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특집] 정토행자상 수상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가면 됩니다.

2022년, 정토 행자 대상을 수상한 박종숙(지원국장) 님. 현재는 정토회 지원국 국장 소임을 맡고 있습니다. 지원국은 정토회에 대중부, 불교대학, 경전대학 등 법당과 관련된 모든 일을 총괄 지원하는 파트입니다. 주요 사업은 불교대학과 경전대학 모집 및 홍보, 운영과 함께 신규 전법 활동가를 교육하는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타고난 꾸준함과 자발성으로 업무가 많다는 지원국의 소임을 성실하게 하는 박종숙 님. 정토 행자의 귀감이 되는 박종숙 님의 수행담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이가 맺어준 정토회의 인연

평소 '대한민국 교육은 너무 획일적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몇몇 뜻 맞는 엄마들과 공동 육아를 하면서 품앗이로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그 당시 지렁이로 음식물을 처리하는 견학 프로그램이 있다고 하여 방문했던 곳이 서초 정토회관이었고, 그것이 정토회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그때는 정토회를 환경보호를 실천하는 단체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는 기존 학교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공동 육아를 할 때에는 좋아하는 수업을 온종일 할 수 있었는데, 학교에서는 그렇지 못하니 점점 의욕을 잃었고 수업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학교를 처음 접하는 어린 아이로서 적응하는 것이 어려운 건 당연할 텐데, 담임 선생님마저도 '아이가 이상하다.'라고 하니 제 고민은 점점 깊어졌습니다. 그러던 중 일산에 저처럼 교육을 고민하는 젊은 엄마들의 모임을 만났습니다. 그들과 함께 뜻을 모아 초등 대안 학교를 만들었습니다. 부모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농가 주택을 임대하여 배울 장소를 마련하고, 교사를 직접 고용해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학부모들의 교육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하는 적극성으로 아이들은 무사히 초등 6학년 과정을 마쳤습니다.

주인공 박종숙 님
▲ 주인공 박종숙 님

중학교를 보내는 시점에 도시형 대안학교를 만들고 싶었지만, 공동 육아도 만들고, 초등 대안학교까지 만들다 보니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중학교는 이미 만들어진 기존 대안학교에 보냈습니다. 그 곳 대안학교의 아이들은 교사와 함께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주말에는 학부모들이 돌아가면서 생활 교사라는 직책으로 아이들의 밥과 청소를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저희 아이는 이곳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도회적인 스타일인 아이에게 시골 재래식 화장실은 힘든 적응 거리였습니다. 그런 아이의 의견은 묻지도 않은 채, '이 방식의 교육이 무조건 좋고, 아이의 성향에도 맞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보낸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아이의 사춘기

저는 늘 바쁘게 생활했고, 무엇이든 처음에는 만들어가며 일하는 업식이 있습니다. 학창 시절에도 그랬던 것 같고, 어느 모임이든 초대 회장을 도맡아 했습니다. 공동 육아를 만들 때도, 초등 대안학교를 만들 때도 맡아 일했습니다. 이렇게 제가 하는 일이 많다 보니, 아이의 심리가 불안하고 부모와 애착이 잘 형성되지 못했다는 것을 그 당시에는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나보다는 대안학교에서 더 잘해주겠지, 아이가 친구들과 실컷 놀면 도움이 되겠지.'라며 생각했습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고려하지 않은 채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방임하는 부모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이는 사춘기를 심각하게 겪고 있었습니다. 목매달아 자살하는 그림을 그리며 늘 죽고 싶다고 말하여 선생님들이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집으로 데려가 좀 더 안정을 취하면 좋겠다는 의견으로 결국은 자퇴했습니다. 대안학교는 학생 수가 적고 선생님들이 늘 아이들과 함께하기에 아이가 숨고 싶어도 숨을 수가 없으니, 고스란히 문제점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돌아보니 일반 학교에 다녔다면 구석에 숨어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을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문제점을 알 수 있으니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문경수련원에서 (맨 왼쪽)
▲ 문경수련원에서 (맨 왼쪽)

