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경주법당
모난 돌에서 빛나는 보석으로

“평범할 것만 같았던 삶에서 오르막 내리막을 겪었습니다. 때로는 아프고 힘들게, 미움과 원망으로 살았던 하루 하루였습니다. 정토회를 만나 수행, 보시, 봉사하는 삶을 알게 되었고, 꾸준한 기도의 힘으로 지금의 내가 있습니다. 행복합니다. 지금 내 삶은 내가 주인입니다.“ 모난 돌이 구르고 굴러 빛나는 보석이 된 사연. 경주정토회 경주법당 이승화님의 이야기 지금 만나러 갑니다.

정토회와의 인연

제가 정토회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2005년, 경주 황성동 이화탕 옆 건물 2층에 있는 정토법당이라는 곳이었습니다. 그때는 그곳이 정토법당인지도 모르고 김성순님을 따라 몇 번 다니는 정도였습니다. 그 후 정토법당은 없어졌고, 도반이던 김성순 님과 함께 이절 저절 다니며 기도를 하였습니다. 김성순 님은 정토회 법문이 너무 좋다며 다시 정토회를 다니고 싶어 했습니다. 그 시기 저는 가정이 파산 직전의 상황이었던지라 '가정이 평안했으면' 하는 기도만 할 뿐 어느 절이건 상관없었습니다.

2006년 5-6차 백일기도 입재식에 김성순 님과 함께 문경수련원으로 갔습니다. 경주에서 23명이 참석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무조건 경주에 법당을 내어달라고 스님께 매달렸습니다. 스님은 가정법회부터 열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처음 뵈었던 법륜스님의 모습은 마치 아기 같은 얼굴이었습니다. 저는 법문을 들으며 무척 감동을 받았습니다. 경주로 다시 돌아온 우리는 법당이 없어 성동시장에 위치한 불국다보회를 빌려 법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식당을 운영하던 저는 한 달 혹은 2주일에 한번씩 법회에 갔습니다. 그러다 2007년 5월 불사를 했고, 드디어 같은 해 7월 17일 경주정토회 개원법회를 열었습니다.

총무 소임 중 이승화 님
▲ 총무 소임 중 이승화 님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

2007년 사업부도와 재산 탕진으로 술만 마시며 세월을 보내던 남편은 5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당시 남편은 사업부도로 술만 부여잡고 허송세월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남편 문제로 저는 날마다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 방법을 몰랐기에 “우리남편 술 끊게 해주세요.”하고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3년을 기도했습니다. 그러다 법문을 들으며 '내 기도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잘못된 간절한 기도 때문에 남편이 죽었다고 생각하니 죄책감이 올라왔습니다. 슬픔과 비통함에 빠져있던 저는 2주 만에 〈깨달음의 장〉으로 수련을 갔습니다. 수련을 통해 모든 생명이 살아있음이 느껴졌고, 개울물 소리가 아름답게 들려왔습니다. 수련을 마친 저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온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삶에 의욕이 움트기 시작했습니다.

2007년 개원 법회 후 3년간 저는 사시예불을 맡았습니다. 당시 저에게는 남편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많았습니다. 책임감 없고, 모든 재산을 탕진한 남편이 너무나 미웠습니다. 또한 시어머니에 대한 미움과 원망은 더욱 컸고 가시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시예불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에 대한 미움들은 사그라져 갔습니다. 그 누구도 남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기에 술이 아내였고 친구였음을 깨달았습니다. 남편에 대한 미움이 미안함과 참회로 그리고 감사함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시어머니에 대한 미움도 원망보다는 감사함과 참회의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사시예불 관음정근을 하며 한껏 목 놓아 울었습니다. 그때 저는 법회를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들었기에 상대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마음이 움틀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불교대학 남산 순례 사전 답사, 왼쪽에서 두 번째
▲ 불교대학 남산 순례 사전 답사, 왼쪽에서 두 번째

