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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우연히 스님의 법문을 듣고 정토회에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눔의 장’ 수련을 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스님이 안내자였는데 “생각을 내려놓고 마음과 느낌에 대해 얘기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생각이 아니라, 내 마음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생소했고 해보려고 해도 잘되지 않았습니다. 쉬는 시간에 문득 맞은 편 관세음보살상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나눔의 장에 참가했던 당시에는 문경에 수련 장소가 따로 없었고, 백화암에서 수련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백화암에 모셔져 있는 관세음보살님은 오른손에 감로수병을 들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제 머릿속에 그려져 있던 관세음보살님은 연꽃과 감로수 병을 들고 있었는데, 연꽃을 내려놓고 감로수 병만 들고 있는 백화암 관세음보살님을 바라보니, 생각을 내려놓고 마음과 느낌을 보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때부터 얼굴이 편안해지고 머릿속은 환해졌습니다. 마음도 시원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눔의 장을 마치고, 1992년 당시 살던 성남에 있는 법당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홍은동에 있는 『월간정토』 사무실에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법당에 처음 갔을 때, 어떤 분이 절을 하고 있었는데 그 앞에 씌어 있는 ‘100만 배 목표’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걸 보며 ‘100배도 어려운데 100만 배라니!’하고 놀랐습니다. 나중에 그분이 “100만 배는 매일 3,000배씩 1년만 하면 됩니다”라고 가볍게 말씀하셔서 더 놀랐습니다. 법당에는 그렇게 매일 절을 하거나, 전단지를 나눠주며 홍보하는 분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분들과 함께 홍보를 거들다가 테이프 사업부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당시 『월간정토』에 속해 있던 ‘테이프 사업부’에서는 법문을 녹음하고 편집하여 테이프를 만들어 배포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월간정토』는 1988년에 창간되어 1989년에 정기간행물로 등록되었기 때문에 법문 테이프는 정토회 간행물 중 하나였습니다. 그때는 홍은동 사무실로 출근하는 출판국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JTS’도, ‘좋은벗들’도 설립되기 전이었고, 『월간정토』뿐이었습니다.
테이프 사업부에서는 ‘불교대학’이나 ‘통신불교대학’을 위한 내용으로 테이프를 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불교대학이 2년 과정으로 주 3회 수업이 있었고, 내용도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강사진으로 대학교수나 스님들을 초빙하여 교과를 꾸려갔습니다. 다양한 내용으로 2년간 진행해 본 결과는 나쁘지 않았지만, 내부적으로는 ‘지식 위주다’라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이후 정토회 내부 구성원으로만 강사진을 꾸려가면서 차츰 법륜스님과 보수법사님이 수업을 맡게 되었습니다.
1993년 제1차 만일결사 1차 천일결사 입재식이 법광법사님의 용두리 밭 비닐하우스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용두리에서 지내며 인사동으로 이전한 『월간정토』 사무실로 출근했습니다. 인사동 사무실 옆에는 ‘좋은벗들’이 있었고, ‘에코붓다’의 전신으로 환경 문제를 주로 다루는 ‘한국불교사회교육원’이 성균관대학교 쪽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각각 흩어져 있다가, 1999년 서초법당이 지어지면서 비로소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1999년 완공된 정토회관은 1층에 법당이 있고, 2층은 사무 공간으로 JTS, 좋은벗들 그리고 『월간정토』까지 한 공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3층은 용두리, 홍제동, 서초동 법당 등지에서 살던 사람들이 모인 생활공간으로 입주하는 순간부터 이미 붐비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공간이 좁다고 말하면서도 다들 잘 지냈습니다.
2000년 들어 쓰레기 제로 실험을 시작하면서 에너지 절약 실험도 했습니다. 내복을 두 벌 겹쳐 입고도 추울 정도여야 난방을 가동하고, 바깥 기온과 실내 온도를 꼼꼼하게 기록하여 백서를 만들기도 하면서, 어디까지 안 쓰고 살 수 있는지 가늠해보며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면서 빵, 사탕, 과자는 안 먹어도 된다고 결론을 내리거나, ‘그렇지만 떡은? 음식은?’ 식으로 의문을 이어가면서 현재 정토회 반입 불가 품목 중 많은 부분을 정해나갔습니다.
