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금정지회
지금 흘린 땀방울이 다음 세대에 이어지기를

주경야독해야 했던 어린 시절,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낸 시간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와 어느새 정년 퇴직을 맞고 보니 돌고 도는 쳇바퀴에서 내려온 다람쥐 신세나 다름없었다는 금정지회 임호경 님, 그의 치열했던 인생, 눈물겨운 수행담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남산 고위봉 정상에서 임호경 님
▲ 남산 고위봉 정상에서 임호경 님

변화의 끝에서 만난 정토회

누구나 인생에서 몇 번, 변화의 시점을 맞이합니다. 이런 변화를 주도적으로 잘 헤쳐 나간다면 행복이 다가오겠지만, 제게 다가온 55세 정년 퇴직이라는 변화는 충격과 허무의 벽만 남겼습니다. 아무 준비 없이 퇴직을 맞이했으니, 신나게 돌던 쳇바퀴에서 갑자기 떨어져 나온 다람쥐 꼴이 되어버려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자괴감이 올라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치매증세로 요양병원에 입원해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직장에서 일어난 오해로 부부사이마저 최악으로 치달으니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가치마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즈음 지인이 재미있는 스님의 유튜브라며 소개를 해주었는데 일반적이지 않은 독특한 스님의 법문에 이끌렸고, 함께 법문을 듣던 아내는 2014년 봄 불교대학에 먼저 입학했습니다. 저는 그해 가을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삶에 대한 허무감과 어머님에 대한 불효라는 죄책감까지 더해져 죽음의 유혹이 속삭일 때마다 저는 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시간 반 정도 온몸이 땀으로 젖을 즈음 맑은 정신으로 돌아오곤 했기에 절을 하며 그 시기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치지 않던 눈물도 도반들과 함께 법당에서 천 배 수행을 하면서 자연스레 사라졌습니다.

소 기르던 목동에서 학교로, 그리고 소년공

4남1녀 5남매 중 셋째로 자란 저는 어린시절 가난한 살림과 많은 형제 덕에 먹고 자는 것은 불편하였지만, 언제나 우리 5남매의 편이었던 어머니가 있었기에 든든했습니다. 아버지의 병환으로 저는 소를 기르는 목동으로, 누나와 형은 살림꾼으로, 어머니는 일하는 가장으로 살아가던 중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5남매를 데리고 경남 의령 산골을 떠나 김해 칠산동 산꼭대기에 있는 분성 배씨 문중의 재실관리인으로 소작을 맡았습니다. 이런 집안 사정으로 저는 초등학교 입학을 10살 무렵에 했는데, 비록 또래보다 늦었으나 학교에 가는 것이 얼마나 좋았던지 잠도 안자고 학교 갈 생각에 날 밤을 새기도 했습니다.

어느덧 제가 김해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께서 저를 안고 우시던 기억이 납니다. 형님과 누나는 공장에 취직해서 집을 떠났기 때문에 5남매 중 첫 중학교 입학이었던 것입니다. 버스 탈 돈이 없어 걸어서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도 잠시, 재실 내 알력다툼으로 우리 식구는 강제퇴거를 당했습니다. 부산으로 와 어머니는 새벽시장으로 일을 나가고 식구는 단칸방 생활을 하며 지냈습니다.

그 시절 저도 제 동생들도, 집안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돼야 했기에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들어갔습니다. 은행 금고를 만드는 철공소에서 다이얼의 비밀번호와 열쇠를 손으로 깎아서 만드는 정교한 작업의 기술자 보조를 했습니다. 제가 열일곱 나이가 되던 어느 날, 서울서 온 전문 기술자가 월급문제로 사장과 다투고는 공장을 나가버리자 사장은 혹시 싶은 마음에 제게 다이얼 작업을 한번 해보라고 했습니다.

