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일산지회
내 행복이 모두의 행복

언제 어디서나 뒤에서 묵묵히 지원해주는 일산법당의 남궁옥 님. 조용하지만 강하고 끈기 있는 남궁옥 님은 매력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 매력 속으로 지금 들어갑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사람마다 어려움의 총량이 있다면 제 경우는 80~90%는 20대 안에 다 일어났다고 생각할 만큼 무척 힘들었습니다. 아주 어릴 때 부모님이 이혼했고, 삼 남매와 엄마,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엄마는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되고 우리나라에 와서, 많이 배우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이 적었지만, 우리 삼 남매를 열심히 키워주었습니다.

당시 돈을 잘 벌며 한 푼도 주지 않던 아버지가 정말 미웠습니다. 우리 집이 가난한 것도, 엄마가 힘든 것도, 이 모든 것이 다 아버지 때문인 것 같아 그냥 미웠습니다. 엄마도 어디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까 어린 저를 붙들고 아버지 욕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남자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특히나 책임지지 않고, 유약한 남자나 가장의 모습은 더더욱 싫었습니다.

엄마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근근이 먹고 살 수는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오빠와 언니는 대학 진학으로 집을 떠났고, 저 혼자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엄마는 저를 돌본다고 생각했겠지만, 오빠와 언니가 없는 이 집에서 엄마를 보살필 사람은 저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019년 부처님 오신 날 묘수법사님께 마정수기 받기
▲ 2019년 부처님 오신 날 묘수법사님께 마정수기 받기

가난해도 넘치는 사랑

학창 시절 집에 갈 때는 항상 번개탄을 사가던 생각이 납니다. 그날도 번개탄을 사서 연탄을 때고 솥에 물을 끓였는데, 어쩌다가 그 팔팔 끓는 물을 쏟아서 발등이 다 뎄습니다. 하지만 엄마가 오기 전에 청소를 다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그 발을 끌고 청소를 했습니다. 엄마가 제 발을 보고 많이 속상해 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어떤 상황이 오면 ‘못 해요! 안 돼요!’라는 말을 못 합니다.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야 했기에 받아들이는 게 익숙했습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는 옛말처럼, 투정을 부리거나 사춘기로 고집을 부리지 못했습니다. 엄마도 살아가기 위해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때가 행복했습니다. 정말 가난했지만 사랑은 넘치게 받고 자랐습니다. 엄마는 아버지가 없다고 넘치는 사랑을 줬고, 9살 많던 오빠는 제게 아빠가 되어 사랑해줬고, 언니도 학교에서 나오는 빵과 우유를 자기도 먹고 싶었을 텐데 늘 제게 가져다줬습니다. 서로가 각자의 방식으로 막내였던 저를 너무나 사랑해줬습니다.

지금도 제 인생 중 가장 힘든 일이라고 하면 오빠가 제 곁에 없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지주면서 가장이던 오빠가 결혼한지 6개월 만에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한 직후였습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제게 아빠이자 오빠면서 언제나 키다리 아저씨 같은 든든한 버팀목이던 오빠가 이 세상에 없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제 오빠 없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지, 모든 것이 막막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또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고혈압을 앓던 엄마와 임신 7개월인 언니를 대신해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장례식 날 슬퍼할 새도, 아파할 시간도 없이, 사고 난 차 번호판을 들고 뒷처리를 했습니다. 이때부터 엄마를 보호할 사람이 정말 저밖에 없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습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대학 커플로 만난 남편은 이야기가 잘 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없이 자란 저와 집안 환경이 비슷해서였을까요? 서로 같은 어려움이 있다 보니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았고, 따뜻한 사람이어서 참 좋았습니다. 취직 후 남편이 군대에 가면서 자연스럽게 헤어지고 여러 사람을 많이 만났습니다. 저에게 잘해주기만 해도 호감을 느끼게 됐습니다. 이제 와서 왜 그런지 생각해보니, 아버지의 사랑이 부족한 것을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채우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을 만나봐도 별다른 사람이 없음을 깨닫고, 지금의 남편과 2년 만에 다시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남편은 어린 시절 유복하게 잘 지냈으나, 어머니가 재가해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할머니 손에 자랐습니다. 할머니에게 얹혀산다는 생각 때문에 눈치를 많이 보고 자랐다고 합니다.

2019년 4월 행복한 대화 외부 안내 봉사 (아랫줄 가운데)
▲ 2019년 4월 행복한 대화 외부 안내 봉사 (아랫줄 가운데)

결혼 후 5년 동안 시할머니와 시삼촌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시누이와 아이들이 매주 찾아왔고, 정작 우리 아이는 돌보지 못하고 친정에 맡겨둔 채 시댁 식구들을 챙기느라 버거웠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너무 어렵게 자라 돈에 대한 집착은 없었지만, 일에 대한 집착은 아주 강했습니다. 이 일이 없으면 당장 먹고 살 수가 없으니, 일하고, 집안일하고, 아이 키우고, 뭐든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툭하면 힘들다고 하소연하고 푸념하는 남편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가족을 책임지지 않아서 저를 힘들게 했던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그대로 남편에게 전달됐습니다. 남자도 힘들 수 있는데, 그 당시 저는 그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남편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대인기피증

시할머니, 시삼촌과 분가하면서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과외를 하다가 지인과 함께 교육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일만 했습니다. 수익성이 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력은 한없이 부족했고,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일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무실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았습니다. 병원에 가보니 기력이 다 빠져서 그런 거라며 15분 이상 걸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지인에게 배신감이 들었습니다. 저를 함부로 대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일을 시키고 고생한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더 해주기를 바라는 상대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대인기피증이 생겼습니다. 6~7년 동안 개인과외와 집만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아이가 불안장애로 아파 돌봐야 했고, 개인 과외하고, 집안일하고 아주 바쁜데 대외 활동이 없으니 막연한 공허함이 느껴졌습니다.