제 복잡한 생활도 정리하고, 아이와의 문제도 해결해 보고자 언니가 살고 있는 중국으로 아이와 함께 갔습니다. 중국에서 생활하면서 이 아이는 뭘 좋아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유심히 관찰해보고 살폈습니다. 그렇게 아이가 좋아하는 음악과 영화들을 함께 들어주고 공유하다 보니, 아이도 심적으로 안정이 됐는지 방황하는 것도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오로지 아이를 이해하기 위해 좋아하지 않는 음악도 같이 듣고, 영화도 함께 보던 것이 오히려 아이를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고, '나와는 정말 성향이 다르구나!'하는 것을 확연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중국에 있는 동안 아이는 국제학교에 다녔고, 몇 개월이 지나자 원래 다니던 대안학교로 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오계의 원칙

아이는 한국으로 돌아와 다니던 대안학교에 다시 들어갔습니다. 학교에서는 설립 이래로 자퇴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온 아이는 저희 아이가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던 중 주말에 생활 교사를 하다가 우연히 법륜스님의 법문 테이프를 들었습니다. 아마도 학부모 중 누군가 테이프를 구독해 준 것 같습니다. 법문의 내용은 너무 재미있었고, 스님이 제 앞에 서서 말하는 듯했습니다. 그 내용 중에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다.'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길로 테이프를 몽땅 빌려와 반복해서 듣고 저도 테이프를 구독 신청했습니다. 그런데 법문 내용 중에서 〈깨달음의 장1〉이라는 내용이 계속 나와 궁금증이 생겼고, 그렇게 다녀왔습니다.

스님의 법문을 통해 오계만 지키면 아이를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졌습니다. 그 외에 문제는 '문제 삼는 내가 문제지, 아이는 아무 문제가 없다.'라고 받아들이니 정말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아이는 락(Rock) 을 한다며 머리를 노란색으로 염색하고, 일렉트릭 기타를 치며, 귀걸이, 체인을 몸에 휘감고 다녔습니다. 입고 다니는 옷도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모범생 스타일인 저로서는 아이의 모습과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었고, 화가 확 올라오는 것을 느꼈지만 오계를 하나하나 따져보니 어느 것도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제 마음은 편해지기 시작했고, '아이는 정말 아무 문제가 없구나!'라는 것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선운사 활동가 나들이에서 도반들과 (왼쪽 두 번째)
▲ 선운사 활동가 나들이에서 도반들과 (왼쪽 두 번째)

돈도 안 받고, 봉사를?

학부모가 건네준 월간정토에 소개된 불교대학에 입학했는데, 일산에서 가까운 연신내 법당을 소개해 주어 그곳으로 다녔습니다. 그 때 연신내 법당 총무는 갓난 아이를 데리고 나와 생글생글 웃으며 반겨주었습니다. 아기가 아직 어려 낯가림이 있어 총무(엄마)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데도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아이를 달래가며 일처리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안 됐다. 얼마나 생계가 어려우면 아기를 데리고 와서 일할까?'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정토회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이 아무런 대가 없이 봉사한다는 것을 알고 '미쳤다! 이건 미친 짓이야! 칭얼거리는 아기를 데리고 돈도 안 받고, 어떻게 봉사를 할 수 있지.'라며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쓰러운 마음에 뭐라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법당에서 법회를 하면 총무 혼자서 사회도 보고, 뒤에 와서 컴퓨터 화면도 틀고, 혼자 왔다 갔다 하는 모습에, '뭐 하나라도 함께 하면 수월하겠구나'라는 마음으로 한 부분을 맡은 것이 봉사 일감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인연으로 저녁 수행 법회 담당이 되었고, 나누기를 끝내고 뒷정리한 후 법당문을 잠그고 나면 뿌듯한 그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금 조각 같던 홍보 전단이, 일산 법당이 되어

