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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 작가가 꿈이었던 나는 다른 직업은 관심도 없었을뿐더러 하루하루 월급 받고 성실히 일하는 이들을 경멸하기까지 했다. 하루빨리 이 따분한 직장을 접고 전업 작가가 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글로 밥 먹고 살 수 있을까? 소설을 좋아해 무지하게 읽었으나 전업 작가로 살기에는 뭔가 부족해 보였다. 그래 드라마!! 그건 돈이 되겠지 그걸 써보자. 사실 드라마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드라마 작가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으며, 유명한 몇몇 작품 이외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본 드라마도 별로 없었다.
이십 대의 마지막 겨울, 꿈에 그리던 백수(?)가 되어 여의도에 있는 방송작가협회 드라마 작가 과정에 입학했다. 골방에 틀어박혀 글을 쓰고 밤새 드라마를 보며 새벽을 맞았다. 하지만 진전은 없었고 나의 드라마는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렇게 3년이 지나갔다. 처음 시작할 때의 당당함은 어디 가고 쭈그러진 내 모습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친구들의 결혼 소식, 출산 소식이 줄줄이 들려올수록 이룬 것 없이 나이만 먹은 내가 초라해 보였다.
이즈음, 지인이 백일기도를 권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지인이 추천한 절에 들어가 봉사하며 백일 동안 기도하게 되었다. 간절하게 기도하니 복잡했던 심정이 하나하나 정리가 되었다. 첫째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자, 둘째 결혼해서 아이를 낳자, 셋째가 글쓰기!! 목숨까지 바칠 줄 알았던 그 글쓰기가 무려 세 번째 순서로 밀려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백일기도를 마치고 다시 속세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현실은 녹록지 않았고 뜻대로 안 되는 세상에 대한 답답함이 남아 있었다.
2008년 겨울, 드라마 공부를 같이하던 김영진 법우의 소개로 '길벗' 여의도 법회에 초대받았고 거기서 법륜스님을 처음 뵈었다. 그리고 다음 달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진행된 '길벗' 정기법회에서 영상법문을 듣고서는 누가 내 뒤통수를 방망이로 때린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다. 법문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요약하자면 '바라는 기도를 하지 마라. 남을 비난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아라' 이런 내용이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그때까지의 내 기도는 분명 바라는 기도였다. 그리고 나는 열심히 살고 있는데 상대의 욕심과 이기심으로 늘 손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고, 용돈 받으며 글 쓰고 공부하는 누군가를 마음속 깊이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니 늘 불안하고 초조하고, 초라하고 자신감이 없었다. 글쓰기가 내 인생의 대단한 불꽃인 양 활활 태웠으나, 그것은 초라한 나를 돋보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 뿐이고, 나는 또 그 꿈 때문에 너무 초라해진 상태였다. 진정 좋은 글을 쓰고 싶었던 게 아니라 유명해지고 싶었고, 자랑하며 으스대고 싶었으니 좋은 글이 나올 리 없었다. 처절하게 반성한 날이었다.
나는 그날로 불교 신도가 아닌 부처님의 제자로 당당히 살기 위해 천일결사에 입재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일주일 전에 이미 천일결사 입재식을 마쳤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결국, 스스로 입재를 자처하고 그날부터 매일 300배를 했다. 그렇게 시작된 정토회와의 인연. 스님의 법문은 들으면 들을수록 명쾌했고 여태껏 내가 품었던 모든 의문을 풀어주었다. 이후 길벗 활동을 하며 깨달음의 장을 다녀왔고, 절대로 하지 않겠다던 출가도 했다. 당시 매월 있던 3,000배 기도에도 종종 참여하며 신자의 때를 벗고 수행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스님의 말씀대로 기도하고 봉사하며 사니 마음도 가볍고 행복했다. 욕심을 낮춰 나에게 맞는 불교계 언론사에 취직해 기자로 일하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마흔이라는 늦은 나이에 결혼도 했다.