감사함

그러던 중 이상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그토록 이절저절 다니면서 시어머니 천도를 했는데 '왜 천도가 되지 않았을까?' 라는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사시예불을 하면서 “아! 내가 시어머니를 꼭 붙잡고 있었구나. 그래서 천도가 되지 않았구나, 내가 시어머니를 붙잡고 있는데 어떻게 천도가 될까? 돈을 주고 제를 지낸다고 천도가 되는 건 아니구나” 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 생각 깨닫고 나니 시어머니에 대한 감사함이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들, 딸을 주셔서 그리고 함께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시어머니도 이제야 편안하게 쉬시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간암이었던 남편의 투병생활은 3월 30일부터 시작되어 5월 2일로 마감을 했습니다. 짧은 기간의 투병으로 저를 고생시키지 않아 그 또한 감사했습니다. 대학 2학년 고등학교 1학년이던 두 아이가 클 때까지 함께 해줘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돈에 대한 허망함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굉장히 홀가분함을 느꼈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수행문과 참회문이 감사하게 와 닿았습니다.

나의 성장을 이끌어준 정토회

저는 한 번도 수행법회를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주간활동을 하면서 도반 이명순님은 불교대학 진행자, 담당을 맡았고, 저는 모든 예불과 집전을 도맡았습니다. 그렇게 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다 천일결사 7차년도에 총무가 되었습니다. 총무가 되어 가장 좋았던 점은 수행법회를 들으며 '내가 무지하고 어리석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인연의 결과로 '내가 괴로워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제1의 화살, 2의 화살도 모자라 제5의 화살을 맞고 있었다'는 것을 법문을 들으며 깨달았습니다.

정토회에 매진하며 살다보니 어느 날 이상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원래 11시에 가게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나 늘 법당봉사일로 2시. 3시쯤 늦게 문을 여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위 상가에서는 남편죽고 바람났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러나 그런 소리를 들어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웃으며 세월이 흘러 천일결사 5차에서 9차년도까지 저는 법당 활동에 젖어들었습니다.

울진 수해 복구, 중앙
▲ 울진 수해 복구, 중앙

7차년도에는 총무, 8차년도에는 대의원, 9차년도에는 경주정토회 총무를 맡으며 제가 점점 단단해 짐을 느꼈고, 관점이 제대로 잡혀감을 알게 되었습니다.

힘들게 넘긴 7차년도 총무 시절

7차년도 총무시절에는 사실 생계와 함께 총무직을 수행해야 했으므로 모든 것이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법당일은 늘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던 중 7차년도 마지막 해에 정토회 이전불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전불사가 힘들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왔던터라 불사를 피하고 싶었습니다. 이전불사를 차일피일 미루던 중 2013년 봄불교대학이 개강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법당 앞 개소주집의 개잡는 소리 때문에 정토회 홈페이지에 민원이 올라있는 상태였습니다. 이전불사는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금 불사를 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을 추진했습니다. 도반들과 함께 이전 불사를 계획했습니다. 그리고 주례회의를 거쳐 우리는 매일 이전불사 300배정진 릴레이 기도를 했습니다. 마침내 2013년 10월에 불사를 하여 11월 17일에 이전개원을 했습니다. 개원당시 저는 자궁근종이 있었으나 치료를 미루고 개원불사를 추진했습니다. 그러다 혹이 커져서 애를 먹었습니다. 병원에서는 “미련스럽다. 죽을지도 모르는데.. 자기 몸을 담보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며 핀잔을 들었습니다. 결국 2014년 1월 4일 자궁근종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 후 2개월 뒤 장개실증으로 또 한번의 수술을 받았습니다.

당시 장사에 전념하지 못하여 2천만원의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식당을 청산하고 저는 바로 〈나눔의 장〉수련을 갔습니다. 수련을 통해 '내가 얼마나 스스로 애쓰며 살고 있는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총무직에 대한 무거움이 많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수련을 통하여 나 스스로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뒤 식당을 그만두고 언니가 다니는 회사에 주.야간 근무를 하며 총무소임도 함께 병행했습니다. 7차년도도 이렇게 마감이 되었습니다.

경전반 입학식
▲ 경전반 입학식

니가 결정해놓고 왜 이렇게 악을 쓰니?

