 대한 새로운 길을 발견했어요. 기존의 브라만교에서 지금껏 자기가 학문을 통해서 배웠던 그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발견한 겁니다. 그래서 그 길로 나아가고자 출가의 원을 세웠습니다.

출가를 결심했을 때를 경전의 내용에 따라 추정해보면 대강 16세 혹은 19세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결혼을 시켰어요. 결혼도 16~19세 무렵에 한 것으로 보여요. 아들이 자꾸 사색에 빠지고 하니까 예언에 따라서 출가할지 모른다고 해서 아버지가 그걸 막으려고 온갖 쾌락을 제공하죠. 그래도 크게 효과가 없었어요.

싯다르타 태자는 출가를 하겠노라고 몇 번 건의했지만 부모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특히 어머니의 눈물이 출가를 막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것 같아요. 29살에 마지막으로 출가하겠다고 아버지인 정반왕한테 얘기했을 때, 어머니인 마하파자파티 부인이 나서서 ‘내가 한 번 막아보겠습니다’ 라고 하자 정반왕이 이렇게 얘기하거든요.

‘지금까지 당신의 눈물이 그 아이의 출가를 막았는데 이제는 당신의 눈물도 그 아이의 길을 막을 수가 없을 것 같소.’

그리고 그 사이에 아버지가 가리사가라는 지방을 다스리는 자리를 준 적도 있어요. 어쨌든 세속에 붙들어두려는 노력이었죠. 그런데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은 채찍을 들어야 해요. 세금도 거둬야 하고 노예도 부려야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어떻게 함께 행복한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저들의 고통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까?’ 라고 고민하던 분이잖아요. 경전에 보면 코뚜레에 꿰인 채 쟁기질을 하던 소의 코뚜레를 다 자르고 방목시켜 버렸어요. 그리고 노예도 다 풀어서 자유를 줘버려요. 그러면 나라가 통치되기 어렵겠죠. 제가 볼 때는 역사적으로 부처님이 싯다르타 태자 때 노예해방을 제일 먼저 한 게 아닌가 싶어요. 경전에 보면 그걸 다 자유롭게 풀어버리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그런 내용이 있다는 건 부처님도 부모님 뜻을 받들어서, 가능하면 부모의 뜻을 거역하지 않은 채 자기의 의문을 풀어보려고 하는 과정을 겪었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10년 내지 13년을 이 세상에 살면서 그 양쪽을 고민했는데, 29세쯤에 이르자 결론이 나버렸어요. 이 세상의 길, 즉 하나가 살기 위해서 하나가 죽는 이 길로는 자신이 추구하는 새로운 길로는 전혀 갈 수 없다고 깨달아버렸기 때문에 미련 없이 떠나게 됐습니다.

그래도 아들에 대한 미련이 조금은 있었나 봐요. 부인이 보고 싶어서 문을 열고 마지막으로 보고 갔다는 묘사는 없고, 아들을 한 번 안아보고 가려고 문을 열었는데 엄마 품에서 자고 있으니까 아이를 건드렸다가 부인이 깰 것 같아서 그냥 문을 닫고 떠났다고 해요. 그렇게 떠나면서 이렇게 결심하십니다.

‘내가 출가하는 게 내 개인의 이익이나 안락을 위해서 출가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의 꼬임에 빠져서 출가하는 것도 아니다. 고통 받는 일체 중생의 괴로움이 없는 길을 찾아서 나는 출가한다.’

저도 대승 경전을 읽을 때는 부처님이 사회의식이 있다는 생각을 별로 안 해봤습니다. 그런데 초기 경전 모음인 ‘아함경(阿含經)’에서 특히 부처님 젊은 시절 출가의 동기를 한 번 읽어보면 대부분 사회 문제 의식이 아주 강합니다. 내 개인이 괴로워서, 인생이 어때서 그 원을 세웠다는 얘기는 하나도 없고, 전부 중생의 고통을 어떻게 하면 없애느냐는 고민에 집중돼 있어요. 수행하다가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을 때도 눈앞에 또 중생의 고통이 어른거려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내가 도를 이루기 전에는 높은 데서 떨어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에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내가 도를 이루기 전에는 독약을 먹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도를 이루면 돌아가서 가족들을 다 그 길로 인도하겠습니다.’

출가를 했는데 아버지인 왕이 잡으러 올지도 모르니까 세 나라를 지나갔다고 해요. 나라가 별로 크지 않으니까 가능한 일이었겠죠. 세 나라를 지나서 아노마 강변에 이르러서야 멈춰 섰다고 해요.

말과 시종을 돌려보내고 정진을 하는데, 돌려보낸 말이 이 성까지 다 와서 성문에 들어오기 전에 스스로 죽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저 성문 밖으로 나가면 탑터가 있는데 두 가지 설이 있어요. 하나는 말이 오다가 죽었다는 자리라고 하고, 하나는 부처님이 늙은 사람을 본 자리라고 해요. 제가 볼 때는 늙은 사람을 본 자리라는 게 더 맞지 않을까 싶어요.

