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시드니법당
컵이 뜨거우면 내려놓으면 됩니다

천일결사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기도를 시작하여, 드디어 들고 있던 뜨거운 컵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된 도반이 있습니다. 남편 때문에 미간이 찌푸려지고 얼굴이 굳어진다 생각했는데, 이제는 찌푸린 얼굴의 아내를 매일 대해야 했던 남편의 마음이 보입니다.
오늘은 코로나 19로 인해 온라인으로 입재식을 진행한 시드니법당 소식과 이 속에서 함께 수행하고 있는 새내기 수행자 노금행 님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6개월에 걸쳐 호주 전 대륙을 태웠던 산불이 종식된 지난 2월 초, 진화된 산불에 안도할 새도 없이 코로나 19가 호주에 들이닥쳤습니다. 그 때문에 호주는 그 어느 해보다 혹독한 여름을 보냈습니다. 시드니법당도 코로나 19로 시드니 법당에서 계획하고 있던 여러 행사가 취소되거나 연기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시드니에서 처음으로 진행해 보려 했던 스님의 영어강연이나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활동가들이 모여 함께하려 했던 활동가 수련이 연기된 것은 무척이나 아쉬운 일입니다.

온라인법회 안내문
▲ 온라인법회 안내문

하지만 우리는 물에 빠졌을 때에도 진주를 캐어오는 정토행자입니다. 처음 해보는 온라인 입재식! 좋은 점도 있습니다. 멀리 이사 가서 그간 못 만났던 도반, 한국 다녀온 가족으로 인해 자가 격리 중인 도반,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도반 이 모두가 함께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총 28명의 시드니 도반이 입재식에 참석하였습니다. 아홉 번의 천일을 지나 열 번째 천일결사에 입재하는 지도법사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수행자는 기적을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 기적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깁니다.

화상으로 입재식에 참여 중인 전정미 님
▲ 화상으로 입재식에 참여 중인 전정미 님

모둠별로 입재한 후 함께 나누기를 하였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달라진 나의 모습이 흥미로워 꾸준히 수행하겠다는 도반,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는 도반, 법문을 듣고 나니 모둠 중심 활동에 대해 기대가 된다는 도반까지 다양한 마음 나누기가 있었습니다. 나누기 후에 다 함께 모여 공양하지는 못했지만, 다음 100일을 기약하며 스님의 법문으로 멀리 있는 도반과 하나가 되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시드니법당의 9-10차 입재식
▲ 시드니법당의 9-10차 입재식

오늘 온라인 입재식에는 지난 9-10차부터 시드니 천일결사자로 함께한 새내기 수행자 노금행 님이 있습니다. 정식 입재가 처음인 데다 온라인 입재였으니 아마도 그 감회가 남달랐을 것입니다. 노금행 님의 이야기 들어보겠습니다.

남편과 사는 것이 불행이다

2019년 9월 13일, 이날은 제가 시드니법당을 처음 찾아간 날입니다. 결혼 12년 차였던 저는 유전질환 진단을 받고 남편과의 성격 차이로 인한 갈등이 고조된 때였습니다. 삶을 포기하고 싶었을 정도로 힘이 들었고,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마지막 희망이라 생각하고 법당을 찾았습니다. 남편과 저는 된밥을 좋아한다는 것을 빼면 공통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식성, 성격, 취향, 생활습관, 가치관 등등 맞는 게 하나도 없는데도 처음 7년은 콩깍지가 단단히 씌어서 행복했습니다. 그 콩깍지가 벗겨지고 난 이후 저는 남편과 같은 공간에 있는 자체가 불행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미소가 사라지고 나날이 굳어져 가는 제 얼굴을 인식도 못 한 채 하루하루 힘들게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5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벼랑 끝에 서 있다고 느낄 즈음 찾아간 금요 수행법회에서는 법륜스님의 법문을 들을 수 있고 불교 의식에 참여하는 등 좋은 점이 많았습니다. 한편, 난관도 있었습니다. 낯선 사람들을 보면서 처음 나누기를 할 때는 아주 당황스러웠습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다른 도반님들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나누기를 하는 모습이 신기했고, 재미있는 얘기도 아닌데 같이 웃어주는 것도 좀 이상하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래도 ‘정신과 상담받으러 가는 것보다는 법당에 매주 가는 게 낫겠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낯선 상황들을 참고 매주 법당을 나갔습니다.

