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영천법당
고난과 슬픔은 바람처럼 뭉게구름처럼

영천법당 정명옥 님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조용하고 한적한 언덕배기 시골에서 삽니다. 결혼 초부터 지금까지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4대가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정명옥 님이 법당 부총무 소임을 맡고 있을 때 처음 만났는데 결의에 찬 모습이었습니다. 강인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강인한 모습보다는 온화한 모습을 자주 봅니다. 일과 수행은 하나라고 얘기하며 동분서주 하지만, 그럼에도 여유가 느껴지는 것이 보기 좋습니다. 이렇게 변화된 모습을 보이는 정명옥 님의 수행담을 함께 보겠습니다.

도반들과, 맨 오른쪽이 정명옥 님
▲ 도반들과, 맨 오른쪽이 정명옥 님

원망의 회고록을 고이 접어 나빌레라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머릿속이 하얘서 도무지 지난 시간들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희망리포터님과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니 자꾸 걱정만 하다가 펜을 들었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앞뒤 재지 않고 아침에 눈 떠서 종종 걸음으로 일을 해내다 보면 늦은 저녁에는 발바닥이 따가울 정도로 아픕니다. 눈이 감기면 잠자고 또 일어나 걷고 뛰고 하다 보니 정토회에 입문한지도 10여년이 다 되어 갑니다. 똑 부러지게 잘 한 것도 없고, 그렇다고 삐뚤어지고 모난 것도 딱히 없습니다.

2012년 1월에 친정아버지를 떠나보내고 혼자 덩그러니 남은 친정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셨습니다. 딸 여섯, 아들 하나 칠남매 중 맏이였던 저는 여기저기 신경 쓸 일이 많았습니다. 시가에서도 사형제의 맏며느리여서 시부모님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나이 육십에 이렇게 지난 날을 돌이켜보니 인생 회고록을 쓰는 기분입니다.

4대가 모인 가족, 앞줄 왼쪽 첫번째 정명옥 님
▲ 4대가 모인 가족, 앞줄 왼쪽 첫번째 정명옥 님

어릴 때 엄마의 살뜰한 보살핌을 못받고 자랐습니다. 11개월 차이나는 연년생 동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할머니가 저를 돌보면서 많이 예뻐해 주시고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제 위치는 늘 가족 중에 으뜸이었습니다. 동네 선후배나 친구들과도 기죽지 않았고 학교생활에서도 늘 우등생으로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책 읽기를 좋아해서 글쓰기에도 재능이 있었고 자연을 벗 삼아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사생대회에 나가서 상을 자주 타기도 했습니다. 글씨도 반듯하게 잘 쓰고 정리도 잘 하여 담임 선생님의 칭찬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유독 체육 시간에 달리기를 하거나 음악 시간에 노래 부를 때는 늘 꼴찌였습니다. 선생님과 친구들 앞에 서는 것이 부끄럽고 자신이 없어서 몸을 숨기거나 눈을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회상해보면 속상한 마음입니다. 열등감이 어디서 왔을까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버지의 괴팍한 성격과 집안 환경 때문에 늘 위축된 마음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쉼 없이

물려받은 논과 밭을 모두 없애고 가세가 차츰 차츰 기울면서 할머니와 엄마의 고부 갈등, 양자로 오신 아버지가 딸만 내리 낳다 보니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엄마와의 부부 갈등, 대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논 밭 모두 없애고 구멍 가게를 차려 술과 담배를 팔고 노름쟁이 들을 모아 매일 시끌벅적하게 생활하다 보니 불협화음으로 생긴 이웃 갈등, 그것이 커져서 서로간의 의견 다툼으로 고발 고소가 생긴 사회적 갈등 등 늘 할머니 애 간장 태웠던 아버지로 기억됩니다. 여러 가지 갈등의 원인을 지켜보고 가난의 굴레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존감이 많이 낮아져 남 앞에 서는 일이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친정어머니 생전에 함께
▲ 친정어머니 생전에 함께

엄마 아버지의 살가운 사랑도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피부로 느끼는 주변 상황이 거칠고 건조했기 때문에 꿈이 자라다 멈춘 것이 늘 한이었습니다. 인생의 목표도 없이 세상의 흐름에 떠밀려서 살았습니다. 그러다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낳았지만 가정이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술과 친구를 좋아하는 남편이 제 마음에 차지 않았습니다. 밖에 나가면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하는데 집에서는 그렇지 않으니, 제 성격이 잘못 되었다고 도리어 화를 내고 손찌검까지 했습니다. 저는 남편을 이해 할 수 없어 미워했고 원망만 쌓여갔습니다.

