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양평법당
나의 부처님, 두 아들

'어느 날은 나누기가 너무 하기 싫어 일도 없는데 일이 있다 하고 결석했습니다. 대중 앞에서 말을 잘 못하는 저를 인정하고 ‘버벅대면 그냥 버벅대고 말지.’라고 편하게 받아들이니 지금은 마음나누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솔직담백한 마음나누기가 매력인 양평법당 이미경 님. 남편의 가출과 죽음, 두 아들의 방황으로 무겁고 힘겨웠던 과거와 화해하고 오늘을 충실히,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미경 님을 소개합니다.

남편의 부재, 아이들의 방황

남편이 가출을 했습니다. 큰아들이 여섯 살, 작은아들이 세 살 때였습니다. 아빠 없는 아이들이란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엄하게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1년 반이 지난 어느 날 훌쩍 떠났던 남편은 바람처럼 다시 돌아왔습니다. 미안해하는 남편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 묻지 않을 테니 그냥 들어오라며 받아줬습니다. 돌아온 남편은 아이들에게 참 잘했습니다. 남편이 퇴근길 불현듯 전화해 놀러가자하면 부랴부랴 짐을 싸서 1박 여행도 자주 다녔습니다.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며(왼쪽 첫 번째)
▲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며(왼쪽 첫 번째)

그러나 큰아이 고등학교 1학년 때 남편은 교통사고로 우리 곁을 영영 떠났습니다. 그때부터 곪았던 상처가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큰 아이는 양평에서 아주 먼 대구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이후 아이의 성격은 점점 날카로워졌습니다. 잠깐씩 주말에 만나도 아이와 많이 부딪혔습니다. 큰 아이가 왜 그렇게 삐딱하게 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도 제 성격에 못 이겨 '네가 죽든 내가 죽든 차라리 하나가 없으면 덜 힘들지 않겠냐!'며 화를 냈습니다.

작은아이 역시 얼마나 속을 썩이는지 고등학교 1학년이 되자 결석과 지각을 밥 먹듯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담임선생님이 상담을 요청하였습니다. 작은아이의 고등학교 1년 생활기록을 보더니 '어머니, 힘드셨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하며 저를 위로해주었습니다. 선생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던 터라 '선생님, 선생님밖에 없어요. 제 아이 좀 잡아주세요.' 하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힘들어하는 저에게 선생님은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선유동 연수원 봉사(오른쪽 고무장갑을 낀 이미경 님)
▲ 선유동 연수원 봉사(오른쪽 고무장갑을 낀 이미경 님)

까칠한 아들과의 처절한 싸움

즉문즉설은 전부 제 이야기였습니다. 큰아이의 까칠한 성격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에 한 번 집에 온 아이와 부딪히는 건 여전했습니다. ‘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왜 이렇게 까칠하게 커가지고 나를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원망의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분노에 찬 아이도 지지 않고 '차라리 내가 죽으면 되겠냐'며 막말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동안 아빠의 가출은 입 밖에 내지도 않고 혹여나 큰아이가 기억하면 어쩌나 조마조마하며 살았습니다. 아이들이 아빠의 좋은 면만을 기억하기를 바라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어떤 계기로 싸움이 시작되었는지는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그날은 큰아들도 저도 속 얘기를 다 끄집어내며 처절하게 싸웠습니다.

“엄마는 내가 기억 못할거라 했지? 근데 기억 안 날 것 같아?”

그 순간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여섯 살짜리 꼬마가 아빠가 가출한 그날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슴에 묻어두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만 억울하고 힘들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안쓰러웠습니다. 강압적인 엄마에게서 벗어나고자 일부러 대구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다는 사실도 그 때 알게 되었습니다. 먼 타지에서 아빠의 죽음을 홀로 감내하며 살았을 아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저렸습니다. 그러나 이왕 이렇게 된 거 저도 그동안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소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도반들과 설악산 나들이(오른쪽 첫 번째)
▲ 도반들과 설악산 나들이(오른쪽 첫 번째)

한 줄기 희망을 보다

불법을 공부한 덕에 큰아들에 대한 상을 짓지 않고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지금은 쨍그랑하고 부딪히지 않고 서로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젠 아무리 싸워도 큰아들과 대화가 됩니다. '엄마, 아까 내가 왜 그랬는지 알아?' 하면서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말해줍니다. 참 감사합니다.

둘째 아들이 고등학교 2학년 2학기가 되자 담임 선생님이 다시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상담실에 저와 아들을 앉혀놓고 선생님이 둘째를 야단치면서 저에게 미안하지만 회초리를 들어도 되겠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제 앞에서 엉덩이 100대를 맞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3대 맞고 울며불며 더 이상 못 맞겠다고, 집에 가겠다고 포기를 했습니다. 아이는 엉덩이가 아프고 화가 나서 울고, 저는 ‘얼마나 아팠을까?’ 마음이 아파서 울었습니다. 그날은 대신 토끼뜀 1000번을 하기로 약속을 하고 헤어졌습니다.

