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8.12.6. 문경수련원 요사채 준공식, 구미 즉문즉설
“몸이 너무 아픕니다. 저도 행복할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문경 수련원의 요사채 준공식에 참석하고, 저녁에는 구미시청 초청으로 즉문즉설 강연을 하였습니다.

문경 수련원에서는 신축 대중 숙소 준공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오전에 흩날리던 눈발은 멈췄지만 여전히 추운 오후였습니다. 준공식에는 문경시와 가은읍 관공서의 관계자 몇 분과 문경 공동체 상주대중, 백일출가 행자들이 함께 자리했습니다.

스님은 어제 남양주 강연을 마치고 서울로 왔다가 오늘 문경 수련원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준공식에서 스님은 기념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정토수련원 숙소동 준공을 먼저 축하드리고요. 이 건물이 지어지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있었습니다. 애 많이 쓰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처음 이 곳에 터를 잡을 때 움막을 치고 살았기 때문에 10년 전 수련 시설을 지었을 때는 아주 기쁜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건물이 지어졌는데도 기쁘기보다는 오히려 염려가 되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 이유는, 대중이 수련을 하기 위해서는 현대 사회에 맞춰 사용이 편리한 건물을 지을 필요가 있지만, 우리 수행자들이 사는 숙소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 사는 생활수준을 가져야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평소에도 늘 하는 생각입니다.”

30여 년 전 처음 문경에 스님께서 살기 시작했을 때는 ‘우리가 사는 집은 우리가 직접 지어야 한다. 조촐하게 지어서 검소하게 생활해야 한다’ 하는 생각으로 직접 허물어진 집의 목재를 구해서 백화암을 짓고 대중의 숙소는 한 사람당 한 평 크기의 방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새로 수련시설을 지으며 그렇게 지은 소박한 건물은 불법건물이라 다 철거를 하게 되었는데요. 스님이 초기에 어떤 마음으로 이 곳에 정착했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 건물에 들어오기가 꺼려지는 이유는 '과연 수행자가 이런 곳에서 살아서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예요. 대중들이 보기에 수행자들이 사는 공간이 자기 집보다 좋다면, 우리가 대중들에게 보시를 해야지, 대중들이 왜 우리들에게 보시를 하겠습니까. 보시를 해야 될 이유가 없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건물을 짓는 것에 대해서 줄곧 반대를 해왔고, 허락을 했더라도 마음이 늘 무거운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준공식에 시장님을 초청해야 되지 않느냐고 했지만 제가 초청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집을 이렇게 크게 지은 것은 부끄러운 일인데 시장님을 초청해야겠어요? 대중을 위하거나 사회를 위해서 지은 건물이라면 많은 사람들을 초청해서 자랑스럽게 축하를 함께 해야 하겠지만, 이런 사사로운 일에 공무를 맡은 분들을 오고 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스님은 30년 전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문경 수련원에 터를 잡은 지가 올해로써 만 29년 5개월이 됩니다. 내년 7월이 되면 만 30년이 됩니다. 제가 어떻게 여기 오게 됐느냐 하면...”

스님은 새로운 불교 운동을 시작하면서 절에 들어가서 부목살이를 한 적이 있는데, 스님들과 절에서 고용된 사람들 간의 차별을 보며 ‘우리 정토회는 앞으로 아무리 어려워도 사람을 고용하지는 말아야겠다’라고 다짐하였다고 합니다.

“제가 이렇게 기쁜 날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건물 모양만 봐도 부담스러운데, 만약 이 건물 안에 살면서 방의 온도가 너무 높거나 일반 시민들이 먹는 수준보다 더 좋게 먹고 산다면, 이 건물은 폐쇄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폐쇄를 반대한다면, 저는 문경 수련원에 출입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을 오늘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면, 우리가 왜 이렇게 살겠습니까.

누가 내었는지 모를 뿐이지 이 돈은 다 누군가가 보시한 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건물의 운영은 반드시 수행 처소의 원칙을 지키며 운영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다 보여주셨잖아요. 왕자 출신이었으니까 출가하기 전에 얼마나 편안하게 살았겠습니까. 그러나 부처님은 출가하신 후 옷은 주워 입고, 밥은 얻어먹고, 잠은 나무 밑에서 잤습니다. 어떤 노비도 고용하지 않으셨어요. 평생 이렇게 사셨습니다.

