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마산법당
흐르는 강물처럼

봄 햇살 같은 따뜻한 미소의 우희수 님을 만난 것은 몇 년 전 마산법당 화합의 가을운동회 때였습니다. 학교 체육관에서 행사를 치른 만큼 모두가 학창시절로 되돌아 간 듯 즐겁고 행복한 시간, 가야금 연주로 행사장을 더욱 흥겹게 해주었던 우희수 님. 창원법당 불교대학 지원 담당으로 활동하는 우희수 님을 반가운 마음으로 만나보겠습니다.

3.15아트홀 공연
▲ 3.15아트홀 공연

인연

40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졌을 때 뭔가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미 국제 아동단체 한 곳에 후원을 하고 있었지만 또 다른 후원할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때 자주 다니던 동네 목욕탕에서 전단지를 보고 JTS 후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행복학교1 홍보지를 보게 되었고 참여했습니다. 행복학교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자연스레 <깨달음의 장>에도 갔습니다. 4박 5일, 내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깨달음의 장> 마치고 돌아오는 길 , 어머니가 계시는 병원을 선뜻 들어갈 수가 없어서 맴돌았습니다. 어머니는 치매였습니다. 집에도 선뜻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남편에게 통보만 하고 <깨달음의 장>을 다녀온 것이 걸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늘 남편이 문제라고 생각했었는데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어서 좀 민망했습니다. 아이 걱정 없이 4박 5일 <깨달음의 장>을 편안하게 다녀 올 수 있었던 것은 남편 덕분이었습니다.

JTS모금(중앙) , 딸과 함께
▲ JTS모금(중앙) , 딸과 함께

남편 때문에 힘들고 고통스러운 날들이 있었지만 그 덕으로 깨우칠 수 있게 인연지어 진 것이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감사의 마음을 내니 마음이 가벼워져서 집으로 들어가 응접실에 앉아 있는 남편에게 삼배를 했습니다. 남편이 “현지야~ 엄마가 공부를 많이 하고 왔나 보다”고 했습니다. 며칠 만에 만난 7살 딸아이는 “엄마, 엄마가 다른 사람이 된 거 같아 공부를 많이 해서 그런 거야” 하며 제 품에 꼭 안겼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아빠에게 먼저 사과하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결혼하고 한 번도 먼저 사과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잘못한 일도 없었고 항상 남편이 문제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근데 그 순간은 아이에게 실망감을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현지 아빠 미안해요, 앞으로 더 잘 해봐요” 라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남편이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친정에 들어가는 경제적 지원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고 제가 하는 모든 일에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결혼

친정 큰 언니가 건강하지 못한 두 아이를 키우며 녹록치 않은 결혼생활을 하는 것을 보며 결혼 생각이 없었습니다. 결혼의 좋은 점 보다는 책임져야 할 무게감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38세에 지금의 남편을 만났는데, 결혼 할 생각이 없다는데도 제게 열렬했습니다. 2년 여 구애 끝에 40세에 결혼했고 예쁜 딸도 낳았습니다. 주변에서는 저희 부부는 결혼하면 잘 살 것 같다고 했지만 그 얘기는 금방 무색해졌습니다.

2남 2녀의 막내인 남편은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부터 직장을 관두겠다는 말을 일삼았습니다. 출산일 며칠 앞두고는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얘기하며 걷자'고 외진 바닷가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선언하듯 당장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했습니다. 기가 찼지만 '몇 달 더 생각하고 뒷일도 준비해서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제 얘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만삭인 저를 밤 바닷가에 혼자 두고 가버렸습니다. 출산 다음 날에는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고 싶다며 홍보물을 내밀었습니다. 결혼 생활 대부분을 그런 철없는 남편에 대한 미움과 분노, 자책으로 살았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책임감 없는 남자와 결혼한 제 자신이 미웠습니다.

전쟁반대 , 평화협상 행진 (오른쪽 ) 딸과 함께
▲ 전쟁반대 , 평화협상 행진 (오른쪽 ) 딸과 함께

어린 시절

저는 삼녀 중 막내로 큰 언니와는 10살, 작은 언니와는 7살 터울이라 외동처럼 아버지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들이 없는 작은 할아버지의 양아들이 되어 사랑을 받으며 살던 분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갔던 할머니와는 청년이 되어서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조금 나아졌지만 할머니와의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결혼해서 자식까지 낳은 아버지의 종아리를 때릴 정도로 엄격하고 강한 분이셨습니다. 작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배려와 사랑 속에 살던 환경에서 갑자기 변화된 환경이 혼란스러웠을 아버지, 아내인 어머니마저 당신의 그런 심정을 이해하기보다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며 할머니 편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술을 마셨고 가족을 힘들게 했습니다. 그로 인해 어머니 역시 힘든 세월을 보냈습니다. 저는 어렸고, 언니들은 부모님의 그런 모습에서 겪은 일들이 많아 원망이 컸습니다.