남편은 섬유 단지를 조성해서 분양하고 또 자회사를 만들어 선배와 맞보증을 서면서 사업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85년 1월 IMF로 부도가 났습니다. 그때부터 참으로 고난의 터널이 시작되었습니다. 가구점, 보험 회사 영업, 치킨 가게, 생맥주집, 세차장, 생선 가게, 한식당, 노래방, 주유소, 대리점, 용역 사무실, 대리 운전사, 그리고 주유소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며 쉼 없이 살았습니다. 지금도 크게 다를 바 없이 살고 있는 중이지만, 잘 버텨왔다고 자부합니다.

그저 오뚝이처럼 나아가리라

정토회와 인연은, 2012년 법륜스님의 희망세상 만들기 영천 강연에서 전 총무 김정희님 소개로 울산에서 강연 홍보하러 온 분들과 봉사하면서 시작했습니다. 그 때 580명 시민들이 즉문즉설에 참가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동네마다 현수막도 부치고 전단지도 나르며 참 즐겁게 준비했습니다. 강연회날 줄지어 선 시민들에게 책도 팔고 강연시간에 문지기 소임도 하고, 강연 마치고 김밥도 먹고 빙 둘러 앉아 나누기 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그때 저는 영천문인협회 회원으로 전 총무님과 같이 활동했었습니다. 전 총무님이 법륜스님에 대한 공부도 하면서 시를 짓고 낭송도 함께 하자고 해서 우여곡절 끝에 여섯 명이 열린 법회를 시작했습니다.

9차년 총무단, 아도모레원에서, 뒷줄 한가운데가 정명옥 님
▲ 9차년 총무단, 아도모레원에서, 뒷줄 한가운데가 정명옥 님

일 년 동안 포항에서 장금옥 님과 이지은 님 그리고 대구에서 김남수 님과 김명선 님이 번갈아 와서 법회 안내도 해주고 불교대학을 지원해줘 불법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부끄러울 정도로 규율 같은 건 아예 모르고 저희들 하고 싶은 대로 했었습니다. 마땅하게 불교대학을 열 장소가 없어서 이 곳 저 곳을 옮겨 다녔습니다.

시내에서 10 리도 더 떨어진 당시 총무의 서당, 도반의 과수원 컨테이너 박스로 된 집, 아는 교수의 빈 개인 연구실 등. 거기서 할 때는 기찻길 옆이라 법문을 듣거나 명상을 하다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몹시 시끄러웠습니다. 서너 달 있다가 또 옮겨서 아는 작가분의 빈 집에서 몇 달 머물다 2013년 9월에 드디어 영천법당을 개원했습니다.

시청오거리 7층짜리 빌딩에 6층 30여 평을 얻어서 난생처음으로 법당 불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태까지 주먹구구식으로 하다가 체계적으로 하자니 참 낭패였습니다. 바닥 장판이며 도배며 간판이며 현관 열쇠까지. 그리고 보시받은 돈으로 물품을 구입하는데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냉장고 밥솥 선풍기 수저 등 세세한 여러 가지가 다 점검 대상이었습니다.

그래도 동분서주하며 도반님들과 즐겁게 했던 기억들이 아련합니다. 유수스님이 개원법회 법문을 해주셨고, 그 이듬해 정초 순회법회에 법륜스님이 법문을 해주셨고, 8차년에는 대구 경북지부 담당 법사인 보수법사님이, 9차년에는 정초에 묘당법사님이 다녀가셨습니다.

묘당법사님과, 법사님 옆이 정명옥 님
▲ 묘당법사님과, 법사님 옆이 정명옥 님

구르면서 다듬어지다

2015년 여름, 전 부총무가 집안 사정으로 회향하고, 회계 소임을 맡고 있던 제가 부총무를 맡아 9차년 말까지 임기를 마쳤습니다. 하루 온종일 뛰어다니며 돈 내고 봉사하고 끼니도 거르면서 법당 일에 몰두했습니다. 법회 참석하랴, 회의 참석하랴, 여러 가지 교육 받으랴. 8차년에는 통일정진을 위해 새벽4시에 일어나 기도했습니다.