우리 사는 환경이 열악하다면, 이런 말을 안 해도 저절로 검소하게 살아집니다. 그러나 사는 환경이 좋다 보면 안개에 옷 젖듯이 사람은 검소함을 점점 망각하게 돼요. 걸어 다니다가 자전거가 생기면 더 이상 못 걸어 다니게 되고, 자전거 타다가 차가 생기면 더 이상 자전거를 못 타게 되고, 자가용이 생기고 나면 더 이상 대중교통은 이용하지 못하게 되고, KTX를 타기 시작하면 더 이상 고속버스는 못 타게 되는 겁니다.

입으로만 수행과 부처님을 이야기하고 행동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대중에게 어떻게 신뢰를 얻을 수 있을까요? 대중들이 보기에 ‘나는 따뜻하고 편하게 자는데, 여기 사는 수행자들은 내가 봐도 미안할 정도로 어렵게 사는구나’ 이렇게 될 때, 우리들이 도덕적으로 리더가 될 수 있고, 대중의 지지도 받을 수 있는 겁니다.

이걸 꼭 명심해야 해요. 우리 1세대가 검소하게 이렇게 살아도 2,3세대만 내려가면 결국 호화롭게 될 거예요. 부처님이 그렇게 검소하게 살아줬는데도 요즘 절에 가보면 대중들보다 훨씬 호화롭게 살잖아요.

이 빌딩은 절대 우리의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건물을 한꺼번에 다 쓰면 안 된다’라고 했는데, 불사위원회에서 ‘신축 건물이라 비워두면 안 되고, 냄새도 없애려면 건물 활용을 해야 된다’라고 해서, 제가 이 건물에 이사 오는 것을 결국 허용은 했습니다. 제가 이걸 수차례 연달아서 강조하는 이유는, 제발 대중들이 보시한 것을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해 주었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감시감독을 해서 눈치를 보며 검소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검소한 삶을 진심으로 살아야 됩니다. 좋은 날, 별로 좋은 소리를 안 해서 죄송합니다. (모두 웃음)

너무 편리만 쫓는다면 우리가 굳이 여기 들어와서 살 필요가 없어요. 조금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수행자로서 살아가는 정신을 잃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편리를 쫓는 것으로 행복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면서 수행과 정진을 통해 우리는 자유와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편리만으로는 자유와 행복의 길로 갈 수 없습니다. 환경이 좋아진 만큼 수행 정진에 더 치중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건물을 사용하기에 앞서 ‘수행자의 삶은 검소한 생활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거듭거듭 강조하는 스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봅니다. 오늘 준공식은 대중들 모두가 진정한 수행자의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구미 즉문즉설 강연

구미시의 초청으로 열린 즉문즉설 강연이었지만, 더 많은 구미시민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며 행사 준비와 홍보는 구미 정토회에서 도맡았습니다. 정토회의 활동가들은 전단지를 배포하고, SNS로 홍보했는데요. 홍보 효과가 있었는지 여섯 시 반에 문화예술회관의 300여 석의 객석이 다 찼습니다.

아쉽게도 발길을 돌린 사람들이 200여 명 되었으며 강연장 밖 로비에서라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깔개를 나누어드렸습니다. 100여 명의 시민들은 땅바닥에서 깔개를 깔고 들었습니다.

오늘 강연에는 구미 시장님도 함께 했는데요. 시장님은 무대에 올라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은 들으면 들을수록 촌철살인 같은 답변에 속이 시원하다고 하며 고민을 단칼에 없애주는 스님이 오셨으니 구미 시민들의 고민이 싹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시장님의 인사 말씀 후 스님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오늘은 총 9명이 질문할 수 있었는데요. 2개의 질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8번째 질문자는 스님은 어떻게 즉문즉설을 할 때 쉽게 대답을 할 수 있게 되었는지 의심의 눈초리로 물었습니다. 스님의 대답이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의심이 많은 편이고 따지기를 좋아하는데요. 스님의 강의를 들어보면 남의 문제에 대해 너무 쉽게 이야기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많이 하셔서 쉽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인지, 힘든 일을 직접 겪어 본 경험들이 많으셔서 쉽게 이야기 할 수 있게 된 것인지, 그게 궁금합니다."