그 당시 일산에는 법당이 없어 한 노 보살님의 집에서 가정 법회를 열었습니다. 법륜스님이 희망 강연을 하던 때였지만, 일산에서는 한 번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일산에 즉문즉설 강연을 개최하게 되었고, 그 담당을 제가 맡았습니다. 처음에는 경험이 없어 못 하겠다고 계속 거절했지만, 주변에서 돕겠다고 하니 용기를 내어 신나게 홍보하러 다녔습니다. 하지만 강연장은 교통이 안좋고 외진 곳에 위치한 588석 규모의 민방위교육장이었습니다. 그곳을 어떻게 채워야 하나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연신내 법당과 일산 가정법당을 오는 도반들과 함께 역할 분담도 하고, 짜임새 있게 계획도 짰습니다. 도반들에게 전단을 나눠주며 시간대별로 역할과 구역을 나누어서 어떻게 진행할지 정리하며 총괄을 했습니다. 일머리가 있어서 그런지 이런 일들이 저에게는 아주 잘 맞았습니다.

그때는 홍보 전단이 금 조각 같았습니다. 나이 많은 보살님이 홍보하러 나와 횡단보도에서 사람들에게 천천히 나눠주는 모습과 모든 분들이 한 마음이 되어 피곤한 줄도 모르고 홍보하는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에 해보자! 하는 마음은 더 커졌고, 원 없이 홍보했습니다. 처음에는 588석을 다 채워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지만, 이렇게 최선을 다해보니 해 볼 만큼 해보고 안 되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런 마음이 통했는지 강연장의 좌석은 다 채워졌고, 이것이 일산 법당 불사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강연을 계기로 기획법회가 13군데나 생겼고, 주간과 저녁 불교대학이 열려 30여 명이 불교대학에서 공부하였습니다. 마치 봇물이 터지듯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경전 대학 학생이었는데, 봉사를 하다가 졸업을 못 할뻔했습니다.

세월호 서명 봉사 모습 (왼쪽 첫 번째)
▲ 세월호 서명 봉사 모습 (왼쪽 첫 번째)

전단을 통해 마음을 배우다

제가 마음공부를 더 많이 할 수 있었던 건, 홍보전단과 JTS모금캠페인 봉사를 통해서였습니다. JTS거리캠페인 때는 사람들이 전단을 거부하면 '이 좋은 것을 왜 안 받지?'라며 화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부처님 당시 차제 걸식의 마음으로 '다만 나는 권할 뿐, 상대가 받고 안 받고는 그들의 마음이다.'라는 관점을 잡으니 '나에게 전단지는 소중하지만, 그들에게는 단지 휴지 조각일 수 있겠구나'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꾸 '왜 이걸 안 받지'라는 분별심은 '내가 남의 인생에 간섭하고 있을 수도 있겠구나'로 돌이켜져 더 이상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좋은 일에 쓸 수 있는 돈을 주기를 바라지만, 돈을 주고 안 주고는 상대의 마음이라는 것이 분명해지니, 걸림이 없어졌습니다. 이런 마음을 넘기고 나니 JTS거리 캠페인은 더 이상 일도 되지 않았습니다.

요즈음 진행했던 1만 불교대학 모집도, 1만 행복학교 모집도 전법하는 당사자의 마음이 얼마나 당당한가의 문제인 거지, 상대가 하고 안 하고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당당함이 없으면 억지로 되지 않는 것이니, 이 법을 알고, 이 법이 좋다는 자신감이 생기면 누구에게라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없다

봉사하면서 함께하는 도반과의 갈등은 필연적이라 생각합니다. 봉사를 하다 보면 재미가 있고, 그래서 열심히 했는데 불편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그때뿐이고 순간순간 돌이킬 수 있었습니다. 이 또한 꾸준히 봉사를 놓치지 않고 하다 보니 감지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활동하면서 직급이 올라갈 때마다 저에게 주는 월급으로 책정해서 1백만 원, 2백만 원, 3백만 원으로 올려가며 몽땅 보시하는 마음을 냈습니다.