그때는 법당 일이 일 순위였습니다. 어쩔 도리가 없이 일단 맡았으니 책임은 져야지 하면서 귀 막고 눈감고 일했습니다. 어리석어서 조화롭게 해 나가는 법을 몰랐습니다. 수행의 관점보다 책임과 도덕성을 앞세워 옳고 그름에서 벗어나지 못해 몇몇 도반과 갈등도 있었습니다.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미워하고 원망하고 나를 괴롭혔던 순간들, 괴로우려고 작정했던 무수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래도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 보면서 참 많이 다듬어졌습니다. 도반들 한분 한분이 지금의 저를 지탱해주었고 무지를 갈고 닦게 해주었습니다. 도반들이 제 소임의 에너지임을 잘 알겠습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인도성지순례 도반들과, 오른쪽 두번째가 정명옥 님
▲ 인도성지순례 도반들과, 오른쪽 두번째가 정명옥 님

2021년 10차년 새로운 임원이 구성이 되었고 영천법당 총무로 임명되었습니다. 여태까지 가보지 못한 인도 성지순례 길에도 올랐습니다. 네 명의 도반과 함께 15박 16일의 긴 여정을 함께 하면서 2500년 전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부처님의 일생을 생생하게 체험해보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도반들과 함께 생활하며 제 안의 까르마를 여실히 들여다 보는 계기였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개인주의이며 안과 밖의 온도 차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까르마에 도취되어 자각하지 못하고 순간 놓칠 때가 많아 상에 집착하는 범부중생임도 깨달았습니다.

코로나가 준 뜻밖의 평화

작년 한 해는 코로나 19로 법당이 제 기능을 못해서 법당에 가지 못했고 집콕 생활을 몇 개월 했습니다. 이참에 집 안 구석구석 대청소도 하고 가게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마을 통장이 되었습니다. 정토회 총무 일을 여러 해 해본 경험과 그동안 수행 정진한 공덕으로 마을 통장 일은 크게 어려울 게 없었고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마을 구석구석 개선점들은 주민들과 상의하여 해결하고 민원이 있으면 충분히 들어주고 서로 서로 문제점들을 보완해 나갔습니다. 또 회계만큼은 정확하게 처리하여 신뢰를 얻으니 어디에도 걸림이 없고 일이 재미있었습니다.

평화행진, 도반들과,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정명옥 님
▲ 평화행진, 도반들과,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정명옥 님

그러던 중에 남편이 바람을 피웠습니다. 하기야 제가 남편 관리를 안 하니 다른 분이 관리했겠죠. 정토회 입문하기 직전에도 바람을 피워 크게 소란을 피운 적이 있었는데, 이 좁은 지역에서 설마 또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때가 끝일 것이라고 생각했었고 방심했습니다. 그런데 그 바람이 계속 이어져 왔다는 것에 배신감이 들고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렇지만 예전과 달리 차분하게 대처했습니다.

일이 터지고 바로 4박 5일 여름 명상에 들어갔습니다. 첫날과 이튿날은 번뇌와 망상으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잘 견뎠습니다. 3일째 되던 날, 스님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온갖 잡념으로 미쳐버릴 지경이었습니다. 묵언을 풀고 어디라도 전화해서 하소연 하고 싶고 이제는 끝장을 내리라 다짐을 하고 마음을 졸였습니다. 온통 괴로웠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4박 5일은 무사히 마쳤습니다.

제가 사는 집은 2층 주택인데 1층이 비어 있던 터라 문을 잠그고 혼자 있으니 남편의 행동이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창문 너머 인기척으로 남편이 안절부절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기가 팍 죽어서 손발이 닳도록 비는 모습에 우습고 기가 찼습니다.

그때 제가 잘한 일이라 여겨지는 일이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남편 점심 도시락을 소풍 가듯이 간식까지 챙겼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밥과 소금으로 도시락을 싸줬습니다. 그랬더니 점심때 반응이 왔습니다. 하루 종일 일하는 사람에게 무슨 짓이냐며 큰소리로 전화가 왔습니다. 그때 상대방 여자 이름을 부르니까 바로 꼬리를 내렸습니다.

