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경전대학 졸업했으니 이제 뭐 할 거야?”
“출가해야지!”
남편이 물어와서 얼른 대답했다. 아니 반사적으로 말이 나왔다. 백일출가 모집 안내를 보고 언제 말을 꺼낼까 틈을 보고 있던 차였다. 혹시 싫어하지 않을까? 가지 말라고 하지 않을까?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괜한 일이었다. 그날로 입방 원서를 냈다. 결혼 31년 만에 상황이 바뀌어 남편이 집에 있고 내가 집을 나가게 되었다.
도대체 가족이란 뭐지? 나에게 가족은 벗어나고 싶은 굴레였다. 아버지와 엄마를 보며 부부 관계의 모순과 이기심을 보았다. 가족은 사랑과 이해의 관계라기보다는 관습에 얽매인 관계로만 보였다. 그 속에서 맏딸인 나 또한 관습의 희생자였다. 결혼 직후부터 나는 엄마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결혼하면 엄마도 나를 한 사람으로, 엄마와 같은 입장의 여자로 이해해줄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엄마는 여전히 내게 요구가 많았다. 조금이라도 엄마의 뜻을 맞추지 못하면 비난하셨다. 몇 년 후 지방에 사시던 부모님이 우리 집 근처로 이사하셨다. 결혼 전과 같은 관계가 다시 시작되었다. 엄마의 구속과 간섭은 결혼 전과 다름이 없었다. 엄마는 여전히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셨고 나는 엄마를 점점 더 미워했다. 맏이로서 엄마를 도왔고 엄마 말씀을 거스르지 않으며 살았는데 인정받기는커녕 비난만 받아 억울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원망과 비난이었다. 엄마를 미워하는 나 자신도 싫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비난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왜 비난을 받을까? 나만 문제인가? 서러웠고 답답했다.
방황하다가 어느 독서 모임에서 법륜스님의 《금강경》을 읽게 되었다. 드디어 구세주를 만난 듯했다. 읽고 또 읽으며 이 책을 평생 끼고 살아야지 마음먹었다. 스님의 즉문즉설도 들었다.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따끔하게 설하시는 스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일어났다. 감사기도를 하며 절을 하라는 스님의 법문을 듣고 108배를 시작했다.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100일 동안 매일 300배를 했다. 감사기도가 참회 기도가 되어버렸다. 가족이 모두 나가고 없을 때 혼자 절을 하며 실컷 울었다. 눈물이 줄줄 흘렀으나 가슴은 시원해졌다. ‘이런 거구나!’ 괴로움은 내 문제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시집살이와 남편 뜻을 받드느라 힘들어서 나를 그렇게 대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아무리 어렸어도 엄마는 맏딸인 나에게 의지하고 싶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엄마를 미워하는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엄마가 나한테 너무 심했지’, ‘같은 여자로서 이해받고 싶다면 엄마가 먼저 나를 이해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수그러들지 않았다. ‘엄마는 변하지 않을 텐데 나만 노력한다고 달라질까?’ 여전히 나는 어둠 속에 있었고 온전한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던 해에 경기도에서 강원도 원주로 이사했다. 남편이 퇴직하고 아이들도 독립했기 때문에 대도시를 떠나기로 했다. 간섭받기 싫어서 모든 일을 다 처리하고 이삿날이 정해진 후에야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사실 통보였다. 부모님, 특히 엄마는 놀라셨고 늙은 부모를 두고 멀리 간다며 야속하게 생각하셨다. 죄송한 마음은 있었으나 친정과 멀어져 마음은 홀가분했다. ‘가족의 굴레를 벗어나서 내 인생을 살아보자’ 라는 마음이 컸다.
