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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아버지가 수도 공무소를 다니면서 토목건설 사업을 하시는 덕에 저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태권도장과 과외 학원을 다닐 정도로 나름 부유하게 자랐습니다. 할머니는 매일같이 잔칫집처럼 음식을 차려놓고 동네 할머니들을 불러 집에서 놀았습니다. 장손인 저는 할머니 사랑을 듬뿍 받았기에 할머니들로 북적이는 게 좋았지만, 어머니는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아버지는 할머니한테 따귀를 맞아도 꼼짝하지 않을 만큼 순종적인 효자였고, 아버지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어머니는 할머니의 별난 성격 때문에 시집살이를 심하게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늘 짜증과 화를 많이 냈습니다.
어느 날 아침 학교에 가려는데 바지 엉덩이 솔기가 터져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바지가 터졌다고 말하자 버럭 화를 내며 그냥 입고 가라고 했습니다. 다른 어머니였다면 “벗어봐라, 얼른 꿰매줄게.”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서운함이 밀려왔습니다. 어머니라면 당연히 한석봉 어머니나 맹자 어머니처럼 자식에게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한 저는 다정하지 않은 어머니가 늘 멀게 느껴졌고, 어린 시절 마음 둘 곳 없이 외롭고 불안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사업을 확장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돈 문제로 자주 다투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저와 동생을 앉혀놓고 “아버지가 사람만 좋지 우유부단해서 사업이 힘들다, 힘들어서 못 살겠다!”며 한탄했습니다. 한번은 “연탄가스 틀어놓고 자살하려다 너희들 때문에 못 죽었다.” 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버지는 사업 핑계로 술과 유흥을 즐기셨고, 집에 있는 게 편치 않았던 저 역시 친구들하고 밖으로만 나돌았습니다. 친구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끼려 했고, 무리에 끼지 못하면 왜 안 끼워 주나 괴로워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사랑고파 병’이었습니다.
스물여덟 살 때 친구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제 성격이 소극적이다 보니 잘 이끌어 주고 결정도 시원시원하게 하는 아내가 좋았습니다.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아내 역시 결혼하면 부모님과 한집에서 살아도 좋다고 할 만큼 저를 좋아해 주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저는 공무원, 아내는 유치원 선생님으로 일하다가 1998년 1월, 제 나이 서른에 결혼했습니다.
신혼여행을 다녀오니 아버지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아버지 사업체가 IMF로 곧 부도가 날 거라고 했습니다.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결혼 전에도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서 저와 동생이 여러 차례 아버지 빚보증을 섰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부도가 났으니 이제 막 결혼한 저희 부부는 빚 7천여만 원을 떠안고 신혼생활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너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때 제 근무지가 정선이어서 주말부부로 지냈는데, 빚쟁이들이 집으로 들이닥쳐 협박도 하고 싸움을 벌이는 일도 있어서 임신 초기인 아내가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월급에는 압류가 들어와 절반밖에 안 되는 월급으로 살림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고민은 어떻게 하면 빚 없이 0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였고, 다행히 처가와 주위의 도움으로 10여 년 지나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시간을 견뎌준 아내에게 늘 미안하고 고마울 뿐입니다.
직장에서 제 별명은 ‘애니콜’이었습니다. 직장 상사가 부르면 언제 어디서나 콜(오케이)라는 뜻입니다. ‘사람 좋다’,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고 진급도 빨리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니 직장 상사한테 잘 보여야 했고 직장 상사 말이라면 다른 약속이 있더라도 다 취소하고 달려갔습니다. 친구들 무리에 끼지 못하면 초조하고 불안해하던 어린 시절의 감정이 직장인이 되어서까지 이어졌습니다. 매일 술 마시고 늦게 들어가고, 주말에도 회사 일을 하거나 동료들과 테니스를 치러 가거나 다른 모임에 어울리다 보니 아내가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아내는 화가 나면 언성이 높아지고 고집을 잘 꺾지 않았습니다. 뭐든 시원하게 결정하고 적극적으로 이끌어줘서 좋다 싶었던 성격도 살다 보니 단점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내의 목소리가 커지면 일단 그냥 져주는 편이지만, 그래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건 물불 안 가리고 밀어붙이는 면이 저에게도 있어서 아내가 아무리 얘기해도 일이 우선순위가 되는 방식을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부부 사이에 갈등이 쌓여가던 2010년 무렵, 아내가 정토회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 당시 원주법당은 가정 법회를 하는 작은 규모였고, 아내는 경전대학 다니면서 원주법당 총무 소임을 맡게 되어 바빠질 것 같다고 했습니다. 아내가 바빠지면 나한테 관심을 덜 쏟겠구나 싶어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2012년 말쯤 부산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때 아내가 법륜 스님의 CD 10장 정도를 선물하며 심심하면 차에서 들으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차를 타면 무조건 스님의 즉문즉설을 듣고 또 들었습니다. 10번 이상씩 들으니 마음 작용의 원리가 이렇구나 하는 걸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잔소리가 많이 줄었습니다. 당시 사춘기, 청소년기에 있던 두 아들에게 밥 먹을 때마다 잔소리를 많이 했는데, 그걸 딱 끊으니까 아이들하고 사이가 좋아졌습니다. 그래도 불교대학이나 정토회는 잘 몰랐습니다.