2017년 12월 광화문 1만 평화행진 참여
▲ 2017년 12월 광화문 1만 평화행진 참여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스님 책을 찾았습니다. 3년 정도 스님의 책은 모두 다 찾아 읽었습니다. 그 책들 내용 중 “어제까지 너무 좋은 남편이었는데, 그다음 날 남편이 바람피운 걸 알게 됐다. 그러면 똑같은 사람을 두고 어제는 좋은 사람이었다가 오늘은 엄청 나쁜 사람이 됐다. 그럼 이게 누구의 문제인가?"

'아, 결국 내 생각과 마음의 문제이구나!' 이런 관점으로 삶을 대할 수 있다는 것이 신선했습니다. 이런 관점으로 생활해보니 삶의 에너지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 좋은 에너지를 제 돈을 벌고, 제 것을 만들어가는 것에만 쓰기에는 뭔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딘가 좋은 곳에 쓰고 싶다는 생각에 일산법당을 찾았습니다.

이 길을 가야겠다

경전반 졸업식 날,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선배 도반들의 봉사를 받았으니, 이제 갚아야죠?” 라는 총무의 인사를 들었습니다. 졸업생인 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마음속에 화살이 박히는 듯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렇지. 받았는데 갚는 것이 당연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2018년도 봄불교대학 담당 소임을 맡았습니다.

봉사를 덥석 맡는다는 게 쉽지 않았지만, 경전반 졸업할 즈음 법사님과의 대화 속에서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매 순간 저 자신을 채찍질했습니다. 부족한 부분들을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랑받지 못해서 떨고 있는 제 모습이 어느 순간 보였습니다. 그때 많이 울었습니다. 그렇게 서서히 불법은 저에게 들어와 제 어릴 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도, 결혼하고 나서도, 회사 다니면서도, 뭔가 채워지지 않는 부분을 채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제 모습이 슬라이드 돌아가듯 보였습니다. 그 순간 가슴이 뻥 뚫리는 거 같았고, 그렇게 저를 인정하고 안아주는 과정을 연습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아버지의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잘나가는 실력파에, 곰 같은 아내, 지금의 저보다도 어린 아버지의 실수가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게 평생을 두고 원망할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108배 할 때, '제가 이렇게 세상에 잘 쓰일 수 있게 낳아주셔서 아버지 고맙습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전에는 아버지에게 뭘 감사해야 하는 건지 알 수도 없었고,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더욱이 제일 고민했던 것 중 하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장례식에 가야 하나였습니다. 너무 꼴 보기가 싫은데 자식 도리상 그러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생판 모르는 사람을 위해 밤새워서 봉사도 하는데 그 장례식 가는 게 뭐 대수야? 가볍게 엄마 손 잡고 가볼 수 있겠다!’ 하는 마음이 듭니다.

2019년 10월 문경 활동가 나들이(오른쪽 첫 번째)
▲ 2019년 10월 문경 활동가 나들이(오른쪽 첫 번째)

기도는 '이거구나! 이게 진짜구나! 이 길을 가야겠다!' 하는 마음을 주었고, 그 어떤 보시, 봉사, 수행도 거뜬히 해낼 수 있게 했습니다. 하지만 2018년도 봄불교대학 졸업생 수가 적고, 경전반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적어 반이 꾸려지지 않아 큰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그로인해 하기 싫은 마음은 올라왔지만, 2019년 봄불교대학 담당과 불교대학 팀장, 2020년 지원팀장 소임을 거뜬히 해냈습니다.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가능했습니다. 주어진대로 살아야만 했던 지난 과거는 제 삶의 큰 자산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제 뜻대로 살 수 없어 괴로웠던 지난날이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어낼 수 있는 다변한 제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수행하면서 다양한 곳에 쓰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자양분이 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행복한 길

봉사하면서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미안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은 압니다. '제가 행복하고 가벼운 것을 보여주니 남편도 덩달아 가벼워지는구나! 지금은 내가 돈을 조금 못 벌어도, 내가 행복하고 가벼워지는 것이 그 사람을 위한 길이기에 이 또한 미안한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삶은 이렇게 가벼워졌습니다. 잠이 부족하면 내일도 자고, 모레도 잘 텐데, 하루 좀 못 잔다고 별일 있겠나. 내려놓는 공부를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고, 봉사는 저의 시간과 노력, 에너지를 내어주는 연습을 하는 것이기에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항상 어디선가 누군가의 뒤에서 조용히 바라지를 하는 남궁옥 님을 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많이 배웁니다. 지금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보여주는 남궁옥 님의 앞길을 늘 응원합니다.

글_김세영 희망리포터(인천경기서부지부 일산지회)
편집_장순복(강원경기동부지부 남양주지회)

전체댓글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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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만

옥님~ 고마워요~ 함께해서 좋아요
눈물이 나네요. 왜 눈물이 나는 지 모르겠어요.
감사합니다

2023-05-10 17:27:46

이경미

새롭게 알게된 도반님 따뜻함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지금 함께 할수 있어 행운입니다 성불하십시요

2021-05-13 07:07:58

오상희

감동적인 글 나눠주셔서 고맙습니다.

2021-05-11 18:4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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