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사하지회
누군가 필요하다면 나이기를

장롱 깊숙이 넣어둔 꿉꿉한 이불, 햇살 비치는 담장에 널어본 적 있나요? 햇살을 받는 등의 따뜻함, 뽀송뽀송 잘 마른 이불의 느낌. 김순희 님과 나눈 이야기가 딱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여러분과도 그 느낌,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깨달음 장에서 만난 첫 번째 나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왠지 모르게 큰 잘못을 한 것처럼 여겼습니다. 아들을 바라던 집에 넷째딸로 태어나서인지도 모릅니다. 〈깨달음의 장1〉에서 ‘나는 괜찮은 사람이구나. 나는 소중한 사람이구나.’ 를 깨닫고 새털처럼 가벼운 마음을 느꼈습니다.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고, 말이 없던 제가 몇 시간 동안 도반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곁에 있던 도반이 “얼마나 무겁게 살았는지 알겠지?”라며 따뜻하게 저의 마음을 알아주었습니다. 저는〈깨달음의 장〉을 마치고 문경 수련원 길을 내려오면서 ‘예전의 나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라고 다짐했습니다.

전쟁반대, 평화협상 집회 때 김순희 님
▲ 전쟁반대, 평화협상 집회 때 김순희 님

나눔의 장2에서 만남 두 번째 나

'그때 어린 나는 할머니 집에 가기 싫었구나. 나도 떼쓰면서 엄마 곁에 있고 싶었구나. 하지만, 엄마 옆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엄마가 힘드니깐.' 눈물과 아쉬움 그리고 그리움을 참아내는 작은 어린애를 가슴에 품고 사는 저를 〈나눔의 장〉에서 만났습니다. 기억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 한 조각을 보고 나니, 다시 저를 안개 속으로 가두는 강렬한 느낌을 경험했습니다.

명상 수련에서 만난 세 번째 나

너무 바쁜 '나'와 아이들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가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자세는 가부좌로 앉은 명상 자세인데, 머릿속은 하루 일과를 바쁘게 정리했습니다. 할 일을 시간순으로 나열하고, 다시 나열한 일들을 시간 단위, 분 단위로 나눠서 계획하는 저의 모습을 봤습니다.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저를 명상에서 만났습니다. 이 좋은 세상에 무슨 걱정을 그리 많이 껴안고 사는지, 저에게 말해줍니다. ‘조금 편안해져도 돼.’ 라고 말하며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걱정해도 해결되는 건 하나도 없는데, 온 마음이 걱정에게 빼앗기는 저를 인정합니다.

잘못된 걸 알았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며 스스로를 다독입니다. 탓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많음을 자연스레 알아차리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받아들이니 나약하고 여린 '나'를 발견합니다. 이 모든 게 부족한 저로 느껴지지만 인정합니다. 그것 또한 저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출발하자. ‘내일부터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라며 또 다른 다짐을 합니다. 이 마음까지 오는 데 4년이 걸렸습니다.

김순희님 제1회 사하지회 모둠원회의 준비모임
'아래에서 왼편'
▲ 김순희님 제1회 사하지회 모둠원회의 준비모임 '아래에서 왼편'

존재감 없는 것이 나의 존재감

저는 6남매 중 넷째입니다. 아버지는 외동아들! 어머니는 종갓집 맏며느리! 득남에 대한 압박이 컸던 어머니는 줄줄이 딸 다섯을 낳은 후 여섯째 남동생을 낳은 집념의 여인입니다. 엄마는 늘 힘들다는 걸 깊은 무의식 속에 이미 가지고 태어났고, 성장한 듯합니다. 할머니 집에 가지 않겠다고 떼쓰는 언니들과는 달리 스스로 여동생을 챙겨서 할머니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혼자 잘 놀았습니다. 저는 그냥 가만히 있는 존재로 엄마 짐을 덜어 줘야 한다는 생각 많은 딸이었습니다. 또 저의 의견을 말하거나 고집하면 주변이 힘들어진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특히 셋째 언니가 굉장히 개성이 강하고 자기주장이 강해서 집안의 불화가 많았습니다. ‘나라도 그냥 살자. 조용히 살자’라는 목소리가 저를 지배했습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결혼도, 조용히 저를 지배하는 목소리에 따라 살면서 엄마의 짐을 덜어주는 삶이 최선의 삶이라 믿었습니다.

누군가가 필요하다면 나이기를

스님 책 중에서 《새로운 백년》을 읽었습니다. 문득 모든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는 스님의 말은 불법에 기인했다는 걸 '새로운 백년 북콘서트'에서 알았습니다. 저도 그 불법을 배우고 싶어서 물어물어 당리동에 있는 사하법당을 찾아갔습니다. 허름해 보이는 법당과는 달리, 법문 만큼은 저에게 큰 재미와 새로운 앎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부처님은 막연한 신화나 전설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 한 인간이었습니다. 깨달음의 과정을 배우면서 저의 생활에 적용해 가는 체험들이 매우 신선했습니다.

늘 그랬듯 말없이 법당을 오가는 사람으로 존재감 없이 혜택만 받으며 불교 공부, 마음공부에 집중했습니다. 조용히 불전함 정리부터 입재식 접수자로 봉사 아닌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경전반 입학 후 불교대학 모둠장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봉사를 했습니다. 봉사를 시작했다기보다 카리스마 넘치는 도반의 요구에 거절못하고 굉장히 부담을 느끼면서 봉사했습니다. 이런 부담감이라면 두말없이 법당을 가지 않는 것이 저의 습관이지만, 계속 법당에 간 이유는 분명 저 같은 사람이 불법을 배우고 싶어서 법당에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누군가는 법당문을 열어주고 법문을 안내해 주는 사람이 필요할 것이고, 그 누군가가 저였으면 했습니다.

