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서른한 살, 저는 결혼과 동시에 지금까지 시댁 식구들과 함께 삽니다. 올해 94세로 멋쟁이며 꽃을 좋아하는 시어머니, 장애가 있지만 총명한 72세 둘째 시누이, 결혼하자마자 친정으로 돌아온 동갑내기 셋째 시누이, 독신을 고수하는 저의 30대 아들과 딸. 삼대가 삼십 년 넘게 한집에서 어우러져 살고 있습니다. 장애가 있는 시누이를 위해 기다란 교자상에 둘러앉아 식사하는 것이 일상 풍경입니다.
시어머니는 50대에 세상을 떠난 당신의 아들을 무척 사랑하였고, 특히 장애가 있는 딸과 손주인 저의 아들을 극진히 돌봤습니다. 제가 직장 회식에 참석했다가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집에 도착하면 “어서 와. 맛있게 잘 먹었니?”라며 다정히 맞이해 주곤 했습니다. 돌아보면 제가 평생 전문 직업인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시어머니가 저의 세 아이를 아기 때부터 정성으로 키우고, 대가족의 집안 살림을 도맡아 준 덕분입니다. 저는 퇴직하고서야 직접 집안 살림을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8남매의 맏이입니다. 덕분에 할머니도 같이 살아 늘 많은 사람이 북적대는 집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혼할 때 시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할머니는 맏아들인 아버지에게 바라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할머니 사이에 큰소리 나는 일이 잦았습니다. 어머니가 할머니 욕을 해도 괴롭고, 할머니가 어머니 욕을 해도 괴로웠습니다. 한쪽 편을 들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길까 두려워 두 분이 싸우면 제가 괴롭다는 말도,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잘 못 하는 것 같다는 의견도 말하지 않았고, 그저 “네, 네.”만 했습니다.
그런 습관은 별달리 제 주장을 하지 않고, 말수가 적어 점잖다는 말을 듣는 성격으로 굳어졌습니다. 시댁 식구들과 오랜 세월 함께 살 수 있었던 건 서로서로 실수하지 않으려고 조심한 덕분입니다. 하지만 속상하거나 힘들고 억울할 때 그런 제 마음을 알아채지 못하거나 무시해버리고, 표현하지 않는 것으로 마찰을 막으려 했던 날도 많았습니다.
대학병원과 노인 환자들이 입원하는 요양병원에서 40년이 넘도록 환자들의 고통과 죽음을 접했습니다. 남편과 저의 절친했던 친구가 병마와 싸우다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그것은 단지 일이었습니다.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똑똑한 아들이었던 남편은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운영하던 사업이 도산하고, 새로이 시도했던 사업들마저 모두 실패하자 몸과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암으로 5년을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이후 저의 절친했던 친구마저 암으로 3년 동안 고통을 겪다가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어가는 두 사람을 간호하며 지켜보아야 했던 그 8여 년은 제 인생의 블랙홀이었습니다. 오직 집과 병원만을 오가며 옆을 바라보지도 내 마음을 느끼지도 않은 채, 빨리 시간이 지나가기만 바랐습니다. 마침내 터널같이 어둡고 긴 시간이 끝나자 차츰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린 듯 마음이 홀가분해졌고,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잘 준비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고등학생 때부터 불교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이 뭣고’하며 참선하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2018년, 늘 지나다니던 은평법당 앞에서 <정토불교대학> 안내 포스터를 봤습니다. 그 길로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정토회에서 처음 배우기 시작한 부처님 법은 이해하기가 쉬웠습니다. 경전 수업에서 배운 것을 봉사활동이나 일상에 적용하고 익히는 법도 배웠습니다.
주변 일에 별반 관심을 두지 않고, 제 마음을 느끼지도 말하지도 않는 습관은 대가족 속에서 모나지 않게 지내기에는 유리했습니다. 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제 속에 남모르는 열등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직장에서 승진하려면 여러 사람 앞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거나, 주도적으로 성과를 내야 하는데, 그러기가 어려웠습니다. 야무지고 당차게 발표하는 동료들을 볼 때마다 속으로 위축되었습니다.
불교대학과 경전대학 수업, 진행자 소임과 봉사활동을 하면서 마음 나누기를 할 때도 역시나 어려웠습니다. 자기 마음을 명료하게 알아차려서 조리 있게 표현하는 도반들을 볼 때마다 ‘어쩌면 저렇게 잘하지? 나는 어쩜 이리 못할까?’ 생각하며, 도반들이 부러웠고 저는 열등하다고 느꼈습니다. 제 마음을 표현할 차례가 되었을 때, 말을 하면서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말하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급기야 습관대로 ‘나는 잘하지 못한다.’ ‘마음 나누기가 하기 싫다.’라는 생각들로 머릿속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웠습니다. 제 마음이 어떤지 정확히 알 수 없었고, 여러 사람 앞에서 표현하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2019년 <깨달음의 장1>에 참가했습니다. 그런 제 마음이 사실은 부러움과 시기하는 마음이며, 저도 나름 괜찮은 사람인데 말을 잘 못 한다는 것 때문에 자책하기를 반복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또, ‘내가 모든 것을 차단하고 있었구나!’를 깨달았습니다. 그 이후 주위 사물과 사람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변한 것입니다.