“질문자가 지금 제 이야기를 듣는다고 의문이 풀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질문자가 앞으로 즉문즉설을 몇 번 더 들어보고 그렇겠구나 짐작하시면 돼요."

"제 생각에는 스님이라는 권위 때문에 일반인들이 겪는 피해를 별로 안 당하실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기 때문에 불합리한 일도 안 당하실 것 같고요. 그만큼 스님이라는 혜택을 받고 있으시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께서는 정말 어려운 일을 당해본 경험이 있으신지, 그런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저는 젊은 시절에 고문도 심하게 당해봤고, 승려 사회에서 왕따도 엄청나게 당해봤어요. 그걸 억울해하고 분해하면 저만 손해예요. 제가 말하는 핵심은 어떤 경우에도 괴롭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누가 저에게 ‘만약 전쟁이 난다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으면 ‘전쟁이 나면 우리가 큰 피해를 입으니까 네가 할 수 있는 어떤 일이라도 해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누가 저에게 ‘아버님 몸이 편찮으신데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으면 ‘아버지를 간호하세요.’라고 얘기합니다. ‘아버지 간호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라고 하면 ‘힘들면 그만두세요.’라고 합니다. 힘들다는데 어떡합니까. (모두 웃음)

아내가 ‘남편이 술을 많이 마셔서 도저히 같이 못살겠습니다’라고 물으면, ‘그럼 이혼하세요’라고 얘기합니다. ‘그럼 애는 어떡해요?’라고 하면 ‘그러면 같이 사세요’라고 합니다. 굉장히 쉬워요. (모두 웃음)

“그건 너무 쉬운 얘기 아닌가요?”

“원래 인생이 그렇게 쉬운 거예요. 정말 힘들면 제가 그만두라고 하지 않아도 그만둡니다.”

“그런 말을 누가 못 합니까.”

“저는 누구나 능히 할 수 있는 말을 합니다. 가족들이 몸이 아파서 고민이라고 물으면 ‘병원에 모시고 가보세요. 저는 도움이 못 돼요’라고 얘기해요. 다만 질문자의 얘기를 들어주고 제 의견을 얘기해 줄 수는 있죠. 그런데도 왜 사람들에게 변화가 올까요? 그건 바로 질문자가 ‘자각’을 하기 때문이에요. 스스로 ‘어, 이건 내 문제네’ 하는 자각이 일어나서 변화가 오는 겁니다. 제가 도와주는 게 아니에요. 예를 들어볼게요.

‘남편이 술을 많이 먹어서 못살겠어요’
‘그러면 헤어지세요.’
‘남편이 돈을 많이 버는데요.’
‘그럼 같이 사세요.’ (모두 웃음)

‘그래도 술을 너무 많이 먹는데요.’
‘그럼 헤어지세요.’ (모두 웃음)

‘애들도 있는데 어떻게 헤어져요?’
‘그럼 같이 사세요.’ (모두 웃음)

이런 대화를 세 번 네 번 하다 보면, 이건 남편 문제일까요, 내 문제일까요? 내 문제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 겁니다. 지금 결정을 못하는 것은 내 문제예요. 나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남편이 돈 벌어주는 것은 좋아하고, 술 마시는 것은 싫어하는 문제가 있는 겁니다. 남편을 변화시켜서 돈만 많이 벌어주고 술은 안 먹게 해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남편을 그렇게 변화시킬 능력이 없어요. 이렇게 솔직하게 얘기하는데, 질문자가 저를 의심할 게 뭐 있어요? (모두 웃음)

질문자도 알고 저도 아는 얘기를 하기 때문에 의심할 게 없어요. 처음엔 이상한 대화를 하는 것 같은데, 대화를 하다 보면 ‘내 문제’라는 걸 알 수 있어요.

내가 결정할 문제이고, 내가 책임질 문제입니다. 아이 문제도 아니고, 남편 문제도 아니에요. 그런데 자기 문제를 자꾸 남한테 책임 전가를 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성당에 좀 다녀라’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당에 가면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탓이요’ 이런 것을 배우니까요. (모두 웃음) 그리고 ‘성경 좀 읽어라’라고 할 때도 있어요. 왜냐하면 성경에 ‘남의 눈에 티끌은 보면서 제 눈에 대들보는 못 본다’라는 말을 배우니까요.