2022년 가벼운 마음으로 온라인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했다. 처음 《금강경》을 읽고 10년도 훨씬 지난 시점이었다. 그 때문인지 입학식 법문부터 가슴이 벅찼다. 스님의 가르침도, 부처님 법도 모두 받아들이자 마음먹었다. 경전대를 시작하며 깨달음의 장 수련을 했다. '뭔가 좀 달라질까'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내 분노의 근원, 엄마에 대해 내어놓았다. ‘깨달음의 장’에서 나는 엄마의 독설과 손찌검을 말했고, 내 모성과 엄마의 모성을 비교하며 엄마가 얼마나 차가운 사람인지 울먹이며 토로했다. 그랬음에도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았다. 셋째 날, “엄마를 원망하는 보살이 엄마보다 더 차가운 사람이다”라는 안내자의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났다. 처음으로 내 생각이 뒤집혔다. 싫어했던 엄마의 모습보다 훨씬 더한 내가 보였다. ‘변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백일출가 45기. 58세. 나이 제한에 걸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늦은 나이다. 지금이 가장 젊은 순간이니 해보자. 만 배, 사람들은 만 배 때문에 백일출가를 망설인다고 했지만, 나는 만 배를 하려고 백일출가를 결심했다. 절을 하며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고, 참회의 심정으로 나를 힘든 상황에 놓아보고 싶었다. 막상 하니 힘들었지만 그만둘 생각이나 못할 거라는 생각이 아예 없었기에 그냥 할 수 있었다. 내 기도문은 ‘받은 사랑을 나누겠습니다’였다. 남은 97일도 그냥 해본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사는 연습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똥 푸고, 사면 정리하고, 도로 포장하고, 농사짓고, 공양 짓고, 몸 사리지 않았다. 일할수록 힘은 들었지만 힘든 만큼 내가 얼마나 남의 도움으로 편하게 살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부모님께 받은 게 너무 많다는 것도 알았다.
한 도반에게 내가 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 수행을 마치면 마음 나누기를 하는데 그렇게 느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수긍하지 못했다. 순간순간의 느낌을 잘 알아차리고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밑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일정이 빡빡하고 힘들어서 일어나는 마음을 알아채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다른 밑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할 때는 일만 보았기 때문이다. 함께하는 도반을 살피지도 않았고 넓은 시야로 상황을 보지도 못했다. 내가 한 일에 대해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컸고, 상황을 도반들과 공유하고 협력하기보다 내 식대로 통제하고 싶었다. 잘하는 일은 혼자 하고 싶고, 마음에 들지않는 사람이 있으면 속으로 그 사람을 배제했다. 스스로 그런 사람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나의 실체였다.
회향 후, 그런 나를 드러내는 일이 벌어졌다. ‘잘 쓰이겠습니다.’ 명심문을 새기며 바라지 팀장 소임을 맡았다. 백일 동안 공양간 일도 해봤으니 걱정은 하지 않았다. 잘 쓰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크게 넘어졌다. 배우기 위해 기존 팀장님 밑에서 바라지했는데 나와 너무 다른 성향 때문에 배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 팀장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시비 분별했다. 백일 동안 뭐 했지? 일 수행을 하며 일과 수행은 하나라고 배웠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꽈당 넘어지고 말았다. 나와 다른 상대를 아예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내 마음에 안 든다며 회피했다. 마음이 불편했고 하기 싫은 마음이 올라왔다. 자신감은 사라지고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어쩌지? 싫은 마음을 추스르고 대웅전에 올라가서 300배 정진했다. 정진하는 동안 마음이 차분해졌다. 어린애 같은 마음이 보였다. 팀장님이 자상히 가르쳐주길 기대했고 잘한다고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상대가 나를 무조건 인정할 만큼 내가 대단한가? 칭찬받을 만큼 최선을 다했나?
바라지를 마치며 법사님과 마음 나누기를 했다. 법사님 앞에, 여러 사람 앞에 나를 내려놓고 인정하기 싫은 밑마음을 내어놓았다. 법사님은 경험 많은 선배님의 모든 것을 따라 배우라고 하셨다. ‘네, 알겠습니다’ 마음을 숙였다. 내가 원하는 만큼의 엄마가 아니라고 무시하고 원망하면서 꼿꼿이 나를 세우며 잘난 척하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숙이겠다고 만 배를 하며 기도했건만 여전히 자신을 내려놓지 못했음을 알았다. 그러나 수행이란 넘어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정진하는 것임을 체험한 기회였다. 백일의 기도가 가슴을 울렸다. '받은 사랑 세상에 나누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_윤 심(백일출가 45기)
편집_월간정토 편집팀
전체댓글 26
전체 댓글 보기정토행자의 하루 ‘월간정토’의 다른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