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운정법당
운정법당 물건들, 행방 보고서

운정법당은 개원한지 만 4년이 채 안 된 비교적 젊은 법당입니다. 하지만 법당의 물건들은 대부분 이런저런 인연 따라 흘러든 나이 든 것들입니다. 오는 6월 임대계약만료를 앞두고 새 인연을 맺은 법당 물건들. 그 사연을 소개합니다.

물건값을 의논하고 있는 박형자 님(왼쪽)과 김민정 님(오른쪽)
▲ 물건값을 의논하고 있는 박형자 님(왼쪽)과 김민정 님(오른쪽)

지난 2월 초, 설 명절을 앞둔 바쁜 시기에 두 사람이 운정 법당에서 만났습니다. 나비장터에 올릴 물건을 정리하고 매매가 초안을 잡는 것이 임무였습니다.

김민정 : 이거는, 이거는 어떻게 해요?
박형자 : 아유, 그거는 회전도 안 되는데 누가 사갈려나? 그냥 한 개에 오천 원 할까?
김민정 : 그래도 살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박형자 : 그럼 두북으로 보내야지, 뭐.

선풍기 네 대가 구석에 눈치 보듯 모여 있습니다. 한 대는 회전이 안 되고 한 대는 목 관절에 이상이 생겨 자꾸만 고개를 숙이는 소심한 녀석입니다. 나머지 둘도 리모콘 기본에 무선이 대세인 요즘 세상에 감히 명함 내밀기 힘든 구형입니다.

측은해 보이는 선풍기들
▲ 측은해 보이는 선풍기들

다른 물건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수저, 접시, 냄비, 밥솥, 국자 등 주방 용품부터 세트 개념 없이 모두 제각각인 의자와 계산기, 파일함, 미니 서랍 등 사무 용품까지. 법당 물건들은 모두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고 말간 얼굴을 하고 있지만 가까이 보면 자잘한 흠집이 있는 오래되고 낡은 것들입니다. 단 돈 천 원, 이천 원이면 살 수 있는 반짝 반짝한 새 물건이 넘쳐 나는 세상, 과연 이 물건들을 살 사람이 있을까요? 법당 물건들은 어디서 왔고, 어떤 인연을 따라 어디로 갔는지, 그 행방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선풍기와 주방 용품의 행방

2018년 봄, 법당 개원을 앞둔 참이었습니다. 인근 덕양법당 소속 도반이, 하던 뷔페식당을 접는다며 필요한 게 있으면 가져가라 했습니다. 덕분에 접시, 수저, 뒤집개, 주걱 등 각종 주방 용품을 풍성하게 챙길 수 있었습니다. 자꾸만 고개 숙이는 소심한 선풍기도 그 때 함께 왔습니다. “공사비는 줄일 수 없으니까 최대한 돈 안 쓰려고 선풍기에 쓰레기통까지 몽땅 챙겨온 거죠.” 당시 총무를 맡았던 최수영 님은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라 했습니다. 가져온 물건들을 모두 박형자 님 집 마당에 부려 놓고, 커다란 고무 통에 넣어 정성껏 씻었습니다.

식기에 묻어 있는 오랜 기름때도 선풍기 날개 안에 묵은 때도 꼼꼼이 닦아냈습니다. 그 때 울력했던 도반들은 3월이라 쌀쌀했지만 마음은 오뉴월 봄날같이 따뜻하고 흐뭇했다고 회상합니다. 3년을 잘 쓰고 장터에 내놓자 그 많던 주방 용품이 순식간에 팔렸습니다. 서비스로 끼워 팔까 고민이었던 작은 스푼과 포크까지 다 나가는 걸 보고 장터 담당자들은 놀랐습니다. 값을 매기기도 애매했던 물건들인데 어찌 된 일일까요?

물품 수령 날 , 모두가 행복한 얼굴입니다
▲ 물품 수령 날 , 모두가 행복한 얼굴입니다

“우리 손 때 묻은 거, 우리 거란 애정 때문인 것 같아요. 식기니까 찝찝한 마음이 들 수도 있는데 모두들 편안하게 하나도 안 따지고 그냥 가져가셨어요.” 나비장터 총괄 소임을 맡은 양은하 님의 설명입니다. 주방 용품은 올 해 대학 진학으로 분가하는 자녀들의 첫 살림용으로도 많이 나갔다고 귀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소심한 선풍기는 어떻게 됐을까요? 다행히 궁합에 딱 맞는 좋은 주인을 찾아갔습니다.