‘정토회관 건립 기념 100일 법문’이 시작되면서 테이프 사업부에서도 큰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그간 불교대학 강의는 대각사에서 진행되었고, 반야심경 강의와 금강경 강의는 스님이 지역법회에서 법문하시는 일정에 따라 이동해가며 녹음하고 테이프로 만들어 신청한 회원들에게 주1회 발송했습니다. 그런데 100일 법문이 시작되자 큰스님을 비롯해 많은 분이 서초법당을 방문했습니다. 즉문즉설을 녹화하기 시작한 시기도 이때인데, 100일 법문 기간에 법당에 오는 분들이 테이프를 많이 구입했습니다. 대략 30만여 개의 테이프가 배포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공테이프를 공급하던 회사 사장님이 연말에 고맙다고 인사하러 오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2차 천일결사가 시작되던 1996년, 북한동포돕기가 시작되면서 정토회관 불사가 불투명해지자 정토회관 불사를 위해 보시하던 많은 분이 떠나갔습니다. 8층 건물을 짓는다고 해서 보시했는데 북한동포돕기에 쓰겠다고 하니 그 당시 신도님들 입장에서는 그럴 법도 했습니다. 그러나 100일 법문을 계기로 다시 정토회원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996년과 1997년에 100만인 서명운동을 하며 힘든 시기를 거쳤고 1998년까지도 지속적으로 위축되다가 1999년 서초법당이 생기면서, 어려움 앞에서 더 마음을 모아준 회원들 덕분에 잘 이겨냈다는 평이 이어졌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때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였습니다. 법륜스님이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고 북한동포돕기를 꿋꿋이 이어가던 모습이 지금도 크게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길거리 서명을 받으러 나갔다가 험악한 일로 수모를 겪는 사람들도 있었고, 중국에서 민간인 정토 활동가가 북한 동포를 돕다가 중국 공안에게 잡혀 감옥에 갇히는 사건이 발생해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서초법당이 완공되었고, 100일 법문을 통해 정토회가 변곡점을 맞이했던 그 시기가 가장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어린 시절에 살던 마을은 산골 같은 곳이었고, 집에서 학교까지 십 리는 걸어가야 했습니다. 마을을 세 개나 지나서 학교에 가다 보니 온 동네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아 마음은 상처투성이가 되어 눈물이 많았습니다. 나중에 정토회에 와서 내 얘기를 풀어놓으니 차츰 마음이 풀렸습니다. 초반에는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수행한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바꿔보려고 노력을 많이 해봤지만 되지 않았고, 수행을 하면 단점이 사라지거나 변화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바꿔, ‘단점을 없앨 게 아니라 장점을 살리자’ 생각하니 단점이 사라진 것은 아닌데,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에너지가 더 많이 생기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참 좋은 분들이었습니다. 몸이 불편한 아들에게 아무 일도 시키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는 그것이 편하고 좋았는데 크면서는 점점 무거움으로 느껴졌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나와서는 무슨 일이든 사람들과 함께 나눠서 하다 보니 힘이 들어 다시 편안했던 집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집의 편안함은 갖고 싶고 무거움만 털어내려고 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은 부족함 없이 지낸 편입니다. 부모님은 수완이 좋아 1년 만에 집 한 채를 사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노름을 좋아해서 집에 돈이 없을 때도 있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부모님은 ‘돈이란 그냥 벌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었습니다. 10년 전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의 영정 앞에서 우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아버지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분들이었습니다. 가족들에게 소홀하기도 했지만,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베푸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아버지를 향한 응어리도 많이 풀렸습니다. 제가 정토회에 들어오고 공동체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부모님은 적극 도와주셨습니다. 2000년 어머니와 함께 인도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그 후 어머니는 정토회를 더욱더 신뢰하고 지지해줍니다.
5차 천일결사가 시작되던 2005년 문경으로 내려와 그 후로 계속 문경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정토회를 처음 만나 성남법당에 들어가던 시기에 활기차게 일했고, 100일 법문 때는 신이 나서 일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문경에서는 깨달음의 장, 나눔의 장, 명상수련 등 수련 접수를 담당하며 편안하게 지냅니다. 수련이 시작되면 수련생들이 불편 없이 수련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전반적인 관리를 하면서 그 기간에 바라지 오신 분들과 나누기를 합니다. 정토회와의 인연, 그동안 살아오면서 겪은 일 등 인생 나누기를 진행하면서 개인적인 고민을 서로 나누는 시간을 갖습니다.
나누기는 사람들의 얘기를 잘 듣고, 상황을 잘 보면서 진행합니다. 코로나 전에는 정해진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그런 형식을 좀 내려놓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는 편입니다. 바라지장 참가자들이 얘기를 많이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지난해 5월에 참가하신 분 중에는 세 분이 우울증을 앓고 있었는데, 얘기를 나누려고 해도 잘 풀리지 않아 어려웠습니다. 그러다가 우울증도 다 같은 게 아니라는 생각에, 귀여운 우울증, 부드러운 우울증, 예쁜 우울증이라고 이름을 붙여보았더니 다들 좋아했고 분위기가 바뀌니 편안하게 얘기도 하고 잘 지내셨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그리움이 없어졌습니다. 수련원에서 그렇게 친하게 지내다가도 안 보면 금세 잊곤 합니다. 앞에 있을 때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고 귀 기울여 듣고 최선을 다하지만, 헤어지고 나면 밖에 있는 사람들은 찾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문경에서 지내면서 달라진 점입니다. 이전에는 밖에 있는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연락해서 챙겨주고, 물건 보내주는 것을 좋아했었습니다.
그래도 기억이 나는 분들이 몇 분 있습니다. 2005년부터 몇 해 동안 회계를 맡았던 젊은 분이 있었는데 아주 꼼꼼해서 철저하게 비용을 따져 음식 재료비와 주유비를 더 아껴달라는 요청을 자주 했습니다. 백일출가 1기부터 16기까지 반장을 맡으셨던 분들도 기억이 많이 납니다. 그리고 2000년에 나눔의 장 돕는이를 할 때였는데, 수련생의 동생이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언니가 가보라고 해서 왔다는데, 할 말이 많은 듯이 보여서 얘기를 들어주고 정토회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그분과 사귀게 되었는데, 사귀는 동안은 참 좋았지만 에너지가 많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헤어지게 되었고 마음이 매우 아팠습니다. 그래도 저는 수련원 안에 살고 있었으니 잘 버텼고, 주변의 위로를 통해 힘든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몇 년간 사람들을 만나지 못해서 힘들었습니다. 요즘은 다시 바라지분들이 오시고 얘기도 많이 하면서 새로이 에너지를 얻곤 합니다. 그분들에게 도움을 드리는 부분도 있겠지만 저도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정토회에서 일하면서 ‘이곳에는 여러 가지 사업이 있으니 해보고 싶은 것들을 다양하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제는 관점에 따라 장점이랄 것도, 단점이랄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 어떤 것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_배상훈(문경수련원 실무자)
편집_월간정토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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