그러다 정선에서 근무하던 2015년 2월, 직원들과 회식 중에 태백법당 총무한테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내 소개로 전화한다면서 태백법당에서 불교대학을 개설하려고 하는데 한 명이 부족하니 꼭 입학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거절하기 어려워서 2015년 불교대학에 입학해서 정선에서 태백으로 꼬박 40분 거리를 운전해서 다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가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인 걸 아는 아내가 작전을 짜서 정토회로 이끌었던 겁니다.
그 후 원주법당에서 경전대학을 졸업하고 통일 꼭지 소임으로 시작해 지금까지 불교대학과 경전대학 진행자, 실천활동 꼭지 등을 꾸준히 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정토회 활동을 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늘 떠나지 않던 불안과 초조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친구들이나 회사 사람들, 지인들이 왜 안 불러주나, 나만 빼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노는 건 아닌가 불안해하던 마음이 줄었습니다. 정토회 일이 워낙 바쁘기도 하지만 소속감을 진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원망도 〈나눔의 장〉1 에서 많이 녹여냈습니다. 스물한 살 어린 나이에 결혼해 호된 시집살이를 했으니, 어머니도 그때 참 힘들었겠구나, 사업에 실패하고 자식들에게 빚을 떠넘긴 아버지 심정은 또 얼마나 참담했을까, 충분히 이해되었습니다. 그렇게 이해하고 나니 내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러나 직장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여전했습니다. 서울의 상급 기관에서는 진급이 그래도 쉬운 편이지만 지방에 있다 보면 진급이 어려웠습니다. 그나마 제일 고생하는 자리에 있다 보면 어렵더라도 진급이 되는 편이었고, 동기들보다 진급이 빠른 제가 그 자리로 갈 차례였습니다.
직장 내에서 제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청장인데, 그 당시 청장은 본인 생각대로 안 되면 직원들을 집요하게 괴롭히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직원들이 하는 상사 평가에서 몇 년 동안 꼴찌를 했습니다. 그 밑에 있던 과장도 만만치 않아서 청장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 하는 예스맨인 데다가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직원들에게는 두 배, 세 배로 일을 시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진급 욕심에 그 자리 발령을 받았습니다. 한 마디로 불구덩이에 들어간 꼴이었습니다. 진급 준비를 시작하면서 너무 바빠지니까 정토회 활동도 접고 법회만 참석하는 정도였습니다.
주어진 현안은 많은데, 윗사람인 청장이나 과장은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랫사람인 저로서는 더 많은 검토 자료를 준비해야 했고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청장은 자기 업적을 만드느라 제도권에서 허락하지 않는 사업들을 무리하게 추진하고, 과장은 방패막이는커녕 한술 더 떠서 난리를 치고, 직원들도 거의 신입이어서 일을 믿고 맡기기 어려웠습니다. 일을 열심히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한 마디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습니다.
혼자 천 배도 해보고 정신과 다니며 약까지 먹었습니다. 거울 속 내 얼굴은 스트레스에 찌들어서 차마 봐줄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가 “당신 그러다 죽을 것 같아. 진급하지 마. 그거 안 해도 돼.” 하며 말릴 정도였습니다. ‘그래, 이건 아니다.’ 싶어 6개월 만에 그 자리에서 나왔습니다. ‘앗, 뜨거워라.’하고 줄행랑을 친 겁니다.
항상 회사에서 잘나가는 주류로 살다가 하루아침에 아웃사이더로 물러난 건데 해보니 너무나 편합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데 그동안 왜 그렇게 살았을까, 참 어리석었구나 싶습니다. 잠시 떠났던 정토회로 돌아와 불교대학과 경전대학 진행자, 실천활동 담당 등 소임을 맡으며 몸과 마음 모두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내가 옳다 싶으면 목소리가 커지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는 업식이 다 사라진 건 아닙니다. 무리에 끼지 못할까 불안한 마음도 아직 조금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화가 나는 걸 알아차리며 부드럽게 이야기하는 연습 덕에 부드러워지고 유연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통일, 복지, 환경’ 세 파트를 총괄하는 실천활동 담당 소임 덕에 손수건, 텀블러, 장바구니 사용이 자연스러워졌고, 아파트에서도 되도록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습니다. 삼별단 활동하며 하루 한 잔 마시던 커피도 거의 끊었습니다. 불편할 줄 알았는데 해보니 나도 좋고 남도 좋고 환경에도 좋은 일이니 안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58세가 되는 3년 뒤엔 퇴직하고, 30년 직장생활을 마치는 나에게 백일출가를 선물할 생각입니다. 백일출가를 다녀오면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구체적인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정토회와 함께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은 확실한데, JTS 해외봉사를 하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과 망설이는 마음이 왔다 갔다 합니다. 하지만 인생 후반기를 채워줄 꿈이 있어 남은 3년의 직장생활도 하루하루 행복할 게 확실합니다.
정리하고 보니 아내 이야기는 아주 조금 나오지만, 남편을 정토회로 이끈 현명한 아내의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든든한 도반의 손을 잡고 모자이크 붓다로 정토회를 가꾸어 갈 홍성호 님의 퇴직 이후 인생을 응원합니다.
글_김옥자 희망리포터(서울제주지부 양천지회)
편집_박선희(서울강원경기동부지회)
나눔의 장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인간관계가 평화로워지는 4박 5일 정토회 수련 프로그램. 깨달음의 장을 다녀온 참여자만 신청하여 참여할 수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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