“그 분이 바닥에 요 깔고 주무시기 때문에 이렇게 숙여져 있으면 너무 좋대요.” 순간 장애는 다른 것이지 열등한 게 아니라는 스님 말이 떠올랐습니다. 모든 것에 쓰임이 있는 거구나! 어디에 가는 지에 따라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되기도 하고 귀하고 소중한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인연이란 참 신묘합니다.

회전은 안되지만 새것처럼 깨끗합니다
▲ 회전은 안되지만 새것처럼 깨끗합니다

책상과 방석의 행방

법당 책상과 방석으로 온라인 개인 법당 완성
▲ 법당 책상과 방석으로 온라인 개인 법당 완성

책상과 방석은 이번 장터에서 제일 인기 품목이었습니다.

경전반 수업중인 강다현 님 남편
▲ 경전반 수업중인 강다현 님 남편

법당 방석과 책상으로 <온라인 개인 법당>을 좀 더 여법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은 모두가 똑같았습니다.

불교대학 수업중인 박형자님 동생
▲ 불교대학 수업중인 박형자님 동생

51개의 방석과 22개의 책상이 금방 동이 났습니다. 가족 전법에 성공한 회원들은 이번 봄 불교대학과 경전반에 입학한 ‘한 집 사는 도반’에게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불대입학선물
▲ 불대입학선물

운정법당 총무인 양태희 님은 법당의 긴 책상을 어머니에게 선물했습니다. 어머니는 그걸로 생명력 강한 다육식물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었습니다.

다육식물 집이 된 법당 책상
▲ 다육식물 집이 된 법당 책상

프린터의 행방

법당 최고가 프린터
▲ 법당 최고가 프린터

프린터는 법당 내 몇 안 되는 신품이자 판매가가 150만원을 훌쩍 넘습니다. 고급기종으로 운정법당의 자랑이었습니다. 토너도 오래가고 양면 인쇄도 가능해 실용적입니다만 정토회에 어떻게 이런 비싼 물건이 들어왔을까 의아했습니다. 사연인즉 이 프린터는 2019년 당시불교대학생이던 안광호 님이 기증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용 중이던 법당 프린터를 눈여겨보다가 토너 값이 만만찮은 것을 알고 유지비가 저렴한 걸로 보시했다 합니다.

“전자제품 취급하는 일을 하셨던가 봐요. '토너도 오래가고 쓰기 좋은 물건이다' 하는데 보니까 우리 법당에서 쓰기엔 너무 크고 좋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에겐 넘치는 물건이니 서초동이나 문경에 보내면 어떠냐 했더니, 꼭 우리 법당에서 썼으면 했어요. 운정법당이 사람도 많아지고 커질 거라고. 자신이 공부했던 법당에서 보시한 프린터가 쓰이는 걸 보고 싶다 했어요.”

때마침 이웃한 김포법당에선 프린터를 임대해 쓰고 있던 상황! 임대료가 너무 아깝다는 김포법당 총무의 하소연에 기존 프린터는 김포로 보냈습니다. 그렇게 운정법당은 크고 좋은 새 프린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전자제품에 밝은 안광호 님은 철마다 에어컨 청소까지 자청했습니다. 천장에 매립된 것이라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에어컨을 분해해 천정에 달려 있는 부분은 달린 채로 떼 낸 것은 본인 집에까지 가져가 철저히 소독하고 관리해 주었습니다.

“특히 초파일을 앞두고선 꼭 에어컨 청소를 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모일 법당이니까 청결이 특히 중요하다면서 정성을 다했어요.” 양태희 님은 온라인 법회로 전환되고 나선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며 지금도 고마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법당의 자랑 프린터는 출판사를 하는 양은하 님에게 돌아갔습니다. 출력할 일이 많은 곳이라 귀하게 잘 쓰일 것으로 기대합니다. 사연을 전해들은 양은하 님이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귀한 물건인 줄 몰랐네요. 그 마음 잊지 않고 좋은 책 만드는데 소중하게 잘 쓰겠습니다.”

출판사 사무실에서 프린터와 함께 한 양은하 님
▲ 출판사 사무실에서 프린터와 함께 한 양은하 님

스텐밧드의 행방

스텐밧드는 사다리와 함께 법당 운영자금으로 구매한 몇 안 되는 희귀 아이템입니다. 어떤 이유로 짠순이 법당 총무님이 지갑을 열었을까요? 법당 행사 때면 떡을 맞추게 되는데 비닐에 담아주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정토회에서 일회용품 사용은 금지니까요. 떡집에선 종이상자에 넣어 달라는 법당의 요청을 잘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2019년, 일명 ‘지렁이 엄마’로 불리는 법당의 환경지킴이 이정화 님이 용맹정진의 공력, 임전무퇴의 각오로 끈질기게 협상해 마침내 통에 담아주는 조건을 관철시켰습니다. 그때 구매한 것이 대형 스텐밧드 3개입니다. 하지만 그 해 초파일에 딱 한 번 쓰곤 끝이었습니다. 코로나가 찾아 온 것입니다. 최수영 님은 ‘천년만년 쓸 줄 알고 비싼 스텐으로 구매했다’며 지금도 아쉬워합니다.