법회 중인 시드니 도반들
▲ 법회 중인 시드니 도반들

천일결사? 그게 뭐예요?

법당을 찾아가기 시작한 지 3주 차 되던 날, 먼저 제게 다가온 한 분이 있었습니다. 도반들 속에서 혼자 어색하게 앉아 있던 저에게 환한 미소로 다가와 따뜻하게 대해주었습니다. 그날 송미심 님은 저에게 조심스럽게 천일결사에 대해 안내해 주었고 같이 해볼 것을 권했습니다. 천일결사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다소 강하게 권하시는 거 같아 조금 부담스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5시부터 기도를 매일 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걸렸습니다. 잠이 많은 편이고, 유전질환 때문에 몸 관리 중이던 터라 매일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기도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왜 저렇게 강하게 권할까' 하는 호기심도 있었습니다.

그날 수행 법회를 마치고 집에 와서 정토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천일결사를 클릭해 본 뒤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불법승 삼귀의를 향한 예불, 나를 돌아보는 수행문,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참회의 108배,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는 정토 행자의 서원, 왜 기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목표 제시, 일상에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보왕삼매론과 기도 후 나누기까지 한 시간 동안 알차게 짜인 이 프로그램대로 매일 기도를 하다 보면 뭔가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보였습니다. 그날 저녁 부랴부랴 결사기도 밴드에도 들어가고, 예불이 한문으로 되어있어 무슨 뜻인지 몰랐기에, 한글로 해석된 걸 다 찾아 프린트해서 기도 준비를 했습니다.

묘덕법사님과 함께한 시드니법당 10주년 특별법회
▲ 묘덕법사님과 함께한 시드니법당 10주년 특별법회

뜨거운 컵을 내려놓다

그렇게 9-10차 천일결사 입재식 6일 지난 뒤부터 저의 천일결사 기도는 시작되었습니다. 수행문이 주는 울림이 컸고 이건 반드시 해야 한다는 강한 믿음이 생겨서 새벽에 일어나는 데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108배도 처음에 조금 다리가 아팠지만 곧 괜찮아졌습니다. 법당에서 얼굴을 마주 보고하는 나누기는 거부감이 있었지만, 밴드에서 글로 나누는 시간은 무척 소중하게 느껴졌기에 다른 도반님들은 간단하게 적는 데 반해 저는 주절주절 적다 보니 글이 참 길었습니다.

그러던 중, 기도 4일째 되던 날, 평소처럼 남편과 시시비비를 가리는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수행문을 떠올리며 남편에게 화도 내지 않고 넘겼는데, 오히려 다음 날 갑자기 터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은 쉬는 날이라 안방에서 코까지 골면서 잘 자고 있었는데 저는 거실에서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진정되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남편은 그냥 자기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저 혼자 그 말에 집착했고 그 생각이 저를 괴롭혔던 것이었습니다.

그 일 이후로 저는 마침내 제가 들고 있던 뜨거운 컵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집에서 혼자 유튜브로 즉문즉설을 들을 때는 이해가 되나, 금방 뒤돌아서 화가 났던 이유도 비로소 알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7년 동안 사랑했고, 이후 5년 동안 미워했던 남편을 그제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바라본 남편은 자기 일 열심히 하고, 밖에서 생긴 일로 집에서 짜증 한번 내 본 적 없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평소 좋은 것과 싫은 것에 대해 명확한 구분을 하고 저 자신을 정의로운 사람이라 여겼습니다. 제가 정한 기준에 어긋나면 다 잘못된 것이라 규정 지으며 오로지 저의 생각과 가치관에 집착하고 살아왔음이 느껴졌습니다.