불교대학 중간 갈무리 (왼쪽에서 세번째 ) 도반들과
▲ 불교대학 중간 갈무리 (왼쪽에서 세번째 ) 도반들과

인생의 전환점

아버지는 저 초등학교 6학년 때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저에게는 세상의 전부였고 하늘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세상은 아무런 변화도 없이 돌아갔습니다. 저 역시 먹고 자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생활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 한 사람 없어진다 해도 세상은 아무 일 없이 잘 돌아가겠구나'싶으니 도대체 산다는 것은 뭐지 싶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사색에 잠길 때가 많았습니다.

아버지가 계실 때는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어도 제가 하고 싶다는 것은 다 지원해 주셨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그중 가장 신명나게 했던 것은 합주였습니다. 그러나 음악의 길은 중학교 진학과 동시에 접어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생활이 어려워졌고 어머니보다 생활력이 강한 큰 언니가 가장 역할을 했습니다. 소심해진 제 꿈은 음악을 항상 들을 수 있는 레코드 가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음악이 좋았고 음악 하는 사람을 선망했지만 현실은 뒷받침이 안 되니 생긴 꿈이었습니다.

국악행사장에서 만난 김병조 님과 (오른쪽)
▲ 국악행사장에서 만난 김병조 님과 (오른쪽)

음악에 미련이 남아서 악대부가 있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진학했지만 왜 그랬는지 악대부 지원을 용기 있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학교생활은 만족했고 마산 불교학생회에서 처음 불교를 접했습니다. 불교에 관한 책을 읽었고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나름 불교적으로 해결했습니다. 어느덧 사는 일에 자신감이 생겨 밝아졌고 취업도 남들보다 빨리 할 수 있었습니다.

취업 후 법문을 듣기 위해 국군통합병원 내 사찰에 다녔습니다. 거기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얘기를 하면서 세상에 대한 다양한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 관심사 중 하나가 우리 문화였고 음악에 대한 욕구도 다시 차올랐습니다. 그래서 가야금을 배웠고 연주 활동 하다가 마산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미국 잭슨빌과 멕시코로 해외 공연도 다녀왔습니다. 그런 경험을 하면서 좀 더 체계적으로 우리 음악을 배우고 싶어서 스물여섯에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대학을 마치고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대학원까지 마쳤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언니가 이혼을 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져 조카 2명과 친정에 돌아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조카는 사춘기를 심하게 겪었고 언니는 조카와는 대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도 손자의 말썽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조카가 학교에서 말썽을 부려 선생님이 호출을 하면 눈물로 상담을 하는 것은 제 몫이었습니다.

친정어머니는 출산 일주일 전에 치매 진단을 받았습니다. 치매에다 날로 건강이 악화되는 어머니의 병원비와 우리집 생활비 일체를 혼자 감당해야 했습니다. 아이 키우며 일도 벅차게 해내야 하니 궁지에 몰린 쥐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혼 전에 언니들은 항상 "고맙다 , 너 아니었으면 어떻게 살았겠니" 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결혼하고 어머니가 치매로 병원에 간 뒤로는 병원에 잠시 들러 달라는 부탁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시간 없다고 자기들도 아프다는 핑계로 외면했습니다. 큰언니는 어머니의 병원비 부담이라도 좀 하라는 이야기가 나올까봐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언니가 원망스러워서 친구에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희수야, 내가 장녀인데 도와줄 형편은 안 되고 마음만 아프니까 동생 전화를 받을 수 없더라” 는 친구의 말에 '언니도 그래서 그랬구나'하고 수긍이 되었습니다.

