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특집] 대중법사님 이야기
향실법사님 마지막 이야기
만 서른 살입니다

불법을 만나 새롭게 태어났다는 법사 님은 이제 만 서른살이라고 합니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꾸준히 나아가고 있는 향실법사 님의 마지막 이야기를 함께 합니다.

나에게 올리는 천도재

대성사에서 처음 법륜스님의 강의를 듣고부터 자연스럽게 홍제동 정토포교원 법회에 참석했습니다. 다시 기도문을 받을 때 조석예불과 만일기도를 받았습니다. '만일기도에 더해 조석예불까지 해야 하나' 하며 의문이 났을 법도 한데, 그 때는 그대로 받았습니다. 몇 개월 지나 총무 도반의 일신상 문제로 총무 소임이 저에게 넘어왔습니다. 법회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거절했으나 스님께서 해보라 하시어 총무가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맡았습니다. 일 년이 지났을 무렵 스님께서 법당에 매일 출근하라하여 ‘네’ 하고 일요일만 빼고 매일 출근하여 법당을 지켰습니다. 어느새 저는 정토회로 출근하고 퇴근한 지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나하나 의문거리를 물어가며 공부하는 재미가 있었고, 법당에 출근하면서 삶에 생기가 돌았습니다. 시어머니는 시누이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고, 남편은 지방으로 발령받아 내려갔습니다. 아들은 고등학생이 되어 야간자율학습으로 늦게 하교하니 저의 정토회 출퇴근에 걸릴 것이 없었습니다.

법당에 매일 출근하면서 궁금한 것이 참 많았습니다. 스님께 쉴 새 없이 질문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영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백중 기도할 때 "이미 49일이 지나 다른 몸을 받아갔을 ‘영가’를 왜 찾는가"라는 질문에 스님은 "그 ‘영가’가 바로 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상치 못한 말씀에 깜짝 놀랐지만 바로 이해는 못했습니다. 나중에 법문을 듣다보니 ‘나’가 맞았습니다. 우리의 업식은 윗대로부터, 어쩌면 그 위 증조, 고조님으로부터 계속 학습해서 내려오고 있고, ‘나’가 아직까지도 그 업식을 끊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계속 천도재를 지내는 겁니다. ‘결국 그 천도재는 ‘나’에게 지내는 거구나. 내가 딱 끊어내면 업식은 더 내려가지 않겠구나.’ 하는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나로부터 모든 걸 끝내버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로부터 마음이 올라와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바깥 상황일 뿐이고, 내 안에서 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면 그저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30년을 정진하면서 넘어진 적도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처음 법을 만나서 모든 걸 내려놨을 때의 기쁨을 기억했습니다. 처음 먹은 마음을 잊지 않으려 계속 되새겼습니다. 시어머니에게 올라오는 마음, 남편에게 올라오는 마음을 볼 때마다 여기서 내 업식을 녹이는 것을 1순위로 생각했습니다. 마음이 올라오면 내려놓고, 또 올라오면 내려놓고 이렇게 하루하루 지내다보니 마음을 조금 더 빨리 내려놓는 것이 업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묵묵히 뒷바라지 해 준 남편의 보살행이 있었기에 나이가 들수록 감사한 마음입니다.

1996.10.31 스리랑카 사르보다야운동을 이끈 아리야라트네(AT, Ariyaratne)박사 초청강연회에서. 홍제동 정토포교원 시절(맨 오른쪽)
▲ 1996.10.31 스리랑카 사르보다야운동을 이끈 아리야라트네(AT, Ariyaratne)박사 초청강연회에서. 홍제동 정토포교원 시절(맨 오른쪽)

불법을 만나 다시 태어난 저는 불가의 자식이라 생각하니 모든 일에 싫다 좋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저 법당에 매일 나갔습니다. 전국에 법당이 생기고 정토회가 점점 커가면서 스스로 부족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법당에 나와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속으로 ‘감사합니다.’ 라는 마음이 절로 솟았습니다.