결혼 3개월 만에 아이를 가졌고 2016년 9월, 아들을 출산했다. 길벗들 대부분이 결혼하지 않았고 결혼해도 자식을 안 낳아서인지 나의 결혼과 출산을 많은 도반이 축하해주었고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늦은 나이에 손주를 얻은 양가 부모님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기에게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잘 쓰이라며 용우(龍右)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그런 기쁨도 잠시 육아는 지난한 시간이었다. 1년 조금 넘은 결혼생활에서 남편이라는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육아라는 또 다른 세상과 맞닥뜨린 것이다. 평소 말수 적고 자기 일에만 성실한 남편은 새벽에 나가 밤늦게 들어올 정도로 바빴고, 주말에 나가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근처에 아는 사람도 없어 대화할 사람도 없었다. 모유가 안 나와 분유를 먹였는데 자다가 아이가 울면 분유 타서 먹이고, 젖병 씻고, 기저귀 갈고 하다 보면 밤잠을 놓칠 때가 많았다. 남편은 아이가 울면 푹 못 잔다고 다른 방에서 자니 너무 야속하고 미웠다. 밤에 아내가 깰까봐 조용히 일어나 분유 탄다는 누군가의 남편 얘기를 들을 때면 어쩌다 나는 저런 인간을 만났나 하며 분노로 가슴이 막혔다.
스님 말씀대로 3년 동안 아이 키우기에만 전념하려 결심했으나 현실은 막막하기만 했다. 임신 중에도 (노산이니 108배 절대 하지 말라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새벽마다 30분 명상하며 기도를 놓치지 않았는데,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기도는커녕 밤낮이 바뀌고 제때 먹지도 씻지도 못하면서 모든 생활은 뒤죽박죽되었다. 법문을 듣는 것도 사치였다. 결혼하고 아이 낳는 두 번째 목표가 이루어졌는데 나는 왜 괴로운가?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보다 몇 달 빨리 출산을 한 남미영 법우에게 전화가 왔다. 매주 수요일 아기엄마 모임이 있으니 법당에 나오라는 얘기였다. 신생아를 데리고 서초동까지 갈 자신이 없어서 처음에는 몇 번 거절했다.
하지만 아이를 남편에게 내팽개치고 이유 없이 방안에 혼자 들어가 몇 번 엉엉 울고 난 뒤 유모차를 끌고 지하철을 탔다. 다행히 사는 곳이 3호선이라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서초동 가기가 어렵지 않았다. 도착해보니 절반 이상이 불교대·경전대 혹은 봉사하며 만나던 청년부 도반들이어서 반갑기도 했다. 특히, 용우 또래인 2016년생 아이들이 많았는데 10명은 족히 넘는 숫자였다. 당시 엄마들은 아기가 울면 달래고 먹이고 기저귀 갈아주느라 다들 법문 듣기도 나누기도 어려웠으나, 그저 함께 모이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는지 수요일이면 어김없이 기저귀와 분유, 간식 등이 든 큰 가방을 옆으로 혹은 뒤로 메고 아이를 안고 법당에 나왔다.
법회에 나가면서 나의 육아 생활에도 변화가 왔다. 그간의 육아 방식을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내가 정말 아이와 못 놀아준다는 사실이었고, 밖에 나가기를 싫어해 아이를 참 정적으로 키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양한 직업군의 엄마들이 노래와 안무, 책 읽어주기, 놀이 활동 등으로 재능 기부를 해주니 아이도 다양한 경험을 접할 수 있었고, 어설프던 내 육아 방식도 조금씩 발전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도반이자 육아 스승이었다.
처음 아기엄마 법회는 수요 법회에 딸린 작은 모임으로 시작했지만, 아기 낳은 청년부 엄마들이 모이면서 회원 수가 늘어갔다. 선광법사님이 지도법사를 맡아주시면서 조직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리고 많은 봉사자의 도움으로 아기엄마 법회의 기틀을 만들 수 있었다.