아무튼 이렇게 출가해서 정진을 시작했는데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십몇 년 내내 출가하는 게 원이었잖아요. 그런데 일주일도 안 되어 배는 고프지, 벌레는 물지, 이리떼는 울어대지, 그래서 왕궁의 따뜻한 잠자리며 부드러운 음식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런 걸 경전에 참 잘 묘사해놓았어요. 사람이란 게 후회가 되면 누가 말릴 때 생각이 나게 마련이에요. 말려도 막 간다고 해놓고, 나중에 후회가 되면 ‘좀 더 말려 주지’ 이렇게 됩니다. (모두 웃음)

부처님이 그런 번뇌가 생길 때마다 원을 다시 다잡게 해주었던 게 바로 중생의 고통이었습니다. 중생이 겪고 있는 그 고통을 생각하면 ‘어, 내가 이래서는 안 되지!’ 해서 다시 다짐을 하게 됐어요. 그때 제일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게 걸식을 해 와서 먹는 음식이었습니다. 가난한 집에 가서 얻어오는 음식이다 보니 태자가 볼 때는 돼지죽보다도 못하잖아요. 그걸 입에 넣으면 바로 토악질이 나오니까 그게 처음에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다시 결심하고 정진하다가도 이런 어려움이 있다 보니 ‘혼자서는 안 되겠다’ 라고 해서 스승을 찾아 나서게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왔던 길을 따라 바이샬리로 갔다가 왕사성(라자그라하, 라즈기르)으로 가서 스승을 찾고 수행을 하셨어요.

우리가 앉아 있는 이 자리가 태자궁터라고 해요. 부처님이 태자로 있을 때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해요. 그럴 듯해요?”

“네!” (모두 웃음)

태자 궁터에 앉아 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어떻게 함께 행복할 수 있을까’ 고뇌하던 한 청년의 모습이 다가와 울컥했습니다.

함께 경전독송을 하고 명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경전에는 부처님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부처님도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수행과정에서 여러 번민을 하면서 정진을 하셨습니다. 다만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장애에 넘어지지 않고 그것을 이겨냈다는 차이만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싯다르타의 출가’를 함께 불러볼까요? 저 동문에서 불러야 멋이 있는데 대중이 많으니 여기서 불러보겠습니다.”

동쪽문 나갔을 적에 늙은자 모습보았네...
남쪽문 나갔을 적에 병든자 모습보았네... ♫
왕국의 부귀영화도 한순간 던져버리고...
외로운 구도의 길을 구름따라 헤매이셨네... ♫

그리고 부처님이 유성출가를 하셨다는 동문으로 가 보았습니다. 동문 밖으로 탑 터가 보였는데 스님은 싯다르타가 늙은이를 만난 것을 기념한 탑일 수 있는 곳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카필라성 주위 마을은 2600여 년 전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이곳 사람들은 헐벗어 있었고, 구걸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며 묵는 숙소마다 전기 사정이 좋지 않고, 따뜻한 물은 고사하고 차가운 물도 졸졸 나오기 일쑤입니다. 성지마다 구걸하는 아이, 노인, 약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문유관은 도처에 널려있습니다. 그래서 싯다르타의 고뇌가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들을 기다린 정반왕. 쿠단 Kudan

해가 지고 날이 쌀쌀해졌습니다. 그래도 순례단은 마지막 순례지인 쿠단으로 향했습니다. 쿠단은 성도 후 6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부처님을 정반왕이 마중 나온 곳으로 이를 기념한 탑이 있는 성지입니다.

달빛 아래, 스님은 옛이야기를 풀어내듯 부처님의 아버지, 정반왕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성도 후 사위성에 부처님이 오셨다는 얘기를 들은 정반왕은 부처님께 사신을 보내 왕궁으로 초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신으로 간 사람들 모두 부처님을 친견 후 깨달음을 얻고 출가해 버렸다고 합니다.

우다야 대신이 겨우 왕의 초대를 전달할 수 있었고 부처님은 그 초대에 응해 성도 후 6년, 출가 후 12년 만에 처음으로 카필라 성에 돌아오게 됩니다. 석가족 젊은이들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많은 이들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이가 정반왕이었다고 합니다. 정반왕에게 부처님은 부처님이 아니라 오직 아들이었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스님의 성지에 대한 설명을 다 듣고 나서 순례단은 렌턴을 키고 함께 경전 독송을 하였습니다. 경전에는 당시의 정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쿠단에 세워진 탑에는 옛날 당시 문양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순례객들은 문양을 직접 보고 만져보며 옛 숨결을 그대로 느껴보았습니다.

“저 별을 보세요. 오늘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날, 성도절이에요. 오늘 밤새도록 명상해서 깨달아야죠. (모두 웃음) 잠은 차에서 자세요.”