성경이 중요하냐, 불경이 중요하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어떻게 내가 나에 대한 자각을 하느냐’, ‘내가 나를 아느냐’ 하는 것이 중요해요. 밖에 백만의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자기가 자기를 이기는 자가 가장 큰 영웅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대웅’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래서 절에 가면 부처님 모셔진 곳을 ‘대웅전’이라고 써놓은 겁니다.

그래서 질문자가 법륜 스님에 대해 의심할 건 아무것도 없어요. 예를 들어서 제가 ‘내가 다 고쳐줄게’, ‘내가 나쁜 건 다 막아줄게’ 이렇게 말한다면 ‘저 사람이 정말 저런 능력이 있나?’ 이렇게 의심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저는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얘기만 하지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를 안 하잖아요. 얼마나 쉬운 얘기만 하는데요. ‘못 살겠다’라고 하면 ‘헤어져라’라고 하고, ‘애 때문에 같이 살아야 합니다’라고 하니까 ‘그럼, 같이 살아라’ 하는 말 밖에 저는 안 해요.” (모두 웃음)

강연장은 순식 간에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이어진 9번째 질문에서도 8번째 질문자가 등장합니다. 자, 그럼 스님의 문답을 계속 따라가 보겠습니다.

9번째 질문자는 몸이 너무 아파서 힘들다고 눈물을 흘리며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제가 몸이 너무 아파요. 양쪽 어깨를 거의 못 사용할 정도로 오십견이 와서 재활 치료를 받고 있는데요. 노후 대책도 없지만 근검절약하면서 식당 일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저는 결혼 생활에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딸 둘, 아들 하나 열심히 잘 키워서 지금 성인이 되었고요. 어깨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하니까 요즘 눈물이 자꾸 나더라고요. 젊을 때에 좀 더 몸 관리도 하면서 살았으면 이 정도로 아프지는 않았을 텐데, 자책하는 마음이 자꾸 들어요.”

“네. 그럼 마이크를 앞에 청년한테 줘보세요. 이 청년은 어떻게 대답하는지 한 번 봅시다.” (모두 웃음)

스님은 마이크를 앞서 질문한 청년에게 넘겼습니다.

“청년이 한 번 대답해 보세요.” (모두 박수)

청년은 당황해하면서 대답했습니다.

“병원 가서 치료받으시면 됩니다.”

그러자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거봐. 대답하기 쉽지?” (모두 웃음)

청중석은 순식 간에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치료는 병원에 가서 받아야 되겠죠.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얘기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서 플러스알파를 하나 더 해야 해요. 요건 저 청년도 대답하기 어려울 수 있어요. (모두 웃음)

플러스알파를 제가 지금부터 알려드릴게요. 아픈 몸이지만 살아있는 게 나아요, 죽는 게 나아요?”

“솔직히 요즘은 죽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제가 지금 50세 밖에 안 됐는데, 예전에는 60세까지만 살았으면 하고 바랬어요. 그런데 요즘은 너무 아프니까 55세까지만이라도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쨌든 지금 죽지 않고 앞으로 5년은 더 살고 싶다는 거네요. 1년이라도 더 살고 싶어요, 당장 죽고 싶어요?”

“좀 더 살고 싶습니다.”

“그래요. 좀 더 살고 싶어 하는데, 지금 살아 있으면 기분이 좋아요, 안 좋아요?”

“네. 기분 좋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눈 뜨면 제일 먼저 ‘아, 오늘도 살았네’라고 해보세요. 교회를 다닌다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살았습니다’라고 하고, 절에 다닌다면 ‘부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살았습니다’라고 기도해 보세요. 아침에 눈 뜨자마자 벌떡 일어나서 무릎 딱 꿇고 ‘감사합니다. 오늘도 살았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면, 육체는 아파도 심리적인 불안과 고통은 사라지게 됩니다.