저는 어떤 일을 할 때 잘하지 못하면 금방 싫증을 냈습니다. 체면 때문에 모르는 것이 있어도 물어보지 않고 넘어가 버리곤 했습니다. 소임을 하면서 한고비 넘고 싶었습니다.
2021년 <정토불교대학>과 <경전대학> 진행을 맡았습니다. 코로나 19를 계기로 컴퓨터를 이용해 온라인으로 진행하는데 너무 서툴러 배워야 할 것이 많았습니다. 모르는 걸 물어보기가 부끄러워 입을 떼지 못하고, 도반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지원 담당인 도반이 마치 수호신처럼 나타났습니다. 당신을 지켜주겠다는 표정으로 굉장히 성의를 다하여 가르쳐 주었습니다. 컴퓨터에 전체 화면을 펼쳐 놓고 제가 이해했는지 하나씩 확인하면서 모두 따라 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밑바닥부터 하나씩 반복해서 가르쳐주는 건 가족이라도 싫다 했을 겁니다. 짜증 한번 없던 편안하고 자상한 도반의 태도 덕분에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질문할 용기가 났습니다. 부족해도 제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나머지는 도반들이 도와주었기에 막막하고 어려운 일도 완성했습니다. 신기했습니다. 저도 조건 없이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선물처럼 생겼습니다. 도반들이 있어 정말 고맙습니다.
올해 6월에는 실천 활동으로 흙 퇴비 만드는 ‘마이두엄’ 수업 진행을 맡았습니다. 이전에 익혀둔 컴퓨터 사용 기술을 믿고 혼자서 리허설을 해봤습니다. 1차 만일결사2 마치고 2차 만일결사 시작되기 전, 몇 개월간 정토회 활동의 휴식 기간을 보내서인지 막상 수업을 진행하자 버벅거리며 땀을 삐질삐질 흘렸습니다.
예전의 저라면 서투른 제 모습이 싫어 다음부터는 절대로 안 하겠다며 포기했을 텐데, 프로그램에 참가한 도반들에게 ‘미안합니다, 다음에는 더 연습해서 오겠습니다.’라고 선뜻 말했습니다. 부족해도 괜찮고 그런 자신을 드러내도 괜찮았습니다. 있는 그대로 저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것에 만족하는 자신이 신기했습니다. 마음이 가벼워지고 즐거웠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도반의 지원 없이 혼자서 진행하고 나니 ‘나도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고, 재미를 느꼈습니다.
앞으로 저는 정토회에서 하는 환경실천 활동이나 행복을 전하는 행복학교 프로그램 등, 소임이 주어지면 할 수 있는 만큼 해보려고 합니다. 나무가 저 혼자 자랄 수 없듯이, 우리도 가족, 친구, 이웃들과 함께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토회를 통해 배웠던 행복해지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고, 사람들이 행복해지면 그만큼 제 행복도 커질 것입니다.
전에는 제가 만족스럽지 않았고 행복해지는 법을 몰랐기에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권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여유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거절해도 자존심이 상하거나, 상처를 받기보다는 제 마음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봅니다. 거절하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신념이나 사정이 있을 테니 그대로 인정하고 동시에 그 거절이 저를 거절하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일상에서도 부정적인 면보다 긍정적인 면을 찾고 선택하며, 포기하기보다 가볍게 다시 도전하는 사람이 되어가니 신기하고 행복합니다. 내일은 더 나아진 제 모습이 보입니다. 지금 저는 바랄 것 없이 행복합니다.
이찬희 님과 리포터인 저는 알고 보니 옆 동네 사람입니다. 동네 찻집에서 마주 앉아 서랍 속에 넣어둔 일기장을 꺼내 읽듯 살아온 이야기와 지금의 행복에 대해 들었습니다. 이찬희 님은 오랜 세월 대가족의 가장 역할을 했는데도 불평이나 원망의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삶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책임을 다하며 살았음이 보였습니다. 그 책임을 다한 지금, 지치거나 물러나 앉은 모습이 아니라 자유롭고 새로운 꿈을 꾸며 행복해합니다. 이찬희 님의 새로운 나날을 응원하며, 브라보!
글_이경희 희망리포터(서울제주지부 서대문지회)
편집_이주현(부산울산지부 동래지회)
전체댓글 40
전체 댓글 보기정토행자의 하루 ‘서대문지회’의 다른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