도반들과 천룡사 봉사하는 임호경 님(오른쪽에서 두 번째)
▲ 도반들과 천룡사 봉사하는 임호경 님(오른쪽에서 두 번째)

어깨 너머로 몰래 배운 실력으로 기술자의 일을 해내자 사장은 놀라워했습니다. 당시 제 사수의 월급은 월 3만원이 넘었고 저는 기껏해야 5천원 남짓을 받았는데 사장 입장에서는 콧대 높은 사수를 다시 찾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입니다. 사장님은 제게 기존 월급의 세배를 올려주겠다고 파격적인 제안을 했으나, 저는 2배만 올려달라고 하고는 대신 남들보다 1시간만 일찍 퇴근시켜달라 했습니다.

덕분에 1시간 일찍 회사를 마칠 수 있었던 저는 퇴근 후 곧장 바로 학원으로 가 중등·고등 검정고시를 준비했습니다. 힘들고 버거웠지만 어머니를 도우면서 제 힘으로 학업을 계속해나갈 수 있어서 가슴 뿌듯한 날들이었습니다. 저희 5남매는 그렇게 모두 고생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한 명도 어긋나가지 않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계속 도전을 다짐했지만

군에 가서 특전사로 차출되어 광주에서 자국민을 총으로 제압하는 갈등과 혼란 속에서 제대를 했습니다. 제대 후 형님 댁에 머물며 늦깎이 대학생활을 하면서 고시준비를 했지만, 연거푸 낙방만 거듭했습니다. 결혼 대신 공부를 더 하고자 하는 저에게 어머니는 결혼이 합격과 연관된다는 사주팔자를 들이밀어 지금의 나의 도반 아내와 신혼여행도 없는 결혼식을 하고 고시원으로 행하였습니다. 당시 아내는 더 좋은 선 자리가 많았는데도 비전 없는 나의 짝이 되어 주었습니다.

신혼여행도 가지 않고 공부에 집중했지만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2차 시험을 한 달 앞두고 시험을 접었습니다. 당시 장수생이었던 저는 나이 제한이 걸리지 않는 직장을 찾아 일단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 하고 10년 뒤에 재도전해보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하지만 10년 뒤엔 늦둥이 아들이 생겨 결국 고시는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도반인 아내와 함께 한 임호경 님
▲ 도반인 아내와 함께 한 임호경 님

삶의 길을 걸어오며 깨닫게 된 감사함

가난한 유년 생활을 보낸 사람들이 대부분 부자가 되어 돈걱정없이 살고 싶어 하지만, 저는 돈에 대한 욕구보다는 사회조직의 일원으로서 책임감 있는 리더가 되고 싶었습니다. 제게는 늘 회사 일이 최우선이어서 아이 셋을 낳을 때 한 번도 아내 곁에 있어 준 적이 없었습니다. 이사 갈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식들을 키우는 것도 모두 아내에게만 맡기고 결과에 대해서는 돌직구로 평가를 해대며 독선적으로 살아왔습니다.

<깨달음의 장>에 가서 아내 마음 한 번 제대로 헤아려주지 못해 가슴에 녹지 않는 얼음덩어리를 안고 살아가게 만든 저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습니다. 제 염원대로 직장에서 인정받아 리더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제가 직장생활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교사로 맞벌이를 하며 3남매를 키워준 아내가 있어서였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아이들과도 상의하고 배려하며 결정하기보다는 일방적으로 통보하며 상처를 준 것도 마음 깊이 미안한 마음으로 다가왔습니다.

정토회를 만나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도 힘들게 살아온 제 어린 시절을 곱씹으며, 요즘 아이들의 사고방식에 수도 없이 분별심을 내며 잔소리를 해대어 자식과도 등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받아야 할 과보라는 것을 알고나니 지금은 아이들과 함께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함인 줄 압니다. 이러한 저의 마음가짐의 변화가 제게 정토회를 만난 제일 큰 복입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함께 수행하는 아내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천룡사지 봉사 중인 임호경 님
▲ 천룡사지 봉사 중인 임호경 님

남은 생은 스님과 함께

법륜스님의 실천적 불교, 참여하는 대중 속의 불교, 환경과 통일을 위해 행동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아 남은 생을 스님과 함께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침 수행이 게을러질 때면 편치 않으신 몸으로 불편한 거처를 자청하시며 전국 100강, 해외 100강, 동북아역사기행을 이끌고 가시던 초인적인 스승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곤 했습니다.