스님과 순례객들이 나가는 길에 별빛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저 별을 보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용성스님의 유훈, 대성 석가사

네팔에 있는 한국절인 대성 석가사에 7시경에 도착해 절에서 준비해준 음식으로 늦은 공양을 하였습니다. 너무나 반가운 배추김치와 커리, 배추, 나물 반찬을 맛있게 먹고 따뜻한 보리차도 마셨습니다. 예불을 드린 뒤 8시에 법회가 있었습니다.

먼저 대성 석가사의 총무 보현스님의 인사말씀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석가사에 머물게 된 인연과 수행담을 들려주며 부처님 오신 날보다 더 많은 대중이 법당에 가득차서 기쁘다고 하여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이어서 법륜 스님의 법문이 있었습니다.

“대성 석가사를 발원한 분은 불심 도문 큰스님이시고, 더 근원적으로는 용성진종조사입니다. 용성진종조사께서는 1864년에 출생하셔서 1940년에 열반에 드셨습니다. 붕괴된 한국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신 분입니다. 그리고 3·1 독립선언 33인 가운데 불교계를 대표하여 서명하신 독립운동가입니다. 33인 중 불교계 대표로서만 아니라 실제로는 3·1운동의 배후에서 지대한 역할을 하셨습니다. 또한 대한민국 국호를 정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한제국 부흥 운동’이 아니라 ‘대한민국 수립 운동’을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3·1운동 때 태극기를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분이었습니다. 그 후 상해임시정부를 도와서 많은 독립 군자금을 보내기도 하셨습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동아시아를 점령하니까 우리 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시고 중국에 가셔서 장개석, 모택동 군대와 함께 연합군을 만들어서 일본 군을 물리치자는 주장을 하셨는데, 그 일을 맡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그만 일본에 밀고를 하는 바람에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이에 낙심하여 ‘외세가 우리를 침공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국민 중에 우리 민족을 배신하고, 제자가 스승을 배신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떠안은 불행의 근원이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독립하고 대한민국의 국운이 번창하려면 과거의 우리 잘못을 참회하고 큰 복을 지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렇게 크게 복짓는 열 가지 유훈(遺訓)을 남기셨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대성 석가사 창건입니다.

우리는 불자로서 불교의 역사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가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가야정사를 가꾸고,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성문사(省門寺), 백제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대성초당(大聖草堂), 신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아도모례원(阿道毛禮園)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힘을 이어서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 룸비니 동산, 부처님이 도를 이루신 곳 보드가야,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하신 곳 사르나트, 부처님이 열반하신 곳 쿠시나가라, 그리고 부처님께서 가장 오래 머무신 사위성 기원정사. 이런 성지를 잘 가꾸는 일 등 열 가지 유훈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경주 남산과 천룡사지 등을 잘 가꾸는 유훈도 전해집니다.

그 중 여러분은 오늘 대성 석가사에 왔습니다. 이곳은 그저 한국 절 하나를 짓는다는 것이 아니라 스승님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유훈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것을 도문 큰스님께서 발원하셨고, 법신 스님께서 지금 24년째 불사를 행하고 계시고, 또 보현 스님께서 9년째 머물면서 마무리 작업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불교 발전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민족부흥의 염원이 담긴 불사입니다. 누군가 와서 보면 ‘오, 여기 한국 절을 잘 지었구나’ 하고 불교 부흥을 위한 절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발원에는 불교 발전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독립, 평화, 통일이라는 염원이 담겨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들도 잘 아시고 이 대성 석가사를 사랑하고 아껴주셨으면 합니다. 그런 의미로 법당 오른쪽에는 용성 큰스님의 영정도 모시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를 잘 아시고, 이곳에서의 생활이 불편하더라도 그 불편에 너무 집착하지 않도록 해보세요. 여기 와서 수 십년동안 어려움 속에서 불사를 이루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 분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조금 가볍게 내시면 좋겠습니다.”

순례객들은 법회 후에 조별 나누기를 한 뒤 취침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새벽 2시 20분에 기상해서 3시에 출발하는 일정입니다. 탄센으로 가서 해발 2천미터의 산 위에 올라 저 멀리 8천 미터 높이의 히말라야 산 봉우리들과 일출 모습을 보고 내려올 예정입니다. 오후에는 부처님께서 전쟁을 막으셨던 로히니강과 꼴리족이 세운 진신사리탑 랑그람을 참배할 예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

전체댓글 40

0/200

지나가던이

정토회는 대한민국의 복이고, 한국불교의 복입니다. 법륜스님과 정토회의 공덕을 수희찬탄합니다. _()_

2019-06-07 01:16:30

김애자

함께 사는 길은 없을까.
함께 편리한 길은 없을까.
함께 행복한 길은 없을까

2019-01-22 09:48:29

김혜경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소서.^^

2019-01-22 07:24:26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