이후 108배를 할 때 저의 기도문은 “다른 사람은 나와 다를 뿐이며, 다르다는 생각에도 집착하지 않겠습니다.”로 정해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가 변하니 남편이 제일 기뻐합니다. 기도 시작하고 보름이 지났을 때 남편이 요즘 생글생글 웃어주어서 이쁘다고 말했습니다. 그날 밤에 자려고 누우니 그 말이 생각나서 눈물이 났습니다. 그동안 남편이 웃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고 다니는 아내때문에 힘들었겠구나 싶어서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노금행 님
▲ 노금행 님

이제는 주위로 눈을 돌려 살피겠습니다

기도를 시작한 9-10차부터 오늘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 5시에 기도를 했습니다. 중간에 몇 번 그만두어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잘못된 자세로 갑자기 무릎과 허리가 너무 아파 절하다가 무릎 연골이 다 닳아서 못 걷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했었습니다. 또, 기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광절약 시간제(서머타임)가 시작되는 바람에 1시간 더 일찍 일어나야 했던 때에는 어두운 새벽에 기도를 하다 보니 왠지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매일 함께 기도하는 도반들과 저를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어 주신 전정미 님 같은 도반의 힘으로 오늘도 기도합니다. 매주 수행법회에서 훌륭한 스승님을 통해 부처님 말씀 들으면서 무지로 인해 생기는 부족한 점을 채워 나갈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저는 <깨달음의 장>을 다녀오지 않은 상태에서 천일결사를 시작했기에 수행과정에 있어서 다른 분들보다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요즘 저는 어릴 적 상처가 어떻게 내면에 형성되어 제 성격과 가치관에 영향을 주었는지 마음을 살피고 있습니다. 정토행자의 서원이나, 천일결사의 목표를 독송하다 보니 주위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환경문제와 기아, 질병, 문맹 퇴치가 남의 일이 아닌 바로 우리들의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종이 키친타월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 수 없었던 제가 광목천으로 직접 만든 키친타월로 살고있는 것도 그 변화 중의 하나입니다. 이 변화들은 남들이 보기에는 크지 않을 수 있지만, 제게는 마치 다시 태어난 것과 같은 기쁨을 줍니다. 물론 여전히 넘어지기도 하고 아직도 벗겨내야 할 업식이 있고, 과거에 잘못 맺어서 풀어야 할 친정 식구와의 문제도 많습니다. 이 모든 걸 당장 없애겠다고 욕심은 부리지 않습니다. 가만히 저를 보는 시간이 좋습니다. 하루 한 시간 고요한 새벽, 천천히 저를 보는 시간이 행복합니다. 제가 맺은 불법의 연과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마음으로 다른 이들에게도 행복을 전하는 수행자가 되겠습니다.


마지막 희망으로 들어선 법당에서 낯설고 불편한 상황을 피하지 않고, 한글로 해석된 경전을 찾아 기도를 시작하는 주인공의 노력 덕분에 지금의 행복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맺은 인연을 다른 이들의 인연으로 넓혀가는 노금행 님의 수행을 응원합니다.

지구촌 전체가 코로나 19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이 사태가 진정되어 시드니법당 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정토행자들이 서로 만나 반가운 손을 맞잡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발원합니다.

글_시드니법당 희망리포터
편집_박승희 (해외지부)

전체댓글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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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명

나누기 잘 들었습니다. 정말 웃는 모습이 아름다우셔요^^ 저도 기도하다보면 돌이켜 질때가 많아 수행을 놓지 않는 것 같습니다. ㅎㅎ 더 신심내어 정진하고 싶어집니다~ 금행님 앞길에 행복한 일 가득하시기를~ ㅎㅎ

2020-04-23 16:16:11

헤돌이

웃는 모습이 정말 너무 예쁘시네요~ 봄날의 햇살처럼 화사하게 빛이 납니다! 좋은 경험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04-04 15:33:46

박주영

꾸준히 핵심을 잡고 가시는 모습 덕분에 덩달아 힘이납니다~

2020-03-31 11:4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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