통증이 얼마나 심하면 죽고 싶은 마음이 들까요.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예전에 행복 전도사라는 사람이 통증이 너무 심해서 자살했다는 기사 보셨어요? 행복 전도사라는 사람이 왜 자살을 했냐 싶지만, 그건 그 사람이 얼마나 통증이 심했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통증이 너무 심하면 ‘이럴 바에야 죽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어요. ‘이런 경우에는 죽을 권리를 달라’라고 하는 운동이 세계 곳곳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어요. 극심한 고통을 느끼면서까지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을 헤치는 행위라는 거죠. 원래 마약은 통용이 안 되지만, 이렇게 통증이 심할 때는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서 마약을 사용하는 것을 법이 허용합니다. 그래서 암 말기에 통증이 심하면 마약을 일부 사용하는 겁니다. 그때 마약은 마약이 아니라 진통제입니다.

만약 그것도 안 되면, 자신의 삶을 존엄하게 마칠 권리를 개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건 정신 질환 때문에 자살하는 것과는 성격이 달라요. 너무 통증이 심해서 죽고 싶기까지 하다는 질문자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질문자가 결정을 해야 돼요. 통증이 없으면 제일 좋죠. 그런 것처럼 남편이 술을 안 먹으면 제일 좋죠. 그러나 남편이 술을 먹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면, 술을 먹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나을까요, 술을 먹으면서 그래도 살아있는 게 나을까요?”

“그래도 살아 있는 게 낫죠.”

“살아 있는 게 낫기 때문에 불평을 하면서도 같이 사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만큼 이뤄지면 좋겠지만, 그렇게 될 수가 없어요. 그래도 남편을 버리는 것보다는 같이 사는 게 나으니까 같이 살고 있는 거예요. 남편이 불쌍해서 살고 있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들에게 그런 자비심은 없어요. 아직도 좀 얻어먹을 게 있어서 같이 사는 거예요. (모두 웃음)

그런데 손익분기점에 가까워지니까 스님한테 이혼 상담을 하는 거예요. 거기에 제가 ‘결혼했는데 이혼하면 안 되지’ 이렇게 대답해 주면 이혼을 꼭 해야 할 이유를 말하고, ‘이혼해라’ 이렇게 대답해주면 이혼을 못 할 이유를 말하고, 대화가 항상 이렇습니다. 제가 첫 번째 대답을 어떻게 하느냐와는 상관이 없어요.

이렇게 계속 대화하면서 ‘헤어져라’, ‘살아라’, ‘헤어져라’, ‘살아라’... 하다 보면, 첫째, 질문자 스스로 ‘이것은 내 문제이구나’라고 자각하게 됩니다. 둘째, ‘아직도 남편에게 얻어먹을 게 있구나’ 하고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 내가 정말 바보 같구나, 미련을 버려야겠구나’라고 깨닫고 이혼을 결심하는 겁니다. 이혼을 해라 하지 말라는 제가 결정해 줄 이유가 없어요. 대화를 하면서 본인이 결정을 합니다.

이때 저의 역할은 이혼을 해도 후회를 안 하도록 도와주고, 같이 살아도 후회를 안 하도록 도와주는 거예요. 같이 살아도 본인이 결정해서 사는 것이고, 이혼을 해도 본인이 결정한 겁니다. 상대가 이혼을 청구해도 결정은 내가 하는 겁니다. 항상 인생은 내가 주인이 되어야 해요.

통증이 있는 건 어쩔 수 없어요. 통증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이해가 돼요. 그러나 통증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통증을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병원의 도움을 얻거나 적절한 운동을 하면 돼요.

정신적인 불안증이 있는 사람은 신경정신과에 가서 약을 미리 지어놓았다가 괜찮을 때는 안 먹더라도 약간 자살 충동이 나거나 주위 사람이 다 밉다면 ‘내 정신이 불안증에 들었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약을 꺼내서 먹어야 해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이건 정신 질환에 속해요. 약을 복용하면 죽고 싶은 심리가 가라앉아요. 이렇게 자기를 딱 조절해서 살면 돼요.”

“저는 아프지 않을 때 절에 가서 절을 합니다. 젊어서 몸을 안 돌보고 산 게 너무 후회돼요.”