청춘 콘서트를 할 때도 새벽 2~3시까지 일하고, 새벽 5시에 집을 나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봉사하기도 했습니다.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이혼하자! 미친 거 아니야.'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이런 며느리, 이런 마누라를 데리고 사는 게 얼마나 힘드실까'하며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숙였습니다. 지금은 저를 인정해 주고, 오히려 제가 봉사를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습니다. 남편도 제가 <깨달음의 장>을 다녀오고 좋아진 모습에 본인도 깨달음의 장을 다녀왔고, 불교대학과 경전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지금은 일반회원으로 제가 하는 일에 언제나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인도 성지순례 중 사진 맨 오른쪽
▲ 인도 성지순례 중 사진 맨 오른쪽

오고 감을 자유롭게

현재는 지리산 쪽에 귀촌해서 살고 있습니다. 온라인으로 전환하기 전까지는 주중에는 서울에 출근해서 서울공동체에서 생활하고 , 주말에는 지리산집으로 가는 일을 매주 반복하면서 상근했습니다. 그러다가 코로나19로 정토회가 온라인으로 전환되면서 서울을 오가는 횟수가 줄었습니다. 지금은 한달에 2~3번 서울에 출근을 합니다. 지금은 온라인으로 바뀌다 보니 한두 번 올라오거나, 업무가 있을 때 일주일에 2~3일 서울에서 지내다가 내려오고, 전보다는 횟수가 많이 줄었습니다. 처음에는 거리가 있다 보니 불편한 마음도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인도에 파견 다녀온 법사님의 인도에 파견가실 때 마음이 "이 방에서 저 방을 건너가듯 가는 거 아니냐."라는 말을 전해들으니 그 걸림 없는 삶이 너무 멋있었습니다. 인도보다는 대한민국 안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리산은 지리산대로, 서울은 서울대로 좋으니 공간이 먼 것은 별문제가 아니였습니다.

국장 소임을 맡은 이유가 다른 능력은 검증할 수가 없고, 웃음소리 그리고 24시간 풀 가동할 수 있는 체력으로 발탁되지 않았느냐는 후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7차, 8차 중앙사무국 행정국장 소임 6년, 9차 상임천준위원장, 10차는 행정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온라인정토회로 전환되면서 지원국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5년간 정토회 소임 중 가장 업무가 많고 바쁜 소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업무가 세게 오면 올수록 수행을 세게 할 수 있는 기회다! 라고 생각하고 물러서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수행, 보시, 봉사를 하는 딱 정토 행자의 모범을 보이는 분을 인터뷰하니 벅찬 감정이 들었습니다.

글_박문구 (서울제주지부 서대문지회)
편집_김세영 (인천경기서부지부 일산지회)

위 이미지를 누르면 텔레그램 '정토행자의 하루' 채널로 이동합니다.
▲ 위 이미지를 누르면 텔레그램 '정토행자의 하루' 채널로 이동합니다.


  1. 깨달음의 장 4박 5일 기간의 정토회 수련 프로그램. 평생에 한 번만 참여할 수 있음. 

전체댓글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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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음성

직급이 올라갈때마다 백만원씩 월급을 올렸다는 표현
소임이 세게 올수록 수행을 세게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많이 와닿습니다
웃음소리와 24시간 할 수 있는 체력! 멋진 부분입니다

2022-09-01 07:21:06

자비행

금쪽같은 전단보고 불교대학 입학했었던 때가 떠오릅니다.
보살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2022-07-27 17:40:03

수처작주

워낙 일을 많이 하셔서 싱글이란 말이 있었는데 아니셨군요

2022-07-25 09:3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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