JTS거리모금, 맨 오름쪽이 정명옥 님
▲ JTS거리모금, 맨 오름쪽이 정명옥 님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남편의 미친 행동과 지랄 같던 성격은 사라지고 제 뜻을 따릅니다. 남편은 2020년 가을 불대에 입학해서 꾸준히 스님 법문을 듣고 있습니다. 예전에 무지하게 살았던 과거를 많이 반성하며 경전반 등록도 했습니다. 지금은 행복학교1도 입문해서 많이 유연해지고 불안한 증세도 안정되고 편안해졌습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우리 부부의 생활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부처님과 법륜 스님을 홍보 삼아 전법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 꾸준히 수행한 공덕과 코로나 19가 가져다 준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쁜 것이 도리어 전화위복이 되어준 결과입니다. 제가 여태 돈 번다고 생계에만 집착해서 정토회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어땠을까 싶습니다. 정토회에 갈 큰 용기를 낸 저 스스로가 자랑스럽습니다.

8년의 마음수행, 이제 첫 발을 내딛듯이

작년 9월에 친정 남동생이 동두천 소요산 계곡에서 나뭇가지에 목을 매 자살했다는 비보가 날아왔습니다. 늘 부모를 원망하며 우울증을 앓고 사람들과의 만남을 꺼리던 나이 50의 동생. 결혼도 하지 않고 밥벌이 한다고 전국으로 다니면서 방황하더니 그렇게 갔습니다. 세상살이 참 마음대로 되지 않대요.

한 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제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입 꾹 다물고 그냥 하루하루 버겁게만 살아졌던 일상이었지만 부처님 법으로 중심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마음 먹으면서요. ‘이러면 이러는 대로 저러면 저러는 대로 기쁨도 즐기고 슬픔도 즐기자. 내게 오는 그 어떤 것도 그 누구의 것이 아닌, 내게 주어지는 선물 꾸러미다. 동전의 양면성일 뿐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행복하게 살자’

도반들과, 앞줄 왼족에서 두번째가 정명옥 님
▲ 도반들과, 앞줄 왼족에서 두번째가 정명옥 님


수행담을 보고 나니 정명옥 님을 처음 만났을 당시 느꼈던 강인함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이해되었습니다. 자신의 어려움을 내 보이거나 불평하는 일 없이 일에 전념을 하는 것과 불도저처럼 밀어 붙이는 것이, 삶이 녹록치 않았기에 스스로의 버팀목을 만들어 내기 위한 방편이었구나 하고. 그간의 일들에 공감하면서 한참동안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하지만 정명옥 님은 그 버팀목이 오히려 스스로를 옥죄는 시행착오들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어려운 길도 마다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정명옥 님을 가까이 보면서 롤 모델로 삼을 수 있으니 제게는 행운입니다. 앞으로도 정명옥 님을 더욱 응원하겠습니다.

글_정명옥(영천법당)
취재_김영미(영천법당)
편집_한숙(서초법당)


  1. 행복학교 행복해지고 싶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종교적 의식이나 프로그램을 배제하고, 법륜스님의 행복 메시지를 통해 개인과 사회의 행복을 이야기하고 소통하며, 지금 이 순간 행복해지는 연습을 함께 하는 곳. 2020년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으로 12강 구성으로 진행되고 있음.
    행복학교 신청: http://hihappyschool.com 

전체댓글 19

0/200

최성희

남편께서 수업중에 그동안 집사람에게 잘못했고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씀하셨어요
명옥님 ~
멋지십니다 ^^

2021-03-14 08:35:53

이의수

어려움을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하며 지혜롭게 대처하시는 모습 감동적이었습니다.. 많은 도움 됐습니다^^

2021-03-13 23:42:07

나부터

많이 힘드셨겠네요.저 또한 앞으로도 계속
모든분들을 위해서 기도 할것이며 저도 명옥님처럼 부처님법으로 날마다 중심을 잡으며 어떠한
경우에서든 행복하게 살아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말씀 감사합니다.

2021-03-13 21:00:10

전체 댓글 보기

정토행자의 하루 ‘영천법당’의 다른 게시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