김순희님 행복학교 홍보중 ' 가운데'
▲ 김순희님 행복학교 홍보중 ' 가운데'

꺼내기 연습

정토회 봉사를 하면서 저에게 매우 힘든 상황은 상하, 수직관계를 떠나서 무조건 '예하고 합니다'였습니다. 저같이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스트레스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법문을 듣고 조금씩 깨치니깐 “말해도 된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걸 믿고, 한두 마디씩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의견을 최소화하고 살았지만, 정토회 활동은 받아들이기만 하고 출력을 안하면 토의도 안 되고, 회의도 안 되고 특히 나누기가 안 됩니다. 말하지 않고 삭히던 저에게 내면의 생각과 의견을 하나씩 꺼내는 연습이 여기서부터 출발했습니다.

법당 밴드에 행사 글을 올리거나 정리해서 알림 공지를 띄우는 봉사를 했는데, 모두가 잘했다고 칭찬했습니다. 자신감을 얻어 나누기하면서 조금 더 저를 표현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표현해도 괜찮구나. 이렇게 말해도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구나.’ 조금 더 제 안의 자신감을 발견했습니다.

어느 날 도반이 “순희 보살 그렇게 큰소리로 웃는 거 처음 봤어.”라고 했습니다. 도반들은 조금씩 밝아지고 표현하는 것에 어색하지 않은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줬습니다. 지금 세상에 살고 있었지만 섞이지 못한 제가 조금씩 섞여 가면서 ‘나는 더이상 짐이 아니고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존재임’을 있는 그대로 느낍니다. 저는 괜찮은 존재입니다.

김순희 님 부울 정초정회원 법회 '아랫줄 제일 오른쪽'
▲ 김순희 님 부울 정초정회원 법회 '아랫줄 제일 오른쪽'

남편은 ‘저러다 말겠지. 해봐야 얼마나 하겠노’라고 생각하다가 법당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니 엄청 불편해 합니다. 아이들은 사춘기 즈음에 엄마가 없으니까 별로 불편한 기억이 없습니다. 남편은 명절날 불편한 마음을 친정에 가서 투덜거립니다. 밤낮으로 절에 가서 집에 늦게 들어오고 밥도 해주지 않는다고 친정엄마에게 하소연합니다. 그때 그 말을 들은 엄마는 주방으로 가더니 새로 짠 참기름 한 병을 가져와서 “전서방 순희가 밥 안해주면 김치 쫑쫑 썰어서 이 참기름 넣고 비벼서 먹어봐라. 밥맛 없을 때 먹으면 맛있다.”라고 했습니다. 저도 남편도 놀랐습니다. 당연히 저를 나무랄 줄 알았는데 남편 스스로 자생하는 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엄마의 눈에도 제가 어떤 말을 해도 정토 생활을 포기하지 않을 걸 알고, 딱 제 편을 들어준 것 같습니다. 그 후로 남편도 크게 불평하지 않습니다.

지금이 제일 좋은 줄

정토회와 함께한 시간이 8년이 다 되어 갑니다. 이 세월 속에서 제 안의 큰 깨달음은 인연에 수순하는 것입니다. 저도, 세상도, 정확하고 절대적이지 않음을 알아차립니다. 여유를 가지고, 유연하게 대처하면 진실의 잣대에 따라 모든 상황은 있는 그대로 제 앞에 펼쳐집니다. 정해진 지식과 원리가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상황을 열어 놓고 받아들입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김순희님 정일사회향 수련중 '가운데줄 제일 오른편'
▲ 김순희님 정일사회향 수련중 '가운데줄 제일 오른편'

제가 어두운 것을 밝게 할 수 없고, 밝은 것을 어둡게 할 수는 없지만 밝은 것을 어둡게 인식할 수 있고, 어두운 것을 밝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이 인식이 계속 오류를 범합니다. 어려움에 부딪히면 정신없이 휘말립니다. 저를 바로 잡고 정신 차릴 수 있는 계기는 아침 수행과 정일사 정진입니다. 법사님과의 대화. 도반들과의 나누기를 통해 이제는 스스로 일어섭니다. 저를 지탱하고 살아 움직이게 하는 맑은 정신으로 어두운 길을 밝게 빛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가끔은 슬픔이 농축해오지만 스스로 말합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걱정 많고 불안한 저는 지금이 제일 좋은 줄 알고 살아갑니다. 지금 이대로 고맙습니다.


목소리가 이쁜 김순희 님. 평소 나누기에서의 느낌은 잘 숙성된 묵은 김치 같았습니다. 글 쓰면서 눈물이 고이고, 엷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정토 행자의 하루, 주인공이 되어 준 김순희 님께 고맙습니다.

글_허승화(사하지회 희망리포터)
편집_ 권영숙(서초지회)


  1. 깨달음의 장 4박 5일 기간의 정토회 수련 프로그램. 평생에 한 번만 참여할 수 있음. 

  2. 나눔의 장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인간관계가 평화로워지는 4박 5일 정토회 수련 프로그램. 깨달음의 장을 다녀온 참여자만 신청하여 참여할 수 있음. 

전체댓글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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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환

인식에서 오류를 갖지 않도록 세상을 넓게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3-06-04 14:58:11

자비행

보살님 수행담 잘들었습니다. 나누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2-07-27 15:15:26

박신영

도반님의 얘기가 저도 제이야기 같아서 눈물이 흐릅니다. 내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게 힘들고 어려운일임을 나누기를 통해 많이 배웁니다. 저도 소임이 주어지면 네하고 하겠습니다 도반님 감사합니다

2021-12-15 06: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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