어머니 생전에 함께
▲ 어머니 생전에 함께

얽매임에서 벗어나다

경전반 다니고 있을 때 새벽에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달려가던 중 어머니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이미 숨을 거둔 어머니께 “어머니 고마웠습니다. 제 어머니여서 행복했습니다. 잘 가십시오” 라고 말하자 어머니의 심장이 다시 뛰었습니다. 가끔 사망 선언이 끝난 뒤에 심장이 뛰는 일이 있다고 의료진이 말해주었지만 저는 어머니가 사랑의 기적을 보여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제 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을 쏟고 영원히 못 놓을 것 같았었는데 어머니를 편안히 보내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불교대학과 경전반에서 배운 가르침들이 바탕이 되어, 얽매임에서 벗어난 때문이었습니다. 또 다른 큰 얽매임이었던 언니들에 대한 원망도 금강경2 수업을 들으며 사라졌습니다. ‘내 어머니니까 언니들이 어떻게 하든지 상관할 필요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자. 후회하지 말자’ 그렇게 마음을 내니 원망이 사라졌습니다.

가볍게 날다

어머니를 보내드린 후에 불교대학 저녁반 담당으로 본격적인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경전반 졸업할 때까지는 일과 어머니 돌보기로 수업 듣기도 벅차서 봉사 할 엄두를 못 냈습니다. 늘 열심히 봉사하는 도반들에게 미안했습니다. 봉사 시작하고는 경험이 없으니 걱정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반들과 함께 하니 가벼워졌습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배우고 스스로 못났다 여기는 마음에서 자유로워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장 소임 맡아 인도성지순례도 다녀왔습니다. 제 나이가 어려서 주어진 소임이라고 여겨져 또 가볍게 받았습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상에 떠밀려 출발 당일 겨우 짐을 챙겨 떠났습니다. 아직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는 아프지 말고 사고 없이 잘 다녀오라며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습니다. 뭉클하게 고마웠습니다.

인도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또 하나의 소임을 받았습니다. 창원정토회 불교대학 지원 담당입니다. 조금 망설였지만 선배 도반들이 언제나 도와주겠다니 힘이 났습니다. 일 맡고는 도반들과 소통하는 부분이 쉽지 않았습니다만, 일과 수행의 통일이라고 일속에 수행거리가 있었고 소임 속에서 저 자신을 더 잘 볼 수 있었습니다.

인도성지순례
▲ 인도성지순례

행복한 수행자

아침에 기도를 놓쳐서 일과를 마치고 아이가 잠든 자리에서 기도를 하면 부스스 뜬눈으로 아이가 말합니다.
“엄마가 기도를 하면 부처님이 옆에 계시는 것 같아서 무서움이 없어져서 좋아”라고. 그런 아이 옆에 남편도 슬며시 다가옵니다. 때로는 남편이 밉기도 하지만 제가 하는 일에 큰 반대 없이 지켜봐 주는 것이 응원이라고 생각하면 참 감사합니다. 가사노동에 아이 키우며 학교수업 , 학원수업 , 예술단체 관련업무 , 정토회봉사 등 바쁜 하루가 지나가지만 포기하지 않고 수행의 길을 갈 것입니다. 저는 행복한 수행자입니다.


이야기를 다 마친 우희수 님은 봉사하면서 기억에 가장 남는 일은, 불교대학에서 담당했던 학생 전원이 경전반 진학신청서를 쓴 것이라고 했습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유장했던 삶을 이야기하면서 잘 웃는 만큼이나 눈물도 많았던 우희수 님, 앞으로는 꽃길만 걷기를 바랍니다.

글_우희수(창원정토회 마산법당)
정리_정명숙_희망리포트(창원정토회 마산법당)
편집_한숙(서초정토회 서초법강)


  1. 행복학교 행복해지고 싶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종교적 의식이나 프로그램을 배제하고, 법륜스님의 행복 메시지를 통해 개인과 사회의 행복을 이야기하고 소통하며, 지금 이 순간 행복해지는 연습을 함께 하는 곳. 2020년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으로 12강 구성으로 진행되고 있음.
    행복학교 신청: http://hihappyschool.com 

  2. 금강경대승불교 경전의 하나 

전체댓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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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열

우희수님!
세상에......
25년전 결핵병원 법당에서 만났던 우희수님.
평생 고마운 마음 잊지 않고 살아왔어요.
잘계시는 소식을 여기서 보게 되네요.
ㅎㅎㅎ

2021-03-02 17:10:48

자재왕

우희수님, 잔잔한 감동을 느끼며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는 꽃길만 걷기를 축원합니다.

2021-01-28 14:19:47

박남주

열심히 사신 희수님 얘기 감동입니다.
어머니 얘기는 저도 마음이 찡 하네요!

2021-01-28 08: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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