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남양주법당
하늘나라로 간 아들이 맺어준 인연

햇살이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는 어느 따뜻한 겨울날, 김용숙 님을 만났습니다. 가정법회부터 시작해서 6개의 법당을 내고 남양주 정토회를 만들고, 이제는 법사교육 대상자인 김용숙 님. “이 인터뷰 내가 해도 되나?” 했지만 늘 그렇듯이 “ 그냥 하지 뭐.”라고 하며 담담하지만 진솔하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아들이 맺어 준 인연

 
종갓집 장손인 외아들이 9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늘은 노랗고,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사고 나고 2주 후 친정어머니가 어디 좀 가자 하셔서 따라와 보니 홍제동 법당이었습니다. 스님이 한참 얘기를 들으시더니 아들이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데, 엄마가 그러고 있으면 어떻게 하냐 빨리 업고 뛰라고 하셨습니다. 실감이 안 나서 그렇게 하면 아들이 다시 살아올 거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49일 동안 매일  3천 배를 하라는 말씀에 삼배하는 것도 모르면서 겁도 없이 용감하게 법당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법문 하는 스님 뒤에서  3000배를 했습니다. 아들한테 고맙다는 말을 되뇌며 절을 하고 또 했습니다. 아들이 저를 수행의 길로 인도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9재 회향을 하면서 유수 스님께서  매일 사시 예불부터 시작해서 법당 끝날 때 가라며 천일 결사 명단 작성 소임을 주었습니다.

인터뷰 하는 날 밝은 표정의 김용숙 님
▲ 인터뷰 하는 날 밝은 표정의 김용숙 님

꾸준히 법당을 다니는 중에 한 번의 유산을 겪고 임신 중독으로 고생하면서 겨우 딸을 낳았습니다. 한 달 된 애를 매일 홍제동까지 업고 다녔는데, 자꾸 토해서 알아보니 유문협착증이었습니다. 5시간이 넘는 수술을 하는 동안 한쪽 구석에서 염불을 외우면서 또 한 번의 고비를 넘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딸이 자라면서 더 집착하게 되어 문득 이러다 딸을 망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딸에 대한 집착을 놓는 연습 한다고 중1때 외국으로 어학연수 간 아이를 7년 동안 들어오라 못했습니다. 이제 딸아이는 훌쩍 자라서 직장 다니며, 엄마를 돌보는 효녀가 되었습니다.
  

가정 법회에서 법당으로

 
IMF로 97년에 길거리로 나 앉았습니다. 당장 기도비 낼 돈도 없어 어머니가 내는 기도비를 제가 가지고 갔습니다. 딸이 4학년 때 구리법회를 알게 되어 다녔습니다. 자주는 못 가더라도 법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2~3년 다녔는데, 법당 하던 두 부부가 영주로 가게 되어 법회를 못 하게 되었습니다. 법문을 듣고 싶은 답답한 마음에 가정 법회를 시작했습니다.
홍보도 안 했는데 도반들이 점점 많아지니 집이 좁았습니다. 제가 경락 일도 하고 있어서 법당의 필요성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군대 법당에서 1년 정도 법회를 했는데, 드나드는 데 불편함도 있고, 사단장이 바뀌면서 지원도 달라졌습니다.

남양주 군대 법당 시절
▲ 남양주 군대 법당 시절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법당을 내자는 의견들이 모여서, 저는 하기로 했으니 그냥 한다는 생각으로 법당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법당을 열고 온종일 법당에 있었습니다. 시간을 못 맞추니 경락 손님은 자꾸 떨어져 나가고, 남편은 돈을 거의 안 갖다 주었지만, 법당에 있었던 덕분으로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땄습니다.

8차년도에 대의원에 당선되었는데, 총무로 지정할 사람이 없어서 가벼운 마음은 아니었지만, 총무를 3년 더 하게 되었습니다. 일 자체가 힘든 건 없는데, 좋다고 와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돌아서는 도반들을 이해 못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내 맘 같지 않다는 생각에 도반들을 못 살피고 너무 일에만 쏠려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공부해서는 전혀 도움이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남양주는 면적이 넓어 오고싶어도 못 오는 분들도 많아서 남양주, 양평, 구리, 의정부, 포천, 동두천(9차년도에 개원)에 법당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저기 법당 내느라 정작 남양주 법당은 신경을 못 썼는데도, 그 동안 탄탄해진 도반들이 알아서 잘해갔습니다.
 