“옛날에 몸을 안 돌봤으면 지금이라도 돌보면 되죠. 옛날에 몸을 안 돌본 얘기를 지금 얘기해서 뭐해요? 지금이 중요한 거예요.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가난한 집에 살았든, 부잣집에 살았든, 결혼을 했든, 결혼을 안 했든, 이혼을 했든, 그건 하등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 내가 내 인생을 어떻게 살 거냐, 이것만 지금 중요한 거예요. 옛날 얘기는 지금 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모두 박수)

얼마 전에 ‘저는 태어날 때 사생아로 태어났고, 결혼도 안 하고 아기를 낳아서 혼자 아기를 키웠어요’라고 하소연을 하시는 분이 계셨어요. 그런데 사생아라는 건 원래 없어요. 생물학적으로 아빠 없는 사람은 있을 수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지금 아빠가 진짜 아빠인지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어요. (모두 웃음) 모든 동물은 아빠가 없어요. 수컷은 교미만 하고 가버리고, 새끼는 다 어미가 키우니까요. 윤리 도덕의 측면에서는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지만, 중요한 건 내가 지금 태어났다는 거예요. 어떻게 태어났든 태어난 겁니다. 어떻게 태어났든 아이에게 죄는 없어요. 엄마가 정신적으로 괴로워하기 때문에 아이에게도 괴로움이 전이되는 겁니다.

어떻게 태어났든, 지금 상태가 어떻든, 모든 인간은 존엄합니다. 통증이 있어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어요. 왜냐하면 통증이 있는 게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이렇게 아플 바에야 죽는 게 나을까요, 그래도 살아있는 게 나을까요?”

“살아 있는 게 낫죠.”

“앞으로 5년은 살아야 되겠다면, 아침에 눈 뜰 때마다 살아있는 것에 감사해야죠. 그러면 통증을 갖고 있으면서도 웃으면서 살 수 있어요.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일체중생이 다 부처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어요. 통증을 느끼면서도 행복하게 살면 돼요.”

“감사합니다.”

울먹이던 질문자는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앞서 질문한 청년에게 다시 말을 건넸습니다.

“병원에 가라는 소리는 흉내 낼 수 있는데, 이런 얘기는 흉내를 못 내잖아요. (모두 웃음) 웃자고 하는 농담이에요.”

한바탕 웃음이 터지고, 스님은 마무리 말씀을 이어갔습니다.

“즐거웠어요?”

“네!”

“자기 삶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돈이 있니 없니, 키가 작니 크니, 결혼했니 안 했니, 이혼을 했니 안했니... 이런 것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거예요.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고, 비교할 수도 없는, 존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하셨습니다. 천상이라는 것은 신들의 세계이고, 천하라는 것은 인간의 세계입니다. 신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통틀어서 나보다 더 소중한 존재는 없다는 뜻이에요. 붓다는 여러분들 각자가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걸 깨우쳐 준 겁니다. 그러니 자신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해요.

자신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건 뭘까요? 보석으로 치장하는 게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걸까요? 아니에요. 행복하게 사는 것이 가장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길입니다. 미래에는 행복이 최고의 가치가 될 것입니다. 행복하지 못하다면, 돈이 아무리 많고, 옷이 아무리 좋으면 뭐합니까. 행복하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질문자 중에는 ‘상처를 잘 받는 성격인데, 즉문즉설 유튜브를 보고 많이 치유됐어요.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만 하고 앉은 분도 있었습니다.

  • 100세 시대, 40대밖에 안됐는데 성인병이 많아서 고민이에요.
  • 복을 지을 형편이 안되는데 복을 짓는 방법이 있나요?
  • 지금은 경제활동을 쉬고 있는데 경제활동도 중요하지만 정치를 하고픈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자녀 3명이 다 결혼을 했는데, 그 가정에 우환이 한 가지씩 있어 고민이에요.
  • 초등 3학년 딸아이가 핸드폰을 너무 많이 봐요.
  • 행복학교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삶의 이치를 실타래 풀 듯이 풀어가는 스님의 말씀에 청중들은 큰 박수로 화답했습니다.

오늘 강연에서 스님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기 자신이라고 했습니다. 강연장 밖을 나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도 한층 밝아졌습니다. 여러분들도 자신이 가장 소중함을 자각하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전체댓글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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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나

몸이 아파도,돈이 없어도 상대가 힘들어도
지금 여기서 난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2018-12-21 06:51:58

규원

정말 유익한 법문 스님 감사합니다. 행복하게 잘살겠습니다.

2018-12-11 14:40:45

김희선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세상에 나보다 더 존귀한 것은 없다라는 말씀이 다가오네요. 내가 소중한 줄 아니 이세상 만물이 더 없이 소중한 존재임도 알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2018-12-11 09:4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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