낯선 타국에서 느낀 기도의 힘

법사수계교육을 받고 있을 때, 중국에서 사업하던 손아래 시누이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미혼인 시누이의 보호자로 남편이 급히 출국하려 하였으나 비자발급이 늦어졌고, 수술도 함께 늦어져 시누이는 수술 후에도 의식을 찾지 못한 채 심양종합병원 중환자실로 들어갔습니다. 의식이 없는 시누이를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남편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국내 소재한 병원 의사와 이송업체를 알아봐야했고, 그 사이 시누이의 보호자로 제가 중국에 가야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무변심법사님의 허락을 받아 이동 법사수계교육으로 대체하기로 하고 중국 심양으로 갔습니다. 중국 병원은 보호자용 간이 침대가 없어서 모든 보호자들이 복도에서 먹고 자고 했습니다. 병원 복도가 시장통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들 사이에서 저는 일주일 동안 시누이의 상태를 지켜보고, 기도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병원비를 지불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시누이가 외국인이라서 큰 종합병원인데도 현금 수납을 요청했습니다. 의료보험이 없어 매일매일 지불하는 병원비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소매치기가 들끓으니 소지품을 조심하라는 귀띔도 있었지만, 매일매일 병원비를 내야해서 현금 오천 만 원 정도를 허리에 두르고 낯선 이국땅 병원 복도에서 낮과 밤을 보냈습니다. 그 와중에 기도하는 마음자리는 놓치지 않으니 겁이 없어지고 담담했습니다.

한국으로 데려온 시누이는 의식을 회복하기는 했지만 아직 요양원에 있습니다. 시누이가 모아놓은 돈이 없어 시누이의 병원비와 요양비는 대부분 우리 부부의 손을 빌었습니다. 시누이가 중국에서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는 돈이 잘 모였습니다. 하지만 점점 상황이 나빠져 계속 재투자를 해야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일이 잘 풀린다고 좋아할 일도 아니며, 항상 앞을 위해 닦아나가야 한다는 것도 확실히 깨친 계기였습니다.

2002년 봄, 재산관리부 오리엔테이션(맨 왼쪽)
▲ 2002년 봄, 재산관리부 오리엔테이션(맨 왼쪽)

이제 만 서른 살입니다

법사 수계를 받은 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법사’라는 이름입니다. 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밖을 보기 전에 안으로 돌이키는 연습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정토회는 직급이 아닌 소임이기 때문에, 어떤 단계가 아닌 ‘나’를 위한 공부로 법사가 된다고 생각하기에 자기 성찰이 필요합니다. 돌이키는 것을 놓칠 때도 많고 나를 고집할때도 많습니다. 스스로 그만큼 닦아 나가야 하기에 올라오는 것을 지켜보고, 올라오면 내려놓고, 치고 나가는 연습을 계속합니다. 모르는 것은 배우면서 부족한 것은 채워가면서 어느 한구석에서라도 도반들과 함께가는 이 길에서 쓰여 질 수 있음에 감사한 일입니다.

처음 스님에게 기도문을 받으면서 받은 <실천적 불교사상> 책을 읽으며 원을 세웠습니다. 책에 담겨있는 법륜스님의 원을 읽으면서 저 역시 그 원이 이루어지기를 발원했습니다. 우연히 스친 부처님과의 인연으로 저는 나침판을 얻었습니다. 제가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가르침입니다.

가끔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자가 다른 약속을 어떻게 지킬까. 지금껏 꾸준히 이 길을 걸어온 것처럼 앞으로 꾸준히 갈 뿐입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시도해보고, 욕구나 집착인 것을 알면 내려놓는 연습을 계속합니다.

저는 1991년 4월 23일 새로 태어났습니다. 저를 낳아주신 아버지는 부처님, 잘 키워주신 어머니는 법륜스님입니다.
올해로 만 30살이 되었고, 만일을 맞이했습니다.
부모님 감사합니다.


대중법사님 특집기사 발행일정표
▲ 대중법사님 특집기사 발행일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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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이미지를 누르면 텔레그램 '정토행자의 하루' 채널로 이동합니다.

인터뷰 진행_권영숙
인터뷰 지원(영상, 녹화)_김혜경
속기 및 녹취_강현아, 박문구, 백금록, 서지영, 이정선, 임명자, 장은미
편집_김난희
도움주신이_전은정

전체댓글 44

0/200

최선영

감사합니다
안으로 돌이키는 연습 저도 이 길을 꾸준히 갑니다

2024-02-25 07:14:14

송흔숙

법사님 말씀 법문같습니다. 가슴깊이 새기고 싶습니다.감사한 마음입니다.

2022-05-15 05:50:30

박윤정

법사님 감사합니다 🙏

2022-04-16 11:3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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