8차년도에는 대의원과 직장생활을 병행했습니다. 주.야로 일을 해야 했고, 이미 7차년도에 ‘나는 내 할 일 다 했다’라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직장 일을 핑계로 나를 돌아보는 시간도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기도를 조금씩 빠뜨리자 관점이 흐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상에 사로잡혔고, ‘나 잘났다’는 마음이 고개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대의원 1년을 남기고 ‘대의원자격 정지’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저는 '내 잘못이 아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법회 출석일수를 수기로 하던 때라 누락되었던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법당에서는 출석일이 37일이라야 하는데 제 출석일이 28일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대의원 자격유지를 신경써왔기 때문에 그럴 리가 없다고 답했습니다. 분명 누락된 것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서 법당 서류에서 입금표를 모두 찾아내어 출석일수를 체크했습니다. 체크한 결과 35회까지 출석한 것으로 되어있었습니다.

저는 그럴 리 없다며 아니라고 맞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총무는 이럴 것 같으면 이의신청을 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지부에 항의했고 화가 났습니다. 너무 화를 낸 탓에 위장에 탈이나 결국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고 내 주장이 맞는데 왜 관리를 제대로 안했나?‘ 라는 생각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습니다. 쉽게 마음이 내려놓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병원에 입원까지 해가며 몸도 아픈데 이렇게까지 해서 밝힐 필요가 있나’ 하는 마음에 이의신청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이의신청은 포기했어도 제 마음속에서는 “잘 못한 게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에 링거를 꽂고 법당으로 향했습니다. 300배, 500배 닥치는 대로 머리를 박고 또 박으며 절을 했습니다. 그래도 한 생각에 사로잡히니 놓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계속 절하고 또 절하자 이런 마음이 떠올랐습니다. “니가 결정해놓고 왜 이렇게 악을 쓰니? 왜 못 내려놓니?” 그러면서 마음이 조금씩 수그러들었습니다.

한편으로 저는 ‘모두 내가 이루었다. 이 법당을 내 목숨하고 바꿔 만들어놓았다. 그런데 나를 알아주지도 않는 이런 정토회라면 안 다니는게 낫겠다’라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절하며 숙이고 그 생각 마져도 내려놓으니 마음이 후련해졌습니다. ‘내 콧대가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올라갔구나. 겸손함을 몰랐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숙이며 수요법회 집전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숙여지는듯하면서도 무언가 자꾸 고개를 드는 느낌이었습니다. 너무 답답한 마음에 저는 화광법사님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울며 말했습니다.

“마음에 무언가 편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법사님!”
“보살! 법당 주인이 아니네. 주인은 어디가고 없다”

그 소리에 저는 뒤통수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래, 나는 주인이 아니었어. 나그네였기에 자꾸 내가 했다는 생각을 했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내가 정토회 일 하느라 식당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빚도 지고 건강도 망쳤는데 어떻게 냉정하게 정지를 내릴 수 있나. 이런 정토회라면 있을 필요가 없다." 하는 생각과 마음이 남아 있었던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법사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누가 시킨것도 아니고 나 스스로 결정해서 한거였는데 남탓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었구나. 사실은 내가 주인이었구나. 모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법당의 주인이라면 이런 결정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했는데 그저 나를 알아달라고 징징거렸던 거구나. 이제껏 나는 중생심으로 살았구나. 초발심부터 다시하자. 무릎이 다까지고 피가 철철 나고 있는데도 나는 모르고 있었구나.’ 그때부턴 저는 기도를 빠뜨리지 않습니다.

선유동 봉사, 첫 째줄 맨 왼쪽
▲ 선유동 봉사, 첫 째줄 맨 왼쪽

나를 낮추는 연습

그 후 어느 날 정토회의 한 행사에 참석하였습니다. 행사화면에 ‘대의원 이승화 자격정지’ 라는 문구가 스크린에 크게 뜨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사람들이 “총무와 사이가 안 좋아 그랬구나.” 라며 위로했지만 나 스스로 굉장히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괜찮다며 제 마음을 다잡는 기도를 했습니다. 겉으로는 괜찮다 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사람들로부터 위로의 말을 들을 때면 듣기가 싫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잘 견뎌 내었기에 깨달은 것이 많았습니다. 저는 대의원 자격 정지가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 사건이 아니었으면 하늘 높은 줄 몰랐던 저의 콧대가 어디까지 올라갔을지 아찔합니다. 그 이후로 저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문경 수련원에 돕는이로 봉사를 갔습니다. 거의 1년 가까이를 다니며 제 모습을 많이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를 낮추는 연습의 시간이었습니다.