둘째 아들과 함께 거리모금
▲ 둘째 아들과 함께 거리모금

토끼뜀 1000번이 말이 쉽지,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아이는 200번 하고 포기하고, 300번 하고 포기하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반바지와 운동하기 좋은 옷을 챙겨 입고 한번 해보겠다며 집을 나섰습니다. 그날 오후 4시쯤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엄마, 나 지금 학굔데. 걸을 수가 없어. 내가 토끼뜀을 다 뛰었는데 다리가 떨어지질 않아. 도저히 집에 못 가겠어. 데리러 올 수 있어?”
사무실 일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아이를 데리러 갔습니다. 똥 싼듯한 바지를 입고 엉거주춤 걸어오는 아이를 보니 눈물이 저절로 흘렀습니다.
“양호실에서 토끼뜀했는데, 선생님들이 지나가면서 ‘야, 이놈아. 여기서 뭐 하냐?’ 물어보더라. 그래서 ‘자아를 찾고 있습니다!’ 하고 뛰고, 교장선생님이 지나가면서 ‘야, 이놈아. 여기서 뭐하냐?’ 그러면 ‘자아를 찾고 있습니다!’ 그렇게 크게 말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 오기가 생기더라.”
저는 목멘 소리로 아들이 자랑스럽다며 칭찬하는데 가슴이 저렸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아이의 지각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불법의 인연을 지어준 선생님에게 정말 감사합니다.

결석하지 말라더니 엄마는 왜 안 가?

남편과 사별한 지 벌써 8년이 되었지만 시어머니는 아직도 저를 의지합니다. 정토회를 만난 지 어느덧 5년이 되었습니다. 25살 큰아들은 구미에서 직장을 다니고, 22살 작은아들은 직장을 다니며 저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옛날 생각하면 혼자 남자아이 둘을 어떻게 키울까 깜깜합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아주 행복합니다.

연등만들기 봉사(가운데)
▲ 연등만들기 봉사(가운데)

처음 정토회에 왔을 때 마음나누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법문은 정말 좋은데, 그냥 법문만 듣고 가면 될 걸 왜 꼭 마음을 나누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은 나누기가 너무 하기 싫어 일도 없는데 일이 있다 하고 결석했습니다. 그렇다고 집에 있는 동안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법당에 나가는 날은 혼자서 저녁을 먹거나, 혼자 먹기 싫어 저녁을 굶기도 했던 작은 아들이 '엄마, 오늘 수요일인데 법회 왜 안 나가? 나한테는 학교 결석하지 말라고 하더니.' 라고 합니다.

버벅대면 그냥 버벅대는 대로

지금은 나누기도 많이 편해졌습니다. 대중 앞에서 말을 잘 못하는 저를 인정하고 ‘버벅대면 그냥 버벅대고 말지.’라고 편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만두지 않아서 정말 다행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봉사소임이 오면 예의상 ‘노!’를 한 번 하지만 인연이다하고 다 받습니다. 봉사소임 덕분에 학생도반들과의 관계도 끈끈하게 이어갈 수 있고, 봉사하는 도반들과 소중한 인연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봉사하는 제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지 힘들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머리 깎고 절로 들어가는 거 아니냐?'며 걱정하던 친정아버지도, '집안에 종교가 두 개라서 큰 우환이 생겼다.'며 불교를 배척하던 가톨릭 신자인 시어머니도 이젠 저의 정토회 활동을 인정합니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문경이나 두북 수련원에 가서 봉사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직장을 다니지 않아도 되는 형편이 된다면 인도성지순례도 꼭 가고 싶습니다. 가끔 농담으로 '엄마 걱정하지 마라. 너희들 장가보내고 나면 엄마는 문경 가서 살 거다.'라고 아이들에게 말하기도 합니다. 과거의 일은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의 일은 아무도 알 수 없으니, 저는 지금이 제일 행복합니다.


방황하는 사춘기 아들 이야기를 들려주던 이미경 님의 떨리는 목소리가 아직도 제 귀에 생생합니다. 저 자신도 사춘기 아들 둘을 키우는 엄마라 그런지 아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목이 메었습니다. 그냥 이래저래 살 수도 있지만, 기왕 살 거 충실히 살아가겠다 결심한 이미경 님. 현재 남양주정토회 경전지원담당, 양평법당 경전지원담당, 봄경전 꼭지 소임을 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열렬히 응원합니다.

글_이현주 희망리포터(남양주정토회 양평법당)
편집_허란희(용인정토회 용인법당)

전체댓글 24

0/200

양혜숙

담임선생님 과의 인연으로 정토회 나오셨다니
지난일이 생각납니다.
교직에 있을 때 학생문제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일들이 스치는데
그때 정토회를 만났다면 ,나도 좋고 학생들에게도 좋은
삶이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교사들이 정토행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2021-02-22 13:29:16

금강화

담임선생님께서 정토 회원이셨다니 정말 좋은 인연을 만나 행복하게 살아가시는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집니다.
감사합니다~

2020-10-03 07:16:20

박성희

기사 읽고 마음에 여운이 종일 갔습니다. 살아 있는 이야기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하여 좋습니다..

2020-09-05 19:31:41

전체 댓글 보기

정토행자의 하루 ‘양평법당’의 다른 게시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