어릴 적 장군이 되어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고픈 꿈이 있었지만 근처도 못가보고 늙어가구나 싶었는데 환갑이 다 된 나이에 통일 의병 활동으로 제 꿈을 이어가고 있으니 감개무량합니다. 늦은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거리에서 춤도 추고 모금도 하고 전단지도 뿌리고 목소리 높여 노래도 하고 통일의 기운을 살리기 위해 사천왕사지 기도도 참여하고 행복학교 진행도 하는 등 주어진 소임을 즐겁게 행하며 차츰 정토회와 스승님의 가르침에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아직도 아이들과 소통문제, 도반인 아내와의 냉기는 남아 있습니다만, 매일 기도와 법문을 통해 제 어리석음을 참회하며 제 인생의 주인이 되고자 단련하고 있습니다.

경주 남산 고위봉에서 바라본 천룡사지 모습
▲ 경주 남산 고위봉에서 바라본 천룡사지 모습

천룡사에 흘린 땀방울이 다음 세대에게 이어지기를

최근에는 주말마다 초파일 준비를 위해 경주 남산자락 고위봉 아래 자리잡은 으뜸절 천룡사에 가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곳곳이 천룡사의 부활을 위한 발굴작업이 이뤄지고 있어 초파일 준비를 위해 새로 등길을 만들고 등을 매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평생 해보지 않았던 톱질, 낫질을 배워가면서도 묵묵히 수행하는 홍상진 님, 섬세한 추진력을 가진 건축사 강정훈 님 , 천룡사의 손과 발이 되어주는 윤태봉 님, 공사 기술자 박봉규 님, 이혜옥 님의 혼신을 다 하는 정성으로 천룡사지가 사람이 사는 절터로 되살아나는 것을 보니 천룡사의 복원이 멀지 않았음이 느껴집니다.

고위산 정상에서 천룡사의 부활기도를 합니다. 부디 천룡사가 우뚝 제 모습을 찾아서 약하고 힘없는 민초들에게 희망이 되고 갈등과 차별과 대립에 선 남북의 청년 후손들을 통합되게 하소서. 저는 여기 천룡사 복원작업과 함께 2차 만일의 생을 마감하고자 발원합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입지전적으로 살아온 임호경 님의 지난 시절 얘기를 듣는 내내 감탄이 나왔습니다. 임호경 님은 대단한 건 아니라며 그저 그 시절엔 그렇게 힘겹게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제 눈에는 자꾸만 눈물이 맺혔습니다.
문득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신발공장에서 만난 남자아이가 생각났습니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온 아이였는데 저를 잘 따라서 아르바이트 마지막 날 대학교 앞에 데리고 가 돈까스를 사주었더니 ‘누나! 이런 건 처음 먹어 봐요!’라며 맛있게 먹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 아이도 임호경 님처럼 멋지게 살아가고 있기를 기원합니다.

글_목승혜 희망리포터(부산울산지부 금정지회)
편집_이정선(경남지부 진주지회)

전체댓글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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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래

조만간 천룡사에서 뵐게요~
저도 천룡사의 부활기도 함께 하겠습니다.
따뜻한 마음과 배려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2023-11-18 00:32:37

오지환

지금 여기에 깨어 행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3-06-27 14:17:02

남경희

평생 열심히 살아오셨네요. 수행자로서도 열심히 제 2의 삶을 사시는 모습도 감동입니다. 아내분의 섭섭했던 마음을 잘 헤아리고 계시니 분명 그 마음도 잘 녹여 내시리라 믿습니다. 건강하세요~

2022-05-23 16: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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