수행자로서의 관점

9차년도에도 총무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나는 기꺼이 하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7차년도에 힘들었다는 트라우마와 함께 무거운 마음이 있었기에 1년 가까이 300배 수행정진을 했습니다. 기도를 꾸준히 하자 두려울 것이 없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9차년도에는 직장생활도 하지 않았고 시간적 여유도 많았습니다. 놀이로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다른 건지, 소임이 편하고 재미가 있었습니다. 시간도 잘 흘러갔습니다. 총무소임을 다시 맡으며 도반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게 되었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소임과 수행 모두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도와주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정토회 안에서 성장해가고 있었고, 수행자로서의 관점이 잡혀가고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법회를 빠뜨리지 않고 들었던 것입니다. 스님의 법문은 제가 힘들 때 흐트러지지 않고 제대로 된 관점을 잡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기도를 꾸준히 하자 저는 알아차림의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힘듦 속에서도 재미가 있었고, 힘들다는 느낌은 없었습니다. 지금도 관점을 잘못 정해 넘어질 때도 많지만 다시 일어나 또 연습하고 연습합니다.

2020 정초순회 법회, 첫 째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 2020 정초순회 법회, 첫 째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지금! 여기 행복한 나. 미래를 꿈꾸다.

저에게 정토회란 '내 안에 잠재력이 발휘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 한도가 얼마인지 모르지만 그것의 200%이상을 끌어올려 펼치도록 해줍니다. 저는 지난 시절 가장으로 직장생활하며 정토회 봉사에 시간을 다 할애 했습니다. 그래서 애들을 봐줄 여유도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고맙게도 알아서 잘 성장해 주었습니다. 지금도 아이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잘 찾아서 합니다. 제가 엄마로써 해줄 것이 없습니다. 잔소리도 안하고 제가 봉사로 바쁘니 오히려 아이들에게 독립심과 자립심이 길러진 것 같습니다.

이번 10차년도에는 통일특별위원 소임을 맡았습니다. 경주에 경주 행복센터를 개설하고, 통일한국으로 나아가는 길에 함께 가고자 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통일특별위원회 활동은 또 다른 맛이 있습니다. 저의 시야가 점점 더 넓어짐을 경험합니다. 정토회와는 또 다른 묘미가 있습니다.

저는 길에 굴러다니는 분별심 많은 모난 돌이었습니다. 자꾸 구르다보니 어느새 내 스스로 깎이고 깎여 동그랗게 빛나는 보석이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지금 내 자신이 너무나도 자랑스럽습니다. 정토회를 만나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 '어떤 얼굴로 살고 있을까요?' 그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아마 지금의 나는 없겠지요? 정토회를 만나서 내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나는 지금 여기! 행복합니다.

글_송민정 (희망리포터 경주법당)
편집_박성희 (홍보국 홈페이지 운영팀)

전체댓글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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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명화 고명주

총무 소임 대의원 소임 하시며 느껴지신 갈등 생생하게 전해듣습니다.치열하게 사신 만큼 잠재력이 일깨워지는 모양입니다.

2020-04-30 15:38:47

김혜진

감동적인 수행담 잘 읽었습니다. 한 줄 한 줄 마음에 와닿고 공감이 되네요. 감사합니다 ^^;;

2020-04-30 07:01:34

굴뚝연기

통일특위위원이 되심을 축하드립니다!대단하시네요~깨달음의 길이 쉬우면,누구나 다 쉽게 깨닫겠죠ㅠ깨달음의 길이 그리도 힘들고 험하고 고생스러운가봅니다ㅠ웃는얼굴,인상이 너무좋으셔서 들어와서 읽었는데ㆍ글솜씨도 보통 아니시네요^^*가까이계심 친구하고 싶은 인상이에요^^건강도 잘챙기시구요~저도 님처럼,깨달음의 길이 아무리 험해도포기하지 않겠습니다ㆍ좋은글감사해요^^*

2020-04-30 04:3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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