가정법회에서 연등 만들기
▲ 가정법회에서 연등 만들기

내가 지은 인연을 몰랐습니다 .

 
9차에는 특위를 맡게 되었습니다. 행복학교, 강연 등 돌아다니는 일이 많아서 나이도 있고, 체력적으로 힘들어 못하겠다는 의사 표현을 했는데 해야 한다고 해서 처음에는 섭섭했습니다. 그러다 “아직 쓰일 수 있으니 그랬겠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수행은 아니지. 네 하고 해보자.“라고 생각하며 강연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몸에 무리가 갔는지 신우신염이 와서 열흘 입원하고 나와서 3개월 휴가를 냈습니다. 몸도 지치고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 힘든 시기였습니다. 문경 돕는이로 가는 것도 차비가 부담될 정도였습니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문경 봉사도 하고  다음 년도까지 특위 활동을 할 수 있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을 키우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기분이 묘하고 억울해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며 따져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나와 보니까 사람 간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 제가 어떻게 하는지 보게 되었습니다.

요양보호사로 밤을 새워 근무하고 힘들어서인지 신우신염이 또 도졌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7달 정도 하고 좀 쉬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쓰러져서 직접 병간호를 하게 되었습니다. 젓가락질도 못 하는 어머니를 간호하며 체력적으로 힘들었지만, 5개월 동안 화를 한 번도 안 냈습니다. 평소에 힘들면 짜증을 많이 냈는데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2015년 송년 법회
▲ 2015년 송년 법회

30년 전에 받은 기도문이 ‘내가 지은 인연을 몰랐습니다. 지은 인연 과보를 감사히 받겠습니다.’ 였습니다. ‘ 내가 지은 인연이 이거구나. 정토 안 만났으면 아픈 어머니 모시겠다는 생각도 안 했을 테고, 돈 안 갖다주는 남편도 더 들들 볶았을 테고, 나 편한 것만 하려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내 인연, 감사할 뿐입니다.

 2020년에는 안 해본 대의원 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때 법사님께서 활동하면서 문경에 가끔 1박 2일 올 수 있냐는 전화를 주었습니다. 그저 연수원 봉사 소임이 있나 보다 생각하고 어머니도 많이 좋아지고 요양보호사 친구가 가끔 봐줄 수 있다 하여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 생각지도 못한 법사교육이었습니다. 전에 법사 하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지만, 잊어버렸고 바라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예전의 저였다면 자신도 없고, 잘못 할까 봐 걱정도 더 많았을 겁니다. 사실 좀 겁이 나기도 하지만, 지금은 기회 주시니 그냥 해 보자 마음먹었습니다. 이 기회에 제가 맺은 인연을 알고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갈 길은 멀지만, 더 숙이는 연습 하고 마무리하라고 기회를 주셨다 생각합니다.

친정어머니와 도반들과의 춘천 청평사 나들이 (왼쪽 친정어머니, 왼쪽 두 번째 김용숙 님)
▲ 친정어머니와 도반들과의 춘천 청평사 나들이 (왼쪽 친정어머니, 왼쪽 두 번째 김용숙 님)

저를 정토회와 인연 맺어주고 하늘나라로 간 아들과 제가 힘들 때 무조건 정토회로 데리고 와 준 친정어머니가 계셔서 요즘은 정토회에 발 담그길 정말 잘했다 생각합니다. 수행하게 해 주어  정말 고맙고 잘 쓰이겠습니다.

글_김영신 희망리포터 (남양주정토회 남양주법당)
편집_임도영 ( 광주전라지부 )

전체댓글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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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미영

꾸준히 수행정진하는 모습이 귀감이됩니다.
이렇게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0-03-14 05:27:44

윤나은

웃으시는 모습이 백만불짜리 더 값진 모습입니다^^
부처님 법 만나 저도 행복하네요^^
건강하시고 뭉클한 글 잘 읽고 갑니다^^

2020-03-03 10:42:50

윤미란

훌륭하십니다. 잘 읽었습니다

2020-03-01 20: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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