초대형 스텐밧드, 법당에서는 떡통으로 불렸습니다
▲ 초대형 스텐밧드, 법당에서는 떡통으로 불렸습니다

문제는 가정집에 쓰기엔 너무 대용량이라는 점. 다들 팔기 어려울 거라 걱정했는데 뜻밖에 적절한 구매자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법당 JTS 담당 이경은 님. 자신이 운영하는 노래방에서 사용하면 좋겠다며 3개를 모두 구매했습니다. 목 터져라, 코로나로 쌓인 스트레스를 노래로 푸는 손님들을 위해 주전부리 식품 보관용으로 잘 사용하고 있답니

신선한 식재료 보관함이 된 스텐밧드
▲ 신선한 식재료 보관함이 된 스텐밧드

좌식의자의 행방

좌식의자
▲ 좌식의자

방석에 좌식이 기본인 법당 시간이 유난히 괴로운 분들이 있습니다. 허리가 불편한 정토행자들의 필수품, 매주 정기 법회부터 온 종일 이어지는 입재식1까지, 아프고 약한 허리를 든든히 받쳐준 좌식의자가 있습니다. 은은한 광택에 산뜻한 바닥 쿠션까지, 귀한 집에서 대접 받고 지내온 태가 나는 이 의자는 실은 김소윤 님이 길에서 주워 온 것입니다.

“법당에 허리 불편한 분들 쓰면 좋을 것 같다고 그냥 들고 오신 거예요. 엄청 지저분했죠. 게다가 전 주인 집에 애들이 많았는지 알록달록한 스티커가 잔뜩 붙어져 있었어요. 진짜 못 쓸 것 같았는데......” 총무의 SOS 호출을 받고 김민정 님이 손 걷어붙이고 나섰습니다. 스티커를 하나하나 다 떼어내고 갖은 기술을 동원해 새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거기다 황색 천 커버까지 만들어 씌우니 영락없는 새 물건이 되었습니다. 3년 간 잘 쓰이고 이제는 법당 도반의 허리 아픈 아버지를 돕기 위해 시골 고향집으로 향했답니다.

전자계산기, 디지털시계, 기타 다른 물건들의 행방

신선하 님의 파트너, 전자계산가
▲ 신선하 님의 파트너, 전자계산가

법당 회계 담당 신선아 님은 오랜 파트너 전자계산기를 구매했습니다. 재택 회계 업무 시 사용할 계획입니다. 최수영 님은 명상수련과 300배 정진의 필수품, 디지털시계를 골랐습니다. 원래 최수영 님 집에 있던 물건인데 법당에 두고 썼던 것입니다. 법당에 있던 물건이 집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하고 좋다 했습니다. 이태란 님 역시 본인이 사왔던 알뜰주걱을 구매해갔습니다.

최수영 님이 고른 디지탈 시계
▲ 최수영 님이 고른 디지탈 시계

“장터에 나온 물건을 보니까 정말 돈 주고 산 게 없네요. 누가 갔다 놨는지도 모르는 게 태반이에요. 회원들이 필요하다 싶으면 아무 말 없이 그냥 갖다 놓더라고요.”

최수영 님 말대로 대부분의 법당 물건은 회원들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보시한 걸 구매해 다시 찾아가는 셈입니다.


돌고 도는 인연 속에 법당을 중심으로 참 많은 것을 나눴고 좋은 일이 참 많았구나! 장터의 물건 하나하나를 돌아보면서 빙그레 미소 짓게 됩니다. 낡고 손 때 묻은 물건을 들고서 모두가 행복했던 이유입니다.

글_전우성 희망리포터(일산정토회 운정법당)
편집_한숙(서초정토회 서초법당)


  1. 입재식정토행자 천일결사를 백일 단위로 나누어 매 백일 마다 함께 모여 수행을 점검하고, 새롭게 백일기도를 시작하는 의식. 

전체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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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재왕

정토회는 구석구석 여기 저기 감동의 산실입니다. 흐뭇한 사연 잘 읽었습니다.

2021-04-15 08:26:32

이수찬

어머니 정리
하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웹에서 모습 뵈니 색다르네요^^

2021-04-07 08:10:45

박민주

따뜻하고 감동적인 기사 잘 읽었습니다^^

2021-04-06 20: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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