어느 날 법사님께서 나누기 수련을 제안하셨고, 시간이 맞는 도반들 10여 명이 주말에 모였다. 출산 이후 처음으로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엄마들만 모인 역사적인 날이었다. 그간 못한 깊이 있는 나누기를 하며 다들 울었다. 지금도 그날을 회상하니 가슴이 먹먹해지고 뭔가 울컥함이 밀려온다. 남편이 괜찮으면 시댁이 문제고, 시댁이 괜찮으면 남편이 문제고, 아니면 아이가 아프고…. 다들 가슴에 묻었던 불덩이들을 꺼내 놓으면서 나누기 수련은 성토의 장이 되었다. 정토행자로 엄마로 3년 동안 아이를 잘 키워보고자 하는 마음이었으나 다들 결혼과 육아라는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나만 힘든 게 아니었네’ 모두가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법사님은 그날 기도방 개설을 권하면서 매일 기도를 놓치지 말라고 조언하셨다. 예전에는 수행을 빼먹으면 양치 안 한 듯 세수를 안 한 듯 찝찝했는데, 이렇게 힘들면서 기도할 생각을 왜 못했단 말인가. 그래 기도하자. 아기엄마 기도방 나누기 밴드를 개설하고 매일 아침 정진을 시작했다. 그렇게 정진의 힘으로 육아와 결혼생활의 고비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2016년생들이 하나둘 어린이집으로 가기 시작하자 아기엄마 법회의 규모가 현저히 줄기 시작했다. 구법당 3층 강당까지 내줄 정도로 번성했던 법회였는데, 출석 인원이 줄고 있었다. 나도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혼자 법회를 나가기도 했으나 안 나가는 날이 늘어갔다. 2019년 겨울, 코로나19 사태가 일어나면서 결국 모든 법회가 중단되었고 아기엄마 법회는 공중에 떠버렸다.
긴 시간을 보내고 2022년 여름, 아기엄마 법회 모임이 재결성되었다. 처음에는 법당에 자리 잡기 힘들어 외부에서 오프라인 모임을 시작했고, 차차 인원이 늘면서 매월 온라인 1회, 오프라인 1회로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법회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아빠들이 소외된다는 의견을 반영해 명칭을 부모 법회로 변경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부모들과 갓 백일 지난 아이부터 초등학생까지 참여하니 시끌벅적하기도 하지만, 아이들 노는 방과 법회를 진행하는 방이 분리되어서 부모들도 법문을 제대로 들을 수 있다. 혼자서 설거지하며 듣는 법문과 도반들과 예를 갖춰 듣는 법문은 차원이 달랐다. 또 아이들을 봐주는 봉사자까지 생기니 더없이 편안한 시간이 되었다. 또 오랜 시간 정토회에서 잔뼈가 굵은 정토행자들답게 적극적으로 봉사에 나서주니 모임이 흥할 수밖에.
이런 기세를 몰아 지난 여름에는 문경 선유동 연수원으로 1박 2일 캠프도 다녀왔다. 태풍 뉴스에 전날 오전까지 허가가 미뤄지다가 오후에 겨우 승인이 났음에도 행사 당일 한 팀을 제외하고 예약자들이 모두 아이를 데리고 참석해 깜짝 놀랐다. 또 장보기부터 공양 준비, 청소는 물론 프로그램 진행까지 모두 부모 법회 구성원들이 봉사자로 참여한 만큼 멤버들의 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행사는 여법하게 끝났으며 누구 하나 다치지 않고 너무나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이번 캠프를 진행하며 육아면 육아, 봉사면 봉사, 무엇이든 척척 해내는 너무나 멋진 우리 도반들에게 또 한 번 반하고 말았다. 앞으로 부모 법회가 널리 알려지고 좀 더 체계가 잡혀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주길 바란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물론 어느 날 또 원이 이루어졌다고 좋아하다가 넘어지는 시간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다만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지혜를 갖고자 노력할 뿐이다. 넘어지는 시간도, 일어나는 시간도, 걸어가는 시간도, 뛰어가는 시간도, 모두 나의 시간이다. 나는 나의 그 모든 시간을 사랑한다. 또 나를, 내 가족을, 나의 도반을 사랑하니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글_정혜숙
편집_월간정토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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